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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사향노루 / 정정예

by 부흐고비 2022. 6. 22.

봄은 새 옷 짓고 찬연하다.

연둣빛 생명들은 언어도 익히기 전에 들판으로 달려 나가 잎보다 먼저 꽃이 폭발한다고 소문을 냈다.

언 땅 뚫고 올라온 할미꽃이 둥글게 말린 허리를 편다. 한줌 햇살 머리에이고 언덕바지에 숨고르기 하려는 참인데, 바람이 분다. 굽은 허리 부러질라 납작 구푸린 머리가 흙속에 다시 묻힐까 엉덩이에 잔뜩 힘을 주었다. 엉덩이에 힘을 세게 줄수록 붉어지는 얼굴은 비단 꽃을 피웠다.

봄의 축제로 드높은 하늘에 풍선을 띄웠지만, 느닷없이 마음을 짓누르는 것들이 있다. 원인불명의 바람이다.

바람이 분다. 세상 센 바람이 분다. 주눅이든 생각들은 보이지 않는 철조망에 걸려서 갈기갈기 찢어진 마음들이 휴지조각으로 너풀대고. 고통으로 배여든 도시는 절규로 나뒹굴며 거리를 방황하던 슬픔들은 까무러쳤다. 가슴에서 새어나온 긴긴 흐느낌은 자꾸만 목젖을 눌러 입술을 깨물게 했다. 속안에서 달궈진 한숨들이 이빨사이에서 쌔게 짓이겨지며 이때도 다 지나가리라. 때가되면 명분 잃은 바람도 후미진 모퉁이서 풀썩 주저 않겠지.

풍랑이 크게 일어날수록 바다 속은 맑고 깊어지고, 바람을 많이 부딪친 나무가 결이 곱고 단단해지는 것이리라. 누군가가 말했다 꽃도 흔들리면서 피어나는 거라고........., 발가락 잔뜩 오므리고 센바람 앞에 힘을 꼭 주자. 바람이 훑어 간 자리서 삶의 결이 곱고 단단해지며 인간의 근원이 맑고 깊어질 것이리라.

예고 없이 찾아온 고난은 숨 쉴 틈조차 주지 않고 풀무질을 해댔다. 흙 도가니에서 풀무질은 멈추지 않고 가열된 온도는 모든 것을 다 태워버릴 것만 같았다. 포기할 수 없는 삶의 등짐 버겁게 지고서도 불평할 순 없었다.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을 세상에서 다시 볼 수 없게 될까봐 두려워서 무거운 날개 짓은 멈출 수가 없었다. 삶의 분량이 많아지는 것만큼 내 속 사람은 사향을 만들어 빚어 향낭주머니에 차곡차곡 쟁여 놓는 것이라 믿어졌다. 고난, 고통 그것들이 사납게 달려들 때마다 쓴 고통을 입안으로 꿀꺽 삼키고 작은창자에 깊숙이 밀어 넣었다.

기꺼이 들 노루가 되어 살기로 하였다. 거친 들판이나 산기슭을 헤매면서 향기로운 나물을 뜯으러 다녔다. 몸은 가시나무에 찔려 살이 찢겨 피나고 상처투성이가 되어 손가락 관절 사이로 해 그림자 다 빠져나간 뒤에 집으로 돌아오곤 하였다. 물젖은 솜뭉치같이 천근만근의 몸을 이끌고 하루치의 고단함을 방바닥에 집어 던졌다. 피곤함에 절여진 버거움이 모가지를 짓눌러도 내가 살아내야 할 삶의 몫이기에 앙다물고 아픔을 삭이곤 하였다.

날선 바람 맞서 들판으로 나가면 헐거워진 관절들은 삐걱대고, 발가락이 부르트도록 나물을 찾아다닌다. 쉽지 않은 일이다. 차라리 쓴 나물을 뜯기로 했다. 다른 사람들이 외면하는 고난의 쓴 나물과, 고난의 쓴 떡 조각을 찾기로 하였다. 쓴 나물을 뜯어 먹을 때마다 옹이박인 손가락마디에 쓴 진들이 끈적거리고 달라붙어 입에서도 쓰고 배에서조차 쓰다. 쓴 떡과 쓴 나물을 먹는 것이 고약하여 온몸이 진저리 쳐졌다. 트림할 때 쓸개에서 독약 같은 물이 올라와 입안까지 역류한 물이 쓰디쓰다. 쓸개 탄 포도주다.

모과 속에 벌레같이 딱딱한 생의 미로를 헤매고 누볐다. 고단한 바람도 걸어와서 내 몸에 부딪혔지만, 명분 잃은 바람은 고통의 얼음을 얼리지는 못해 내 앞에 풀썩 무릎을 꿇었다. 쓸개 탄 포도주는 작은창자에서 향낭주머니로 고운 향을 만들어 채워 흘러넘친다. 나는 사향노루, 모과 속 벌레로 생의 한복판 미로를 누빈다. 금빛 노을 진 들녘에서서 향낭주머니 “달그랑 달그랑” 사향이 하늘에 구멍 뚫고 올라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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