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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춤 / 최운숙

by 부흐고비 2022. 6. 22.

한 여인이 펼쳐진 억새밭에서 춤을 춘다. 느릿느릿 일정한 형태도 없이 흐느적거린다. 마치 내면의 슬픔을 끌어내듯 춤이 진행된다. 그녀의 의식에 따라 억새가 바람에 흔들리다 눕는다. 영화 <마더>의 시작 장면이다.

친정엄마는 한 번도 당신의 생각을 드러내지 않았다. 할머니의 매운 시집살이와 아버지의 가벼운 주머니도 말없이 받아냈다. 구성지게 뽑아대는 판소리 여섯 마당이 아버지의 목소리로 주막에서 흘러나왔을 때도, 한나절 내내 약장수와 어울려 다니다 분 냄새 풍기고 들어와도 모른척했다. 남에게는 한없이 너그러웠으나 가족에게는 불같았던 아버지와 달리, 훅 불면 날아갈 듯 한 가랑잎 같은 엄마가 가정을 지키는 것은 사막의 낙타처럼 감내하는 것이라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앞으로 갈 수도 없고, 왔던 길을 되돌아가기도 어려우며 더더욱 멈춰 설 수도 없는 상황에서 가슴에 더는 별이 뜨지 않았을 것이다. 한 번도 자식을 위해 목소리를 높이거나 아버지 말씀에 반기를 들지 않은 채 순종하며 살았다.

엄마의 한계는 어디까지였을까, 당신 안의 그림자는 어떤 것이었을까, 햇살이 좋은 정오正午가 아버지라면 당신은 보잘것없는 한낮의 작은 그림자였다.

아버지가 마흔여덟에 떠나시고 이어 피 끓는 젊은 오빠도 떠났지만, 가장과 젊은 사람을 데려갔다고 악다구니도 쓰지 않았고 머리 싸매고 드러눕지도 않았다. 북받치는 설움을 왜소한 체구에 꾹꾹 눌러 쟁이셨다. 한 번이라도 짐을 져본 사람은 그 고통을 안다. 너무 깊은 슬픔은 눈물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아버지와 아들을 떠나보낸 후 연줄을 끊고 자유롭게 하늘을 나는 연처럼 엄마는 하얀 꽃이 되었어도 여전히 그 사막 안에 홀로 남겨져 있었다.

딸은 엄마의 팔자를 닮는다고 했던가, 그 무렵 고된 시집살이 중이었지만 지금 아니면 영영 엄마를 잃어버릴 것 같았다. 요양원에 계신 당신을 모시고 집으로 왔다. 따뜻한 밥 한 끼 차려 드리고 하룻밤 한 이불속에서 자고 싶었다. 불편한 시어머니의 시선을 피해 나란히 앉았다. 당신은 걱정 따윈 바람에 날려 보냈는지 평온하기만 했다. 그때, 시어머니의 성난 목소리가 들렸다. 돈이 없어졌다는 것이다. 치매에 걸린 사돈이 가져간 것이 틀림없다고 하신다. 시어머니의 날 선 소리에 단 하룻밤의 소망도 포기하고 늦은 밤 요양원으로 향했다. 만 원짜리 한 장을 당신 손에 쥐어주며 “엄마, 미안해”라는 나에게 빙긋이 웃기만 했다. 그 천 원짜리가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지만, 혹여 엄마 손에 갔다 치더라도 소박한 그 날의 소원을 포기한 걸 내내 후회했다.

엄마가 춤을 춘다. 느릿느릿 앉아있는 슬픔을 끌어올려 어깨에 걸친다. 팔이 비스듬히 곡선을 이루며 머리 위를 스치고 내려온다. 흔들어놓고 사라지는 바람처럼 자유롭다. 보잘것없이 살아온 발뒤꿈치가 땅에서 일어선다. 한 번도 날아보지 못한 어깨가 들썩이며 날기 시작했다. 춤은 얼마간 이어졌다.

엄마는 처음으로 당신의 생각을 춤으로 말하고 있었다. 무엇을 말하고 싶었을까. 아무도 알 수 없는 당신만의 언어인 춤으로, 지켜왔던 침묵을 깨고 조각난 울음을 접고 있었던 것일까. 춤을 추며 그림자로 살아온 생을 조금씩 거두고 있었다. 이미 자유로운 정신을 가졌지만 남은 육체마저 버리는 중이었다. 그녀는 발뒤꿈치를 들어 다시 땅에 내려놓았다. 고달픈 삶도 땅에 내려앉았다.

어머니라는 이름은 외롭다. 영화 <마더>의 엄마처럼 엇나간 사랑도, 같은 공간이지만 서로 다른 곳을 바라볼 때도, 시대의 변화에 앞서가도 외롭긴 마찬가지다. 그래서 그들의 춤은 슬프다.

나는 엄마처럼 외롭지 않게 살겠다고 했다. 그러나 문득문득 외로움을 느낀다. 따뜻한 사람과 같이 있음에도 그것은 때때로 찾아든다. 어쩌면 산다는 건 외로움을 향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깊어지고 넓어질수록 외로움도 커지기 때문이다.

슬픈 춤이 좋다. 땅을 향하는 낮은 몸짓이 좋다. 그것은 내 안에 쌓여있는 엄마의 외로움을 보내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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