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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문과 원문


이롭다고 하여 조급히 나아가서도 안 되고, 위태롭다고 하여 용감하게 물러나서도 안 된다.

不可以利躁進 不可以危勇退
불가이리조진 불가이위용퇴

- 김시습(金時習, 1435~1493), 『매월당집(梅月堂集)』 「매월당문집(梅月堂文集)」 권18 <고금군자은현론(古今君子隱顯論)>

 

조선전기 문인 김시습의 시가와 산문을 엮어 1583년에 간행한 시문집. 15권 4책, 부록 2권 1책, 도합 23권 6책. 신활자본. 김시습이 별세한지 18년 뒤에 중종의 명에 의하여 유고의 수집이 시작되어 맨 먼저 이자(李耔)가 10년에 걸쳐 겨우 3권을 수집하였다. 이것은 김시습의 자필본이었다고 한다. 그 뒤에 박상(朴祥)과 윤춘년(尹春年)이 김시습의 유고를 계속하여 수집하였다. 마침내 윤춘년에 의하여 『매월당집』이 간행되었다.

 

 

해설


요즘 자신이 저지른 잘못에도 불구하고 떠나야 할 때 떠나지 않고 버티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또 흠결이 있으면서도 더 높은 자리를 탐하다가 그동안의 명성에 먹칠하는 사람들도 보게 된다. 아름다운 뒷모습을 보여주는 사람은 드물고 민낯을 보여주는 사람은 많아지니 사회가 점점 퇴보하는 느낌이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우리는 처신(處身)하는 데에 자주 어려움을 겪는다. 더구나 중요한 관직에 있는 사람이 자신의 자리를 두고 진퇴를 결정하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이다. 예부터 처신하는 방법에 대해 많은 이야기가 있지만, 김시습은 고금군자은현론(古今君子隱顯論)에서 다음과 같은 지혜를 들려준다. ‘군자는 이롭다고 하여 조급히 나아가서도 안 되고 위태롭다고 하여 용감하게 물러나서도 안 되며 오직 의리에 합당한지 아닌지, 때에 맞는지 아닌지를 살펴서 그 여하에 따라 진퇴를 결정해야 한다’라고 말이다. 그래야만 벼슬하는 것도, 벼슬에 나아가지 않는 것도 모두 이름을 아름답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선택은 공적인 지위에 나아가거나 내려오는 일에만 국한된 것은 아닐 것이다. 삶의 어느 한순간, 진퇴를 잘못 선택해 인생에 오점을 남길 수도 있다. 이형기 시인은 시 낙화(落花)에서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라고 노래했다. 떠날 때를 아는 사람의 뒷모습은 아름답다. 어느 한 교수는 칼럼에서 ‘아침을 열면서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라고 말했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게 인생이라면, 영원히 살 것처럼 굴기를 멈추라는 뜻이다. 그러나 살아가면서 머무를 때와 떠날 때를 판단하는 것은 역시 쉬운 일은 아니다. 또 자신을 비우기 위해 삶이 곧 멈출 듯이 생각하면서 아침을 연다는 것도 범인이 이를 수 있는 경지는 아니다.

김시습은 오직 때와 의리에 합당한지를 살펴서 진퇴를 결정하라고 우리에게 충고하고 있지만, 맹자는 ‘빠르게 떠날 만하면 빠르게 떠나고, 오래 머물 만하면 오래 머물고, 은둔할 만하면 은둔하고, 벼슬할 만하면 벼슬하니, 바로 공자이시다(可以速而速 可以久而久 可以處而處 可以仕而仕 孔子也)’라고 했다. 맹자는 공자가 여러 성인 중에서도 때를 알아 때에 정통한 성인이라고 칭송한 것이지만 우리에게는 역설적으로 이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새삼 느끼게 해주는 말로 다가온다.

최근 독일의 최장수 여성 총리의 자발적 퇴장은 잔잔한 감동을 준다. 이른바 박수칠 때 떠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우리 주위에도 뒷모습이 아름다운 사람들은 존재할 것이다. 민낯을 보여주는 사람이 아니라 아름다운 뒷모습을 남겨주는 사람. 이 가을, 우리 선인들이 남겨놓은 좋은 명구들을 곁에 두고 자신을 끊임없이 수양해 나간다면 내가 그 경지에 이를 날이 어느 날 불현듯 올 수도 있지 않겠는가!

글쓴이 : 소상윤(KBS심의실 심의위원)


 

 

17세기 초반 기자헌이 편집해 간행한 매월당시(梅月堂詩) 사유록(四遊錄)에 실린 김시습의 초상화. 무량사에 있던 자화상을 보고 그린 것으로, 현재 전하는 초상화 가운데 원본과 가장 가까운 것으로 여겨진다. 원본에는 목에 염주를 건 모습으로 그려져 있었다. 출처:한국고전번역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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