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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악착 보살 / 김지희

부흐고비 2022. 6. 29. 07:33

거미가 까마득한 허공에 집을 짓는다. 방사형의 살들을 도래방석처럼 엮어간다. 거미는 지지실을 타고 중심축을 오가며 쉬지 않고 동심원을 반복한다. 집의 중심인 바퀴통에 떡하니 거꾸로 매달려 있는 모습이 외줄을 타는 무동처럼 아찔하다.

청도 운문사의 비로전 천장 대들보에 단청이 희미해진 배 한 척이 걸려있다. 뱃머리와 고물이 용머리 생김새인 나무배에는 줄에 매달린 동자승이 있다. 불퇴전의 화신 동자보살은 장난기 머금은 표정으로 악착스레 외줄에서 내려다보고 있다. 한순간 마음의 중심을 잃고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질 사람들을 보살피느라 내려오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동자보살이라 부르기도 하고 악착보살이라고도 한다.

악착보살의 이야기는 구전으로만 전해진다. 옛날에 청정하고 신앙심 깊은 이들을 서방의 극락정토로 인도해 가는 반야용선이 도착했다. 용선을 타고 가야 할 어느 보살이 자식들과 마지막 작별 인사를 하느라 배를 놓치고 말았다. 다행히 멀리 떠난 것이 아니어서 배에서 밧줄을 던져주었고 보살은 그 밧줄에 악착같이 매달려서 극락정토로 갔다고 한다.

년 전에 이십여 년 넘게 다니던 직장에서 해고통지를 받았다. 아무런 준비도 없던 상태에서 하루아침에 일어난 일이라 당황스러웠다. 오백 명이나 되는 동료 직원들이 뭉텅뭉텅 무더기로 잘려 나갔다. 먼저 해고된 동료들은 소송을 준비 중이었고 나는 혼자 마지막까지 남아 해고될 날만 기다리는 신세가 되었다. 당시는 남편도 실직해있던 상태라 홀로 외줄에 매달려 있는 심정이었다. 놓아버리면 천 길 낭떠러지 아래로 떨어질 것 같은 두려움이 엄습해왔다.

면직을 당한 동료 직원들이 모여 회사의 일방적 부당해고에 맞서 법적 대응을 했다. 생계를 책임져야 할 가장들이면서 아이들의 미래를 등에 짊어진 부모들이었다. 일 년이 넘게 분기탱천하여 노동부며 대법원까지 오가며 항변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계란으로 바위 치기 격이던 아우성은 하나둘씩 현실과 타협하면서 절절한 메아리로 흩어졌다. 나는 지레 질려 목소리조차 내지 못했다. 같이 동조하지 못하는 내가 미안했지만 그렇다고 회사를 나올 형편도 못 되었다. 복잡한 심경으로 겨우겨우 출근을 이어가던 그해 겨울이었다. 혼자 간당간당 악착스럽게 붙들고 있었던 내 밥줄은 임금피크제로 정년이 연장된 다른 직원의 차지가 되었다.

외줄에 매달려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높은 건물 외벽에 줄 하나에 의지해 창문을 닦거나 도색작업을 하는 사람, 천 길 낭떠러지 절벽에서 약초며 석청을 따는 약초꾼, 배에서 내려준 공기 호스에 의지해 차가운 바닷속에서 해산물을 채취하는 잠수부. 이들은 모두 삶이라는 외줄에 매달려 억척스럽게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거미는 하루에 한 번씩 집을 짓는다. 이때 거미는 외줄을 타고 땅으로 내려오기도 하고 유사 비행을 하기도 한다. 튼튼한 집을 짓기 위해 중심축을 만들기 위해서이다. 거미줄은 강철보다 강하다고 한다. 그렇지 않으면 백척간두의 허공에서 어떻게 삶을 영위할 수 있겠는가. 천적을 피하고 먹잇감을 사냥하는 거미의 정교한 줄타기는 목숨을 보전하는 생의 악착일 것이다.

겨우살이는 깊은 산에 키가 큰 참나무, 물오리나무, 밤나무, 팽나무 등에 기생한다. 수십 미터 나무의 우듬지에 기생하며 겨울을 난다. 겨우내 숙주가 되는 나무의 수액을 뽑아 먹고 그걸로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다. 겨우살이 열매는 탱탱하고 말갛고 속살이 끈적끈적하다. 숙주 나무에 달라붙어 생명을 이어가기 위해서이다.

소나무 담쟁이넝쿨은 오래된 소나무를 감고 올라 수만 개의 잔뿌리를 내리고 기생하며 소나무 수액으로 살아간다. 이처럼 살아있는 것들은 끈덕지게 자신의 생명을 이어간다.

게으름이 찾아와 무기력할 때 나는 가끔 새벽시장에 나가본다. 짙은 어둠의 두께가 채 가시기도 전에 시장은 어런더런 활기에 차 있다. 언제 장만해 놓았는지 생선들이 벌써 가지런하게 누워있다. 가지며 오이, 미나리, 파래, 물미역도 옹기종기 모여 할머니들의 걸걸한 수다에 싱싱함을 보탠다. 손수레로 배달하는 천 원짜리 종이컵의 커피믹스 한 잔이 새벽시장의 새참이다. 부산스러움과 억척스러움을 똬리 틀어 이고 있는 할머니들의 맵고 짠 삶에는 보이지 않는 외줄이 있다. 그건 더러는 자식이기도 하고 더러는 남편이기도 할 것이다.

프랑스의 화가 에드가르 드가의 <페르난도 서커스단의 라라>는 외줄에 매달린 쇠고리를 입에 물고 공중곡예를 하는 여자의 모습을 그린 그림이다. 여자는 두 팔을 앞뒤로 벌려 가까스로 몸의 평형을 유지하고 있다. 그녀의 생은 평생 저 아득한 공중에 매달려 있는 삶일 것이다. 천정에 수직으로 매달려 고통과 추락의 공포를 감내하고 있는 여인에게서 고난한 삶의 단면이 느껴진다. 에드가르 드가는 주로 매춘부나 무용수들을 모델로 그림을 그렸다고 하니 그림이 더욱 실감 나게 느껴진다.

내가 어릴 적인 6~70년대에는 서커스단 공연이 자주 열렸다. 그중에도 가장 하이라이트는 공중 그네타기였다. 두 명과 세 명의 곡예사들이 허공에서 회전한 후 그네에 안착하는 묘기였다. 사람들은 줄을 버리고 공중을 회전하는 장면에서 비명을 지르다 가까스로 그네를 잡으면 안도의 숨을 내쉬며 탄성의 박수를 보냈다. 어린 나는 보는 내내 가슴을 쓸어내렸다. 위기와 그 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사람들은 저마다 보이지 않는 위로를 받았던 것은 아닐까.

‘악착’은 일반적으로 부정적인 의미로 쓰인다. 성질이 몹시 모질고 도량이 좁고 잔인하여 끔찍스러운 상태를 지칭한다. 하지만 악착의 또 다른 의미는 철저한 자기 관리로 고난에 대처하는 승부 근성일 것이다. 모질은 환경에서도 열매를 맺고 끈질기게 생명을 이어가는 겨우살이, 백척간두에서 줄을 치고 먹이를 사냥하는 거미, 억척스럽게 삶을 꾸려나가는 사람들의 모습은 지금껏 느슨하게 살아온 나를 되돌아보게 한다.

거미의 집은 얼추 다 완성이 되어 간다. 방사형의 투명한 집이 바람에 간들거린다. 가지를 붙들고 있던 몇 장의 이파리가 낙엽이 되어 호수에 떨어진다. 겨울 들머리 생의 끄트머리에 있는 거미가 한순간 줄을 타고 쑥 내려온다. 악착보살의 화신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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