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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뱀을 좋아하나요 / 강서

부흐고비 2022. 6. 29. 07:45

뱀을 좋아한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화면으로 보는 것만 좋아한다. 뱀은 징그러움과 매력을 동시에 선사하는 동물이다. 적어도 내겐 그렇다. 그래서 그런지 내셔널지오그래픽 채널에서도 단골로 등장한다. 움츠리고 있다가 한순간에 먹이를 낚아채는 모습은 흥미진진하다. 소름 돋는 화면을 뚫어지게 쳐다보다 진저리를 친다.

그럴 때마다 간교한 지혜를 가진 유혹자를 왜 뱀으로 표상하는지 생각하게 된다. 정교한 비늘의 소리 없는 움직임, 쉿쉿거리는 소리가 들릴 것 같은 양 갈래의 혀는 째깍째깍 돌아가는 초침 같은 긴장감을 준다. 어릴 때부터 뱀에 관한 얘기를 수없이 들어왔다.

막냇동생은 밤에 태어났다. 외숙모님을 비롯한 친척들은 안방에서 어머니의 출산에 대비하고 있었다. 부엌의 가마솥에서는 물이 설설 끓었다. 방 안의 어른들은 뱀을 숭상하지 않은 이들이 당한 고통과 죽음에 관해 얘기했다. 누가 더 무서운 이야기를 하는지 내기를 하는 것 같았다. 이야기의 결론은 뱀을 보면 그냥 내버려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집에 들어온 것은 작대기를 이용해 밖으로 나가도록 길을 터 주어야 한다고 했다.

어머니는 등에 짐을 져 나를 때 쓰는 큰 바구니인 질구덕에 산후 빨래를 지고 세기알이라는 곳으로 가셨다. 집에서 멀지 않은 곳이지만 어린 우리는 처음 가 보는 곳이다. 그곳은 바다와 잇닿은 넓은 동산이다. 파도가 미치지 못한 곳에는 풀이 무성했다. 비가 오면 민물이 며칠간 고이는 웅덩이가 있다. 어머니는 그곳에서 빨래를 하셨다.

상쾌한 빨랫방망이 소리와 달리 후텁지근한 온도로 인해 오뉴월의 억새와 띠는 아이들의 키를 넘었다. 같이 갔던 누군가가 굉장한 놀란 듯 비명을 지르며 나를 불렀다. 뛰어가 보니 방 하나 넓이의 깊은 구렁텅이가 있었다.

“으악, 맙소사.”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뱀들이 마구 뒤엉켜 있었다. 한두 마리도 아니고 수백 수천 마리다. 밑바닥이 보이지 않는다. 누가 떠밀지 않았는데도 저절로 스르륵 구렁텅이로 떨어질 것 같은 극도의 공포감에 빠졌다. 후들거리는 다리로 정신없이 어머니 계신 곳으로 뛰어왔다. 겨우 진정이 되었다.

어른이 된 후에도 가끔 뱀이 나오는 악몽을 꾼다. 아마도 그때의 기억이 너무 강렬해서 그런 것이 아닐까.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레이더스』라는 영화를 봤을 때다. 주연인 해리슨 포드가 뱀이 우글거리는 동굴에 떨어지는 장면이 있다. 나도 모르게 비명이 나왔다. 동시에 어렸을 때 봤던 장면이 반사적으로 떠올랐다. 두 발도 자동으로 높이 들렸다. 극장에 뱀이 있을 리 만무한데 말이다.

뱀은 제주에서 풍요와 다산, 부를 일으키는 신으로 여겨져 왔다. 칠성이라 부르기도 한다. 우리 집을 비롯한 많은 집에서는 곡식을 저장하는 광에 안칠성을 모셨다. 제사나 명절날 네모난 대나무 바구니인 차롱착에 음식을 올렸다. 미개하여 미신을 섬긴다는 학교에서의 가르침을 맹신한 내게 어머니는 안칠성에 제물 올리는 것을 더는 하지 못하게 눈을 꿈쩍이며 말리셨다. 그게 뱀을 위하는 의식인 것을 알았다면 나는 더 펄쩍 뛰었을 것이다.

뒤꼍의 장독대 옆에는 ‘눌할망’이라 하여 밧칠성을 모셨다. 안팎으로 축복을 받고 싶은 인간의 심정이리라. 밧칠성은 이 년에 한 번 무당을 불러 제를 지냈다. 그날 뚜껑 역할을 하는 주젱이를 띠로 엮어 새로 갈았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밧칠성은 누구도 손대지 못하고 몇 년째 그대로 있다.

어릴 때부터 많이 보아 온 것이지만 뱀만큼 진저리치게 하는 것은 없다. 어른들은 그 단어도 제대로 말 못 하고 ‘진 것’이라고 두려움을 담아 입술 밖으로 내었다. ‘긴 것’이라는 뜻이다. 『해리포터』 시리즈에 등장하는 완전한 악을 지닌, 부를 수 없는 그 이름 볼드모트가 그렇다. 누구도 그의 이름을 부르는 걸 꺼린다. 그의 악이 두려워 입에 담으려고 하지 않는 것이다. 진 것이라고 불렀던 것은 풍요도 주지만 죽음과 파괴의 신도 될 수 있는 존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 아닐까.

이것은 무속신앙과 연관이 있다. 남성도 여성도 될 수 있는데 물할망, 칠성할망, 안할망으로 불린다. 이것으로 보아 여성성이 더 강한 것 같다. 내 할머니의 할머니 때부터 전해져 온 이야기가 있다.

“물 할망이로구나, 날 우치젠 호난 나누었구나.
(물을 지키는 할머니가 비 오려니까 나와 누웠구나.)

팡돌 알더레 기어 들어붑서, 아히덜 놀래염수다.”
(디딤돌 아래로 들어가 주세요, 아이들이 놀랍니다.)

얼마 전, 우리 동네 그 구렁텅이에 가 보았다. 위치를 가늠하며 찾아보았지만 찾을 수 없었다. 여기저기 돌아다니다 겨우 찾았다. 아쉽게도 돌로 메워져 있었다. 주변에는 거친 가시덤불이나 억새도 없었다. 전에는 고사리류의 식물도 많이 자랐는데 말이다. 어릴 때는 엄청나게 넓은 굴 같이 느꼈는데 구렁의 지름은 2m도 채 되지 않았다. 가만히 있어도 빨려 들어갈 것 같은 블랙홀처럼 보였던 곳이 지금 보니 별것 아니다.

올레길이 된 그곳에는 정자가 세워져 있고 올레꾼들은 한담을 나누고 있었다. 그 옆에는 계단을 올린 등대가 있다. 어릴 때는 우리 집을 비롯해 초가집들이어서 계단이라는 것을 본 적이 없다. 어머니가 이 부근에서 물질할 때 등대에서 숨바꼭질하면서 놀던 곳이다. 고래기름으로 밤새 불을 밝혀 남편을 기다리던 아낙들도 다 저세상 사람이 되었다.

뱀은 많이 사라졌다. 사라진 것은 그것만이 아니다. 고둥이나 게, 낙지도 예전 같지 않다. 낙지는 보통 밤에 잡는다. 무섭지도 않았나 보다. 어린 날에 손전등 들고 혼자 바다로 갔다. 차가운 바닷물에 발을 담그고 불빛을 비추었는데 낙지가 너무 많아서 마치 뱀들이 우글거리는 것 같았다. 뱀이라는 단어가 생각난 순간 징그러운 느낌과 함께 새로운 행동을 하게 되었다. 전에는 아무렇지도 않게 잡던 낙지를 맨손으로 잡을 수 없었다. 주전자에 넣을 때마다 비명을 지르고 손을 털며 겨우 몇 마리 잡았다. 그 때의 기억이 떠오른 것이다.

사라진 것들에 마음이 쓰인다. 뱀이 많았던 터전에 돌무더기 속에서라도 뱀들이 살고 있었으면 좋겠다. 그것들이 거기에 살고 있다고 생각하면 우리의 뿌리도 뽑히지 않을 것이라는 안도감이 든다.

무릇 생명이란 제 자리에서 숨 쉬고 살아야 안전한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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