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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느낌

박관서 시인

by 부흐고비 2022. 7. 1.

박관서 시인
1962년 전북 정읍에서 태어나 조선대 대학원 국어교육과 졸업. 목포대 교육학과 박사과정 수료.

1996년 《삶 사회 그리고 문학》으로 작품 활동 시작.

시집으로 『철도원 일기』와 『기차 아래 사랑법』, 『광주의 푸가』가 있다.

제7회 윤상원문학상, 2014 도라지문학상 수상.

 



가거도行(행) / 박관서
밀려난 꿈은 가장자리가 가장 깊다/ 사는 일에 목을 걸고 맴을 돌다/ 국토의 맨 끝 가거도에 이르러/ 이웃 나라 닭 울음에 귀 기울이고 있는/ 녹섬 앞 둥구회집 평상에 앉아/ 검정 보리술로 목을 헹구면/ 박혀 있던 낚시미늘마저 따뜻해진다/ 밤 깊은 동개해변 찰랑거리는/ 둥근 달빛에 젖어 흠뻑/ 사는 일 흔적도 없이 지워져/ 남의 나라 남의 일이 될 즈음에야/ 새로워진 나를 만난다 스스로 깊어진/ 가장자리를 만난다 생무릎 꺾여/ 밀려나보지 않은 이들은 평생을 살아도/ 가거도에는 이르지 못하리//

30 / 박관서
칼로 물 베기라지만// 물처럼 어울려 서로 보듬어 낮고 부족한 곳을 채워서/ 네 것 내 것이 아니라 우리 것으로 다시 태어나/ 새로운 생명까지 잉태해 낸 사랑이라지만// 몸을 씻고 난 물이 금세 더러워지듯이/ 마른 물바닥을 조각칼로 후비고 파내면서 서로 미워/ 서로 슬퍼서 속으로 울던 날이 어디 하루 이틀이었는가// 알고 보면 멀리 푸른 하늘로 흐르는 구름이/ 증발된 그대와 나의 사랑이 아닌가하여 서로/ 발톱과 부리를 휘둘러 갈라보려고도 했었건만// 물처럼 하늘이나 구름이 베어질리 없고/ 서로의 몸에 새겨진 시간이 나뉘어질리 없어/ 물뿌리로 돋은 그대가 내 안에 있고 내가// 그대 안에 있어 이제는 낡고 비우고 가벼워져서/ 천천히 물 위를 떠다니는 부레옥잠처럼 차고/ 투명하고 따뜻해진 그리움으로 서로를 밀고 당기며// 우리 안에 내린 순간을 영원으로 즐기시게나/ 그러하세나 사랑하는 그대여//

선로변에서 / 박관서
눈을, 다시 뜰 때 있다. 나른한 한낮을 골라 전철기 청소를 하러 가다가 양팔 곱게 벌린 철로와 철로 사이를 칸칸이 잇고 있는 침목 위로 똠방똠방 건너가는데, 한 뼘이나 될까. 샛노란 눈빛 달랑달랑 내밀고 있는 개불알꽃을 만나 서로 어르며 안부를 나누다가, 문득 등골이 서늘해 돌아보니 천둥 같은 기적이 덮쳐와 목덜미를 낚아채 선로 밖으로 동댕이친다.// 와르르르르 지나온 길 지나갈 길 모두 무너져 내린다. 잠긴 눈으로 본다. 환하다. 일거에 삼십년을 비우고 다시, 눈 뜰 때 있다. 선로변이다.//

신호기 / 박관서
그와 나는 두 가지만 이야기한다// 붉은 등/ 푸른 등// 벌써 삼십 년이 흘렀다/ 기차가 지나갔다 그와 나의 등허리를 밟고/ 바람도 지나갔다// 푸른 등/ 붉은 등// 미안하지만,/ 그와 나는 같은 꿈을 꾸는 것이다//

기차를 기다리며 / 박관서
멀리 불빛을 보네/ 외딴 전철기 막사에 앉아/ 오지 않는 기차를 기다리네/ 풀벌레 울음 가슴을 치네/ 에이 몹쓸 것, 뜯어내어/ 풀어주네 수풀 밭으로/ 낮에는 소주를 마셨네/ 작업복에 담겨 평생을/ 철길 아래 침목으로 누워/ 기차를 기다리는 동료들/ 슬슬 꼬드겨 한 컵 가득/ 소주를 마셨네 모처럼/ 수은 불빛으로 타올랐네/ 흐린 낯빛으로 낮게 깔린/ 기름 먹은 하늘을 불러 모아/ 스파이크 대못으로 쾅 쾅/ 두드려 박았네 한 치의/ 틈도 없이 서로를 결박하였네/ 그제야 삼천오백만 육십 킬로를/ 달려온 밤 기차가 지나갔네/ 천둥처럼 소문처럼 깜박/ 깜박 별들이 솟아올랐네//

무안역 / 박관서
짙푸른 어둠에 물든 밤/ 초당산 낮은 등허리로/ 구불구불 이어진 논둑길 따라/ 호드기 울음소리마저/ 둠벙 깊이 꼬리를 감춘 밤/ 노란색 역명등 더듬이로 켜든/ 산골 깊은 무안역 푸른 메모지 같은/ 유리창에 이마를 부비며/ 사랑한다 사랑한다 사랑한다/ 눈발처럼 몰려드는 하루살이들/ 치지직 치지직 제 몸을 태워/ 밤하늘 멀리 별빛으로 흘러가는/ 아픈 첫사랑의 간이역//

간이역 소식 8 ㅡ에밀레 / 박관서
나는 먼 곳을 보지 못하네/ 십 분 전에 떠난 기차와/ 십 분 후에 들어올 기차에 대해서만// 열심을 다해왔네 하루하루 다해왔네/ 십 년 지나 이십여 년 지나가네/ 가끔 씩 너무 멀리 온 것 같아/ 누군가는, 네가 세상을 아느냐고/ 역사를 아느냐고 그런 것도/ 시냐고 삶이냐고 엄중하게 다그쳐/ 어둔 밤길 홀로 더듬거리기도 하지만/ 나는 가까이밖에 보지 못하네/ 손에 들린 빨간색 푸른색 전호기와/ 눈에 보이는 철길 신호기에 대해서만/ 열심을 다해왔네 한순간도/ 다른 데는 훔쳐보지 않았네/ 천 년 전에 누군가 그랬던 것처럼/ 천 년 후에 누군가 그럴 것처럼/ 나는 나를 걸었네 내 몸을/ 내 몸에 걸었네 제 몸의 무늬로만/ 기적 소리 둥그렁 둥그렁 울리며 나아가는/ 종소리가 되었네 그래 미안하네/ 나는 너무 멀리 나와버렸네//

20년 / 박관서
기차가 내 안으로 들어온다/ 기차는 그냥 다니는 것이 아니고/ 기차가 오기 전에 장내신호를/ 기차가 가기 전에 출발신호를/ 기차가 간 후에는 개통취급까지 해줘야 하는 것인데// 요즘엔 기차가, 아무런 신호도 받지 않고/ 아무런 취급을 해주지 않아도/ 내 안으로 진입해 들어와/ 출입문을 열어/ 사람들을 풀어놓고/ 짐보따리를 풀어놓고/ 비척비척 눈 비비는 강아지까지 풀어놓곤 한다// 더불어 노란 햇살도 함께 따라와/ 개찰구 아래 손바닥만한 패기 화단에/ 눈곱처럼 돋아 있는/ 채송화 개불알꽃까지/ 함박웃음 짓게 하나니// 아 아득한/ 무엇 하나 부럽지 않고 밉지 않고/ 무엇 하나 못나 보이지 않는/ 햇살 내리는 봄날의 간이역 그/ 생전 처음 보는 아득한 풍경을/ 선물로 주고 가나니// 내 안으로 들어온/ 기차가, 땀이었고 눈물이었고 한숨이었고/ 오기였고 버팀이었던// 그 기차가, 이제야//

싱건지 / 박관서
시를 쓰는 친구 녀석은/ 싱건지가, 송이눈 내리는 겨울밤/ 벌거벗은 여자의 희뭉한 살빛 같다고 했지만/ 아서라, 옴쓰라미 뜬눈으로 버틴/ 야근을 마치고 퇴근한 아침/ 쏟아지는 햇살을 커튼으로 가리고/ 허리께 올라타 노곤노곤한 어깨와 등허리/ 애써 주무르는 아내의 손목을 타고 스며드는/ 스리슬슬 두루뭉실 달착지근 수수무리/ 허랑무봉인 요 맛, 싱싱한 건지의 맛/ 몽유도원인지 아수라 지옥인지/ 여름인지 겨울인지를 따지지 않고/ 제 육신을 놀려 한세상을 익혀내는/ 알타리무 말간 몸에서 우러난/ 그 맛이더라 싱건지의 맛.//

영산강에게 고함 / 박관서
맑은 날, 하늘은 파랗고 바람은 산들거리는 봄날/ 영산강변에 나와 그대를 만납니다// 잇속으로 얽힌 세상/ 무너지는 산과 좁혀지는 강을 봅니다/ 메꿔진 바다를 봅니다 막힌 하늘을 봅니다// 하늘과 바다와 산과 강이 만나는 이 곳/ 영산강변에 나와 자꾸만 좁아지는 그대의 품속을 봅니다// 이름도 모를 가마골 용소에서 나와/ 황룡강, 그락강, 광주천, 지석천, 고막원천, 문평천, 함평천, 영암천을 거쳐/ 대해인 서해바다에 이르기까지// 동아시아의 원형을 품은 장고형 반남고분에/ 후백제 견훤과 왕건 능창장군 수달의 숨겨진 역사를 안고/ 관방제림, 영모정, 풍영정, 응암바위, 동학항쟁, 나주의 병, 광주항쟁으로 이어지는/ 풍류와 의기, 정의로움은/ 남도의 젖줄을 이루었나니// 그 젖줄을 따라 영산포, 구진포, 동말, 회진, 터진목,/ 중천포, 고운진, 사포, 신설포, 북적포, 뒤구지, 자구리,/ 몽탄나루, 남악나루, 갓바위, 똥섬, 삼학도, 째보선창에 이르기까지// 천년 세월을 고요히 바라보던/ 용수산, 추월산, 금성산, 삼인산, 무등산, 월출산, 이별바우산/ 승달산, 유달산 갈래를 따라// 나고/ 살고/ 사라지는 짱둥어, 세발낙지, 운저리 같은 사람들이여// 제 어미의 자궁은 더럽혀지는 것이 아니라는/ 제 어미의 자궁은 계산되는 것이 아니라는/ 제 어미의 자궁은 잊혀지는 것이 아니라는// 맑고 푸른 영산강변 만난 그대/ 봄날의 어미 같은 목소리로 천지를 울리나니// 하늘이여 땅이여 강이여 바다여/ 그 뜻을 고이 받아주소서//

백마강 햇살 아래 / 박관서
그녀가 왜 울었는지 모른다/ 부소산 그늘 아래 강물에 잠긴 흰 말의 잔등을 타고 날아오르던 은빛 물뱀들이 홀로 잠든 방문을 아무도 두드리지 않는 밤은 없건만// 그녀를 비우기 시작했던 것일까/ 그는, 살거죽을 비집으며 실한 광대뼈가 솟아오른 술잔을 홀짝홀짝 비우며 손으로 슬픔을 쓰다듬었다 얼핏 천년 정도의 순간을 건너온// 달빛이 그녀를 회수해갔다며/ 내가 왜 이런지 모르겠다며 자신의 창자를 꺼내어 내게 보여 주었지만 사내들은 너무 많이 안다 그녀의 혀가 금세 차가워지듯이// 날카롭게 지워지듯이 그도, 나도/ 결국은 하나의 사과알 혹은 가을날에 슬슬 다시 차오르는 햇살이었다 춤추던 문자들을 미끼로 매달고 그래, 참, 오랜만에 누워보는//

순천만 갈대밭에서 / 박관서
갈대가 속으로 운다는 것은 다 거짓말이다/ 오랜 세월 반도의 맨 남단/ 홀로된 누이의 속곳처럼 바람에 잠겨 있는/ 순천만 갈대밭에 서보면 안다/ 함부로 꽃은커녕 싹도 피우지 않는 긴 세월/ 짜디짠 포구에 뿌리를 내려/ 수시로 몰려드는 바람에 맞서 우- 우-/ 마른 어깨에 어깨를 걸고/ 아직까지 내지르는 함성 속에 서보면 안다// 갈대는 속으로 울지 않는다/ 오래된 연인들 누구나 그렇듯이 함부로 울지 않고/ 함부로 웃지 않으며 서로의 팔뚝 맞잡고/ 끊임없이 제 길을 가는 것이다/ 어디 천하의 후진국 쓸개 없는 시인들 몇몇이 달려들어/ 일어서라 나아가라 쓰러져라 앞장서다가/ 홀로 제 풀에 지쳐/ 사라지며 내지르는 중얼거림일 뿐// 어디 긴 세월 한 세상/ 제대로 사랑하는 사람들이 쓰러진들/ 무너진들, 아니 한 줌 초개처럼 사라진다 한들/ 속으로 우는 것을 보았는가 흔들리는 얼굴로/ 한탄하는 것을 보았는가 웃기지 마라/ 우는 것은 속으로 속으로 우는 것은/ 제 가슴속에 닭벼슬 하나도 제대로 세우지 못한/ 못난 시인들의 노래일 뿐// 한때의 순연한 바람과/ 산들거리는 실루엣 속으로 칸나처럼 깃들었다/ 이내 불어 닥치는 어둡고 습한 바람에 치여/ 갈대밭을 떠나는 여름철새들이 목을 꺾으며/ 하늘 높은 데서 저 홀로/ 끼룩대는 울음일 뿐,// 갈대는 말이지/ 한 계절이 바꿔 목에 칼이 들어온대도/ 공허한 하늘로 날아올라 스스로 우는/ 헛된 꿈은 꾸지 않아 시인이든/ 무지렁이 필부든/ 순천만 갈대밭에 서보면 알아// 오랜 세월을 하루같이 우- 우-/ 메마른 어깨에 어깨를 걸고 말없이 한세상/ 끝끝내 지켜내는 게 누구인지/ 진정 누구의 피눈물인지/ 갈대가 속으로 운다는 새빨간 거짓말을/ 우리의 근대사처럼 꽃처럼 시처럼 노래하는/ 그대들 시인들, 천년의 함성 너머 눈멀고 귀먹은/ 부끄러운 노래들은 알아야 하지//

별 / 박관서
늦은 밤 열 한 시경/ 구슬땀 배인 입환 작업 마치고/ 싸한 겨울 바람에 앞섶을 풀어 맡긴 채/ 오렌지색 투광기 불빛에 젖어/ 선로와 선로를 지나 터벅터벅/ 사무실로 돌아오다 보면/ 자갈밭 사이사이에 무수히/ 반짝이는 빛들 빛들이 있어/ 천천히 살펴보면 사금파리/ 부서진 돌멩이 구겨진 우유곽들/ 별 것 아닌 것들의 어깨 위에/ 눈부신 금가루들 저리 쏟아져 내려/ 따뜻한 눈빛으로 반짝거린다/ 어깻죽지 노곤 노곤한 이 밤//

봄날, 내 마음은 / 박관서
햇살 내리는 봄날/ 산들바람에/ 매화꽃 가지가지 낭창거리네// 모처럼/ 흰 종아리를 내민/ 내 마음도 산들거리네// 지난 계절/ 또는 지지난/ 겨울날의 웅크림 때문이리// 사는 일 엄중하여/ 어깨 한번 제대로 펴보지 못한/ 지난날들 때문이리// 금세 가버린 날들/ 되돌릴 수도 돌아볼 수도 없는/ 망할, 속울림 때문이리// 맑은 봄날/ 하늘 아래/ 두서없는 꽃잎으로// 떨며, 떠다니는 내 마음은//

송별식 / 박관서
불현듯 날아온 전보 한 장에/ 퇴직을 삼 개월 앞둔 그가 짐을 싼다/ 쏟아져 나오는 사물함을 뒤지다가/ 이제는 쓸 일 없을 겨울 털모자와/ 잘 빨아서 입으라며 참 따뜻하며/ 동절용 작업복도 함께 던져준다// 그러고 보니 겨울이 가까웠던 것일까/ 떠나김을 준비하는 그는 말이 없고/ 지켜보는 우리들도 말이 없다 하루 내/ 오고가는 열차의 꽁무니에 뒤엉켜/ 철없이 피어난 찔레꽃처럼 흔들릴 뿐// 야근을 마친 아침 퇴근길에야 우리들은/ 기운 햇살 줄줄이 스며드는 역전 골목/ 함바집 뒷방에 모여 보글대는 곱창전골로/ 송별식을 한다 서로가 빈속인지라/ 몇 잔의 선술에도 불기둥이 서고/ 눈자위와 귓불에도 금방 꽃물이 든다/ 그러하다 선로변에 뼈를 묻은 우리들/ 어디에서 어디로 뒹군들 선로 위를/ 흐르는 기적에 가는 귀 먹는 일 아니랴/ 몸으로 뒤섞여 한 세상 엮어가는 우리들/ 부드럽게 달라붙는 연결기처럼 모두/ 뜨겁고 깊은 송별주를 나누자, 건배!!//

강정 간다 / 박관서
강정에 간다/ 형과 형수와 아내와 딸과 함께/ 여름휴가 삼아 배를 타고/ 뒤늦게 신혼여행 왔던/ 제주도 아름다운 바닷마을/ 태풍에 흔들리는// 강정에 간다/ 부끄러움으로 간다/ 총칼 난무하는 곳도 아니고/ 국경을 넘나드는 싸움터도 아닌/ 시골마을 하나 지키자는/ 사람들을 만나러 간다/ 강정에 간다/ 갓난아이를 안고 폭설 속에/ 목숨을 다한 미이라가 되어/ 역사와 전설로 남아 있는/ 사람의 체온을 찾아/ 강정에 간다/ 따순 피가 흐르는/ 형과 형수와 아내와 딸을 만나러/ 나는 오늘도/ 부끄럽게 부끄럽지 않게/ 강정에 간다//


천국의 인사 / 박관서
어머니가 거수경례를 한다 밖에는/ 살갗 저미는 겨울비가 내리고// 홀어미로 산 오십여 년의 기억들이/ 반백의 자식들을 울먹이는데// 해맑은 합죽이 치매 노인이 담겨있는/ 요양병원이 살아있는 천국이다// 모든 탑의 문이 아래에 있듯이/ 모든 마음의 문도 몸에서 열린다// 고맙다고 감사하다고 우리는 서둘러/ 각 잡힌 경례를 천국으로 보냈다//


주 시인에게 / 박관서
휘몰아 덮쳐드는 모래바람을 부드럽게 쓸어내며 천 리 밖을 보는 낙타의 속눈썹이 물에 닿으면 바늘처럼 날카롭게 굳어서 울지를 못한다지// 그러한 낙타야, 네 등에 올라탔을 때 속으로 물길이 흘렀다 정읍천 찬물이 서해바다 어의도 안온한 해변에 이르러 숨은 장군의 마음이 그랬으랴// 성실한 적이나 시시때때로 일깨우는 골병이 필요한 나이를 맞지 못하고 돌아간 사내들이 그렇듯이 살아온 날들을 잊지 마시라, 그리하여 낙타야// 두 개의 굽은 등뼈 사이에 얹은 엉덩이가 금세 뜨거워져 서로 함께 눈썹이 젖을까 봐 높이 일어선 하늘만 바라보며 울뚝울뚝 걷지 않았느냐// 그리 걷는 너를 거꾸로 마음에 앉혀들고 걸으니 어찌 꽃길이 아니었으랴 순간으로 순간을 만나서 걷는 천 리 걸음이 단 한 걸음이지 않았으랴// 그리 껴안고 일어나시라 순간으로 백억 년을 사는 지구가 심은 낙타의 속눈썹으로 술잔을 바라보던 시인아, 두 개의 등뼈를 잘 곧추세우시라//

나라의 뿌리를 묻는다 / 박관서
프랑스 팡테옹 국립묘지에/ 독일군 장교가 누워있는 것을 보았는가// 미국 알링턴 국립묘지에/ 그들과 싸운 소련군 장군이 묻혀있는가// 대한민국 현충원 국립묘지에/ 일본군 장교가 안장되어 있는 게 말이 되는가// 강도와 승냥이의 시절은 그렇다 하자// 4.19와 5.18 그리고 촛불을 지나고서도/ 우리의 얼굴은 왜 이리 엉망인가// 아직도 얼마의 마늘과 쑥을 더 먹어야/ 인간의 얼굴이 되는 것인가//

약산(若山)*의 나라 / 박관서
꼬박 사흘 밤낮을 울었노라// 사라졌다 나타난 아니 나타났다 사라진/ 나라를 생각하며// 식민지 경찰이었던 그가 독립한 나라의 경찰이 되어/ 독립군으로 한 목숨 걸었던 이의 고향 집을 급습하여// 변소에서 똥을 누다 두들겨 맞고 두 손에 수갑을 차고/ 미처 추키지 못한 옷고름 흘러내린 아랫도리를 내보이며// 개처럼 끌려가며 웃었노라// 어허 옷이나 좀 입자며 동네 골목으로 마당으로/ 고개를 돌리며 혀를 차는 이들을 둘러보며// 일하는 손과 낮은 곳에서 바라보는 눈들의 나라를/ 꾸었던 꿈이 죄가 되어// 스스로 일어서지 못하고 밤손님으로 주어진 해방으로/ 나라는커녕 나를 지운 낮도채비가// 뺨을 때리고 얼굴에 침을 뱉어도 닦지 않고 다만/ 그를 국립묘지에 안장하고// 무덤보다 먼 나라로 떠났노라//
*약산 김원봉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로, 1919년 의열단을 조직하고 1938년에는 조선의용대를 창설하는 등 일제에 대한 무장투쟁을 전개하는 데 앞장섰다. 광복 후인 1945년 12월 임시정부 제2진으로 귀국해 좌우합작을 추진했으나 남한의 단독정부 수립이 본격화되면서, 일제강점기 형사 출신 노덕술 등에게 체포되어 고문과 수모를 받은 끝에 1948년 남북협상 때 월북하였다. 이후 북한에서 요직을 맡았으나 1958년경 숙청되었을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나라가, 나라가 / 박관서
지난밤에 꿈을 꾸었네 나라가, 나라가 일어서서 나를 쫓아오는 꿈이었네 황당했네 나라가, 나라가 나를 죽이려하다니 도망가기는커녕 움직여지지도 않아 숨쉬기도 힘들었네 나라가, 나라가 나를 덮쳐 물에 빠진 두더지가 되어 빈지기 눈만 껌벅였네 가슴만 터질 듯 했네 나라가, 나라가 소리 없이 외치다가 꿈을 깨니 TV에 수장된 나라가, 나라가 먹물들의 붉은 혓바닥을 나부끼며 자꾸만 가라앉고 있었네 나라가, 나라가//

광주행 / 박관서
너를 지우는 시간이 길다/ 송정리역에서 내려 막국수 한 그릇 말아 먹고/ 다시 지하철을 타고 돌고개로 간다/ 몇몇 떠오르는 이들에게 연통을 넣을까 말까/ 핸드폰을 만지작거린 지 오래되었다/ 손에 쓸리는 턱수염도 어제 같아서/ 깨끗이 밀고 네게로 잠행한다/ 하늘 아래, 날벼락도 이슬비도 휘날리는 깃발도/ 저항하는 몸도 슬픔도 언어도/ 붉은 용암으로 분출되는 것을 보았다/ 묵힌 분노만이 사랑이 된다 애먼/ 사랑 타령이 아니라 이 지상에서 살아가는 동안/ 눈먼 살을 털고 이백여섯 개의 잠든 뼈를 들쑤셔/ 어둔 울타리에 갇혀 성난 울타리를 짜고 있는/ 너와 나를 지우며 간다 오래오래/ 품으로 깃드는 바람이 깊다.//

조만식 / 박관서
북쪽의 소식은 항상 서늘했는데/ 古堂, 당신의 별호인 옛집을 생각하니 따뜻해집니다// 누구도 두고 온 집이 있겠습니다만 제 것을 천시 말라며 양 무릎에 닿는 무명 두루마기를 입고 제주에서 나온 말총 모자를 쓰고 평양 고무공장에서 만든 고무신을 신으면서// 종이 한 장도 우리 것을 써야 한다며 당신이 시작한 물산장려운동이 백년이 지난 지금도 NO 일본제품 불매운동으로 계속되고 있어 서늘해집니다 습관이란 허리뼈보다도 무서워서// 허리가 휘도록 일하면서 다시 일으켜야할 나라를 함부로 들어먹지 말자고 당신이 오신학교에서 스스로 세우려던 민립대학에서 그리고 신간회와 6.10 만세운동으로 자주 민족국가로// 평생 실천궁행으로 비폭력 비살생 무저항 불복종 운동으로 세우려던 당신의 집을 생각해봅니다 그저 잘 사는 집이 아니라 사람이 사람과 함께 어울려 고향을 묻지 않고 살아가는// 그 집 마당에는 장두감나무 석류나무가 안쪽 텃밭으로 오월 햇볕을 몰아넣고 창문 곁엔 멀구슬나무가 책 읽는 소리에 귀 기울이고 있겠지요 키 큰 은행나무 두 그루가 서로를 바라보는 사립문은// 언제나 열려있어 누구나 출입할 수 있지만 비굴하고 비천한 이들은 스스로 들어서지 못하는 낮아서 높은 담장이 둘러쳐진 평양 산정현교회처럼 자존 깊은 이들이 살아가는 집이겠지요// 古堂, 그대 오래된 집이 지금 다시/ 지어야 할 집이어서 북녘 하늘을 보며 뜨거워집니다//

바라보는 미얀마여, 바라보소서! / 박관서
내게 젖을 물린 어머니를 바라보듯이/ 바라보소서, 미얀마여!// 왜 쏘았지, 왜 찔렀지,/ 트럭에 싣고 어디로 갔지, 오월이 되면// 금남로에서 망월동에서 두부처럼 잘린 너의 유방과/ 꽃잎처럼 뿌려진 너의 붉은 핏자국들을// 바라보면서 단지 바라볼 수밖에 없어서/ 치가 떨리던 미얀마여, 바라보소서!// 아무 것도 아닌 것들을 모든 것으로 알고/ 모든 것을 지우는 저들의 눈을// 눈으로 바라보소서! 푸줏간의 고기가 되어/ 법과 명령으로 살인을 즐기는 저들을// 하나가 전부인 생명을 모르고/ 약자가 정의인 국가를 모르는// 저들, 어미의 품에서 나서 어미의 품을/ 헤집어 찢어발기는 저들을 바라보소서!// 돌아갈 곳 없는 무국적의 짐승들/ 빛도 그림자도 없는 무저갱에 갇혀// 휘두르는 총칼을 수저나 골프채로 알고/ 단지 제가 제 살을 파먹는, 저들을// 잊지 말고, 용서하지 말고, 새기고/ 새기며 바라보소서, 미얀마여!//

‘영광신문’ 창간 25주년에 붙여 / 박관서
사람이 하늘인 세상입니다/ 진즉부터, 영광은 사람이 하늘이었습니다// 서남해 푸른 바닷바람을 받아안아 대륙을 향하여 불갑산 모악산을 거쳐 마라난타 존자의 말씀으로 빛으로 사람이 가져야 할 사랑과 평화와 공생의 씨앗을 한반도에 뿌렸습니다// 하늘 아비의 기상과 땅에서 난 어미의 숨결을 처음으로 받아들여 천년의 눈을 뜬 영광은 한반도의 배꼽이었습니다 배꼽이 아프면 온몸이 아프고 배꼽이 편안하면 모두가 편안합니다// 그리하여 법성포였고 그리하여 불갑사와 소태산 대종사의 정신으로 세상을 개벽하였습니다 신령스러운 햇살이 황금 조기떼의 등비늘로 빛났습니다 굽히지 않아 속을 비운 뼈와 마른 살로// 만민 창생의 생생한 삶을 정론직필의 필대로 삼아 눈 밝은 이야기와 숨결들로 실어날랐습니다 영광신문 25년은 그렇게 찰나의 순간으로 천년을 건너는 公無渡河의 노래가 되었습니다// 언론은 사람에게 핏줄입니다/ 백년 천년, 영광에서 사람의 핏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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