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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느낌

박상률 시인

부흐고비 2022. 6. 28. 08:00

박상률 시인
1958년 전남 진도에서 태어나 전남대학교 상과대학을 졸업하였다. 1990년 《한길문학》에 시를, 《동양문학》에 희곡을 발표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진도아리랑』, 『하늘산 땅골 이야기』, 『배고픈 웃음』, 『꽃동냥치』, 『국가 공인 미남』, 『길에서 개손자를 만나다』 등과 동화, 소설, 희곡집, 산문집 등 다수가 있다. 소설 『봄바람』은 중학교 국어 교과서에, 소설 『세상에 단 한 권뿐인 시집』은 고등학교 국어와 문학 교과서에 수록되었다. 1996년 불교문학상, 2018년 아름다운 작가상을 수상했다.

 



택배 상자 속의 어머니 / 박상률
서울 과낙구 실님이동. 소리 나는 대로 꼬불꼬불 적힌 아들네 주소. 칠순 어머니 글씨다. 용케도 택배 상자는 꼬불꼬불 옆길로 새지 않고 남도 그 먼 데서 하루 만에 서울 아들집을 찾아왔다. 아이고 어무니! 그물처럼 단단히 노끈을 엮어 놓은 상자를 보자 내 입에서 나도 모르게 터져 나온 곡소리. 나는 상자 위에 엎드렸다. 어무니 으쩌자고 이렇게 단단히 묶어놨소. 차마 칼로 싹둑 자를 수 없어 노끈 매듭 하나하나를 손톱으로 까다시피 해서 풀었다. 칠십 평생을 단 하루도 허투루 살지 않고 단단히 묶으며 살아낸 어머니. 마치 스스로 당신의 관을 미리 이토록 단단히 묶어놓은 것만 같다. 나는 어머니 가지 마시라고 매듭을 하나도 남기지 않고 다 풀어버렸다. 상자 뚜껑을 열자 양파 한 자루, 감자 몇 알, 마늘 몇 쪽, 제사 떡 몇 덩이, 풋콩 몇 주먹이 들어 있다. 아니, 어머니의 목숨이 들어있다. 아, 그리고 두 홉짜리 소주병에 담긴 참기름 한 병! 입맛 없을 땐 고추장에 밥 비벼 참기름 몇 방울 쳐서라도 끼니 거르지 말라는 어머니의 마음./ 아들은 어머니 무덤에 엎드려 끝내 울고 말았다.//

똥간과 천당 / 박상률
“어딘가?”/ “똥간이시, 아니 천당이시!”/ “일 다 보고 나믄 전화하게.”/ “그냥 말하게. 천당이란꼐 그라네. 말해 다 듣고 있은께.”/ “똥 누는 데다만 힘 써. 내 말까지 들을라고 신경 쓰지 말고.”/ “시방 똥 잘 누고 있단께. 워매 시원한 거! 천당 간 것 같어.”/ “자네가 언제 천당 가봤다고 시원하다 한가?”/ “똥 잘 누면 고것이 천당이제! 자네 아적도 고걸 모르는가?”/ “모르기는…… 나도 아네. 똥 잘 누는 것이 천당 간 것하고 막상막하일 것이네!”// 두 사람은 정작 용건은 나뉘 않고 똥 이야기만, 아니 천당 이야기만 했다. 나는 그새 볼일을 다 보고 나와버려서 뒷이야기를 더 듣지 못한 게 아쉬웠다.//

선인장 / 박상률
온몸이 가렵다/ 땀구멍마다 뿔이 나고 있다/ 선인장 가시 같은 뿔이 옷을 뚫고 나온다/ 내가 선인장이 되고 있나 보다/ 이글거리는 태양 아래 온몸이 처진다/ 발밑엔 온통 모래가 날아와 쌓이고/ 비는 통 오지 않는다/ ―목이 탄다/ 나는 얼마나 더 납작하고/ 가늘어져야 하는가//

꽃동냥치 / 박상률
밥 한 주먹 담아 먹을 양재기 하나 없이도, 동전 몇 닢 받아 넣을 깡통 하나 없이도, 그는 동냥치다. 한 면에 한 마을씩 가가호호 제삿날만 챙겨 두면 먹고사는 일 정승 판서 부럽지 않은 그. 등짝에 지고 다니는 망태기엔 철 따라 달리 피는 들꽃 가득하여 꽃동냥치라 불리지만, 그는 여태껏 무얼 동냥한 적이 없다. 어쩌다, 제사 없는 날엔 아침 일찍 뒷산에 올라 마을 사람 아침잠을 다 깨운다./ “내 며느리들 빨리 일어나서 나 먹을 아침밥 지어라!”/ 졸지에 한 마을 아낙이 모두 그의 며느리가 되고 만다.// 그가 죽어 그의/ 꽃망태기도 같이 묻혔다. 그의 무덤에 꽃이 피어났다./ 지금 내가 그에게 동냥을 청한다./ “꽃 한 송이, 내 등짝에도 피어나게 해 주세요.”//

엎어말아국수 / 박상률
젊은 날 내 살았던 도시 환란을 겪은 뒤/ 서남해안 어느 산골 암자에 스며들어/ 가부좌 틀고 중님 흉내 냈지/ 그 암자에 방부 들인 진짜 중님/ 절 아래 마을 식당에서/ 엎어말아국수 주문했단다/ 위에는 국수 아래는 고기!/ 엎어말아국수가 서양에도 있었으니/ 이탈리아 수도승이 머리를 감추기 위해 쓴 모자 이름이/ 카푸치노였다네/ 나중에 그게 커피를 덮은 우유 이름이 되었다 하니/ 역시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

바다로 간 사내 / 박상률
추석 지난 가을이었다/ 물질하던 아내는 뭍으로 품 팔러 가고 / 꼬막 캐던 딸년은 어디로 갔는지 모른다/ 겨울 내내 그는, 그물코만 만졌다// 늘어진 한숨 가락을 씨줄 삼고/ 밭은기침 장단을 날줄 삼아/ 그는 날마다 그물을 짰다/ 그물로 바다를 건지고 싶은 것이다// 날이 갈수록, 바다는 자꾸만 멀어져 간다// 벼르고 별러 바다에 나간 그는,/ 마침내 바다에 그물을 던졌다/ 담배 한대가 타들어 간 뒤/ 그의 그물에 펄 흙 담긴 콜라병 하나가 걸렸다/ 세월이 하 수상하다// 그는, 더욱 먼 바다로 갔다//

죽일 년 살릴 년 / 박상률
​이 년 가니 저 년 오는 세밑 저녁/ 앉은뱅이책상 앞에 쭈그려 앉아/ 헌 수첩 전화번호 새 수첩에 옮겨 적는다/ 해마다 갖는 나만의 송구영신 의식으로/ 전호번호부 개정판을 내는 것이다// ​이 사람은 금년에 연락한 일 한 번도 없었지/ 내년에도 전화할 일 없을 테니 헌 수첩에서 죽이고/ 이 사람은 자주 연락해서 전화번호 외울 판이지만/ 내년에도 또 전화할 일 있을지 모르니 새 수첩에 살리고// ​묵은해니 새해니 따질 것도 없는 살림이지만/ 구년 가고 신년 오는 그 사이/ 죽일 년 살릴 년 운명을 가르는 나의 연례행사//

아내의 브래지어 / 박상률
밤새 토악질하다 엎드려 있다./ 진통제 몇 알 먹고 겨우 눈을 붙인/ 병든 아내 머리맡에 놓인 브래지어 하나,/ 유행 지난 꽃무늬 장식이 요란하다./ 신혼 시절 떠올리며/ 브래지어 컵을 살며시 쥐어 본다./ 아무런 저항도 아무런 탄력도 없이/ 그만 손안에서 구겨지고 마는 젖 주머니/ 아내 가슴께까지 이불을 끌어올려 주다/ 옷 사이로 자꾸 숨어드는 야윈 젖을/ 슬며시 쥐어 본다./ 아무런 저항도, 아무런 탄력도 없이/ 쥐어지는 지난 십 수년의 세월./ "만질, 가슴살도, 없죠?/ 이제, 컵이, 단단한, 걸로, 바꿔야겠어요..."/ 자는 줄 알았는데,/ 아내가 느닷없는 소리를 한다./ "아니, 아직은...."/ 나는 더듬거리다 애써 되묻는다./ "그럼, 크기는, 몇짜로?"//

국가공인미남 / 박상률
그 옛날 걸핏하면 글쟁이 얼굴이 지명수배* 전단에 오르던 때였지/ 세월 지나 그 때 일 돌아봐도 될 무렵 되어/ 송기숙 소설가와 이문구 소설가가 가끔 설전을 벌이며/ 후배 글쟁이들의 판단을 기다리곤 했지// 송 왈, 미남부터 먼저 한 잔 혀야제.// 이 왈, 형님 먼저 한 잔 허는 거야 말릴 일 아니제만, 꺽정패 같은 화상이 미남이라니, 자 다가 봉창 두드리데끼 그것이 시방 믄 /말씀이우?// ​송 왈, 허허, 자네 벌써 까묵어부렀는가? 나는 국가에서 인정한 미남이잖이여! 촌 차부(터미널) 벽에까정 그렇게 써 붙여 나를 광고했잖이여? ‘이 자는 호남형으로’ 어쩌구저쩌구 말이시. 아따, 껄쩍지근허게 내 입으로 이런 말까정 꼭 해야 쓰겄는가?// 이 왈, 나도 그렇게 묘사되었던 것 같은디….// ​송 왈, 아녀, 문구 자네는 ‘얼핏 보면 미남이나….’ 그렇게 사진 밑에다 꼬랑지 붙여 놨잖이여! 그 말이 뭔 소리여? 첫눈엔 미남 같제만 자세히 뜯어 보믄 미남이 아니란 말 아녀?// 이 왈, 착 보믄 척! 첫인상이 중요하제, 꼭 찬찬히 뜯어봐야 아남. 그러고 그때 사진을 못 나온 것으로 썼드만.// ​송 왈, 사진 탓 허긴! 원판 불변의 법칙 모르는가? 으찌되았든 나는 나라에서 인정한 미남 이란 말이여!// 이 왈, 형님은 원판보다 나은 사진 썼드만, 형님은 순 사진발이었다니께유.// ​송 왈, 으찌되았든 나는 나라에서 인정한 미남이란 말이여. 자 한 잔씩들 혀. 미남이 권한 께 술맛도 더 돋을 것이여!// 후배 글쟁이들 술잔 들고선 저마다 키득키득//
* 교육지표사건(1978.6.27) 전남대 송기숙 교수 외 11명이 국민교육헌장을 비판하며 ‘우리의 교육 지표’를 공동 발표했던 사건.

날마다! / 박상률
<채털리 부인의 연인>​을 쓴 D.H.로렌스가 자기 작품의 외설 시비를 무척 의식했대. 출판사에서 "귀하를 위해서라도 이 책을 출간하지 마십시오"라고 했거든. 그래서 고국을 떠나 이탈리아 피렌체로 가서 자비 출간을 했다는구만. 영어를 모르는 한 인쇄공이 의아해하며 책 내용을 물었대. 누군가가 그 책에 대해 조심스레 말하자 그 인쇄공 말하길, "난 또 뭐라구, 그건 우리가 날마다 하는 거 아녀? 근디 ​뭘 영국서 여기까지 와서 인쇄한 디야?" ​채털리가 ​재떨이가 되는 순간! 담배꽁초가 재떨이로 들어가는 건 당연한 일이렷다.​//

날마다? / 박상률​
이씨 정부 하는 짓이 하도 꼴같잖아 수행하는 틈틈이 ​저잣거리에 몸을 나투어 꾸짖던 성직자들. 그 성직자들의 뒤를 캔다는 소문이 돌았다. 특히 여자관계를 캔단다. 아마 이건 자기들이 해봐서 잘 아니까 그랬겠지. 이 소식을 들은 어떤 스님 왈, 지들은 날마다 여자랑 그거 하며 살면서 어쩌다 한 번 할 수도 있는 거 가지고 뭘 그리 소란이야? 잠자코 이 말씀 듣고 있던 젊은 시인 왈, 그 사람들도 ​그걸 ​날마다는 안 할 거예요. 이 말에 그 자리 모든 대중들이 하하하!​​//

​형용사 혐오증 / 박상률​
헤밍웨이는 이른바 하드보일드체 문장을 구사하며 형용사 따위의 ​수식어를 아주 싫어했지요. 자신의 복잡한 감정을 화자나 등장인물을 통해 드러내고 싶지 않아서 형용사를 좋아하지 않았겠지요. 헤밍웨이는 파리 시절 문학 사부였던 거트루드 스타인이 "장미는 장미이고 장미이다"라고 한 말에서 형용사 대신 점층적 반복 이미지를 익혀 자신의 소설에서 잘 써먹은 듯합니다.// ​그렇다면, "유신녀는 유신녀이고 유신녀이다"이지요 유신녀는 라이방 박의 상속인이자 히로뽕 박의 누나. 라이방 박은 군사반란에 이어 독재를 한 사람. 라이방 박의 아들 히로뽕 박은 걸핏하면 제정신이 아닌 상태로 유곽에서 발견되는 사람.// 라이방 박 일가는 헤밍웨이와는 달리 형용사를 매우/ 좋아하는 듯. 형용은 맨얼굴이 아니라 분을 덕지덕지 바른/ 얼굴인데 그 일가 모두 수식, 분식, 꾸밈, 과장으로 점철./ 그들의 하드보일드체 얼굴, 아니 맨얼굴은 무엇?​//

지랄 총량의 법칙 / 박상률
강연 가서 만난 중학생 아이들/ 과학 시간에 배웠단다/ 어떤 물질이 화학 반응을 일으켜/ 다른 형태의 물질이 되더라도/ 전체의 질량은 똑같다는 것/ (이를 질량 보존의 법칙 또는 질량 총량의 법칙이라 한다지)// ​십대 때 지랄을 떨지 않으면/ 나중에 어른 되어서 지랄을 떤다고/ 중학생일 때 지랄을 다 떨어버려야/ 어른이 되어서 지랄을 떨지 않게 된다고 했단다/ 자기네들 담임 선생님 그 말씀 하시면서/ 아주 심각하셨단다// ​아이들 이구동성으로/ 혹시 우리 담임 선생님이 지금 지랄 떠는 중이실까요?//

굿, Good / 박상률
어느 출판사 사옥 입주식에 김금화 만신의 굿이 있었다. 굿이나 보고 떡이나 얻어먹는다 했는데, 나도 제물을 얻어먹었다. 김금화 만신이 입에 넣어주는 생쇠고기 제물을 거리낌 없이 받아먹은 것이다. 내 생전에 쇠고기를 날로 먹은 건 처음이다. 내 고향 진도의 씻김굿하고도 많이 다른 김금화의 서해안 풍어굿. 그러나 신명 나고 기를 받는 건 같았다. 진도에선 목사도 어머니 돌아가시면 굿하고, 정형외과 의사도 어머니 발뽁 삐면 굿한다. 굿이 곧 일상이었다. 그런 때가 있었다. 굿하면 모든 것이 Good이었으니//

뿌리, 꽃을 보다 / 박상률
흔한 것은 귀한 것이 아니듯/ 가까이 있는 것은/ 그리움이 아니다// 닿지 않을 듯한 거리를 두고/ 이름을 이름을/ 노래로 부를 때/ 그리움은 더하는 것// 여러 가지로 살려 하지 않고/ 오롯이/ 하나의 무엇으로/ 살아갈 때/ 나머지 무엇은/ 그리움으로 남아/ 뿌리에서 가장 먼 자리에/ 꽃 되어 피어오른다// 꽃이야/ 별이 아니어도 좋고/ 그리움은 이슬보다/ 바람을 닮는다//

치명적인 / 박상률
상수리나무 휘감고 올라가는 칡넝쿨, 거침없다/ 휘감은 자리마다 나무의 살 깊게 패인다/ 나무의 굵은 허리 지나 가슴에 이르도록/ 세게 휘감은 사랑의 자국/ 상처 되어 깊이 박힌/ 치명적인 사랑에 붙들려/ 나무는 가만히 선 채/ 신음만 나직하다./ (사랑하되 너무 깊이는 말고)/ 칡넝쿨은 그런 소리 아랑곳없이/ 바람에 속절없이 흔들거릴 때마다 휘감을 사랑 또 찾는다./ 깊이 붙들어 매지 않으면 아니 될 문명, 치명적인//

수렵시대 / 박상률
쫓기고 있는 산 노루의 외마디를/ 지상의 언어 몇 마디로 따라 적을 수 있을까?/ 지은 죄 하나 없이/ (그들 산 노루는 미처 그런 생각도 못 한다)/ 그저 산 노루로 그렇게 태어난 탓으로/ 사냥꾼으로부터 쫓김을 당하고/ 그들의 숲까지 뭉개지는데 사실/ 어떠한 사냥꾼의 발길로도/ 그들을 걷어차선 안 된다. 그런데도/ 사냥꾼은 그들에게서 피와 고기를 원한다. 그들이/ 사냥꾼에게 진 빚은 처음부터 아무것도 없지만/ 사냥꾼은 점점 더 뻔뻔스러워져 간다/ 울타리를 치고 사냥개를 기르고/ (사냥개는 당연히 사냥꾼의 편이다)/ 하루 낮 하루 밤의 만족을 위하여/ 방아쇠를 당긴다/ 이미 울타리는 산 전체를 통째로 가두고 있어/ 도망을 가도 소용이 없다/ 죽어야 한다?/ 이렇게 죽어야 한다?/ 차마 목숨이 넘어갈 것 같지 않다// 포위망은 점점 좁혀져 온다//

고추 먹고 맴맴 농약 먹고 맴맴 ㅡ진도아리랑 22 / 박상률
고추밭에 농약을 치면/ 고추가 맵냐/ 농약이 맵냐/ 등에 진 약통 분무기/ 어깨가 제법 가볍게/ 느껴질 쯤/ 고추 먹고 맴맴/ 농약 먹고 맴맴/ 절규도 없이 다리가 풀려/ 고추 속에 집 지은/ 퍼런 벌거지보다 못한/ 방어력/ 저리도 끈질기게/ 속만 파먹으며/ 시퍼렇게 사는데/ 명색이 인간인 내가/ 방어보다 나은/ 공격을 하다가/ 고추 먹고 맴맴/ 농약 먹고 맴맴 서산에 걸린 해/ 한 뼘이나 두 뼘이냐//

곡(哭)문경새재 / 박상률
그 옛날 전라도 하고도 진도 섬 마을에 두 청춘 있었으니/ 어여쁜 주민댁 따님과 그 집에서 머슴살이 하는 떠꺼머리 총각/ 이팔청춘도 지나 방년 이십 꽃다운 세월 맞은 두 사람/ 눈 맞고 배 맞아 사랑은 돌이킬 수 없는데/ 주인 처지 머슴 처지 벗어날 길 없어 밤봇짐을 쌌더란다/ 사람들 눈길 피해 물길 산길 건너고 훑으며 숨어든 곳/ 경상도 하고도 첩첩산중 문경 땅, 새들도 울고 넘는다는 새재렷다/ 문경새재는 웬 고개인고 굽이야 굽이굽이 눈물이로구나/ 그리하여 그들의 사랑은 진도아리랑 첫소리로 남고/ 청천 하늘엔 잔별도 많고 두 사람 가슴 속엔 수심도 많은 채/ 고개 타령 눈물 타령 다 삼켜가며 그 산골 기슭에 뿌리내려/ 아들도 낳고 딸도 낳으며 자자손손 살았더랬는데/ 세월이 억수로 지나 웬 건설업자가 나라의 대표가 되자/ 느닷없이 수만 년 잠든 반도 땅 골골샅샅 다 뒤집어 놓을 모양이라/ 뜬금없이 배도 산으로 갈 일이 생겼구나/ 새들도 숨이 차 쉬어 넘는 산 고개에다가도 물길 낸다고 난리이니/ 사공이 많아 배가 산으로 가나 물길 아는 사공이 없어 그러나/ 진도아리랑 끝자락 다시 짤 일 생겼구나/ 문경새재는 웬 물길인고 굽이야 굽이굽이 눈물이로구나/ 예나 지금이나 그 고개는 눈물이로구나/ 아이고 아이고 문경새재여 곡하며 울자 해도/ 어이없고 기가 막혀 이제 울음소리조차 나지 않는구나//

안부 ㅡ시인 박영근의 전화 / 박상률
상률이? 나, 영근이 야./ 어제 서울 나갔는데/ 전화도 못 하고 들어와서 미안해.// 시집 오늘 부쳤어.// 지금 빠쁘지?/ 바쁜데 전화해서 미안해.// 해 길어지는 봄날 오후,/ 그는 울었다.//

서울사람 1 / 박상률
해는 떠도 거리는 회색이다/ 수원지 위에/ 신발공장 옆에/ 은행나무 이파리 속에/ 죽음이,/ 회색의 죽음이 쭉 늘어 서서 삶을 맞는다./ 그러나/ 서울사람인 그는/ 죽음과 늘 함께 하기에 오히려/ 확실한 삶을 산다고/ 생각, 생각한다!// 물고기는 수원지 물이 맵다고 한다/ 강아지는 신발공장 식당의 된장국이 쓰다고 한다/ 은행나무는?/ 거리의 햇살이고 바람이고 끈끈하다고 한다// 서울사람인 그는/ 맵고 쓰고 끈끈한 것이 모두/ 서울식이라서 그렇다고 그런다/ 그는, 서울사람인 그는/ 처음부터/ 서울식에 길들여져 있다.// 그-렇-지-만// 서울사람인 그도/ 역시/ 죽었다/ 수원지 위에/ 신발공장 옆에/ 은행나무 이파리 속에서/ 늘 삶과 함께 하던/ 죽음의 발길에 채여.// (그는,/ 서울사람인 그는/ 회색빛 웃음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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