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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황덕도 / 심인자

부흐고비 2022. 7. 4. 07:30

풍광들이 정겹다. 긴 세월을 그리 해 왔듯 몇 가구의 집들이 이마를 맞대고 있고, 끝집 옆으로 잘 자란 밭작물이 옹기종기 햇빛 바라기에 여념 없어 보인다. 갯내를 가득 품은 바닷바람이 코끝을 간지럽히더니 어느 사이 작은 어선 몇 척을 춤추게 한다. 길 위로 야트막한 야산의 늙은 소나무 한그루가 무심히 나를 바라본다.

가 봐야지 하면서도 연고가 끊긴 탓에 오랜 시간이 흘러버렸다. 소녀에서 이제는 희끗희끗한 흰머리 여인이 되었어도 이곳은 여전히 그리움이다. 유년의 나를 설레게 한 섬. 섬 안의 섬, 황덕도.

여름 어느 날 옆집 숙이가 날 찾았다. 숙이 옆에 교복을 단정히 입은 한 소녀가 서 있었다. 곱슬머리가 인상적인데다 맑은 얼굴이 밉상은 아니었다. 한창 유행하던 Sㅡ언니를 맺어주겠다는 것이다. 나는 초등학교 육학년이었고 그녀는 중학교 일학년이었다. 가끔 우리 집에 놀러왔다. 숙이랑 셋이서 밥도 먹고 나란히 누워 잠을 자기도 했다. 숙이의 감초역할로 우리 둘의 사이도 꽤 가까워졌다. 여동생이 없는 그녀에게 어느 사이 동생이 되어 있었다. 살뜰히 챙겨주는 마음을 느꼈기 때문이다.

여름 방학 첫날, 그녀의 집에 가기로 했다. 평소 같으면 어림없는 일이었다. 착하고 싹싹하고 게다가 뭐든 챙겨주는 그녀를 어느 사이 우리 부모님도 딸처럼 대해주었기에 가능했다.

처음으로 떠나는 여행이었다. 양껏 꾸린 가방을 메고 콧노래를 부르며 통통배에 몸을 실었다. 새하얀 포말을 일으키며 앞으로 나아갈수록 우리 집은 점점 작아져갔다. 집 떠나는 마음이 이런 것일까. 설레면서도 한편으론 가족들과 떨어져야한다는 두려움도 일었다.

통통배는 칠천도의 여러 마을을 돌며 사람들을 하나 둘 내려주었다. 그녀의 손을 잡고 선착장에 발을 디뎠다. 다 온 줄 알았는데 구불구불 산길을 또 걸었다. 소나무 그늘에 앉아 흐르는 땀을 식히며 쉬기도 했다.

눈앞에 작은 섬이 보였다. 오순도순 정겹게 머리를 맞대고 있는 몇 가구 되지 않은 작은 섬이었다. 아담하고 평온해 보이는 그 섬에 정이 갔다. 두 손을 입가에 대고 그녀가 목소리를 높였다. 몇 번의 고함소리에 조그만 배 하나가 노를 저으며 다가왔다. 나룻배였다. 마을 사람들이 돌아가며 수시로 노를 저어 건너 주고 데려오는 유일한 교통수단이었다.

부모님은 처음 보는 나를 반겨주었다. 시원한 오이냉국과 밭에서 뽑아온 나물 몇 가지를 무쳐 밥상을 내오곤 연신 배고플 텐데 어서 먹으라며 딸 대하듯 했다. 편식하는 것도 잊은 채 밥 한 그릇을 거뜬히 비우곤 동네 구경을 나섰다. 집 옆으로 교실이 하나 뿐인 작은 분교가 있었다. 인원수가 열 명 남짓하다고 했다. 교실이 깨끗했다. 책걸상이 반듯하게 잘 정돈 되어 있었고 문고의 동화책도 가지런히 꽂혀있었다. 교탁 옆의 낡은 풍금에 눈길이 갔다. 그녀에게 들려주고 싶었다. 합주반원으로 활동해서 웬만한 동요는 연주할 수 있었기에 용기를 냈다.

등대 구경을 시켜주겠다고 했다. 집 뒤로 한참 언덕을 오르니 작은 등대가 보였다. 무인 등대로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아 낡고 군데군데 칠이 벗겨져 있었다. 사진으로 보던 화려한 등대는 아니어도 아담하고 운치가 있었다. 볼품은 없어도 깜깜한 밤에 비추는 불빛이 밝고 아름답다고 했다. 편편한 계단 바닥의 흙먼지를 털어내고 나란히 앉았다. 멀리 지나가는 어선을 향해 손을 흔들며 쪄온 옥수수를 먹었다.

밤이 되니 집 생각이 났다. 섬 속의 섬이라 여직 전기가 들어오지 않았음을 몰랐던 것이다. 집집마다 호롱불밖에 없어서 어둠을 밀어내기에는 무리였다. 그녀의 방에도 호롱불 하나가 앉은뱅이책상에 놓였다. 안방의 부모님은 일찍 주무시는지 간간히 코고는 소리가 들려왔다. 잠은 오지 않고 식구들이 떠올랐다. 나 생각은 안 하고 연속극 보느라 모두들 텔레비전 화면을 뚫어져라 보고 있겠지. 어머니, 아버지, 오빠, 호랑이 같은 언니들, 만날 이겨보겠다고 달려드는 여동생까지 그리워하다 잠이 든 모양이다.

익숙하지 않은 소리에 눈을 떴다. 집에서는 통통배 소리에 잠을 깨곤 했는데. 여긴 집과 달리 소리가 컸다. 파도 소리였다. 세찬 물결에 밀려왔다 쓸려나가는 자갈 구르는 소리. 천둥소리 같기도 하고 구슬이 한꺼번에 쏟아지는 소리 같기도 했다. 수탉의 긴 울음소리가 장단 맞추듯 추임새를 넣는 사이 날이 밝아오기 시작했고 낯선 곳에서의 첫 아침이 싫지는 않았다.

또래 학생들이 모였다. 낚시 가자는 얘기를 미리 해 두었던 모양이다. 배를 타고 바다 한가운데로 나갔다. 시퍼런 바다가 무섭긴 했지만 낚시가 해보고 싶었다. 임시방편으로 만든 허술한 낚싯대를 드리우자 금시 입질을 했다. 챔 질에 장어 한 마리가 꿈틀거리며 올라왔다. 낚시도 처음, 물고기를 잡는 것도 처음이었다. 소리를 지르며 즐거워하자 모두들 맞장구를 쳐주었다. 연이어 두 마리를 더 낚았다. 그 재미에 얼굴 타는 것도 모르고 반나절이나 낚시에 열을 올렸다.

점심을 먹고 다들 바닷가에 모였다. 새벽에 쳐둔 그물을 끌어당기기 위해서였다. 양쪽으로 편을 갈라 긴 밧줄을 당기면 되는 단순한 작업이었다. 나도 그녀 옆에 섰다. 누군가가 큰소리로 노래를 부르자 다른 사람들도 합세하며 밧줄을 당겼다. 캠핑 온 대학생들도 구경하다가 우리 사이에 끼어들었다. 얼마나 재밌던지 손바닥이 얼얼하도록 잡아끌고 또 끌어당겼다. 밧줄이 사람 뒤로 쌓여가고 드디어 그물이 해변으로 끌려나오자 크고 작은 물고기가 파닥거렸다. 조금씩 나눠졌다. 수고한 대학생들의 저녁 한 끼 매운탕으로, 마을 남정네들의 안주거리인 횟감으로, 저녁 밥상에 올릴 생선구이로. 물고기와의 한판 줄다리기에 두 팔의 힘이 다 빠졌지만 항구를 향하는 만선의 깃발마냥 높이 쳐들었다.

밤이 이슥해지자 발소리를 죽인 채 사립문을 빠져나왔다. 컴컴한 길을 그녀의 손 하나에 의지하며 따라 걸었다. 어느 집에 다다라 대문을 밀쳤다. 희미하게 불빛이 흘러나오는 방문을 여니 동네 학생들이 다 모여 있었다. 서리를 나간다는 것이다. 달빛에만 의지한 채 캄캄한 들길을 지나 어느 밭에 멈췄다. 남학생 몇이 밭으로 기다시피 들어가더니 무언가를 안고 나왔다. 행동이 얼마나 민첩하고 빠른지. 그때 고함이 들렸다. 주인이 지키고 있었는데 하필 그 밭에 들어갔던 모양이다. 혼비백산 줄행랑을 쳤다. 달리기라면 나도 자신 있었다. 헉헉거리며 방에 들어와 보니 다들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키들키들 웃음이 났다. 달리다 넘어져 옷이 흙 칠갑인데도 수박을 꼭 안고 있었다. 참외도 땄다는데 어디서 흘렸는지 빈 소쿠리였다. 서리한 것은 이 뿐이 아니었다. 낮에 따로 챙겨둔 물고기로, 닭장에서 꺼내온 계란으로, 십시일반 가져온 먹을거리들로 군밥을 해 먹으며 여름밤을 보냈다.

아름다운 여행이었다. 처음으로 해본 낚시도, 주인한테 들켜 줄행랑치며 따 온 수박 서리도, 마을 사람 모두가 한마음으로 노동요를 부르며 그물을 끌어당기던 것도, 양어머니가 차려주시던 맛난 밥상도, 밀짚모자를 눌러쓰고 나룻배로 데려다주던 오라버니도 마치 어젯밤 일 마냥 선명하다.

지금껏 그녀와 인연을 이어간다. 그녀, Sㅡ언니를 만나지 못했더라면 내 추억 속의 황덕도는 없었을 것이다. 아름다운 섬에서의 추억도 만들지 못했으리라. 그랬다면 나는 허허로운 가슴을 채우려 이 나이에도 여행 가방을 꾸릴지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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