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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불안한 해빙 / 이주옥

부흐고비 2022. 7. 13. 08:44

봄철 나물 중 흔한 머위는 주로 그늘진 대나무 숲이나 언덕에 자생한다. 대체로 이파리나 줄기를 먹는다. 맛은 쌉싸름하지만 입맛 돋우는 데 좋다는 나물이다. 몸에 좋은 것이 입에 쓰다는 말이 있으니 일부러라도 그 맛을 즐길 일이다. 작고 여린 잎은 데쳐서 된장 양념에 참기름 두어 방울 떨구고 깨소금 솔솔 뿌려 반찬으로 먹으면 별미다. 줄기는 껍질을 벗겨 삶았다가 무치거나 볶거나 탕에 넣어 먹기도 한다. 특히 육개장이나 오리탕을 끓일 때 넣으면 특별한 맛이다. 하지만 나는 삶은 줄기에 생새우와 함께 들깻가루 두 스푼 정도 섞어서 자작하게 볶은 것을 가장 좋아한다.

친정어머니가 보낸 택배 상자 속에 튼실하게 삶아져서 묶인 머위 대가 듬뿍 들어 있었다. 유난히 색깔도 누르스름하고 통통했다. 무슨 요리를 하든지 대 여섯 번은 해 먹을 양이었다. 그러잖아도 이즈음에 간간이 생각나서 재래시장으로 사러 갈 요량이었는데 반가웠다. 사다 놓은 새우도 있고 곱게 갈아 놓은 들깻가루도 있으니 우선 볶음 요리부터 했다. 그러나 남은 것이 더 많았다.

대부분의 봄철 나물은 한꺼번에 많은 양을 채취한다. 먹는 재미보다 뜯는 재미가 더 좋다는 고사리나 취, 다래 순을 삶아 햇볕에 말리는 것은 흔한 봄 풍경이다. 하지만 머위는 오래 보관하기가 애매하다. 누군가는 고사리나 취처럼 데쳐서 햇볕에 말려 보관하기도 한다지만 내게는 언제나 단시간에 처치해야 하는 나물로 여겨진다. 그래서 보통 냉장고에 넣지만 그래 봤자 고작 3일을 넘기기 어렵다. 그러다보니 할 수 없이 냉동실에 넣는다.

며칠 후였다. 머위 대를 다시 꺼내서 녹이는데 속살은 어디 가고 질긴 껍질만 남아 있었다. 속을 꽉 채웠던 부드럽고 통통한 살은 어디로 가버리고 마치 삼 껍질처럼 질긴 표피만 살얼음을 품고 있었다. 속살이 사라진 머위대, 냉동실을 아무리 뒤져도 빠져나간 살점은 찾을 수 없었다. 허망하기만 했다. 대체 냉동실 안에서 어떤 일이 벌어진 것일까. 느닷없이 냉동실로 끌려가 꽁꽁 얼어버릴 바에야 차라리 장엄한 소멸을 택해버린 것일까. 기개 한번 대단하다. 껍질만 남은 줄기를 버리면서 문득 선득해졌다.

사람도 봄볕처럼 따뜻하고 부드러웠던 관계가 이런저런 이유로 마음이 굳고 차갑게 얼어 버릴 때가 있다. 부모와 자식 간에도 사소한 것에 냉기류가 흐르고 몇 시간이든 며칠이든 딱딱하게 굳는다. 부부간도 물론이고 연인 간에는 더욱 잦은 일이다. 그럴 때 서로의 방식으로 냉기를 조절하며 해동하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꽁꽁 얼어버린 마음 녹이기는 쉽지 않다.

말랑말랑한 탄력과 은근한 온기를 품은 인절미 몇 조각을 냉동실에 얼렸다가 실온에 꺼내 놓으면 그럭저럭 처음의 탄력을 되찾는다. 데우거나 찌는 등 다른 방도를 취하지 않고도 그대로 먹을 수 있다. 하지만 굳게 얼어버린 떡이 제아무리 녹는다 해도 처음의 맛 그대로이기야 하겠는가.

삶에는 탄력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사랑하는 사람들도 적당히 밀고 당기며 관계에 탄력을 만들고 미운 정 고운 정을 쌓는다. 하지만 그 관계가 얼어붙으면 어찌 될까. 그것을 녹이는데 들여야 하는 시간과 노력은 결코 만만하지 않다. 그뿐일까. 말랑거리는 탄력으로 허물을 감싸고 보듬던 너그러움도 단단하게 얼어버린 마음 안에서는 쩡쩡 얼음 갈라지는 소리를 내며 깨져버릴 수도 있다. 자신도 알아채지 못한 앙금과 거리가 질긴 껍질처럼 남아 쭈뼛쭈뼛 해지고 자칫하다간 속살 같은 그간의 사연과 정리情理를 송두리째 잃을 수도 있다. 무엇보다 얼었다 녹은 것은 대부분 본래의 맛과 모양을 잃는다는 것이다.

사람과의 관계에 쫀득한 탄력은 무작정 얼렸다 녹였다 해서 생기는 것은 아닐 것이다. 밍밍할지라도 기본 체온으로 엮어가는 일상이 가장 평화롭고 안전할 터, 그러니 얼음 찬 시간을 건너서 돌아온 사람들에게 다시 온기를 찾아가는 시간은 불안한 해빙기일 수밖에 없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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