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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울 어매 유품 / 정인호

부흐고비 2022. 7. 13. 08:50

그리움이란 말속에는 사랑이 있다. 다른 사람도 그렇겠지만 나에게 어머니 사랑이란 퍼 올려도 퍼 올려도 줄지 않는 우물과도 같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숭고한 단어 어머니, 그걸 부정하는 이는 없을 것이다. 그 어머니를 내 어릴 적에는 ‘어매’라고 불렀다.

울 어매가 지난 2018년 삼복더위가 절정이던 음력 6월 19일 아흔다섯을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돌아가시던 날 우리 여덟 남매는 울고불고 법석을 떨었지만 맏아들인 나는 어쩐 일인지 눈물 한 방울 나오지 않았다. 누가 뭐라고 해도 다하지 못한 불효로 눈물샘이 메말랐기 때문이다.

입관하는 날, 수의를 입혀드릴 때였다. 다섯째 여동생이 어매가 평소 사용하던 침대 서랍에서 챙겨 온 틀니를, 평소 읽으시던 금강경을 가슴에 얹어드렸다. 이승의 모든 번뇌를 내려놓고 편안히 눈 감은 얼굴을 본 것은 그때가 마지막이었다.

하관을 하던 날에는 동생들이 오열하는 앞에서 취토取土의식을 거행 했다. 인부들이 한 삽 떠 주는 부드러운 흙을 두 손으로 받아 조심스럽게 뿌렸다. “취토 취토 취토!” 세 번을 복창하면서 극락왕생을 염원했다. 그리곤 그들이 다가와 억센 팔 힘으로 흙을 밀어 넣기 시작했을 때 여동생들은 철 만난 매미처럼 소리 높여 울었다. 이게 우리와 하직하는 마지막 순간이었다.

장례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니 저녁 무렵이었다. 스무 이틀 으스름달이 서녘에 걸렸는데 여동생 다섯이 유품을 정리했다. 평소 여동생들은 경쟁이나 하듯이 친정 올 때마다 물색 고운 옷들을 사다 드렸는데 한 번도 안 입은 옷들이 장롱에 가득했다고 한다. 당신 며느리가 외국 여행가서 사다 드린 가방도 나왔는데 손잡이에 달린 상표도 뜯지 않은 것이라 둘러앉은 다섯 딸들이 눈치를 살피며 눈독을 들이는 웃지 못할 장면이 가관이었다. 그 손가방 속에는 몇 장의 신권 지폐, 경로우대증, 목도장 같은 것들이 나왔다.

마지막으로 TV받침으로 쓰던 궤짝을 열었다. 입구에 화장품 그릇이 들어 있었는데 뚜껑조차 열지 않아 변색된 동동구리무 병, 동네 의원에서 지어 온 변비약 봉지는 유효기간이 지난 지 몇 년이 된 것도 있었다. 목이 길던지 짧은 양말은 헤어 질대로 헤어져 폐품으로 분류해도 아깝지 않았는데도 손수 꿰매서 차곡차곡 쌓아 놓았다. 손때 묻은 수첩을 들춰보니 우리 형제들 전화번호가 비뚤비뚤 적혀있었다. 맨 첫머리에 어매 사랑을 독차지 한 막내딸 전화번호가 굵은 글자로 적혀 있었고 친정 종손자從孫子 결혼식 날자가 지워지지 않았다.

어매가 거처하시던 방에 딸린 마루 밑에는 남녀 공용 검정 고무신이 주인이 세상을 하직한 것도 모른 채 비스듬히 세워져 있었다. 네 발통 달린 똘똘이 의자위에는 당신의 굽은 허리를 닮은 닳을 대로 닳은 뭉텅한 호미 한 자루와 해 가리게 모자가 얹혀 있었다. 마당가 장독대에 올라보니 단지와 단지 사이에 이런저런 물건들을 모아 놓았다. 삼다수 물병 하며 빈 병들이 많았는데 그것들을 눈에 보이는 족족 재활용 통에 집어넣었고 당신은 내 눈을 피해 도루 주워 다가 빈틈이나 단지 사이에 끼우고….

그러나 그 중에서도 가장 내 가슴을 먹먹하게 만든 것은 어매가 쓰던 장롱 위의 종이 상자였다. 상자 속에는 당신의 회갑 때 안동포安東布로 지은 수의壽衣를 넣어 근 35여 년 간 얹어 두었던 것이었다. 그 상자를 열었더니 내가 부산으로 유학 가서 받은 중, 고등학교 졸업장과 정근 상장, 주산 5급 합격증이 들어 있었다고 한다. 대처로 공부하러 간 맏자식 금의환향을 빌며 만져보고 쓸어보고 그리움을 달랬을 모정이 한없이 눈물겹다.

어매가 꽃길 가신지도 어느덧 3년이 지났다. 나는 안동 고향 집에 갈 때마다 거처하시던 방문을 열고 환기부터 시키고 청소를 한다. 유품 중에도 왕골로 짠 반짇고리와 그 안에 한쪽 날이 밤쯤 부러진 가위 하나가 나를 올려다보면서 버리지 말아 달라고 애원하는 것 같아 그걸 보면 볼수록 한층 더 가슴이 아린다. 내 딴엔 효도한다고 헌 것을 버리고 새것을 사다 드렸다. 그런데 낡고 헌 것도 차마 버리질 못하고 감춰둔 것이 유품으로 남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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