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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느낌

장석남 시인

부흐고비 2022. 7. 18. 08:00

장석남 시인
1965년 인천광역시 덕적도에서 태어나 서울예술대학 문예창작과를 졸업하고 인하대학교대학원 국문학과에서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1987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새떼들에게로의 망명』, 『지금은 간신히 아무도 그립지 않을 무렵』, 『젖은 눈』, 『왼쪽 가슴 아래께에 온 통증』, 『미소는, 어디로 가시려는가』, 『뺨에 서쪽을 빛내다』, 『고요는 도망가지 말아라』, 『꽃 밟을 일을 근심하다』가 있다. 제11회 김수영문학상, 제44회 현대문학상, 제10회 미당문학상, 제23회 김달진문학상, 제28회 상화시인상, 제18회 지훈문학상, 제28회 편운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한양여자대학 문예창작과 교수.

 



내일 / 장석남
걸어서 다는 갈 수 없는 곳에/ 바다가 있었습니다// 날개로 다는 날 수 없는 곳에/ 하늘이 있었습니다// 꿈으로 다는 갈 수 없는 곳에/ 세월이 있었습니다// 아, 나의 세월로 다는 갈 수 없는 곳에/ 내일이 있었습니다.//

뺨의 도둑 / 장석남
나는 그녀의 분홍 뺨에 창을 열고 손을 넣어 자물쇠를 풀고 땅거미와 함께 들어가 가슴을 훔치고 심장을 훔치고 허벅지와 도톰한 아랫배를 훔치고 불두덩을 훔치고 간과 허파를 훔쳤다 허나 날이 새는데도 너무 많이 훔치는 바람에 그만 다 지고 나올 수가 없었다 이번엔 그녀가 나의 붉은 뺨을 열고 들어왔다 봄비처럼 그녀의 손이 쓰윽 들어왔다 나는 두 다리가 모두 풀려 연못물이 되어 뺨이나 비추며 고요히 고요히 파문을 기다렸다//

항아리 ㅡ감포에 갔을 때 / 장석남
동해 바다에 바로 이웃해 접한 소주집이었다 주인은 귀가 셋으로 하나는 파도 소리가 제집으로 드나들고 있었다 우리 같은 것들은 엄두가 날 일이 아니었다 그 집 뒤안에는 장독대가 있었는데 그 중에도 배가 커다란 항아리가 있어서 나는 줄창 그 마당에 앉아 소주를 바람과 함께 털어넣으면서도 그 항아리 속이 궁금했다 그 여럿의 파도 소리 중에 어느 것이 그곳에 들어가 둥그렇게 부검 자리를 잡고 있을 것인가 그 드나들던 길이 하도나고자 처갓집 드나들 듯하는 것이어서 반질반질하게 윤이 배겨 있을 것이어서 눈에 선해도 거기에 그 바다에 사는 물고기들의 눈빛 같은 것도 묻어 있을 것인지는 장담할 수가 없었다 그런 건 금방 녹아버릴 만큼 그곳은 서늘한 뜨거움이 미끈했었으니까 나는 파도 하나를 불러 망설이며 망설이며 내 속을 거기에 딸려 보내보아도 도대체 되돌아오는 놈이 하나 없어서 마음은 줄창 한밤 중이었다 그래 자꾸만 소주잔만 털었다 그 저물 무렵 그 장독대의 빈 항아리 하나는 어느덧 내 살친구들이 되어서 내게 한시도 귀를 막지 못하게 하는 귀를 하나 더 달아주어서 내 차지한 이승의 자리 중 한 자리를 그 파도들에게 한편 내줘야 한다는 것을 스스로 알게끔 하였다 그 파도 소리에 배부른 항아리를 나는 내 속엣살림 한쪽에도 하나 들이고 흔들리지 않게 새끼돌로 괴어 그곳에 어지간한 씁쓸하고 들큼한 일들을 파도 소리 같은 걸루 단련해서는 넣어두었다가 그게 좀 필요할 때마다 술을 푸듯이 퍼다가 목을 적셔보아야겠다고 생각해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 앞의 바다 빛깔이 꼭 거기 속살처럼 청량하고 부드럽고 부드러워서가 아니라// 꼭 그래서만이 아니라//

풍적(風笛) 1 / 장석남
네 눈동자 속 마른 나뭇잎/ 네 눈동자 속 때 절은 내// 청춘의 숙박부// 네 눈동자 속/ 느닷없는 우박떼// 허공 가득 한꺼번에 두리번두리번, 토란잎들//

매화꽃을 기다리며 / 장석남
매화분 하나를 구해 창가에 두고는/ 꽃봉오리 올라오는 것 바라보니/ 피멍 든 듯 붉은 빛이 섞여서/ 겨우내 무슨 참을 일이 저렇듯 깊었을까 생각해본다/ 안에서는 피지 마 피지 마 잡아당기는 살림이 있을 듯해/ 무언가 타이르러 오는 꽃일지 몰라/ 무언가 타이르러 오는 꽃일지 몰라/ 생각해본다// 집은 동향이라 아침 빛만 많고/ 바닥에 흘린 물이 얼어붙어 그림자 미끄럽다/ 후일(後日), 꽃이 나와서, 그 빛깔은/ 무슨 말인가/ 무슨 말인가/ 그 그림자 아래 나는 여럿이 되어 모여서/ 그 빛깔들을 손등이며 얼굴에까지 얹어보는 수고로움 향기롭겠다//

살구꽃 / 장석남
마당에 살구꽃이 피었다/ 밤에도 흰 돗배처럼 떠 있다/ 흰빛에 분홍 얼룩 혹은/ 제 얼굴로 넘쳐버린 눈빛/ 더는 알 수 없는 빛도 스며서는/ 손 닿지 않는 데가 결리듯/ 담장 바깥까지도 훤하다// 지난 겨울엔 빈 가지 사이사이로/ 하늘이 튿어진 채 쏟아졌었다/ 그 하늘을 어쩌지 못하고 지금/ 이 꽃들을 피워서 제 몸뚱이에 꿰매는가?/ 꽃은 드문드문 굵은 가지 사이에도 돋았다// 아무래도 이 꽃들은 지난 겨울 어떤,/ 하늘만 여러번씩 쳐다보던/ 살림살이의 사연만 같고 또/ 그 하늘 아래서는 제일로 낮은 말소리, 발소리 같은 것 들려서 내려온/ 신과 신의 얼굴만 같고/ 어스름녘 말없이 다니러 오는 누이만 같고// (살구가 익을 때,/ 시디신 하늘들이/ 여러 개의 살구빛으로 영글어올 때 우리는/ 늦은 밤에라도 한번씩 불을 켜고 나와서 바라다보자/ 그런 어느날은 한 끼니쯤은 굶어라도 보자)// 그리고 또한, 멀리서 어머니가 오시듯 살구꽃은 피었다/ 흰빛에 분홍 얼룩 혹은/ 어머니에, 하늘에 우리를 꿰매 감친 굵은 실밥, 자국들//

살구나무 여인숙 ㅡ제주에서 달포 남짓 살 때 / 장석남
마당에는 살구나무가 한 주 서 있었다/ 일층은 주인이 살고/ 그 옆에는 바다 소리가 살았다/ 아주 작은 방들이 여럿/ 하나씩 내놓은 窓엔/ 살구나무에 놀러 온 하늘이 살았다/ 형광등에서는 쉬라쉬라 소리가 났다/ 가슴 복잡한 낙서들이 파르르 떨었다/ 가끔 옆방에서는 대통령으로 덮은/ 짜장면 그릇이 나와 있었다/ 감색 목도리를 한 새가 하나 자주 왔으나/ 어느 날 주인집 고양이가/ 총총히 물고 걸어가는 것이 보였다/ 살구나무엔 새의 자리가 하나 비었으나/ 그냥 맑았다 나는 나왔으나 그 집은/ 그냥 맑았다//

꽃이 졌다는 편지 / 장석남
1// 이 세상에/ 살구꽃이 피었다가 졌다고 쓰고/ 복숭아 꽃이 피었다가 졌다고 쓰고/ 꽃이 만들던 그 섭섭한 그늘 자리엔/ 야윈 햇살이 들다가 만다고 쓰고// 꽃 진 자리마다엔 또 무엇이 있다고 써야 할까/ 살구가 달렸다고 써야 할까/ 복숭아가 달렸다고 써야 할까/ 그러니까 결실이 있을 것이라고/ 희망적으로 써야 할까// 내 마음속에서/ 진 꽃자리엔/ 무엇이 있다고 써야 할까// 다만/ 흘러가는 구름이 보이고/ 잎을 흔드는 바람이 가끔 오고/ 달이 뜨면/ 누군가 아이를 갖겠구나 혼자 그렇게/ 생각할 뿐이라고/ 그대로 써야 할까//
2// 꽃 진 자리에 나는/ 한 꽃 진 사람을 보내어/ 내게 편지를 쓰게 하네// 다만 흘러가는 구름이 잘 보이고/ 잎을 흔드는 바람이 가끔 오고/ 그 바람에 뺨을 기대보기도 한다고// 나는 오지도 않는 그 편지를// 오래도록 앉아서/ 꽃 진 자리마다/ 애기들 눈동자를 읽듯/ 읽어내고 있네//

상강(霜降) / 장석남
그이를 만나러 간다// 여전히 오지 않고/ 그저 파밭 가에 앉아 있듯/ 푸르고 매운 자리// 삭정이 끝에/ 잠자리 놀 듯/ 골똘한 오후// 내일도/ 눈썹 그늘이 길어져서/ 있을 만한 자리// 자리가 삭지 않아/ 서리를 맞는 자리//

동지(冬至) / 장석남
생각 끝에,/ 바위나 한번 밀어보러 간다// 언 내(川) 건너며 듣는/ 얼음 부서지는 소리들/ 새 시(詩) 같은,// 어깨에 한짐 가져봄직하여/ 다 잊고 골짜기에서 한철/ 얼어서 남직도 하여// 바위나 한번 밀어보러 오는 이 또 있을까?/ 꽝꽝 언 시 한짐 지고/ 기다리는 마음/ 생각느니,//

배호 3 / 장석남
신촌 크리스탈 백화점 앞에서 눈을 맞는다/ 눈이 오니까 그녀는 지금/ 눈길을 오리라/ 그녀 뒤의 발자국을 눈은 지우리라/ 자꾸 눈발은 등을 민다 그녀는/ 등을 밀리며 오리라 리어카 스피커에서/ 한생애가 쏟아져나와/ 쉽게 살얼음이 되는 것 바라보며/ 사람들은 찬 이마와 머리칼을 데리고/ 어디로 가나 그녀는 지금/ 손아귀에 깊은 골짜기를 쥐고 오리라/ 눈길을 오며 그녀는 아이를 가지리라/ 재개봉 영화 간판을 올리며 눈발 속의 한 인부가/ 흑백 화면처럼 저녁을 가린다/ 강화버스 쪽으로 골목 하나 사라지고/ 그 자리에 적막한 불빛을 물고/ 강화버스가 두런두런 들어선다/ 골짜기 내게 다가와 어깨에 묻은 눈을 털고/ 말없이 손을 잡고 나는/ 그녀에게 入山한다/ 눈길을 다시 가며 그녀는 호두나무꽃 같은 아이를 가지리라//

저 많은 별들은 다 누구의 힘겨움일까 / 장석남
보푸라기 이는 숨을 쉬고 있어 오늘은 교외에 나갔다가 한 송이만 남은 장미꽃을 보고 왔어 아무도 보지 않은 자국 선명했어 숨결에 그 꽃이 자꾸 걸리데 보푸라기가 자꾸만 일어 저 많은 별들은 다 누구의 가슴 뜀일까 아스라한 맥박들이 자꾸 목에 걸리데어머니, "얘야, 네 사랑이 힘에 겨웁구나" "예 어머니. 자루가 너무 큰걸요" 저 많은 별들은 다 누구의 힘겨움일까//

별의 감옥 / 장석남
저 입술을 깨물며 빛나는 별/ 새벽 거리를 저미는 저 별/ 녹아 마음에 스미다가/ 파르륵 떨리면/ 나는 이미 감옥을 한 채 삼켰구나//유일한 문밖인 저 별//

초저녁 ‘밥별’ 이라는 별 / 장석남
저녁때 밥을 먹습니다/ 저녁때 된장에 마른 멸치를 찍어 먹습니다/ 자꾸 목이 막혀 찬물도 몇 모금씩 마십니다/ 좀더 어둡자 남쪽 하늘에 별이 떴습니다/ 그 별 오랫동안 쳐다보며 씹는 저녁밥/ 속으로 나는 그 별을 ‘밥별’이라고 이름붙입니다/ 어느 틈엔가 그 별이 무척 신 얼굴로 진저리치며 빛납니다/ 눈에 어려 떨어질 듯/ 어느덧 그 별 내 들숨을 타고 들어가/ 마음에 떴습니다/ 누군가가 떠서 초저녁 마음을 내려다봅니다/ 삶은 드렁칡, 삶은 드렁칡, 마음 엉키고/ 눈에 드렁칡처럼 얽히는 별의 빛이여//

봉평의 어느 시냇물을 건너며 / 장석남
저 햇빛의 찬란함 위로는 이편의 모든 것이 다 손잡고 맨발로 건너갈 수 있을 것만 같다// 그러나 건너보면/ 햇빛은 뒤로 물러나며 조그만 징검돌을 올리고/ 징검돌은 기우뚱 무슨 말인가를 건네기도 하는 것이다/ 봄이 오는 길도 그러하였고/ 너에게로 가는 길도 그러하였다// 시냇물은 발랄하고/ 기러기가 날아간 쪽 하늘빛이 아직은 좀 남아 있고//

불을 끄면 / 장석남
불을 끄면 모두 눈을 달고 살아나서 무서웠지/ 눈 감았지// 철이 들면서 불을 끄면/ 다 보이지 않으니 좋다,/ 웃음이 솟아도/ 눈물이 불쑥 와도/ 좋다,/ 그렇다가도/ 끝내 다시 불을 켜서/ 한꺼번에 서른도 마흔도 또 쉰도 먹는 날이 있었지// 불을 끄면/ 그대로 새벽 포구와도 같아져서/ 미끄러지는 미명들을 받아안고/ 맥박을 세지//

저녁의 우울 / 장석남
여의도 분식집에서 저녁밥을 먹고 강변을 걸었다/ 강은 내게 오래된 저녁과 속이 터진 어둠을 보여주며/ 세상을 내려갔다/ 천둥오리도 몇 마리 산문처럼 물 위에 떴다/ 날곤 날곤 했다 그러면 강은 끼루루룩 울엇다/ 내가 너댓 개의 발걸음으로 강을 걷는 것은/ 보고 싶은 자가 내가 닿을 수 없는 멀리에 있는/ 사사로운 까닭이지만, 새가 나는데 강이 우는 것은/ 울며 갑작스레 내 발치에서 철썩이는 것은 이 저녁을/ 어찌 하겠다는 뜻일까//

얼룩에 대하여 / 장석남
못 보던 얼룩이다// 한 사람의 생은 이렇게 쏟아져 얼룩을 만드는 거다// 빙판 언덕길에 연탄을 배달하는 노인/ 팽이를 치며 코를 훔쳐대는 아이의 소매에/ 거룩을 느낄 때// 수줍고 수줍은 저녁 빛 한 자락씩 끌고 집으로 갈 때/ 천수천안(千手天眼)의 노을 든 구름장들 장엄하다// 내 생을 쏟아서/ 몇 푼의 돈을 모으고/ 몇 다발의 사랑을 하고/ 새끼와 사랑과 죄를 두고/ 적막에 스밀 때// 얼룩이 남지 않도록/ 맑게/ 울어 얼룩에 얼룩을 만드는 이 없도록/ 맑게/ 노래를 부르다 가야 하리//

어느 해 낙산사 새벽종 치는 일을 권해 받았으나 하지 못한 것을 후회함 / 장석남
종소리가 온다 어느 절에서 오는지 모른다 나는 슬며시 방문을 밀고 나와 앉는다 좀더 맑게 온다 이제 몇 번째인가? 나는 하던 일도 없어지고 해야 할 일도 없어진 채 그저 좀 앉아 있기로 한다 맛좋고 영양 많은 횟감용 생굴장수가 지나가는 그 위에 또 한번 종소리 덩- 하고 울려온다// 어느해 봄 불 타기 전 낙산사 뒷방에 얼마쯤 머물자고 청했을 때 스님 한 분, 밥 값으로 종두 일을 권했으나 그만 못 하고 말았는데 이제 와 후회한다// 꽃 같은 손을 만들어 종을 밀어 때리면/ 뜰에선 목단꽃도 피었을 테지/ 목단꽃 겹겹처럼 곱디고운 뉘우침도 많았을 테지// 후회는 기도를 낳고 나는/ 죽으면 동해에 움터오는 먼동이나 되어/ 어느, 밤 지새운 기도객의 맑은 눈자위에 불그스레 서려서 그를 보는 가슴을 아프게 할 거야/ 그를 보는 가슴을 꽃 쥐듯 아프게 할 거야//

옛 노트에서 / 장석남
그때 내 품에는/ 얼마나 많은 빛들이 있었던가/ 바람이 풀밭을 스치면/ 풀밭의 그 수런댐으로 나는/ 이 세계 바깥까지/ 얼마나 길게 투명한 개울을/ 만들 수 있었던가/ 물 위에 뜨던 그 많은 빛들,/ 좇아서/ 긴 시간을 견디어 여기까지 내려와/ 지금은 앵두가 익을 무렵/ 그리고 간신히 아무도 그립지 않을 무렵/ 그때는 내 품에 또한/ 얼마나 많은 그리움의 모서리들이/ 옹색하게 살았던가/ 지금은 앵두가 익을 무렵/ 그래 그 옆에서 숨죽일 무렵//

오래 된 정원 / 장석남
나는 오래 된 정원을 하나 가지고 있지/ 삶을 상처라고 가르치는 정원은/ 밤낮없이 빛으로 낭자했어/ 더 이상은 아물지도 않았지/ 시간을 발밑에 묻고 있는 꽃나무와/ 이마 환하고 그림자 긴 바윗돌의 인사를 보며/ 나는 그곳으로 들어서곤 했지 무성한/ 빗방울 지나갈 땐 커다란 손바닥이 정원의/ 어느 곳에서부턴가 자라나와 정원 위에/ 펼치던 것 나는 내/ 가슴에 숨어서 보곤 했지 왜 그랬을까/ 새들이 날아가면 공중에 길이 났어/ 새보다 내겐 공중의 길이 더 선명했어/ 어디에 닿을지/ 별은 받침대도 없이 뜨곤 했지/ 내가 저 별을 보기까지/ 수없이 지나가는 시간을 나는/ 떡갈나무의 번역으로도 읽고/ 강아지풀의 번역으로도 읽었지/ 물방울이 맺힌 걸 보면/ 물방울 속에서 많은 얼굴들의 보였어/ 빛들은 물방울을 안고 흩어지곤 했지 그러면/ 몸이 아프고 아픔은 침묵이 그립고/ 내 오래 된 정원은 침묵에 싸여/ 고스란히 다른 세상으로 갔지/ 그곳이 어디인지는 삶이 상처라고/ 길을 나서는 모든 아픔과 아픔의 추억과/ 저 녹슨 풍향계만이 알 뿐이지//

목도장 / 장석남
서랍의 거미줄 아래/ 아버지의 목도장/ 이름 세 글자/ 인주를 찾아서 한번 종이에 찍어보니/ 문턱처럼 닳아진 성과 이름// 이 도장으로 무엇을 하셨나/ 눈앞으로 뜨거운 것이 지나간다/ 이 흐린 나라를 하나 물려주는 일에 이름이 다 닳았으니/ 국경이 헐거워 자꾸만 넓어지는 이 나라를/ 나는 저녁 어스름이라고나 불러야 할까보다// 어스름 귀퉁이에 아버지 흐린 이름을 붉게 찍어놓으니/ 제법 그럴싸한 표구가 되었으나/ 그림은 비어있네//

속삭임 / 장석남
솔방울 떨어져 구르는 소리./ 가만 멈추는 소리./ 담 모퉁이 돌아가며 바람들 내쫓는/ 가랑잎 소리./ 새벽달 깨치며 샘에서/ 숫물 긷는 소리./ 풋감이 떨어져 잠든 도야지를 깨우듯/ 내 발등을 서늘히 만지고 가는/ 먼,/ 먼, 머언./ 속삭임들.//

벽에 걸린 연못 / 장석남
어느 저녁/ 연못을 떠다가 벽에 걸었다/ 거기 놀던 새들은 노는 채로/ 흔들리는 풀은 흔들리는 채로/ 풀 흔들고 간 바람은 흔들고 간 바람인 채로/ 벽에 걸렸다/ 풀이 눕고 그 위에/ 바람과 같이 우리가 눕던 자리는/ 저만큼이다/ 거기 머물던 적막은 그러나/ 이제 보니 다 적막은 아니다/ 못 보았던 샛길이 하나 막 어디론가 가고 있다/ 다시 얼기 시작하는 窓이다//

봄비 / 장석남
풀린/ 봄/ 물결이여 네 고요 위에/ 둥글게 둥그렇게/ 서로서로 몸을 감고 죽는다/ 둥그런, 둥그런 물의 棺들/ 물 위로 물 속의 푸른 어둠이 솟아올라와/ 둥근 그 소리에까지도 푸른 어둠이 스민다/ 풀린/ 봄/ 물결이여/ 네 몸 위에 받는 봄비는/ 먼데 골짜기까지도 봄이게 하며 몸을 터서 죽는다/ 아 너와 내가 잠들었던/ 이 한 덩어리 기슭의 바위에도 봄비는 와서/ 둥글게 둥그렇게/ 앉음새를 고쳐준다//

봄 산(山) / 장석남
푸른 것들이/ 조금씩 나오고 올라오고/ 자란다/ 연록에서 떨어져 나와 연록을 뿌리치고/ 초록을 뿌리치고 더 크게 푸르러지고 떠오르고/ 밑바닥에서부터 떠올라 골짜기를 채운다/ 더 채우고 산을 밀고 계곡으로 올라간다/ 절벽을 낭떠러지 아래로 밀어 떨어뜨리며/ 꼭대기로 산꼭대기로/ 오른다// 봄 山이 봄 山이/ 걸걸거리면서 숨을/ 끓이면서 꽃 피워/ 일어서서/ 봄 山이/ 천년 절간들도 다 아무것도 아니야/ 아무것도 아니야/ 파묻어버린다// (이승이나 떠야 간혹 스님들 모습도 연기로써 보이겠다)//

여름 산 / 장석남
둥글게 흰 풀잎의 둥금/ 둥금 위에 앉은 잠자리의 투명/ 투명 위에 앉은 여름 산// 비 온 뒤/ 이목구비 뚜렷한/ 여름 산 메아리 속으로/ 먼 훗날 살집을/ 걸린다// 둥글게 흰 풀잎의 둥금/ 둥금 위에 앉은/ 이슬과 해와,/ 발자국//

가을의 빛 / 장석남
누군가 울먹이며 지나갔는가/ 一個 小隊의 코스모스들이 허리마다 올올이 바람을 감고 서서/ 이제 더 오래 못 서 있을 빛을 내내/ 빛내고 있었으니/ 이 빛깔들은 이후 어느 길목을 돌아/ 어디로 종종이며 흐를 것인가// 그것이 눈물겨운 것은/ 날마다 내 꿈이 허드레로만 생각되어져서가 아니라/ 앞치마를 두르고 저녁밥을 끓이고 있는/ 추억의 이마가 너무 푸르러서만이 아니라/ 내가 가는 길이/ 종내는 혼자가 저렇게 허리에 바람을 감는 길이라는/ 이 가을 속 조용한 손님의 말씀이 있었으니// 누군가 엉엉 울고 갈 이가 있어서/ 또 그가 손목을 만지작이며 걸리는/ 작은 새끼들의 울음도 있어서/ 낮에 나온 달이 저렇듯 오랫동안 창백하게/ 이 근처에 머물고 있는 것은 아닌가/ 우두커니 오동나무도 한 주 서 있는 것은 아닌가//

가을볕 / 장석남

우리가 가진 것 없으므로/ 무릎쯤 올라오는 가을풀이 있는 데로 들어가/ 그 풀들의 향기와 더불어 엎드려 사랑을 나눈다고 해도/ 별로 서러울 것도 없다/ 별 서러울 것도 없는 것이/ 이 가을볕으로다/ 그저 아득히만 가는 길의/ 노자로 삼을 만큼 간절히/ 사랑은 저절로 마른 가슴에/ 밀물 드는 것이니/ 그 밀물의 바닥에도/ 숨죽여 가라앉아 있는/ 자갈돌들의 그 앉음새를/ 유심히 유심히 생각해볼 뿐이다/ 그 반가사유를 담담히 익혀서/ 여러 천년의 즐거운 긴장으로/ 전신에 골고루 안배해둘 뿐이다/ 우리가 가진 것이 얼마 없으므로/ 가을 마른 풀들을/ 우리 등짝 하나만큼씩만/ 눕혀서 별로/ 서러울 것 없다//

폭설 ㅡ산방山房 / 장석남
밤사이 폭설이 내려서 소나무 가지가 찢어지는 소리/ 폭설이 끊임없이 아무 소리 없이 피가 새듯 내려서 오래 묵은 소나무 가지가 찢어져 꺾이는 소리, 비명을 치며/ 꺾이는 소리, 한도 없이 부드러웁게 어둠 한 켠을 갉으며 눈은 내려서 시내도 집도 인정도 가리지 않고 비닐하우스도 폭도도 바다도 길도 가리지 않고 아주 조그만 눈송이들이 내려서 소나무 가지에도 앉아/ 부드러움이 저렇게 무겁게 쌓여서/ 부드러움이 저렇게 천근 만근이 되어/ 소나무 가지를 으깨듯 찢는 소리를/ 무엇이든 한번쯤 견디어본 사람이라면 미간에 골이 질,/ 창자를 휘돌아치는/ 저 소리를/ 내 생애의 골짜기마다에는 두어야겠다// 사랑이 저렇듯 깊어서, 깊고 깊어서/ 우리를 찢어놓는 것을/ 부드럽고 아름다운 사랑이 소리도 없이 깊어서/ 나와 이웃과 나라가 모두, 인류가/ 사랑 아래 덮인다/ 하나씩 하나씩/ 한 켜씩 한 켜씩 한 켜씩/ 한 자씩 두 자씩 쌓여서/ 더 이상 휠 수 없고 더 이상 내려놓을 수 없고 버틸 수 없어서 꺾어질 때, 찢어질 때, 부러지고 으깨어질 때 그 비명을 우리는 사랑의 속삭임이라고 부르자// 사랑에 찢기기 전에 꿈꾸고/ 사랑에 찢기기 전에 꿈으로 달려가고/ 찢기기 전에 숨는 굴뚝새가 되어서/ 속삭임들을 듣는다/ 이 사랑의 방법을 나는 이제야 눈치 채고/ 이제야 혼자 웃는다//

해 질 녘 / 장석남
아버지는 종일 모래밭에서 와서 놀더라/ 아버지는 저녁까지 모래밭에/ 숨을 놓고 놀다/ 모래알 속에 아들과 딸을/ 따뜻이 낳아두고 놀다 가더라/ 해당화밭이 애타는 저녁까지// 소야도가 문갑도로/ 문갑도가 다시 굴업도로/ 해걸음을 넘길 때/ 1950년이나 1919년이나/ 그 이전(以前)이/ 물살에 떠밀려와 놀다 가더라//

묵집에서 / 장석남
묵을 드시면서 무슨 생각들을 하시는지/ 묵집의 표정들은 모두 호젓하기만 하구려// 나는 묵을 먹으면서 사랑을 생각한다오/ 서늘함에서/ 더없는 살의 매끄러움에서/ 떫고 씁쓸한 뒷맛에서/ 그리고// 아슬아슬한 그 수저질에서/ 사랑은 늘 이보다 더 조심스럽지만/ 사랑은 늘 이보다 위태롭지만// 상 위에 미끄러져 깨져버린 묵에서도 그만/ 지난 어느 사랑의 눈빛을 본다오/ 묵집의 표정은 그리하여 모두 호젓하기만 하구려//

그믐 / 장석남
나를 만나면 자주/ 젖은 눈이 되곤 하던/ 네 새벽녘 댓돌 앞에// 밤새 마당을 굴리고 있는/ 가랑잎 소리로써/ 머물러보다가/ 말갛게 사라지는/ 그믐달/ 처럼//

부엌 / 장석남
늦은 밤에 뭘 생각하다가도 답답해지면 제일로 가볼만한 곳은 역시 부엌일밖에 달리 없지./ 커피를 마시자고 조용조용히 덜그럭대는 그 소리는 방금 내가 놔둔 詩 같고, (오 詩 같고)/ 쪽창문에 몇 방울의 흔적을 보이며 막 지나치는 빛발은 나에게만 다가와 몸을 보이고 저만큼 멀어가는 허공의 유혹 같아 마음 달뜨고, (오 詩 같고)// 매일매일 식구들을 먹여 살리는 고요의 이 반질반질한 빛들을 나는 사진으로라도 찍어볼까? 가스레인지 위의 파란 불꽃은 어디에 꽂아두고 싶도록 어여쁘기도 하여라.// 내가 빠져 나오면 다시 사물을 정리하는 부엌의 공기는 다시 뒤돌아보지 않아도 또 詩 같고, 공기 속의 그릇들은 내 방의 책들보다 더 고요히 명징한 내용을 담고 있어, 읽다가 먼데 보는 오 얄팍한 銀色 詩集 같고,//

방 / 장석남
동백꽃이 피었을 터이다/ 그 붉음이 한칸 방이 되어 나를 불러들이고 있다/ 나이에 맞지 않아 이제 그만 놓아버린 몇낱 꿈은 물고기처럼 총명히 달아났다/ 발 시려운 석양이다/ 이제 나는 온화한 경치로 나지막이 기대어 섰다/ 아무도 모르는 사랑이 겹겹 벽을 두른다/ 동백이 질 때 꽃자리엔 어떤 무늬가 남는지/ 들여다보는, 큰 저녁이다/ 문 없어도 시끄러움 하나 없는/ 들끓는 방이다//

술래 1 / 장석남
신발 벗어놓고 꽃 속으로 들어간 매화 분홍// 신발 벗어놓고 열매 속으로 들어간 살구 분홍// 신발 벗어놓고 겨울 속으로 들어간 첫서리의 분홍// 신발장을 정리하며/ 지워지지 않는 분홍의 핏자국들을 만진다// 나는 그 얼룩들의 술래였다//

군불을 지피며 2 / 장석남
집 부서진 것들을 주워다 지폈는데/ 아궁이에서 재를 끄집어내니/ 한 됫박은 되게 못이 나왔다/ 어느집 家系였을까// 다시 불을 넣는다/ 마음에서 두꺼운 연기가 피어오르고/ 잉걸로 깊어지는 동안/ 차갑게 일어서는 속의 못끝들// 감히 살아온 생애를 다 넣을 수는 없고 나는/ 뜨거워진 정강이를 가슴으로 쓸어안는다// 불이 휜다//

오동(梧桐)꽃 / 장석남
다른 때는 아니고,/ 참으로 마음이 평화로워졌다고 생각하고 한참만에 고개를 들면 거기에 오동꽃이 피었다// 살아온 날들이 아무런 기억에도 없다고, 어떡하면 좋은가...... 그런 평화로움으로 고개를 들면 보라 보라 보라/ 梧桐꽃은 피었다 오오/ 무엇을 펼쳐서 이 꽃들을 받을 것인가//

저녁 햇빛에 마음을 내어 말리다 ㅡ섬진강에서 / 장석남
어미소가 송아지 등을 핥아준다/ 막 이삭 피는 보리밭을 핥는 바람/ 아, 저 혓자국!/ 나는 그곳의 낮아지는 저녁해에/ 마음을 내어 말린다// 저만치 바람에/ 들국(菊) 그늘이 시큰대고/ 무릎이 시큰대고/ 적산가옥/ 청춘의 주소 위를 할퀴며/ 흙탕물의 구름이 지나간다// 아, 마음을 핥는 문밖 마음//

저녁 산보 / 장석남
비로소 밀물이다/ 모래들은/ 한 번 꾹 감았다 뜬 눈으로/ 밀물 허리를 안는다/ 물빛 속이나 엿보며 잔잔히/ 건너오는 바람들은/ 해당화숲 깊은 곳으로만 들어가 긁히고/ 나는 내가 만든 말이나/ 스스로 엿들으며 가나/ 그게 무슨 내용인지/ 어느덧 눈目은/ 새파란 하늘을 깨뜨린/ 첫 별이다/ 저 구멍으로/ 내가 보고 싶은 얼굴들이나 줄줄이/ 찢고 나왔으면,/ 너무 빨리 들어차는/ 밀물이다//

깊은 밤 / 장석남
나는 지금/ 빈 백사장이 자꾸 눈에 보여/ 무슨 까닭인지 백사장이 자꾸만 눈에 보여// 바람이 불고 있다 웅성거리는 웅성임들/ 지붕이 바람을 업고 모래꿈을 꾸고// 처마에 매달린 풍경이 자기 육신을 치는 소리/ 풍경이 자기 육신을 쳐서/ 소리로라도 가려고 하는 곳/ 그곳을 나는 지금 보고 있다// 백사장 위로 下弦이 하나 우두커니/ 걸어가고 있다//

인연 / 장석남
어디서 봤더라/ 어디서 봤더라/ 오 그래,/ 네 젖은 눈 속 저 멀리/ 언덕도 넘어서/ 달빛들이/ 조심조심 下棺하듯 손아귀를 풀어/ 내려놓은/ 그 길가에서/ 오 그래,/ 거기에서// 파꽃이 피듯/ 파꽃이 피듯//

저녁강에서 / 장석남
나도 언젠가 물 위를 걸을 수 있으리라 생각하며/ 강 곁을 걷는 날들 많아/ 향기에 굳은 살 배기는 들꽃들 많아// 꽃의 향기여/ 얼마나 많은 살 벗어야/ 물 위를 걷는가// 길은 이미 물에 젖어 물 건너에 있는데/ 산그늘에 눌려도 나는/ 바람에 떠밀리기만 할 뿐/ 그뿐//

강(江) 1 ㅡ흘러감 / 장석남
어느 깨달음이 저보다 더 어여쁜 자세가 될 것이고/ 무엇이 저렇듯 오래 젊어서 더더욱 찬란할 것인고/ 강을 건너는 것이 어디 나뭇잎들이나/ 새들뿐이던가 봄이나 안개들뿐이던가/ 저 자세/ 저 --- 밑바닥에서 지금 무엇이 가라앉은 채 또한 강을 건너고 있는지/ 때로 강의 투명은 그것을 보여주려는 일/ 이 세상에 나온 가장 오랜 지혜를 보여주려는 일// 가장 낮은 자가 가장 깊이 삶을 건너는,/ 가장 가벼운 자가 가장 높이 이승을 건너는,// 어느 깨달음이 저보다 더 어여쁜 자세가 될 것인고//

독강*에서 / 장석남
덕적 독강 부두에서/ 우럭 회 썰어놓고 먹다/ 소주가 달다고 말하니 갑자기 옛 하루가 돋아나/ 하얗게 할아버지 한 분/ 돛 펴고 노저어 오시네/ 멀리 당진(唐津)이 이웃처럼 가까이 보이네// 지나가던 어린아이/ 노래음절 맞지 않네// 어깨 위의 듬성듬성 옷 기운 자국 보며/ 씀바귀처럼 웃네// 웃음 이내 식어 노을로 뻗어가네//
* 인천 덕적에 있음

쾌청 / 장석남
이 꽃은 신발을 닮았다/ 이 꽃은 발바닥을 닮았다/ 이 꽃은 입술을 닮았다/ 이 꽃은 사랑에 쓰린 가슴을 닮았다/ 모여서 어디를 가는가/ 만장일치/ 하늘로 갑니다/ 노래를 부르면서 딱따기를 치면서/ 하늘로 갑니다// 저 별은 눈물을 닮았다/ 저 별은 선한 이들의 감옥을 닮았다/ 저 별은 혁명을 닮았다/ 보이는 하늘 모두 텅 빈 가슴을 닮는다 그,/ 너비와 높이를 오무려서 어디로 가는가/ 거기로 갑니다/ 만장일치/ 사람 사는 땅으로 갑니다/ 무섭도록 서러운 노래도 좀 부르면서/ 멋도 좀 알려 주려/ 반짝이며 갑니다// 느티나무가 겨우내 애써 모은/ 창(窓)을 한꺼번에 일제히 내달고서/ 서 있네 그 창문들/ 하나도 빼놓지 않고 세어 볼 참인,/ 헛갈리면 처음부터/ 다시 세어 볼 참인/ 하루/ 푸른, 한/ 숨과/ 잎//

어지러운 발자취 ㅡ해변에서 / 장석남
이제 저 어지러운 발자취들을 거두자/ 거기에 가는 시선을 거두고/ 물가에 서 있던 마음도 거두자/ 나를 버린 날들 저 어지러운 발자취들을 거두어/ 멀리 바람의 길목에 이르자 처음부터/ 바람이 내 길이었으니/ 내 심장이 뛰는 것 또한 바람의 한/ 사소한 일이었으니//

이슬비 속으로 / 장석남
이슬비 속에 들어가/ 이슬비가 많은 곳으로 걷는다/ 머리카락이 다 젖을 즈음/ 수술등처럼 적막을 해부하는/ 불빛 하나를 지나친다/ 그 위에서 비를 미는/ 바람, 몸이 다 노래였던 바람은/ 제 몸을 이슬비로 열어/ 내 어깨를 감는다/ 노래가 젖으면 무엇이 되는가/ 울음의 뒤처럼 어깨가 꺼억꺼억 한다// 이슬비에 안겨 걷다보면/ 누군가 자꾸만 부른다/ 멈추고 삼키는 톱밥, 손가락, 꼬쟁이,/ 납물 같은// 이슬비가 되어가며/ 이슬비가 많은 곳으로 걷는다//

버스 정류장 옆 송월전파사 / 장석남
갑자기 한두 점씩 눈발이 날리기 시작해/ 버스 정류장 지붕 아래 들어가 잠시 접어둔/ 그리운 것 있나 생각할 동안/ 內傷한 세월들 엿보러, 불빛에 뛰어드는 눈송이들 보이네/ 32번 월미도행 버스 정류장의/ 한 찰나를 송월전파사의 검은 롯데 파이오니아 스피커,/ 전도사처럼 서서 아무 일 없다고 세월 밑 세월을 흘려 보내주네/ 저녁의가요산책 여기까지 나와 세월의 파고름 습자지처럼/ 머금네// 조금 더 농밀해진 눈송이들/ 그 앞에서만 노네/ 지금, 눈송이들/ 傷한 것 앞에서만 노네/ 송월전파사 유리 진열장의 여러불빛들이/ 그것들을 깜빡이며 보네/ - 곧 진창이 되리라// 버스 정류장 지붕 밑/ 그리운 것 있나 생각할 동안/ 傷한 세월만 먼 길을 오네//

마당에 배를 매다 / 장석남
마당에/ 녹음(綠陰) 가득한/ 배를 매다// 마당 밖으로 나가는 징검다리/ 끝에/ 몇 포기 저녁별/ 연필 깎는 소리처럼/ 떠서// 이 世上에 온 모든 생들/ 측은히 내려보는 그 노래를/ 마당가의 풀들과 나와는 지금/ 가슴 속에 쌓고 있는가// 밧줄 당겼다 놓았다 하는/ 영혼/ 혹은,/ 갈증// 배를 풀어/ 쏟아지는 푸른 눈발 속을 떠갈 날이/ 곧 오리라// 오, 사랑해야 하리/ 이 세상의 모든 뒷모습들/ 뒷모습들//

수묵(水墨) 정원 7 ㅡ우리는 늙으면 / 장석남
우리는 늙으면/ 저녁별을 주로 보게 될 것이다/ 우리는 늙으면/ 문턱에 앉아서 부는/ 바람도 느껴볼 것이다/ 우리는 늙으면 매일/ 저녁별 보는 것을/ 잊지 않을 것이다/ 보이지 않는 날도 잊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늙으면/ 늙음 끝까지 신작로를/ 바라보고 창문 아래에/ 앉아서/ 저녁별을 볼 것이다/ 그리고 먼지로 바뀌게 되는 것이다//

고양이풀에 물 주다 / 장석남
직장의 창가 화분 하나에 고양이풀이 돋아나서 겨울을 난다. 겨울에도 발그스레하게 물만 주면 깔깔댄다. 저년이! 하면 또 깔깔댄다. 물 준지 오래면 다 죽은 듯 풀어헤쳐져서 늘어지지만 물 주면 두어 시간이 가지 않아 다시 일어선다. 불굴의 애교다. 곁의 화분으로도 옮겨가는 것 본다. 받침 접시 넘치게 물 주어 걸레로 닦으며 많이 준 것 참 드물게 후회 없다.//

불멸 / 장석남
나는 긴 비문(碑文)을 쓰려 해, 읽으면/ 갈잎 소리 나는 말로 쓰려 해/ 사나운 눈보라가 읽느라 지쳐 비스듬하도록,/ 굶어 쓰러져 잠들도록,/ 긴 행장(行狀)을 남기려 해/ 사철 바람이 오가며 외울 거야/ 마침내는 전문을 모두 제 살에 옮겨 새기고 춤출 거야// 꽃으로 낯을 씻고 나와 나는 매해 봄내 비문을 읽을 거야/ 미나리를 먹고 나와 읽을 거야// 나는 가장 단단한 돌을 골라 나를 새기려 해/ 꽃 흔한 철을 골라 꽃을 문질러 새기려 해/ 이웃의 남는 웃음이나 빌려다가 펼쳐 새기려 해/ 나는 나를 그렇게 기릴 거야/ 그렇게라도 기릴 거야//

기차에서의 술 / 장석남
기차에서 마시는 술은 발밑에 구름을 만드는 일과 같아서 또 가슴께에 파도를 불러 모으는 것 같아서 나는 목적지로 가는 것이 아니고 이 차 또한 출발한 곳으로 돌아올 차가 아니고 그 모든 나선의 여정 속에서 술맛 좀 아는 사투리들과 첨작으로 치닫는 술은 차창에 어린 이국 외투의 어둠이나 못 알아들을 새벽, 발음 새는 가을 나무들, 그런 것들과 함께 하는 술은 참 커다랗기도 한 벼슬길의 술이어라//

꽃밭을 바라보는 일 / 장석남
저, 꽃밭에 스미는 바람으로/ 서걱이는 그늘로/ 편지글을 적었으면, 함부로 멀리 가는/ 사랑을 했으면, 그 바람으로/ 나는 레이스 달린 꿈도 꿀 수 있었으면,/ 꽃 속에 머무는 햇빛들로/ 가슴을 빚었으면 사랑의/ 밭은 처마를 이었으면/ 꽃의 향기랑은 몸을 섞으면서 그래 아직은/ 몸보단 영혼이 승한 나비였으면// 내가 내 숨을 가만히 느껴 들으며/ 꽃밭을 바라보고 있는 일은/ 몸에, 도망온 별 몇을/ 꼭 나처럼 가여워해 이내/ 숨겨주는 일 같네.//

비밀을 하나 말씀드리죠 / 장석남
밤새 벼락이 때리고 폭풍이 몰아치고 마치 어느, 역사와도 같이/ 밤을 다 부숴버리는 천둥이 쏟아지고 하였습니다./ 다 어디서 몰려온 불한당들처럼 그 시간의 손님들은/ 담을 지나 큰길가를 지나 씨앗처럼 작아져서는 사라졌습니다./ 그리하여 화창하니 밝아진 것 보자니 아무래도 나는 숨겨둔 비밀을 하나쯤 말씀드리고 싶죠./ 내게 애인이 생겼죠./ 손을 잡으면 손가락들이 하나씩 사라지고 마침내 그 자리가 그만 꽃송이가 되는 애인 말이죠./ 어깨를 감싸 안으면 하늘에선 하늘의 이삭들이 패죠./ 아무 때나 이런 비밀을 말하진 않죠./ 계곡을 뒤집던 흙탕물도 맑아져서 계곡을 다 싣고 계곡 위의 하늘까지를 싣고 내려가는 그런 태평한 날이어야 하죠./ 비밀을 하나 말씀드리죠./ 애인이 생겼다는 얘기죠./ 애인은 가끔 비밀을 빠져나와 새벽별이 되는 게 흠이죠./ 이미 아실 분들은 아셨겠지만 애인만도 아닌 애인이죠.//

방을 깨고 마주친 비참 / 장석남
날이 맑다/ 어떤 맑음은/ 비참을 낳는다// 나의 비참은/ 방을 깨놓고 그 참담을 바라보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광경이, 무엇인가에 비유되려 한다고 생각하는 순간 몰려온 것이다/ 너무 많은 얼굴과 너무 많은 청춘과 너무 많은 정치와 너무 많은 거리가 폭우처럼 쏟아져 들어오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밝게 밝게 나의 모습이, 속물근성이, 흙탕물이 맑은 골짜기를 쏟아져 나오듯// 그러고도/ 나의 비참은 또 다른 지하 방을 수리하기 위해 벽을 부수고 썩은 바닥을 깨쳐 들추고 터진 하수도와 막창처럼 드러난 보일러 비닐 엑셀 선의 광경과 유래를 알 수 없는 얼룩들과 악취들이 아니고/ 해머를 잠시 놓고 앉은 아득한 순간 찾아왔던 것이다/ 그 참담이 한꺼번에 고요히 낡은 깨달음의 화두(話頭)가 되려 한다는, 사랑도, 꿈도, 섹스도, 온갖 소문과 모함과 죽음, 저주까지도 너무 쉽게, 무엇보다 나의 거창한 무지(無知)까지도 너무 쉽게 깨달음이 되려 한다는 것이다 나의 비참은// 나의 두 다리는 아프고/ 어깨는 무너진다// 방바닥을 깨고 모든/ 견고(堅固)를 깨야 한다는 예술 수업의 이론이 이미 낡았다는/ 시간의 황홀을 맛보는/ 비참이 있었다// 아직도 먼 봄, 이미 아프다/ 나의 방은 그 봄을 닮았다/ 나의 비참은 그토록 황홀하다//

눈사람의 스러짐 / 장석남
나는 녹는다/ 먼 옛날의 말씀이 나를 녹인다/ 나를 만들던 손은 나를 떠난 즉시 나를 잊었을 것/ 나는 소리친다 소리친다/ 누구도 듣지 않으므로/ 발밑에서 질척인다 나의 외침은// 나의 스러짐/ 이것이 무엇입니까? 외침은/ 오래된 종소리와 같다/ 종소리의 멀어짐과 같고/ 종소리의 반복과 같다/ 소리가 되다 남은 종과 같이 침울하고 어두컴컴하다// 나의 외침이 마저 사라지기 전/ 나는 이렇게 더 뇌어본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자유입니까?/ 보일러가 으르렁대는 밤/ 나는 낯선 수로를 걸어갔다//

종일 손가락을 깨물다 / 장석남
앓다 나와/ 물끄러미 장미꽃을 바라본다/ 눈감은 사이 문득/ 낙타가 걸어온다// 눈뜨면/ 우리나라의 모든 국경이/ 모래바람으로 날아드는/ 철책 위 봄날/ 넘어가는/ 피투성이 낙타떼// 비단길을 바라보며/ 종일 손가락을 깨물었다//

중년 / 장석남
봉숭아는 분홍을 한 필/ 제 발등 둘레에 펼치었는데/ 마당은 지글거리며 끓는데/ 하산(下山)한 우리는 된 그늘을 두어 필씩 펼쳐놓고서/ 먹던 물 대접 뿌려서 마당귀 돌멩이들 웃겨놓고서/ 민둥산을 이루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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