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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느낌

고찬규 시인

by 부흐고비 2022. 7. 20.

고찬규 시인
1969년 전북 부안에서 태어났다.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동 대학원 수료.

1998년 《문학사상》으로 등단하였다.

시짐으로 『숲을 떠메고 간 새들의 푸른 어깨』, 『핑퐁핑퐁』가 있다.

제22회 시와시학상 젊은시인상 수상. ‘천몽’ 동인

 



만종(晩鐘) / 고찬규
구부린 등은 종이었다// 해질녘,/ 구겨진 빛을 펼치는/ 종소리를 듣는다, 한 가닥/ 햇빛이 소중해지는// 진펄밭 썰물 때면/ 파인 상처를 생각할 겨를도 없이/ 호밋날로 캐내는, 한 생애// 쪼그린 아낙의 등 뒤로/ 끄덕이며 끄덕이며 나귀처럼/ 고개 숙이는 햇살/ 어둠이 찾아오면, 소리 없이// 밀물에 잠기는 종소리//

날 / 고찬규
꿩, 꿩/ 아직 못다 본 일을 보겠다고/ 수꿩이 한 소리 할 때// 때 이르게 핀 콩꽃은/ 콩콩 소리도 없이/ 볼일 다 봤다고 져내리는// 오늘도/ 날은 날/ 꿩 울고 콩꽃 지는//

틈 / 고찬규
너나 나나/ 겨울 오는 것이나/ 봄 오는 것이나/ 다 그렇고 그런 것/ 그도 그럴 것이/ 틈이 없으면 틈을 만들며/ 틈이 생기면 틈을 메우며/ 다시 말하면/ 함박꽃이며 눈보라가 두 눈 가득하거나/ 새소리며 물소리며가/ 귀를 한가득 메우는 것이다//

섬 / 고찬규
섬을 섬이게 하는/ 바다와 바다를 바다이게 하는 섬은/ 서로를 서로이게 하는/ 어떤 말도 주고 받지 않고/ 천 년을 천년이라 생각지도 않고//

경마장의 얼룩말 / 고찬규
총성은/ 함성에 묻혔다/ 문이 열리고/ 말이 달린다/ 심장이/ 뛴다/ 말이 뛰고/ 말이 뛰자/ 심장은/ 더 빠르게/ 뛴다/ 앞만 보고/ 질주하는/ 말은/ 말을 만들며/ 말을 지우며/ 할 말 없게 말들며/ 말을 맞춘 자의 몫으로/ 환호를 먼저/ 배당하고/ 말은 사라진다/ 입 안에 맴도는/ 펄떡이며 살아있는/ 의미심장//

얼룩말 1 / 고찬규
그렇지 뛰는 거야/ 그 뜀으로 경계를 지우는 거야/ 저 푸른 초원을 뛰노는 얼룩말/ 어디까지 하얗고/ 어디까지 검은가/ 그 경계는 무엇으로 결정되는가/ 달리는 말은 경계가 없다/ 얼룩은 경계에서 생겨난/ 아슬아슬한 말이었다//

얼룩말 2 / 고찬규
검은 바탕에 흰 줄무늬인가/ 흰 바탕에 검은 줄무늬인가// 흑백논리를 위한/ 신의 한 수// 나의 배경은/ 나의 선택은// 당신을 향해/ 간신히 벼리어지는// 내 녹슨 언어//

거미줄 / 고찬규
그날 새벽, / 나를 잡고자 친 거미줄이 아니었겠으나/ 나는 거ㅣ줄에 걸렸다// 망가진 건 거미줄이었고/ 나도 거미도/ 지금껏 사과 한마디 없다//

백로 / 고찬규
밤새,/ 초승달과 풀잎은/ 날을 겨누고 있었다// 서늘하다// 풀벌레 울음 속에/ 한바탕/ 초승달이 쓸고 지나간/ 새벽 풀밭/ 쪼그리고/ 다촛점 렌즈 안경도 벗고/ 가까이 더 가까이/ 고개 숙여 다가가는 내게/ 흰 풀잎/ 이슬 털며 날을 세운다// 아무도 베이지 않았다//

마음의 등불 / 고찬규

반짝이는 눈도 없이 별을/ 노래하려느냐/ 무엇이 있어 어둠 꿰어/ 수놓겠느냐, 잠든 밤// 스스로를 밝히는 별빛도/ 스스로를 노래하던 풀벌레 소리도/ 이미 하나의 생을 위한/ 홀로의 몸짓이 아니었다/ 밤하늘 멀리 피워올리는 교신/ 살아 있음을 일깨우는, 영원한/ 귓가에 소근대는 복음 그리고/ 새벽종과 함께 스미는 눈물// 바람 부는 날에도 숨죽인/ 동굴은 있고/ 그 안에 등불을 밝히는/ 마디 굵은 거친 손이 있다//

모과 / 고찬규
이런저런 나무가 많은 최 영감 댁에는/ 꽃나무가 많지만/ 사과나무도 있고 감나무도 있고 석류나무도 있어/ 때가 되면 그럴 듯한 열매를 맺곤 한다// 가을도 끝 무렵/ 그 가운데 별 대접도 받지 못하는 모과나무가/ 못생긴 모과를 주렁주렁 매달고 있다/ 찢어지지 않는 게 마냥 신기할 따름/ 이건 숫제 버드나무처럼/ 가지마다 아래로/ 아래로/ 축축 처져 있다// 가을도 끝 무렵/ 저 죽는 줄 모르고/ 제 새끼 붙들고 있는 모과나무 아래/ 혼자 사는 최 영감은/ 몸 좀 놀렸다고 가쁜 숨 몰아쉬고// 철없이 놀다 가는 햇살만 반짝/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반짝이는/ 가을도 끝 무렵/ 제비는 날렵하게 떠났고/ 처마 밑엔/ 말라붙은 똥 몇 점//

탱자꽃 / 고찬규
―언젠가, 손가락 하나 들어갈 틈이 없던 탱자나무 울타리 속은 얼마나 넉넉한 품이었던가 상처입은 새들, 부드러운 털가슴에 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잠들 수 있던 얼마나 견고한 성(城)이었던가 그때 내 가슴엔 또 얼마나 많은 가시가 돋아 있었던가//
고통 속에서 피는 꽃이라고/ 딱히 말할 근거는 어디에도 없지만// 새떼들 날아오르는 텅 빈 오후// 어둠을 모아 두 눈을 찌르는/ 총총한 별처럼// 그렇게 어두운 귀퉁이/ 아픈 마음 한 구석// 무더기무더기 탱자꽃 피었네// 새떼들 날아오르는 텅 빈 오후엔/ 꽃그늘조차 그저 그늘이었네//

꽃복숭아 / 고찬규
아버지 정년 퇴임 후/ 앞마당 텃밭은 점점 줄어만 갔다/ 자꾸 넓어지는 꽃밭// 꽃도 먹을 수 있는 열매를 맺어야 꽃이라는/ 어머니 앞에/ 한 평생을 같이 한 아버지는/ 이제 슬슬 눈칫밥이다// 돼지우리 옆에 모과나무가 있고/ 그 옆으로는 꽃복숭아가 한창인데/ 손녀딸을 안고 할머니가 된 어머니/ 시어머니가 되어 벼락같이 한말씀하신다/ 꽃복숭아 파내고 감나무나 대추나무를 심어야겠다고// 때까치가 놀라 저녁놀이 비끼고/ 딸아이는 마냥 헤헤거리고/ 아내의 두 볼에는 발그레 복숭아가 열렸다//

은행나무가 있는 우물 / 고찬규
달밤, 고목 아래/ 평생을 같이한/ 긴 혀 늘어뜨린 개 한 마리와/ 늘어진 러닝셔츠를 입은 늙은이/ 은행잎은 한껏 가랑이를 벌려 부채가 되었다/ 허여멀건 달밤,/ 잎잎은 한낮에 박힌 햇살에/ 희푸르게 멍들어 있다/ 남정네 여인네 할 것 없이/ 몇을 삼키고도/ 퍼내도 퍼내도 고여 있는/ 눈물,/ 늙은이가 밤새 길어올린 것은/ 맨가슴에 뿌리박은 긴 한숨이었겠다//

주말농장 / 고찬규
참 용하기도 하지/ 씨앗만 뿌려 놓으면/ 어떻게 그렇게 닮은 것들이/ 목을 빼고 고개를 쳐드는지/ 시금치를 닮고 쑥갓을 닮고 옥수수를 닮은 것들로/ 주말에나 가는 주말농장은/ 주말이면 풀밭이 돼 있다// 땅에서 막 올라온 것들/ 그 구분이 마냥 쉬울 수만은 없는데/ 농장지기 '아먼 늙으먼 죽어야재 할매'는/ 참 재주도 좋다/ 나이 먹으니 아무것도 뵈는 게 없다더니/ 눈은 손끝으로 옮겨 간 게지/ 용케도 풀만 쏙쏙 뽑아내는데/ 입도 쉬지 않고 놀리는 것인데/ 끌끌 혀를 차며 젊은것들 어쩌고 하시는 데는/ 내 뿌리까지 뽑히는 것만 같았지// 봄바람이 네 뿌리를 보여 달라고 할 때/ 햇살은 혀를 내밀며 헤헤거리고/ 막걸리 한 사발과 나는/ 먼 산이나 바라보며 딴청이고//

북 디자이너 / 고찬규
페이지는 숨죽이고 있다/ 책 속에 길이 있다고 굳게 믿고 있는/ 그녀가 꿈꾸는 세상은 모니터 속에 있다/ 바깥소식이 궁금할 틈은 없다/ 복도 끝 걸터앉기 좋은 계단에도/ 그녀는 엉덩이를 허락한 적이 없다/ 하루에도 몇 번씩 그녀의 시선이 향하는/ 창밖에는 한 그루 나무가 있었지만/ 눈길은 햇살에 차단당한다/ 그녀의 입김이 닿지 않는 곳으로부터/ 봄은 오고 꽃잎은/ 내려앉을 곳을 찾지 못한다/ 오래 묵은 깊은 숨이/ 꽃잎과 날리는 찰나/ 누군가의 소식이 날아오고/ 모니터의 페이지를 따라/ 그녀의 꿈은 끊임없이 이어지고/ 창 밖에는 드레스를 입은 나무가 떠나가고 있다//

대조동 아라리 / 고찬규
변한다는 사실만이 변치 않는/ 계절의 끄트머리, 오늘도/ 부풀리는 만큼 남는다고 믿는 사내는/ 새벽부터 빵을 굽고 있다/ 어떤 말이 필요할까/ 어김없이 찾아드는 밤하늘엔/ 중심부에서 밀려난 별들이/ 근근이 살아가고 있다, 저마다/ 그만큼 빛을 더한 채//

금은방 / 고찬규
더 많은 주름을 거느린 담에 기댄 채/ 할머니는 꾸벅구벅 끄덕이며/ 청춘을 푸른 하늘처럼 펼쳐 놓는 중/ 햇빛은 이내 뒤따라온 햇빛에 말리면서/ 과거를 비쳐주지 못하고 바삐 사라진다./ 가지런히 돌고 돌았다. 골목 골목은/ 거대한 팽이가 되어/ 스스로 상처를 드러내는/ 계절은 채찍이었다. 변해야만 했다./ 담쟁이는 담의 일부/ 잎이 또 한번 피고 졌다./ 듬성듬성 낡은 시간이 덧칠해져 있다./ 저 시간 속에서 얼마나 많은 목숨이 절단되고/ 아기들은 울었던가./ 시장이 있고 두 대의 약국과 하나의 병원/ 많은 소리들이 숨쉬기 시작하면/ 할머니가 기댄 담벼락 맞은 편 금은방 앞에는/ 어떤 시계로도 돌려 놓을 수 없는 화려한 추억/ 주섬주섬 할머니가 볕에 말리고 있는 것은/ 꿈으로 갈고 닦은 보석인가./ 서로 다른 빛으로 반짝이는 각자의 둥지/ 금은방? 그렇지 금이 바로 방이지/ 시계가 시간을 따라 떨어져 나가고/ 금은 방이 된 시계방/ 시침에 찔려 언제나 봄인 뻐꾸기와/ 목과 목을 옭아매는 목걸이/ 주렁주렁 장신구며 보석이/ 저마다 제 몫을 반짝인다./ 햇빛은 할머니를 찔러 보지만 더 이상/ 청춘은 푸른 하늘처럼 펼쳐지지 않는다./ 할머니는 오늘도 금 간 담벼락에 기댄 채/ 낙타의 등허리 같은 길을 꾸불꾸불 가는 중//

봄날 / 고찬규
비 개고 황사 걷히고/ 유치원 가기 싫은 딸아이랑/ 출근을 하지 않아도 되는 사내가/ 모종삽과 조리를 나누어 들고 집을 나선다/ 뿌리 내릴 곳을 찾는 것인데/ 철없는 햇살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천지사방에 들까불며 부딪고 나뒹군다/ 두 사람은 동네 뒷산에 올라/ 바위틈에서 막 올라오는/ 연둣빛 소나무를/ 한참이나 지켜보는 것이었다/ 금새 철든 햇살이/ 사내의 등보다 넉넉하게 내리쬔다//

허공은 힘이 세다 / 고찬규
한 점,/ 점으로 박혀 있는 벌레에게/ 잎사귀는/ 완벽한 한 세상// 한 점,/ 점은 구멍이 되어/ 점점/ 잎사귀는 벌레 속으로/ 점점/ 벌레는 잎사귀 속으로// 속절없이 녹음 우거지는/ 한여름 한낮/ 벌레도 잎사귀도 간데없고/ 맴맴/ 허공만 맴맴//

사연 / 고찬규
다 아는/ 이미 오래 된 얘기/ 사마귀가/ 사마귀를/ 잡아먹는 것을 본 적이 있다/ 그 처음과 끝을/ 더 얘기해 무엇하리//

이유 / 고찬규
열매는 그다음 일/ 잎보다 꽃을 먼저 내보내기 위한 것이었으니/ 사과나무에게 겨울은 그런 것이었으니/ 참으로 갸륵하다/ 꽃이 피는 이유만으로// 꽃이 피는 이유만으로/ 내 눈이 내 귀가 새삼 심장박동 소리가/ 새롭다 내 몸이 내 맘이/ 꽃이 피는 이유만으로 삼라만상이/ 다 이유가 되고// 다 용서가 되니/ 울다 울다 울다 지쳐 울던 새들도/ 갈 것이라 왔다 봄도 사랑도/ 봄이 오는데 새삼 무슨 이유인가/ 가려고 온다 봄은/ 눈물 채 멈추기 전에//

붉은 시장 / 고찬규
1// 횡단보도가 있었지만 좀처럼 신호는 바뀌지 않았다 사람, 사람들 속에서 출근길 가장의 발걸음보다 더 바쁘게 깜박거리는 신호를 기다린다 새로운, 어느 누구의 음모도 욕망도 아닌//
2// 노파가 있고, 서너 개의 함지박엔 기미 같은 곡물 그녀의 입은 기울인 됫박이 되어 좁쌀 같은 혼잣말과 뉘처럼 거친 말들을 쏟아 놓는다 때때로, 마침표처럼 박힌 검정콩을 쪼던 비둘기들이 둥근 하늘에 점점이 말줄임표를 새겨넣었다 가슴속, 시퍼런 멍을 간직한 채 둘러앉아 뚝, 뚝 배추를 다듬는 손들은 꼭 자신의 손등을 닮은 잎만을 밤새 수북이 쌓아 놓곤 한다 어떤 귀퉁이는 소란스럽고 목소리가 큰 사람은 의기양양했지만 스스로는 알고 있다 돌아서면 이긴 것도 얻은 것도 없는 결국 바겐세일의 생을//
3// 자(尺)와 저울과 붉은 알전구 아래의 꼼지락거림 이 모든 것 절실함이었을 뿐 누구도 삶이나 희망 혹은 구원의 노래에 대해서는 애써 말하지 않았다 석고 같은 살덩어리들 정육점 아저씨의 두 볼만큼이나 덤덤한 시장의 밤, 낮은 해가 뜨거나 불이 켜지는 것으로 더욱 구별되지 않았다 유리상자 속엔 곱게 바수어진 꿈이 가득 진열돼 있다 쉽게 지나치는 거리는 여전히 아우성의 질서 속에 가랑이를 당당히 벌리고 있다, 검붉은//

찬란한 가면 / 고찬규
금방이라도 울음을 쏟을 것 같은 얼굴들/ 간유리는 새파랗게 열고 있다/ 조그만 히터 위에/ 형편없이 말라 버린 장미가 던져져 있다/ 장밋빛 민생이란 네온사인에 빛나는 고통일 뿐/ 가진 자에게 가시란 오히려 신선한 자극이었다/ 허공을 할퀴는 고양이의 앙탈처럼, 앙증맞게/ 도시의 사막을 뒹군다 찢겨진 채로/ 벌레조차도 떨어진 낙엽은 거들떠보지 않았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기억들은/ 더욱 선명하다/ 세월의 골 깊은 주름을 따라 이 시간/ 천천히 산책을 나가는 사람도 있으리라/ 히죽이 웃으며 입을 벌릴 때/ 이빨 사이를 빠져나간 침묵/ 먼지와 몸을 섞다 누런 잎에 포개어진다. 오로지 빛 안에서/ 당장이라도 봉오리를 터뜨릴 것처럼 조화가/ 배부른 화병에 꽂혀 침묵을 떨구고 있다//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장담할 수 없는 희망에 대하며/ 이제는 거두고 싶은 말들에 대하여/ 나에게도 뜨거웠던 순간이 있었던가/ 나는 흘러가는가/ 눈물처럼/ 투명한 출입문/ 오르거나 내려서는 계단을 통과하면/ 신호등은 기다렸다는 듯 깜빡이며 발걸음을 재촉하고/ 박자에 맞춰 중얼거리던 말들은 보도블록 위에 랩이 되어/ 낙엽과 함께 밟힌다/ 어디론가 떠나려 해도/ 나를 자유롭게 하던 혼자라는 것이 나를 붙든다// 어디로 가는가/ 회색의 조화 속에 종종거리며// 늦가을 밤 풍경이 되어 가는/ 내 얼굴도 뒷모습도 어느덧 도시적/ 무너지는 것들이 전부는 아닐 거라는/ 불안한 확신과 가식/ 주저리주저리 가증스럽다고 느낄지라도/ 거침없이 주저앉지 않는다/ 아무렇지도 않은 듯 돌아보는/ 도시, 그 찬란한 가면//

단장(丹粧) / 고찬규
아무도 견디려 하지 않던 가지 끝에서 당신은 자라고 있었다 내 어느 한 구석도 비워 놓지 않았는데 골짝의 눈은 녹아 눈물 한 방울 보태주지 않은 강 흐른다 어느덧, 머뭇거리는 자는 갈 데까지 가지 못하고 갈 곳 없어 하는 마음만 남아 낮달로 떴다 지난날 수도 없이 눈을 맞추던 별이 나만의 별이 아니었음을 어설프게 깨달아 가면서 물오르는 가지 끝 푸르게 맺힌 멍울을 본다// 해묵은 것들을 모아 모닥불을 피운다 비가 내리지 않아도 젖은 눈 가지 끝에 자라 나는 겨울눈을 본다 혈관을 따라 도는 피톨들 가지런히 도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었다 분수처럼 내 안의 피도 솟구치고 싶은 것이라며 또륵또륵 목련 끝 눈망울이 토악질을 한다 나비처럼 절뚝이며 다가오는 계절의 희망 세상의 채워지지 않는 빈 속을 들여다본다 밤이 짧아지면 오는 것이 꼭 봄은 아니었다 벌레처럼 달아나는 재울 수 없는 마음 느릿느릿 녹슨 수도꼭지에 붉은 입맞춤을 전한다 늦기 전에 밤늦도록 화장을 한다//

길 안의 둥지 / 고찬규
저마다 사연 있는 놈들이 모여/ 꽃과 향기와 거시기를 굴뚝도 없이/ 노을 혹은 거짓말처럼 피워올리는/ 겨울 천변 공사판/ 드럼통에 갇혀 몸부림치는/ 그을음과 언뜻언뜻 하늘로 차오르는/ 초저녁 불꽃을 보다보면/ 이곳까지 와 닿은 발길과/ 짝 맞지 않는 목장갑, 간혹/ 구색에 맞춰 뒤로 돌아선 엉덩짝이/ 다 내 것이요 네 것이다/ 이럴 때면 흔해빠진 골목길/ 그 따뜻한 불빛을 생각한다/ 타오르며 사그라지는 것들의 고단함/ 가까이 다가가면 꺾어져 이어지는/ 골목과 동그란 아랫목/ 이를테면 애호박 하나 달고 저물어가는/ 노오란 호박꽃의 한 생을/ 떠올리는 것이다 모처럼/ 겨울 앞에 서 있는 겁 없음이/ 하루를 살아 온 자의/ 귀갓길 안에 놓여 있는 것이다//

오월의 신부 / 고찬규
사랑을 알 나이가/ 그런 때가 따로 있기는 있는 것인가// 꽃 분분한 날/ 볕들도 쌍쌍이었고/ 이유 없이도/ 눈물 날 것만 같은 날// 성호를 그으며/ 신부님 단상에 오르고/ 사회 보는 신랑 친구는/ 신랑 입장에 이어 신부 입장!/ 신부 입장을 연신 외치는데// 어쩌자는 건지/ 신부는/ 신랑도 하객도 아랑곳없이/ 당최 어쩌자는 건지/ 고목나무 아래서// 아버지를 껴안은 채/ 꽃비 맞으며/ 꽃비 맞으며/ 신부 입장 외치거나 말거나/ 신부 화장 지워지거나 말거나// 과월호 같은 한 쌍의 연인으로 /뺨마다 단풍 드는/ 꽃 분분한 날/ 웃거나 울거나/ 누구라도 웃거나 울거나//

기적 / 고찬규
한 편의 시를 쓰는 것/ 한 사람의 독자가 읽어 주는 것/ 한 사람을 알게 되는 것도 그렇지만/ 서로 사랑하게 되는 것/ 바닷물이 소금이 되듯 당연한 것이/ 이 당연한 것들이 누군가에겐 기적// 아군의 함성 적들의 고함 소리가/ 하나의 합창이 되고/ 포탄이 폭죽이 된다면/ 폭죽이 저마다의 가슴을 수놓을 때/ 먼 여행을 떠난 민들레 홀씨가/ 밤하늘에 별로 뜬다면/ 박수 소리와 함께/ 마침내 인류에게 평화가 온다면 그렇다면/ 기적, 그야말로 기적 같은 기적// 햇살 좋고 바람 넉넉한 날/ 바람 타는 나뭇잎이 배를 뒤집어 보이며/ 하릴없이 반짝일 때/ 반짝임을 아무렇지 않게 바라보다/ 문득 마주한 눈에서 눈부처가 돼 있는/ 나를 발견한다면/ 네 안에서 나를/ 잊고 있던 나를 찾는다면/ 이 또한 기적적으로 기적//

핑퐁어학원 어느 시인의 혼잣말 ㅡ그리하여 미소는, 어디로 가시려는가* / 고찬규
무릇 시인이라면/ 예쁜 연애시 한 편쯤은 가져야/ 제대로 된 시인인 게지/ 넝마 걸친 시인의 평소 지론이자 시시한 시론인데/ 입이 바쁘고 말로만 시를 쓰니/ 변변한 시 한 편 갖지 못했음이 자명하다/ 불혹의 나이에/ 새삼스레 말(言)을 다시 배워 보겠다고 등록한/ 핑퐁어학원에 첫 등원하는 날/ 휘둥그레진 두 눈으로 주춤주춤하는데/ 먼저 눈인사를 건네는 아낙이 있는 것이다/ 오, 삐까번쩍!/ 넝마주이 시인은/ 첫눈에, 딱!/ 눈웃음이 하도 예뻐서/ 핑퐁핑퐁 눈길이 오가다 보면/ 시한 편 얻을 것만 같았지/ 비로소 제대로 시인이 될 것 같았지/ 하!/ 시 쓰기는 콩깍지 씌우기/ 시 쓰기는 콩깍지 벗기기를/ 하루 이틀 사흘/ 하하!/ 작심삼일 언감생심/ 이내 깨달음이라니/ 남루하고 누추하여라/ 어느 세월에 말은 배워 시를 쓰시나 /예술은 눈웃음이 예술이라며/ 진흙 속에 뒹구는 심사/ 언제쯤 연꽃 한 송이 밀어 올릴까나/ 그럴듯한 연애시 한 편쯤은 가져야 시인인 게지/ 그렇지, 무릇 시인이라면//
* 장석남 시형에게 빌려 쓰다.

고장난 사내 / 고찬규
두 개의 창살이 만드는/ 석 장의 볕이 유일한 낙이었다/ 마무도 찾지 않는 빈 그네처럼/ 삐걱삐걱/ 드물게 움직이는 사내// 사내를 따라/ 먼지는 하루살이처럼 몰려다니며/ 더 많은 먼지들을 낳고, 낳고, 낳고/ 죽어라고 낳고 있거나/ 앞다퉈 볕에 타 죽는다// 환등기처럼 깜박이는 두 눈으로/ 간혹,/ 강물이 출렁이고/ 한가로이 풀을 뜯는 염소와/ 나비를 쫓는 아이// 사내는 해바라기였다/ 가부좌를 튼 채/ 얼굴 가득 검버섯을 박아 넣고/ 돌고 돌았다 점차/ 눈동자가 한 몸을 대신하게 됐다// 어디선가 백목련 지는 소리//

죽순 / 고찬규
묘지 옆/ 불쑥불쑥 솟아오른/ 죽순들/ 저마다의 사연이야 내사 모르지만/ 단 하나 분명한 것/ 그들에게 단단해져야 할 이유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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