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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느낌

배영옥 시인

부흐고비 2022. 7. 21. 08:00

배영옥 시인
1966년 대구 출생. 계명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학과 석사과정 졸업.

1999년 《매일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으로 『뭇별이 총총』, 『백날을 함께 살고 일생이 갔다』가 있음. '천몽' 동인. 2011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해외창작거점 예술가파견사업>에 선정, 2011.11월~2012.7월까지 쿠바 체류. 2018. 6월 지병으로 타계.

 

 

 


누군가 나를 읽고 있다 / 배영옥
움직임이 정지된 복사기 속을 들여다본다/ 사각형의 투명한 내부는 저마다의/ 어둠을 껴안고 단단히 굳어 있다/ 숙면에 든 저 어둠을 깨우려면 먼저 전원 플러그를/ 연결하고 감전되어 흐르는 열기를 기다려야 한다/ 예열되는 시간의 만만찮음을 견딜 수 있어야 한다/ 불덩이처럼 내 온몸이 달아오를 때/ 가벼운 손가락의 터치에 몸을 맡기면/ 가로세로 빛살무늬, 스스로 환하게 빛을 발한다/ 복사기에서 새어 나온 불빛이 내 얼굴을 핥고 지나가고/ 시린 가슴을 훑고 뜨겁게 아랫도리를 스치면/ 똑같은 내용의 내가 쏟아져 나온다/ 숨겨져 있던 생각들이, 내 삶의 그림자가 가볍게 가볍게/ 프린트되고, 내 몸무게가, 내 발자국들이/ 납작하고 뚜렷하게 복사기 속에서 빠져나온다/ 수십 장으로 복제된 내 꿈과 상처의 빛깔들이/ 말라버린 사루비아처럼 바스락거린다/ 살아서 꿈틀거리는 어떤 삶도 다시 재생할 수 있으리/ 깊고 환한 상처의 복사기 앞을 지나치면/ 누군가 나를 읽고 있는 소리,//
* 1999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당선작

적막이라는 상처 / 배영옥
적막은/ 꿈꾸는 자의 이름과 동일하다// 다만 들을 귀와 마음이 없을 뿐// 새벽 세시의 단면을 잘라보면/ 시간의 단층 사이/ 살아 움직이는 소리의 화석을 보게 될 것이다// 적막이라는 붉은 상처를 본다// 풀벌레의 시간을 지나/ 새의 시간을 지나/ 매미의 시간을 지나// 적막은 결코 텅 비어 있지 않고/ 적막은 결코 눈멀어 있지 않고// 적막은 귀 막은 몸을 향해 발언하는/ 빈틈없는 소리들이다//

수화 / 배영옥
손끝에서 피어나는 저 꽃의 말들을/ 좀처럼 읽을 수 없다// 허공에 뱉은 말들/ 팔랑팔랑/ 운명을 거부하는 말의 꽃들// 입 밖으로 나오는 순간/ 금방 사라지고 말 꽃의 날개들// 말을 다 뱉어내고도/ 꽃섬 가득/ 흩날리는 꽃잎들// 손끝에서 사라지는 그리움의 말들//

언제나 지척에 있다 / 배영옥
자작나무 가로수들 사이에/ 빈 공간이 생겼다/ 며칠 전 책 읽어주던 단풍나무도 없어지고/ 민둥치만 남았다/ 단풍나무 그늘도 함께 사라졌다// 자작나무 잎들이 하얗게 들떠 있다/ 바람이 슬쩍 건들자/ 몇 안 남은 이파리들/ 있는 힘을 다해 흔들어댄다// 눈여겨보면 곧 죽어 없어질 것들..../ 죽음은 언제나 지척에 있다//

수치(羞恥) / 배영옥
그것은 전속력으로 한 생을 덮어버린다// 예고 없이 불쑥 솟아나/ 떨어지지 않는다/ 마음에 달라붙어/ 수시로 나를 곁눈질한다// 내가 나에게서 발견한/ 내가 나에게서 멀어지게 한// 전생과 내생을 돌고 돌아/ 이제야 눈에 보이는 것// 나날이 어두워지는 내일처럼// 약 먹을 때도/ 왼손으로 밥 먹을 때도/ 정리되지 않는 시구(詩句) 속을 헤맬 때도/ 내 곁을 떠나지 않는 그/ 깊고/ 검은 빛을/ 어찌 외면할 수 있겠어// 수치(羞恥)는 이제 나의 힘/ 그것마저/ 사랑해야겠어//

주름 / 배영옥
주름들은 한 몸에 모여 산다/ 한번 자리 잡은 주름들은 잘 떠나지 않는다// 내 몸도 수많은 주름으로 이루어져 있는 게 아닐까/ 몸 안에서 몸 바깥으로/ 울음을 밀어내고 밀어내다 멈춘 그 자리/ 바로 주름의 자리// 중심에서 밀려난 것이 아니라/ 있는 힘을 다해 스스로를 밀어내는 것/ 자신을 비워가는 것// 아직도 비워야 할 것이 남아 있다는 듯/ 안간힘을 다해/ 주름을 넓혀가는 몸// 지금은, 다만, 극단으로 깊은/ 주름과 골 사이/ 온몸이 헐거워지고 있는//

청둥오리가 있는 연못 / 배영옥
잊었다, 끝이다 단언하지만/ 저토록 긴 꼬리를 끌며/ 따라오는 파문이 있다// 뒤돌아보면 이미/ 물결 사이로 숨어버리는……// 못은,/ 물이랑을 파고드는 흔들림을 알아보고/ 제 속에 울음을 새기고 있다는 것을/ 그래서 못은 점점 더 고요해지고/ 깊어진다는 것을// 어느 여름 심한 가뭄에/ 못이,/ 바닥을 드러낼 때/ 마침내 보이지 않던 흔적들이 제모습을 드러낼/ 바로 그곳,/ 청둥오리가 떠나버린 연못//


만월 / 배영옥
어머니는/ 먼 남쪽으로 밥 지으러 가서/ 끝내 돌아오지 못했다// 식은 아랫목은 다신 데워지지 않았다// 식구들끼리 달라붙어/ 서로 몸 뒤채며/ 체온을 나눠 가지다가 문득,// 달그락달그락 그릇 씻는 소리에/ 문 열고/ 마당 내다보니// 차고 맑은 우물 속/ 어린 동생에게 밥 한술 떠먹이고 싶은/ 고봉밥그릇이 떠 있었다//

연꽃 / 배영옥
천 년 동안 중천을 떠돌던 엄마가/ 속이 텅 빈 골다공증 엄마가/ 백랍(白蠟) 같은 엄마가/ 아무리 손을 뻗어도 잡히지 않던 엄마가/ 연꽃 속에서/ 소복단장을 벗고 있다//

수레국화 / 배영옥
돌아가신 엄마의 수레꽃밭을 시멘트로 봉해버리고/ 아버지는 하릴없이,/ 대청마루에 앉아 있는 날들이 늘어만 가신다// 끊었던 담배를 다시 피우신다//

모란 / 배영옥
모란은 누구의 상실이기에/ 저리 붉은가// 모란의 세계에 든 사람 누구도/ 상처를 말하지 않는다// 우울한 얼굴과/ 슬픈 눈매// 모란에 가면/ 모란은 없고// 모란모란 만개한 눈동자들이 피워올리는/ 뜨거운 눈물만 있다// 소리는 없고/ 눈매만 깊은// 저 충혈된 헛꽃들!//

자두나무의 사색 / 배영옥
갈망(渴望)에 대해 생각하느니/ 갈(渴)과 망(望)에 따르는 마음의 움직임에 대하여/ 순수하고도 티끌 하나 없는,/ 번져오고 번져가는/ 이 목마른 잎사귀에 대하여/ 무성한 손아귀로 숨통을 조여오는 칡넝쿨의 간절함은/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 자두나무는 생각한다/ 허공을 뜨겁게 달구는 저 촉수의 끝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칡넝쿨에 온몸 내어준 채/ 자두나무의 사색이 붉다/ 누렇게 말라버린 잎사귀는 누구의 갈증인가/ 뿌리로부터 멀어질수록/ 더욱더 위험한 짐승이 되는/ 갈망/ 다시 생각하느니/ 마른 잎사귀에도 그늘은 지고/ 그늘은 결코 마르지 않느니/ 칡넝쿨의 결박이 견고해질수록/ 불타오르는 나의 갈망, 갈증 아니 너에 대하여//

포도나무만 모르는 세계 / 배영옥
찌그러진 주전자를 옆에 두고 한 아이가 웅크려 울고 있다/ 반나절이 다 익어가도록 흐느끼고 있다// 비행기가 머리 위로 낮게 스쳐간다/ 발등을 타고 오르는 개미를 손가락으로 눌러 죽이다가/ 젖은 눈물자국이 말라가는 한낮의 아이// 오랫동안 내 속에서 죽은 아이/ 지금도 포도나무를 보면 되살아나서/ 자전거 바퀴를 한 발로 돌리며 집으로 돌아가는 아이// 태양 아래 포도나무 잎사귀만/ 무성하게 푸르고// 포도만 알알이 보랏빛으로 물들어가고 있다//

아, 하고 입 벌리고 다무는 사이 / 배영옥
목련나무 가지 끝/ 주먹 꼭 쥔 꽃봉오리와 꽃봉오리 사이/ 흰나비 한 마리/ 횡으로 종으로 떠다니고 있네// 낮게 또는 높게/ 제 날갯짓의 간곡한 사연을 들으라는 건지/ 들어서 대체 어떻게 하라는 건지// 팔랑과 팔랑 사이/ 천근만근 날개가 펼쳐 보이는 묵직한 숨결을/ 목련이 받아 안고 있네// 아, 하고 입 벌리고 다무는 사이// 나비는 저 홀로 피고/ 목련은 저 홀로 지네//

담쟁이 ㅡ아버지 / 배영옥
당신의 빛나는 손바닥을 가진 적이 있지. 당신 손바닥 위에서 나는 검불처럼 잠들기도 했지. 당신을 열면 당신이 사라질까봐 나는 매일 뒷골목을 맴돌았지. 당신 손바닥에 있을 때만 나는 어린아이였지. 여전히 어린아이고 싶었지. 당신 손바닥에 달린 천 개의 창으로 나는 세상을 보았지. 당신 손바닥이 보여주는 뒷골목의 사람들은 아름다웠지. 당신을 열면 당신이 사라질까봐 나는 매일 붉은 벽에 서서 바람을 마셨지. 지독한 행복이었지. 당신 손바닥에 아로새겨진 그 빛나는 상처를 품고 나는 어른이 됐지. 어린아이고 싶은 어른이었지. 혼자서도 손바닥을 뒤집을 수 있는 어른이었지만, 나는 결코 손바닥을 뒤집을 수 없었지. 행여 당신 손바닥이 쏟아질까봐, 당신을 열면 당신이 사라질까봐 나는 주먹을 움켜쥐고 살았지. 그리운 기척 같은 버릇이었지.//

유산 / 배영옥
귀 어두운 아버지/ 아무리 크게 말해도 내 입만 골똘하게 쳐다보시더니/ 귀 닫고 눈으로만 대화하시더니/ 입마저 어두워지셨다// 귀의 어둠이 눈에 엉겨 붙어 눈이 더 어두워지셨다/ 눈의 어둠이 귀에 엉겨 붙어 귀가 더 어두워지셨다// 말이 자꾸 헛나가신다/ 입이 자꾸 미끄러지신다// 시인에겐…… 만년필이…… 입이다/ 입…… 간수…… 잘해야 한다!// 눈 귀 밝을 땐 아무 내색 없으시더니/ 눈 귀 입 어두워지고서야/ 겨우 한 말씀 하신다//

야유회 / 배영옥
아침 일찍 시골 엄마들이 벚꽃구경 간다/ 새로 한 파마머리에/ 빨간 잠바 꽃무늬 스카프 두르고/ 한껏 멋을 부린 엄마들이 관광버스 타고 나들이 간다// 뽕짝 소리에 맞춰 시동 걸어놓고/ 마을 앞에서 엄마들을 기다리는 관광버스// 엄마들을 몽땅 태우고/ 어디 멀리 다른 나라로 이사 가버리지나 않을까/ 이러다 영영 버스를 놓쳐버리는 거나 아닐까// 엄마가 그리운 아이들/ 엄마가 불안한 아이들/ 올망졸망 눈 부릅뜬 아이들// 언제 돌아올까 돌아오긴 할까/ 언니 동생 손잡고/ 눈이 빠져라 울먹이는 마을 앞 신작로// 전세 낸 봄바람이/ 엄마들을 데리고 사라지는 아침//

시넨시스 화석 / 배영옥
손바닥만 한 돌 속에 꽃이 된 그대가 보인다// 돌 속으로 걸어 들어가/ 스스로 집이 되어 갇혀버린/ 시넨시스* 한 송이// 딱 1억 년만 거슬러 올라가면/ 그대를 만날 수 있을까// 돌 속에 갇혀서도/ 돌 밖으로 희미한 손을 내미는 시넨시스// 꿀벌들은 벌벌떼떼 울어대고/ 꽃샘바람은 귓불을 할퀴고 지나간다// 자궁 속 씨방을 열면/ 그대를 담아올 수 있을까// 지구의 흉터인 시넨시스 화석(花石)을 본다/ 겨드랑이 상처가 화끈거린다//
* sinensis, 1억 2,500만 년 전에 살았던 개화식물.

고장 난 풍금 / 배영옥
대체 어떤 소리들이 빠져나갔기에/ 저렇게 기울어 있는 걸까// 고장 난 풍금의 건반을 건드리자/ 아직 못다 뱉은 소리라도 있는 것처럼/ 저음의 목쉰 소리가 내려 깔린다// 희고 검은 건반들은 한번 정한 자리에서/ 비뚜름히 기울어 있을 뿐/ 너무 오래 소리를 불러내/ 낡아버린 흔적들이 차곡차곡 남아 있을 뿐// 건반 따라 이어진 여러 가닥 줄들,/ 한 몸처럼 움직이다가도/ 어떤 때는 아예 꿈쩍도 안 한다// 보이지 않는 피아노 줄처럼/ 나도 어딘가에 연결되어 있는 게 아닐까/ 혹시 건반을 누르는 누군가의 손끝에 따라 울고 웃는/ 꼭두각시 인형이 아닐까// 그래서 내 웃음 속에는/ 고장 난 풍금 소리처럼/ 울음소리가 섞여 있는 것인가//

사람꽃 / 배영옥
암 병동 외래센터에/ 보라 꽃, 흰 꽃, 분홍 꽃이 활짝 피었다/ 얼굴이 얼굴을 감싸고/ 두건 꽃이 피었다// 먼 산이 저물어갈 때/ 홀로 빈 산을 지키는 감국처럼/ 한 사람에 딱 한 송이씩/ 떼어내야 할 꽃잎들, 주름들을/ 헛웃음 속에 감춘/ 저 사람꽃들을 보아라// 자분자분 허공을 떠다니는 헛꽃들/ 흔들리는 중심을 감싸 안으며/ 만개한 햇빛 속으로/ 웃음꽃을 피워 올리고 있다// 향기 없는 꽃이/ 천리를 가듯// 꽃 지고 꽃 피는/ 저 사람꽃들의 천국으로/ 한 발 더 가까이/ 새들이 난다//

너라는 꽃을 지우기 위해 / 배영옥
언젠가 목구멍 저 깊은 곳에 숨어 있는 성대를/ 내시경 화면으로 본 적이 있다/ 어두컴컴한 목구멍 안쪽에서 소리가 되어 나오려고/ 파르르 떨고 있는 성대는/ 아주 작고 연약한 꽃잎이었다// 내 손으로/ 눈 닫아걸고 귀 닫아걸고 입 닫아걸고 십 년이 지났지만/ 너는 아직 내 안에 있었다/ 질문 없는 대답처럼/ 너는 꽃이 되어 있었다// 너라는 꽃을 지우기 위해/ 나는 얼마나 긴 침묵과 싸워야 했던가/ 스스로 씹어 삼킨 가시는/ 또 얼마나 깊이 폐부를 찔러댔던가// 고통의 축제*는 끝이 없고/ 나는 얼마나 더 붉은 입술을 깨물어야 하는지/ 또 얼마나 오래 숨죽여야 하는지// 목구멍에 핀 저 꽃에게 묻는다//
* 정현종의 『고통의 祝祭』에서 따옴.

그녀의 사생활 / 배영옥
그녀의 노후에 대해 쓴다./ 그녀의, 그녀의 트라우마에 대해 쓴다./ 그녀의 맛깔난 육두문자에 대해서 쓴다.// 새벽이 올 때까지 마당은 평화롭고/ 동그랗고 매끄러운 자갈들이/ 세상 밖 꿈속으로 퇴출 될 때까지/ 그녀는 평생 마당을 벗어나지 못한다고 쓴다./ 성지순례 하듯 마당을 들락거린다고 쓴다./ 생활과 동격인 고귀함을 일찌감치 깨달았다고 쓴다./ 그러나 사생활은 사생활일 뿐이라고 쓴다./ 밤이면 되살아나는 새파란 냉잇국 같은 그녀라고 쓴다.// 밥도 되고 교통비도 되고 아이스크림도 되는/ 핸드백도 되고 하이힐도 되고 립스틱도 되는/ 자갈 자갈들.// 강가의 자갈을 볼 때마다/ 입안에 혓바늘이 돋는다고 쓴다./ 밤마다 자갈자갈 끓어오르는 개구리울음처럼/ 견딜 수 없는, 그러나 견뎌야 하는/ 혓바늘 같은 그녀라고 쓴다.//

여분의 사랑 / 배영옥
나의 미소가/ 한 사람에게 고통을 안겨준다는 걸 알고 난 후/ 나의 여생이 바뀌었다/ 백날을 함께 살고/ 백날의 고통을 함께 나누며/ 가슴속에 품고 있던 공기마저 온기를 잃었다/ 초점 잃은 눈동자로/ 내 몸은 각기 다른 방향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우리의 세상을 펼쳐보기도 전에/ 아뿔싸,/ 나는 벌써 죄인이었구나/ 한 사람에 남겨줄 건 상처뿐인데/ 어쩌랴/ 한사코 막무가내인 저 사람을……// 백날을 함께 살고/ 일생이 갔다//

여운에 기대다 / 배영옥
자작나무 위에 앉아 있던 새 한 마리/ 이리저리 옮겨 다니다/ 금세 날아가버린다// 바람 한 올 없는 가지 끝 남겨진 이파리들/ 저들끼리 몸을 비비고 있다// 누군가 떠난 흔적과/ 누군가를 떠나보낸 여운이/ 자작나무 밑동까지 뒤흔들고 있다// 저 혼자 말라가는 이파리 그림자들/ 저 혼자 흔들리는 그림자 이파리들// 누가 자꾸 마른 등을 떠미는가// 공중 낭떠러지 위/ 백지장 이파리들만/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다//

나의 뒤란 / 배영옥
숨겨둔 얼굴을 찾아 뒤란에 들었네 바람이 불 때마다 손바닥을 뒤집으며 잡초들이 머리칼을 쥐어뜯으며 흔들렸네 고통의시간을 다시 되돌리고 싶었네 매일매일 억눌린 얼굴들을 감추며 뒤란은 깊고 더 어두워졌네 뒤란이 하는 일이란 할 일 없이 그늘을 늘리는 일, 돌 틈 아래 쉼 없이 잡초를 밀어 올리는 일, 그늘보다 더 짙은 어둠을 끌어당겨 어제보다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숨어드는 일, 이끼보다 새파랗게 바닥으로 젖어드는 너와 나의 얼굴들 이제 너와 나는 밀생한 이끼의 혜택을 함께 누릴 자격이 없네 뒤란의 그늘 속에서 수많은 접촉사고가 있었네 그늘의 결계가 풀리길 기다리는 사이 우리는 영원히 초면이었네//

자화상 ㅡ겨울 연못 / 배영옥
풍향계 같은 발자국만 남겨놓고/ 새들은 다 어디로 갔나/ 얼음 위에 찍힌 풍향계가/ 저 멀리 북국(北國)을 향해 치닫는 동안/ 나는 무엇을 했나// 누군가 던진 돌멩이가/ 얼음에 박혀 있는 겨울 연못/ 돌멩이가 반만 박혀 있다고/ 물고기가 반만 놀라는 것도 아닌데// 물속을 들쑤셔서라도 고통을 확인하고 싶어/ 맨발로 어두운 바닥을 헤매고 싶어// 풍향계가 반만 돈다고/ 북국이 가까워지는 것도 아닌데/ 새들은 왜 발자국을 남겨놓고 갔을까/ 나는 무엇을 남겨야 하나// 누군가 나를 향해 던진 돌멩이만/ 바닥으로 가라앉는/ 겨울 연못// 이 악물고, 더 깊이 바닥으로 파고드는/ 돌멩이들//

행복한 하루 / 배영옥
단풍나무에 기대앉아/ 백설기 먹고 물 마시고 토마토 몇 조각 먹는 사이// 기껏/ 거미 두 마리/ 큰 개미 서너 마리/ 작은 개미 수십 마리 다녀갔다// 며칠 전에 잘려나간 단풍나무 그림자 아래였다//

훗날의 장례식 / 배영옥
주인공인/ 나만 없을 것이다/ 벅찬 고통을 감당하기 어려워/ 일찍 떠났으므로/ 엉킨 실타래 같은/ 검은 부재의 바람이 불고/ 태극기 휘날리고/ 잿빛 비둘기들만 구구거리며 하늘로 날아오를 것이다/ 무거운 공기가/ 이제 진짜 안녕이라며/ 작별을 고할 것이다/ 새 없는 공중으로 검은 비가 내릴 것이다/ 한가한 사람들도 오지 않을 것이다/ 주인공인 나만 홀로/ 슬플 것이다//

 

​지금 나는 그곳이에요 / 배영옥
마치 내가 상류에서 하류로 흐르는 강물이거나/ 짝사랑하는 여인을 스토킹하는 스토커처럼/ 끊임없이 나를 뒤쫓아오는 나를 발견했어요// 꼬리도 없는데 꼬리잡기 놀이를 하는 것처럼/ 마치 내가 갓 깨어난 소리처럼/ 소리가 먼저이고, 새가 나중인 새처럼// 있잖아요, 허공에 높이 뜬 말똥가리는/ 눈만 커다랗게 허공에 박아둔다는데// 저것 좀 보세요/ 내가 걸어온 거리/ 내가 자라온 마을/ 내가 떠나온 그곳에// 흉터처럼 생생한 그것,// 내가 나를 내버려두어도/ 스스로 길을 따라나서는 그림자, 의식, 그리고 현재형 전생// 나는 지금 그곳이에요//
* 문인수의 「나는 지금 이곳이 아니다」에서 따옴.

 

씨를 뿌리다 / 배영옥
기원전 3500년에서 3000년 사이에 씨를 맺은 중국의 꽃씨 하나가 내 방에 들어와 꽃을 피운다 수천 년이 지난 연꽃이 주름도 없이 화사한 향기를 뿜어내고 있다 방안 가득 연꽃은 자꾸만 피어나 나는 연꽃을 만져보고 향기를 맡아 보고 뿌리째 뽑아도 본다 질척이는 진흙을 걷어내고 뿌리를 생으로 씹어 삼키기도 한다 아삭아삭한 수천 살 먹은 연근을 씹고 있는데 지나온 시간들이 꿈처럼 펼쳐졌다 나는 밤마다 코피를 대야 가득 쏟아냈다 골다공증에 걸린 엄마는 내내 허리를 굽히고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자고 일어나면 방은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백랍 같은 얼굴의 엄마가 꽃 피고 있었다 내가 아는 연꽃은 흰색이다 자꾸 꺾여지는 엄마의 허리를 끌어안으며 소복 차림의 내가 뻘 속에 한 발을 디디고 있었다 머리 위로 연잎과 연꽃의 사라진 그림자가 너울너울 펼쳐지고 있었다 그림자 속으로 들어간 엄마는 기원전 3500년에서 3000년 사이에 검은 열매를 맺고 있었다 툭툭 씨앗들이 방안으로 떨어져 내린다 굳게 입 다문 연꽃들이 고요히 제 무덤 속으로 돌아가고 있다//


나를 위한 드라마 / 배영옥
나는 한때 사람을 살았던 적이 있다// 살아서 고통스럽던 기억은/ 쓸쓸하고도/ 달콤한 드라마 같다// 어제는 단맛만 골라 삼키고/ 오늘은 쓴맛만 삼켰다// 아파서/ 면죄부를 받았다/ 그러므로// 나는 열린 결말을 누구보다 사랑했다// 다음 생만큼은 시대의 요구에 적극적으로 응답하리라// 전생에서 죽인 사람을/ 현생에서 다시 죽였다// 화창한 대낮에/ 기억의 사막에/ 죽은 시체를 버려두었다// 여행 가방에 까마귀 날개를 넣어두고/ 나는 한때 사람을 떠났다//

다음에 / 배영옥
슬쩍 가슴 한쪽 보여주고/ 황급히 옷깃을 사리는 말이 있다// 온전한 정신도 낯선 치매도/ 노구(老軀)에 갇혀버렸다/ 누구도 따라 들어가지 못하는 검은 내부,/ 흰 머리칼이/ 허공을 향해 휘어지고 있었다// 작은 교회 요양원이었다/ 백발 할머니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마지막 씨앗까지 날려보낸 빈 대궁들/ 표정조차 닮아가는 의좋은 자매들// 백주대낮에 긴 어둠 고여, 출렁이는 섬 같다/ 정신이 몸을 가두고/ 몸이 정신을 가두는/ 저, 아득한 섬과 섬 사이// 몸밖으로 흘러나온 시간들/ 왜 생각하기 시작하면 잃는 것이 많아질까// 그녀가 본 것은 늘 나와 함께 있다/ 아무것도 사라지거나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다음에, 하고 돌아서는데/ 너무 많은 다음에 치인 다음이/ 손사래를 친다/ 다음이 다음을 기다리는 줄 모르고/ 기다리는 다음이/ 영영 세상을 등지는 줄도 모르고/ 다음에, 다음에 올게요//

그림자 찾기 / 배영옥
왜가리가 물속을 들여다본다/ 물결의 움직임을/ 두 눈과 긴 부리가 함께 본다// 물이 물 밖의 왜가리를 올려다본다// 물 속에서/ 물 밖에서/ 서로 바라보는 시선이 마주칠 때,/ 허공에서 들끓는/ 간절함이여// 서로 바라보다가/ 오직 보이는 것만 들여다보다가/ 끝내 채워지지 않는,// 내가 나를 잊어버리고 사는 날들이 많아졌다/ 내가 나를 외면하는 날들이 늘어만 간다//

그림자와 사귀다 / 배영옥
원하지 않아도/ 언제나 곁들여 나오는 토마토케첩처럼/ 숱한 감정에 나를 살아보기도 했다/ 너무 맑아서 오히려 들리지 않는 종소리를 품고/ 몸살 앓는 그믐이기도 했다/ 누구나 알고 아무도 모르는/ 너무 예민한 거울을 나는 갖고 있어서/ 완연한 병색처럼 검은 노을을 따라나서기도 했다/ 당신의 배면은 너무 어둡고/ 나의 가면은 기나긴 사계절을 건너온/ 뜨거운 소금사막이었다/ 싹튼 목화꽃이 솜이 될 때까지/ 나는 나에게서 조금도 달아나지 못했다/ 머리와 꼬리를 문 뱀처럼/ 진흙을 빠져나와 다시 진흙으로*/ 아무 때나 곁들여 나오는 토마토케첩처럼/ 뒤따르며 앞장서며//
* 오정국 시인의 시 「진흙을 빠져나오는 진흙처럼」에서 따옴

벽돌 한 장 / 배영옥
유모차 안에 갓난아기도 아니고/ 착착 쌓은 폐지 꾸러미도 아닌,/ 벽돌 한 장 달랑 태우시고 가는 할머니// 제 한 몸 지탱할 수 있는/ 가장 적당한 무게가/ 벽돌 한 장의 무게라는 걸까// 붉은 벽돌 한 장이/ 할머니를 겨우 지탱하고 있다// 느릿한 걸음으로/ 이쪽으로 저쪽으로 옮겨 다니는 유모차 할머니// 너무 가벼운 생은 뒤로 벌렁 넘어질 수 있다/ 한평생 남은 것이라곤 벽돌 한 장밖에 없다는 듯이/ 허리 한 번 펴고 더 굽어지는 할머니// 벽돌 한 장이 할머니를 고이고이 모셔간다//

재활용함 / 배영옥
그의 검은 손이 헤집어내는 것은 어제의 네 윗도리가 아니라, 어제 그제의 네 구두가 아니라, 어제 그제 그끄저께의 네 속옷들이 아니라, 젖내 풍기는 젖먹이의 배냇저고리가 아니라, 네가 태어나기 이전 너와집 아궁이의 다 타버린 재가 아니라, 그가 가슴에 한 아름 가득 안아 낡은 1톤 트럭에 쌓아놓은 저것은, 어제의 그가 울컥울컥 게우던 피울음이 아니라, 어제 그제부터 갑자기 말라버린 피폐한 그의 육신이 아니라, 까마득한 옛날 신의 분노로 범람하던 붉은 강물이 아니라, 우리가 태어나 울고 웃고 다시 울음으로 몸을 부리고 돌아갈 어느 생의 아픈 상처를 다시 헤집어놓은 것이라면, 그가 몇 아름이나 반복해서 부려놓은 저것은, 트럭 위에 수북하게 쌓여있는 저것은, 맞춤처럼 착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 모든 기억의 추억의 토사물*은 어떤 낱말로도 재활용되지 않을 텐데
* 최승자 시인의「雨日 풍경」에서 따옴.

또 다른 누군가의 추억으로 남을 / 배영옥
나는 끝내/ 의자 아래 묻힌 신전을 모를 것이고/ 의자 또한 나를 모를 것이고/ 의자 위의 사과는/ 나에게 관심조차 없는데/ 나는 오늘도 의자를 기다리는 사람/ 기억하지 말아야 할 것을/ 애써 소환하는 사람/ 의자를 관(棺)처럼 떠받드는 사람/ 오래도록 동행해야 할 목숨과/ 매일매일 불화하는 사람/ 짙어지는 어둠과/ 푸르른 이끼를 끌어다 덮는 사람/ 그러니 나날이 봉분을 쌓는 어지럼증이여/ 의자를 경배하라/ 나는 오늘도/ 또 다른 누군가의 추억으로 남을/ 뿌리 깊은 의자에 묻히노니,/ 아무도 나를 찾지 마라//

똥개 / 배영옥
다리를 버둥거리던 개가 순식간에 축 늘어졌다/ 먹이를 향해 이글거리던 식욕도/ 경적에 묻힌 단발마도 뚝 끊겼다/ 땡볕 아래 백주의 주검 위로/ 파리 떼들이 맨 처음 문상을 온다/ 가장 부지런한 조문객들/ 손바닥을 비벼대며/ 최선을 다해 슬픔을 만끽하고 있다/ 개가 평생 달고 다니던 노숙의 냄새를/ 서둘러 발라내는 파리들/ 가죽과 살 사이/ 뼈와 근육 사이/ 주인 잃은 냄새들이 속속들이 불려 나온다/ 똥개라는 이름으로 얻은 혐의들이/ 하나둘씩 지워진다/ 죽어서야 겨우 혐의를 벗은/ 개의 영혼을/ 파리들이 공중으로 인도하고 있다/ 죽음으로 씻지 못한 죄는 없다//

클라이밍 / 배영옥
암벽에 달라붙은 사내를 본다/ 자일에 매달린 사내를/ 그림자가 받아내고 있다// 그림자는 사내의 말을 듣지 않는다/ 그림자는 마음보다 늘 한발 앞서간다// 사내보다 먼저 손을 내밀고/ 사내보다 먼저 흔들리고/ 사내보다 먼저 늙어가는 그림자// 누구든 그림자를 마음대로 떼어낼 수 없다// 햇볕이 내리쬘수록 그림자는/ 바위 속으로 조금 더 파고들어간다// 암벽 속 어둠이 점점 깊어진다//

오독 / 배영옥
선인장에 들러붙어 떨어지지 않는다/ 선인장 바늘처럼 꼼꼼하게 나를 벼린다/ 당신은 어떤 선인장보다 바늘의 그늘이 날카롭고/ 바늘과 바늘 사이 계곡이 깊다/ 선인장과 선인장의 바늘과 선인장의 그늘을 멀리 떠나보낸다/ 나는 멀어져서 오히려 가까운/ 선인장과 선인장의 양심과 선인장의 어둠을 피해/ 선인장보다 더 선인장답게/ 바늘을 세우고 그늘을 넓혀도/ 숨어있는 이 수치를 떨쳐버릴 수가 없다/ 선인장보다 더한 오독은 없다/ 선인장보다 더한 연인은 없다/ 나와 선인장은 전 우주의 무게로 서로 매달려있다//

사과와 함께 / 배영옥
르네 마그리트의 마그네틱 사과 한 알 현관문에 붙여놓고/ 나는 날마다 사과의 집에 살고 있는 사람/ 사과의 허락도 없이 문을 따는 사람// 나는 이제 더 이상 과수원집 손녀가 아니고/ 사과도 이미 그때의 사과가 아닌데/ 국광, 인도, 홍옥……처럼 조금씩 존재를 잃어가는 사람// 사과의 고통은 사과가 가장 잘 안다는 할아버지 말씀처럼/ 그럼에도 매번 피어나는 사과꽃처럼/ 봄이면 내 어지럼증은 하얗게 만발하곤 하지만/ 나는 사과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 한 번도 빨갛게 익어본 적 없는 사람// 내가 사괴를 볼 때마다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건/ 사과의 눈부신 자태 때문이 아니라/ 사과 이전과 사과 이후의 고통을 배회하고 있기 때문// 그러나 나는 날마다 사과의집에 살고 있는 사람/ 할아버지도 르네 마그리트도 방문하지 않는 현관 안에서/ 누군가의 기척을 기다리는 사람/ 한 알의 사과 門 안에서 봄이 오길 기다리는 사람// 그럼에도 사과는 이미 사과꽃을 잊은 지 오래/ 그럼에도 나는 이미 사과를 잊은 지 오래//

위성 / 배영옥
어느 날 과거와 미래의 다른 얼굴이 나를 찾아온다면/ 그녀들이 둥글게 손에 손을 맞잡고/ 위성처럼 내 주위를 에워싸고 있다면/ 나는 환호성을 울리며 기뻐할 수 있을까/ 비명 없이 끔찍할 수 있을까/ 그 중 몇몇을 내가 좋아할 수 있다면/ 그 중 몇몇은 나를 비판할 수 있을까/ 이런 말도 안 되는 상상에서/ 나는 슬며시 젖은 왼발을 이불 밖으로 꺼내놓을까/ 꿈속처럼 저린 손을 꾹꾹 누르며 다시 잠이 들까/ 나는 이미 다른 이름이지만/ 그녀의 눈코귀입은 다르지만 체격미소머리칼은 다르지만/ 이마의 굵은 한줄 주름과 눈 밑의 다크 서클은 똑같아서/ 젊고 늙고 아름다운 그녀들/ 추하고 잔망스럽고 애달픈 그녀들/ 모두 나를 이루고 나는 항상/ 나에게서 두어 발자국 뒤쳐져 걷고 있고/ 나는 항상 나의 바깥에서 내 얼굴의 그림자를 찾고 있고//

암전 ㅡ고영 시인에게 / 배영옥
그러므로/ 함께 별을 바라본다는 건/ 타다 남은 잔해를 서로에게 보여준다는 의미// 언젠가 찰나와 순간의 에너지를 폭발시켜/ 유성처럼 끝장을 보겠다는/ 결심// 이것은/ 神이 우리에게 질문을 던질 때부터/ 예정된 운명이자 수순,/ 파·멸과/ 파·탄의 시나리오// 별의 시체를/ 몸속에서 꺼내어 보여줄까?// 죽음을 영접하기 위해서는 얼마나 오랜 연습이 필요한지/ 아무도 얘기해주지 않는데/ 왜 너만……// 별을 향해 걸어갈 내 발자국에는/ 왜 검은 그을음이 묻어 있는지// 훗날/ 네게만 말해줄게//

수박 / 배영옥
붉은 뇌수로 꽉 찬 수박을 싣고/ 트럭이 왔다// 수족이 다 잘려나가는 고통을 겪은 뒤에야/ 비로소 한 생애가 완성되는/ 수박// 저 사내는 머리통만으로 일가를 이룬 사람이다// 엽기적인 살인 사건의 전모가 드러나기 전에/ 어서 빨리 해치워야 한다고/ 붉은 뇌수가 곪아터지기 전에/ 서둘러 처분해야 한다고// 몇 번의 짧은 흥정도 없이/ 옛소, 수박!/ 사내가 안겨주는 머리통을 받아들고/ 염치도 없이 돌아와// 쓸쓸히 혼자 식탁에 둘러앉아/ 쩍 갈라터진 뇌수를/ 빨아먹는다//

오늘처럼 / 배영옥
하루살이 떼가 눈앞을 가로막는다// 더 이상 뵈는 게 없다고/ 지금 여기,// 발 디딜 곳 없는 막막한 허공뿐이라고// 자욱하게/ 죽자 살자 달려든다// 눈앞에선/ 환풍기 숨찬 동력이/ 들끓고 있다//

가나안교회는 집 뒤에 있지만 / 배영옥
골목길을 걸을 때/ 예수 믿으세요/ 매일 만나는 그녀/ 물티슈 한 봉을 건네준다// 나는 당신의 어린 양, 속죄의 기도를 올리기엔/ 내 두 손은 너무 많은 어둠을 더듬거렸고/ 내 두 눈은 검붉은 장미가 가득했다// 매번 식탁 위에 쌓이는/ 가나안교회, 약속의 땅에 닿기도 전에/ 나는 먼저 그녀의 눈먼 충복이 되어버렸다// 책상 위 먼지를 훔치거나/ 벽지에 말라붙은 모기 피를 닦아내거나/ 방바닥의 김칫국물을 제거할 동안/ 단 한 번도 가나안교회를 찾아가지 않았다// 한 장씩 가볍게 손끝에 잡혀 올라오는/ 물티슈의 다양한 쓰임새를 되새기면서// 가나안교회,/ 죄를 사하는 물티슈의 세례가/ 이토록 가볍다면 지금 나에게는 가장 필요한 게 아닌가// 내게는 가장 편안하고/ 가장 안전한 장소/ 가나안교회는 늘 집 뒤에 있지만//

이상한 잠적 / 배영옥
옆집 여자는 매일 의자 위에 앉아 거의 움직이질 않는다. 창문을 열면 바로 눈앞까지 늙은 의자가 다가와 있다. 뚫어질듯이 한 곳만 응시하는 일, 그녀의 소일거리는 오로지 바라보며 기다리는 일이다. 기다리는 줄도 모르고 기다린다. 기다리는 일 하나만으로도 하루가 빠르게 지나간다. 의자가 여자가 되고 여자가 의자가 되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다. 그녀는 점점 깜깜해져서 의자 속으로 묻혀버린다. 의자의 표정을 읽을 때까지 하루 종일 그녀의 잠적을 바라본다. 잠적 속에서 잠적을 본다. 그녀라는 나라의 의미가 희미해질 때까지 바라본다. 너무 늙어서 깜깜해진 생애처럼 속내를 보여주지 얺는 옆집 여자. 몇 번의 태양이 떴다 지고, 카리브 해의 파도가 불러낼 때까지 늙은 의자에 앉아 깜깜하게 늙어가는 쿠바 흑인 여자.//

늦게 온 사람 / 배영옥
눈앞에 문이 있어도/ 당신은/ 문을 보지 못한다// 내가 당신의 방패가 되어주었다면/ 내가 당신을 안아줄 수 있었다면/ 문 밖에서 함부로 문을 닫지 않았을 텐데// 문 안에서 그리워하는 사람은/ 안팎이 조금씩 바뀌고 있는 사람// 그리하여 한번 늦은 사람은/ 영원히 늦은 사람// 눈앞에 문이 있어도/ 당신은/ 문을 보지 못한다// 당신은 한참이나 늦어버린 사람/ 이미 늦은 사람//


​귀 / 배영옥
나는 가장 아픈 귀였다/ 피부보다 민감한 통점이었으며/ 소음의 배후였다/ 고집이 세었지만/ 언제나처럼 뿌리는 없었다/ 나는 부적절한 귀가 지은 죄였다/ 부글거리는 문장을 오래 품고/ 발설하지 않는 인내는/ 절대 미덕이 아니었다/ 나의 내부가 늘 고요했다면/ 공사장 소음을 뚫고 들려오는/ 새소리를 들을 수 있었을 것이다/ 이따금 귓바퀴가 아파오고/ 구름도 작약꽃도/ 단풍나무 숲도/ 가장 아픈 문장을 엿듣고 말았다/ 처음과 끝처럼/ 후회는 결코 혼자 오지 않았다/ 세상의 한 귀가 부서지고/ 기우뚱 균형을 맞추려던 그때/ 나는 이 세상도 오래 앓았던 귀라고 믿었다//

이상한 의자 / 배영옥
의자는 죄의식의 냄새를 갖고 있다// 전생이 나무였거나 멸종한 짐승의 시체였거나/ 모체를 떠난 기억이거나/ 하나도 남김없이 버려야 하는데/ 나는 너무 늦었다// 의자가 다시 의자가 아니었던 때로 돌아가기에는/ 너무 멀리 자기로부터 떠나온 것// 아픈 나와 마주앉아 생각해보니/ 함부로 의자를 떠올리기도/ 함부로 의자를 해체하지도 못했던 내 지난날들이 모여/ 생애를 이룬 것을 알겠다// 세상에 없어서는 안 될 의자를/ 어떤 이는 희망의 또 다른 서자라고 하지만/ 그래도 나는 늦었다// 의자라는 말이 있기도 전에/ 나는 늘 의자를 가지고 다녔으므로// 내 의자는 항상 한쪽 다리가 기울어져 있다//

의자를 버리다 / 배영옥
오늘 나는 의자의 숨결을 버리려는 사람, 나는 의자에서 시작해서 의자로 끝나는 폐족(廢族)의 자손, 오래된 의자의 가계도를 그려본다, 낡고 초라한 의자, 팔꿈치 닳은 의자, 오늘 나는 의자의 그림자를 들여다보고, 의자의 별들과 의자의 태양과 의자의 뒷면을 떠올려보는데, 누구는 의자의 눈으로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또 누구는 의자의 귀로 들리지 않는 소리를 듣는다는데, 한번도 나는 의자의 정체를 궁금해 하지 않고, 한 번도 의자의 눈물을 기억하지 않고, 하지만 오늘 나는 의자의 노래를 듣고 있는 단 한 사람, 오늘 나는 의자의 검붉은 상처를 되새기는 사람, 당신을 위한 그리움이 오늘만은 죄가 되지 않고, 언젠가 우주의 티끌로 사라질 의자를 미리 버리는 사람, 의자의 그림자와 의자의 소리와 의자의 고독은 대체 어떤 영혼들을 불러 모으는 걸까, 나는 이미 오래전에 의자를 저버렸던 사람, 모든 영혼은 각자 자기 안의 의자와 마주해야 할 순간이 있고,//

​ 상 위의 숟가락을 보는 나이 / 배영옥
사람들은 가까운 사이임을 강조할 때/ 그 집 숟가락 숫자까지 다 안다고들 한다/ 그 말이 단순히 숟가락 숫자를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마흔 넘어서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 내 생애는/ 두레밥상 위에 숟가락을 놓으면서부터 시작되었던 것/ 사라지고 다시 나타나는 숟가락들/ 어제 옆집 아버지 친구는/ 서낭당 언덕에서 돌멩이에 걸려 돌아가시고/ 건넛집 아이엄마는 오늘 딸 쌍둥이를 낳았다// 나도 이제 상 위의 숟가락에 숨은 배면을 들여다볼 수 있는 나이// 수저통에 가지런히 누워 있는 숟가락을/ 상 위로 옮기는 가벼운 노동을/ 아직 생각이 어린 아이들에게 시킨다/ 몸과 생각에 물기가 많은 아이들은/ 죽음과 생의 신비가 숟가락에 있다는 것을 아직 알지 못한다// 따닥따닥 말발굽 소리를 내며/ 아이는 상 위에 숟가락을 식구 수대로 가지런히 놓고 있다/ 눈대중으로 숟가락 숫자를 헤아려본다// 가장 귀중한 숟가락을/ 나는 이미 스무 살에 잃은 적이 있다//

​맥도날드의 밤 / 배영옥
한밤의 맥도날드, 텅 빈 창가에/ 나를 앉혀둔다/ 어두워서 오히려 밝은/ 밝아서 오히려 어두워지는/ 맥도날드, 욕망의 거울 앞에서/ 네온사인 따라 나도 잠깐 빛나지만/ 나는 이곳에서/ 거짓이 아닌 나를 발견할 수 있을까/ 나를 이 무덤에 순장시킬 수 있을까/ 맥도날드, 눅눅한 후렌치 후라이 같은/ 음악은 서서히 바닥으로 나를 떠다밀고/ 감자와 튀김이 서로 분리되는 시간에/ 키위의 과육과 씨앗이 서로 멀리하는 계절에/ 맥도날드, 맥도날드의 밤은 비밀이 깊고/ 낮은 우유부단한 미로 같다고 말한 자를 기억하는 시간/ 끝없이 늘어지는 노래는 악취가 나고/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맥도날드, 나는 반음 낮은 음악이어서/ 자주 젖어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모자챙을 구부려 쓰고/ 자정을 지나가는 맥도날드/ 한 번도 날지 못한 맥도날드//

유리벽의 독서 / 배영옥
교보문고 간이 의자에 앉아/ 유리벽에 기댄 사람들의 등을 본다// 등과 등을 서로 맞대고/ 호기심과 호기심을 맞대고/ 사람들은 저마다 고개를 숙인 채/ 서로 다른 표정으로 책 속에 빠져들고 있다// 책 표지는 대부분 무표정하다, 책에겐 표정이라는 게 없다/ 표정을 보여주는 건 등뿐이다/ 때론 진지하게 때론 유쾌하게 때론 슬프게/ 유지벽은 등의 표정을 있는 그대로 옮겨 적는다/ 사람은 등을 기억하지 못해도/ 유리벽은 등을 기억한다// 내가 등을 기댄 유리벽은 나를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 나는 어떻게 기록될 것인가// 자리를 바꿔 앉아 책을 읽는다// 유리벽에 등을 내준 채/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내가 앉았던 자리가 누군가에 의해 채워질 때마다/ 유리벽은 재빨리 등의 표정을 살핀다// 유리벽은 독서를 멈추지 않는다//
*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따옴.

나는 왜 / 배영옥
나는 왜 치약을 이렇게나 많이/ 서랍에 쟁여두고/ 하루에 서너 번 양치를 하면서/ 왜 이렇게 많은 치약이 필요한 걸까 생각하고/ 치약이 실신하듯 거품을 물고/ 제 몸을 쥐어짜면서/ 얻는 것이 대체 무얼까 궁금해한다// 장난감을 가진 아이처럼/ 서랍 속 차곡차곡 넣어 둔/ 치약을 종류대로 늘어놓아 보는데/ 누가 대체 색색의 치약을 이렇게 많이/ 만들어내는 것일까 생각하고/ 아이는 치약을 맛있는 아이스크림처럼 빨아 먹지만/ 나는 한 번도 박하 향으로 정신의 허기를 채운 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무언가를 씹고 갈고 물어뜯는/ 이의 세례식,사제가 없어도/ 누가 보지 않아도,홀로 행하는 의식은 경건해야 할까/ 왜 거품에 휩싸인 하루 이틀 사흘은/ 모락모락 시궁창 냄새만 풍기는 걸까/ 거품을 만들 겨를도 없이/ 쉽게 끝나버린 연애처럼/ 씹고 삼킬 건덕지도 남아있지 않은/ 삶은 왜 내장 속 구석구석까지/ 구역질을 동반하는지// 치약은 왜 약도 아닌데 치약인지/ 쥐어짤 물기 하나 없이/ 어제도 오늘도 부글부글 끓어오르고// 나는 치약을 왜 이렇게나 많이/ 마치 단 한 번도 치약을 가진 적이 없는 것처럼//

유리공을 위한 시 / 배영옥
유리공의 숨 속에는 온갖 형상이 숨겨져 있다/ 모든 신경이 한 숨으로 모아져/ 어떤 형상이든 불러낼 준비가 되어 있다/ 양 볼 가득 동그랗게 부푼 숨이/ 긴 대롱 속으로 몽땅 빨려 나갈 때까지/ 두 뺨이 홀쭉해질 때까지/ 가슴 속 뜨거운 불을 조심스레 밖으로 불어낸다/ 유리공의 더운 숨결을 먹고/ 꽃이 피고 벌 나비가 날아오른다/ 물병자리 별도 뜬다/ 숨결이 옮겨간 대롱 끝에서/ 새가, 구름이, 천사의 날개가 부풀어 오른다/ 유리공의 목구멍은/ 생명의 배출구이자 투입구/ 뱃가죽이 등에 찰싹 달라붙을 때까지/ 온몸이 투명해질 때까지/ 유리공은 늘 한 호흡//

시를 위한 시 / 배영옥
그러므로 함께 별을 바라본다는 건/ 타다 남은 잔해를 서로에게 보여준다는 의미./ 언젠가 찰나와 순간의 에너지를 폭발시켜/ 저 별처럼 끝장을 보겠다는 결심./ 별이 우리에게 질문을 던질 때부터/ 예정된 운명이자 수순./ 파멸과 파탄의 시나리오.// 별의 시체를 몸 안에서/ 꺼내어 네게 보여줄까./ 별을 찾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연습이 필요한지/ 별을 향해 걸어가는 발자국에는/ 왜 검은 그을음이 묻어있는지 네게 말해줄까.//

훗날의 시집 / 배영옥
필자는 없고/ 필사만 남겨지리라// 표지의 배면만 뒤집어보리라// 순환하지 않는 피처럼/ 피에 감염된 병자처럼// 먼저 다녀간 누군가의 배후를 궁금해 하리라// 가만히 내버려두어도/ 여전히 현재진향형인 나의 전생이여// 마음이 거기 머물러// 영원을/ 돌이켜보리라//

무량사 가는 길 / 배영옥
무량사 팻말 아래 화살표는 보신탕집을 가리키고 있다/ 한 팻말 안에 절 이름과 보신탕집 이름이 사이좋게 합방하고 있다/ 도량 건너에는 오리전문점과 암소갈비집도 있다/ 일종의 묵계 아래 성업 중인,/ 개들이 꼬리를 말고 당도하는 저곳에서/ 향냄새를 말끔히 지운 사람들이 질근질근 개고기를 씹어댄다/ 하릴없이 화살표를 따라 걷거나/ 차를 타고 지날 때마다/ 무량사와 보신탕집까지의 백여 미터 거리/ 그 짧은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 나는/ 독경소리보다 개 짖는 소리에 번번이 마음을 빼앗긴다/ 죽은 부처에게 바치는 오체투지도/ 지복을 달래는 향공양도/ 제 육신마저 흔쾌히 연옥의 불길에 던져버린/ 견공들의 성불에는 미치지 못하리라/ 문득 곰곰 생각해 보니/ 저 화살표가 가리키는 곳이 소신공양의 정토(淨土)였던가/ 무량사 가는 길이 까마득하다//

안개빛 그리움이여 / 배영옥
희미한 그림자 속으로 간다/ 안개빛 그리움이여// 파아란 불빛을 찾아/ 그대와나 길을 간다// 뭉개구름이 둥둥 간다/ 그 하늘빛 아래// 그대와나 둘이 거닐어 본다/ 안개빛 그리움이여// 가을 빛으로 머물어 본다/ 안개빛 그리움이여//

부드러운 교육 / 배영옥
아이가 껌을 씹는다/ 껌의 실체, 껌의 본모습,/ 부드럽게 저를 받아주는 건 껌밖에 없다고/ 함부로 검을 휘두르지 않는/ 아이는 이미 껌의 수동성을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온몸으로 체득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껌이 품고 있는 적극적인 수용이란/ 결국 자기 몸을 모조리 내주고/ 마지막에 비로소 얻어내는 것이라는 걸/ 껌 속 무수한 잇자국은/ 껌의 폭력성, 현실에 순응하는/ 아이가 껌을 씹는다/ 껌이 부드럽게 입안을 굴러다니고/ 껌이 부드럽게 잇자국을 받아내고/ 껌이 침과 뒤섞여 부드러워질수록/ 아이는 점점 뼈와 살이 단단해질 것이다// 껌을 향한 인류의 집착,/ 껌처럼 부드럽게 몸을 숙이고/ 껌처럼 수십 수백 번을 씹혀도// 아이는 자란다/ 껌처럼 부드럽게/ 껌처럼 수동적으로/ 풍선껌처럼 무럭무럭 가벼웁게 자란다//

키스 / 배영옥
전등 하나 만큼의/ 조명 갓이 드리워주는 반경만큼의/ 입술,// 네 입을 열어라/ 빛이 어둠에 당도하는 시간이/ 네가 이곳에 머무를 유일한 기회이므로// 네 입술에 묻은 이름을/ 밟고 지나가겠다// 어둠의 안이 저토록 눈부시니,// 입술에 오래 닿은 이름은/ 뜨겁게/ 한 자리를 고수 중이겠다// 바깥에서 안으로 짙어지는 어둠이란/ 변경할 수 없는 차선 같은 것// 조명등 아래가 가장 어둡다/ 밤의 모서리로 번져가는/ 네 등 뒤가 가장 캄캄하다//

햇볕에 임하는 자세 / 배영옥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고결한 햇볕들이/ 지구별에 왕림을 하는가// 양지 공판장 앞 옹기종기 모여앉은 할머니들/ 무릎 위에 달랑 얼굴 하나씩 올려놓고/ 공손히 햇볕을 맞이하고 있다// 영정에나 어울릴 법한 흑백 사진들이 웃는다/ 잘 여문 호두알 같고/ 이리저리 엮어놓은 실타래 같다// 입가에 새겨진 주름을 잡아당기면/ 곡진한 생애가 한 말쯤 술술 풀려나오겠다// 한평생으로 풀지 못한 고통의 매듭들을/ 햇볕에라도 녹여 달래려는 심산인가// 그림자에 물이 빠지는 줄도 모르고/ 땅이 꺼지는 줄도 모르고/ 햇볕을 영접하고 있다// 빈 몸뚱어리 가득 노을을 쟁여넣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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