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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느낌

여정 시인

by 부흐고비 2022. 7. 22.

여정 시인
1970년 대구 출생. 계명전문대 경영학과 졸업.

1996년 《시와반시》 문예대학 수료.

1998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을 통해 등단. 시집으로 『벌레 11호』가 있다.

시나인 회원.

 



자모의 검 / 여정
혹자가 말하길, 입속은 자객들의 은신처란다. 그들이 즐겨쓰는 무기는 '영혼을 베는 보검'으로 전해오는 자모의 검이란다. 을씨년스런 날이면 자객들은 검은 말을 타고 허허벌판을 가로질러 어느 심장을 향해 힘차게 달려간단다. 천지를 울리는 말발굽소리 어느 귓가에 닿으면 그들은 어김없이 이성의 칼집을 벗어던지고 자모의 검을 빼어든단다.// 바람을 가르는 소리 한 영혼의 목을 뎅거덩 자르고나면 자객들은 섬뜩한 미소로 조의금을 전하고 또 다른 심장을 향해 말 달려간단다. 그날에 귀머거리는 복 있을진저, 자객들의 불문율에 있는 '귀머거리의 목은 칠 수 없다' 는 조항에 따름이라.// 혹자가 말하길, 자모의 검에 찔린 사람들은 귀부터 썩어간단다. 귀가 썩고 뇌가 썩고 심장이 썩고, 썩고 썩어 생긴 가슴의 커다란 구멍으로 혹한기의 바람이 불어대고 수많은 까마귀 떼의 날갯짓이 장대비처럼 내린단다. 그 부리에 생살이 뜯기고 새하얀 뼈를 갉히며 그렇게 순식간에 사라져 버린단다. 그날에 수다쟁이는 화 있을진저, 더 많은 까마귀 떼를 불러 들임이라.// 자객들의 말발굽소리 요란한 날이면 너희들은 하던 일을 멈추고 두손으로 귀부터 틀어막고 묵직한 바위 뒤에 숨어 최대한 몸을 낮춰라. 그리하면 자객들이 탄 검은 말들이 너희를 비켜가리니, 자모의 검일망정 결코 너희를 해(害)치 못하리라. 귀 있는 자들은 들어라. 이 말로 더불어 너희가 그날에 '복 받았다' 일컬음을 받을지니, 부디 그날에 너희에게 복 있을진저, 혹자의 말이니라.//
* 1998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벌레 11호 / 여정
半 지하방에서 꿈틀댄다. 12시를 향해 기어가는 시침 위에서 꿈틀댄다. 꿈틀대자마자 결핵약을 먹는다. 10개의 환약들이 식도를 타고 꿈틀댄다. 나는 10개의 환약들에 끌려다닌다. 수정체를 뚫고 급습하는 벌레 1호, 실내화를 신은 발로 밟아 죽인다. 책상 위를 기어 다니는 벌레 2호, 책상 위에 놓인『죽음의 한 硏究』를 번쩍 들어 쳐 죽인다. 벌레 3호는 볼펜심으로 콕 찍어 죽인다. 벌레의 주검 앞에 냉소를 던진다. 입안에서「헌화가(獻花歌)」가 꿈틀댄다. 철쭉꽃이 피어난다. 참꽃이 아닌 그 개꽃이 피어난다.// 밥그릇에 담겨 꿈틀댄다. 밥알들이 꿈틀꿈틀꿈틀꿈틀꿈틀꿈틀꿈틀꿈틀꿈틀꿈틀댄다. 식탁 위를 달려가는 벌레 4호, 입안에 든 숟가락을 번개같이 빼내어 쳐 죽인다. 오물오물 씹히는 밥알들이 벌레 4호 같다. 콩나물이 꿈틀댄다. 파김치가 꿈틀댄다. 그 사이로 지나가는 벌레 5호, 젓가락으로 집어 들어 그 사이에 끼워 죽인다. 벽이 꿈틀댄다. 의자가 꿈틀댄다. 가만히 방바닥에 드러눕는다. 방바닥에 가만히 있던 벌레 6호, 드러눕는 등짝에 짓눌린다. 나도 몰래 죽인다. 살갗 위를 기어 다니는 벌레 7호, 8호, 9호, 이리저리 뒤척이며 꾹, 꾹, 꾹, 눌러 죽인다. 천장이 꿈틀댄다. 몇 켤레 구두가 내 머리 위에서 꿈틀꿈틀꿈틀꿈틀꿈틀꿈틀꿈틀꿈틀꿈틀꿈틀댄다.// 벌레 10호, 잠을 뚫고 들어와 꿈속을 기어 다닌다. 투명한 재떨이를 들어 가만히 얹어놓는다. 서서히 죽인다. 죽은 벌레 10호를 재떨이에 담아 한 번 더 태워 죽인다. 꿈속에서도 꿈틀댄다.//

달아나다 / 여정
달아 나다. 네 옆에 있는 어둠이다. 달아 나다. 너를 키워낸 엄마다. 자궁 속은 늘 어두운 법, 그 법 속에 우리가 산다. 산다는 건 어쩌면 뿌연 안개 속에서 달아날 구멍을 찾는 것, 구멍은 늘 무덤 가까이 있다. 탈출자의 명단이 거기 새겨져 있다. 달아, 나 오늘 탈출자의 뒤를 밟아봤다. 어둠에 젖은 길을 지나 안개 속을 헤집고, 쏙 사라져버린 그 넓은 보폭과 그 빠른 걸음에 매달려봤다. 하지만,// 달아 나다. 네 옆에 있는 헛수고다. 탈출자가 벗어놓은 가죽옷을 들고 울고 있는 네 탯줄이다. 새까만 네 양분이다. 탈출자는 항상 우리 반대편에 서서 언제나 밝고 자유롭다. 가죽옷과 함께 배꼽을 두고 간 그들이 나비처럼 너울대고 너울꽃이 된다. 너울꽃은 고아 아닌 고아다. 그 고아는 방실 웃으며 방실내를 풍긴다. 하지만 벽 하나,// 달아 나다. 여기는 어둠의 쇼윈도다. 너는 노오란 백열등이다. 너는 밤마다 노오란 울음을 터뜨리며 내 자궁 속에서 디스플레이된다. 네 노오란 울음도 어쩌면 디스플레이다. 어쨌든 너는 내 아기, 내 희망, 내 구멍이다. 내 어둠의 옷을 무덤 옆에 벗어두고 달아날 그 구멍, 그 구멍으로 비쳐드는 세상이 밝게 흔들리고 있다.//

쥐며느리 / 여정
동그랗게 몸을 말아야 한다. 이제 그만 잠에서 깨어나야 한다. 정오를 가리키던 해시계도 해시계 위에 알록달록 핀 꽃도 그 꽃길 위에 새겨진 발자국도 고이 접어 이제 그만 일어나야 한다. 동그렇게 동그랗게 더 작게 몸을 말아야 한다. 잠에서 깨어난 이불처럼 방 한쪽 구석에 가지런히 현실로 뛰어들어야 한다.// 내 몸만큼의 어둠을 끌어안는다. 가로등 하나 없는 길을 걸어간다. 내 몸만큼의 퀴퀴한 냄새가 나를 사로잡는다. 내 몸이 가벼워진다. 나는 방 한쪽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현실의 문을 두드리고 있다. 꽃핀다. 내 몸 가득 곰팡이꽃 핀다. 나는 지금 그 꽃길 위를 걸어가고 있다. 발자국이 새겨지지 않는 길 구두 밑창이 닳지 않는 길 나는 구두 위에 쌓인 먼지만큼 걸어가고 있다.// 피곤하다. 이불을 펴듯 웅크리고 있던 몸을 편다. 드르릉─쿨쿨 구두 위에 쌓인 먼지를 털어낸다. 드르릉─쿨쿨 밖으로 나간다. 꿈길은 늘 대낮처럼 환하고 늘 여러 꽃들처럼 알롣달록하다. 꿈길을 걸어가는 나는 늘 구름 위를 걸어가고 늘 바람 따라 움직인다. 바람이 내 등을 밀고 있다. 동상 걸린 발가락에 침을 놓듯 내 등을 찌르고 있다. 내 등에서 콕콕콕 피가 솟구친다.// 이제 그만 잠에서 깨어나야 한다. 동그랗게 동그랗게 더 작게 꿈길을 접어야 한다. 꿈길에 난 발자국들을 지워야 한다. 방 한쪽 구석에 개어놓은 이불처럼 방 한쪽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동그랗게 동그랗게 더 작게 현실의 길을 걸어가야 한다. 발자국이 생겨지지 않는 그 길을 구두 밑창이 닳지 않는 그 어둠의 길을 동그랗게 동그랗게 더 작게 걸어가야 한다.//

카멜레온 / 여정
잎새에 매달려 푸른 음계를 배운다. 나는 온몸으로 노래한다. 하지만 광합성을 할 수 없는 나, 나는 사시의 눈을 굴려가며 날벌레를 잡아먹는다. 사람들은 그런 나를 손가락질한다. 내 뿌리를 들먹거린다. 나는 그들에게 온몸으로 따져본다. 말이 자꾸 빗나간다. 그들은 내 긴 혀의 사정거리 밖에 서 있다. 변한다. 내 살은 딱딱하게 굳어 벽이 되고 나는 벽 속에 갇혀 웅크린다. 내 가슴속에서 가시가 솟아나고 나는 그 가시에 찔려 피를 흘린다. 태양과 달이 번갈아 가며 내 살을 긁어댄다. 때론 바람이 내 살을 할퀴고 스쳐간다. 벽에 금이 간다. 나는 어떤 모양의 울음을 터뜨리며 이 곳을 뛰쳐나갈지를 그려본다. 화석이 된 혀가 움직이지 않는다. 하지만 난 또 변할 수 있다.//

눈꽃 여정 / 여정
서러운 달빛을 담고/ 눈꽃이 피었다// 그림자에 서리를 달고/ 허공을 기어오르는 넝쿨// 길목은 허약하고/ 어둠은 치유되지 않아// 줄기를 파드는 동티에/ 무너지는 겨우살이// 청춘은 사라져도/ 설렘은 결코 놓지 않으리// 그리움을 더듬는 여정/ 허허로이 떠도는 일상//

모자 속의 산책 / 여정
모자속의 겨울은 너무 길다// 겨울 입구 ㅡ 말라깽이가 된 태양이 시퍼런 하늘에 누워 있다. 바람의 호스를 따라 항암제가 흐른다. 머리칼이 몽땅 빠진 나무가 사지를 비틀며 별을 바라본다. 별은 너무 멀리 있다. 까마귀 떼가 몰려와서 가지 위에 내려앉는다. 가지는 무거워 몸을 축 늘어뜨린다. 어머니의 눈 속에서 노을이 붉어진다. 붉은 노을 사이로 한 여자가 걸어간다. 그녀의 몸은 반쪽이다. 반쪽은 무덤가에 있다. 별이 먹구름에 가려진다.// 겨울- 벽 벽 벽 벽, 벽이 솟는다. 나무의 키가 점점 줄어든다. 비둘기들도 나무를 외면하고 건물 위에 둥지를 튼다. 다리가 무너진다. 세상 소식이 끊긴다. 길들이 얼어붙는다. 얼어붙은 길 위에 눈사람 하나 놓여 있다. 코도 삐뚤 입도 삐뚤 눈도 삐뚤인 인생이 하나 놓여있다. 어머니는 두 눈 속으로 나무를 옮겨 심는다. 나무 위에 따스한 햇살이 내린다. 하늘보다 더 푸른 웃음이 쌓여간다.// 겨울 출구- 목련의 하얀 힘줄이 불거진다. 봄이 하얗게 오려다 주춤주춤 허물어진다. 허물어지는 은박 사이로 즉석복권의 행운숫자가 빗나간다. 굵은 햇살이 눈사람의 살을 긁어댄다. 하얀 살에서 투명한 피가 솟는다. 나는 눈사람을 커다란 냉동실에 집어넣는다.// 모자 밖의 계절은 지칠 줄 모르고 달려간다. 네 명의 주자가 바통을 주고받으며 여전히 트랙을 돌고 있다.//

화향·부케…화환 ㅡ무음행진곡 / 여정
캐주얼정장차림의그여자를처음만났다·악수의형식을빌어오른손을잡았다…캐주얼정장이수직으로잘리고왼쪽이벌거벗었다·놀란가슴이나도모르게악수의형식을놓쳐버리고젖무덤을만졌다…그녀의왼쪽이무조건반사적으로출렁거리고오른쪽이조건반사적으로웃었다·그웃음이놀라워나도모르게젖가슴도놓쳤다…그녀의벌거벗은왼쪽이빠른속도로주름·주름…주름졌다·반만남은오른쪽캐주얼정장이빠른속도로따라변했다…검정치마에소복저고리를오른쪽만걸친그녀가악수의형식을놓치고버둥대는내손을잡고흔들어주었다…앞을돌아보면·천길낭떠러지…모래성이무너지듯내살이주르르흘러내렸다·그녀는내뼈를잡고흔드는방식으로안도의한숨을내쉬었다…허공을타고웨딩마치가울려울려…울려퍼졌다…캐주얼정장차림의그여자가웃고있었다//

치킨게임 / 여정
암탉이 계란을 하나 낳고부터/ 나도 하나의 계란을 낳으려고 끙끙댔다/ 계란이 하나의 텍스트를 낳고부터/ 수탉도 암탉의 울음을 울며 계란을 낳기 시작했다// 수탉이 계란을 낳고부터/ 노란 병아리도 닭살의 생닭도 계란을 낳고 있다/ 계란프라이도 통닭도 조각치킨의 조각들도 계란을 낳고/ 심지어 닭똥집도 하물며 계란도 계란을 낳고 있다// 나무들도 꽃과 열매 대신 계란을 낳고/ 사람들도 여아와 남아 대신 계란을 낳고/ 자판기들도 음료와 커피 대신 계란을 낳고/ 내 운동화도 발자국 대신 계란을 낳고// 전속력으로 날아드는 저 계란들이 나는 너무 무섭다/ 나는 나도 모르게 머리를 오른쪽으로 휙 돌린다/ 왼쪽이 죽고 오른쪽만 겨우 살아남은 내가/ 계란을 낳지 못하는 한 마리 닭이 되어 닭장 안에 홀로 있다// 복날이 그리 멀지 않다//

어느 나뭇잎의 노래 / 여정
햇살이, 햇살이 내리쬘 때마다/ 나는 너무 미안했다/ 너도 나도 다 같은 초록인데/ 내 등 뒤로 흘려보낸/ 큐티클層의 그 은빛 환희만큼의 그늘이/ 나는, 나는 너무 미안했다/ 들풀들의 그늘진 얼굴이 떠올라, 이 서러운 광합성/ 겨울이 닥쳐오면 모두 무너져버릴 헛된 꿈인 것을/ 차라리, 햇살이 내 살에 구멍을 뚫고/ 숭숭숭 지나가버렸으면 좋겠다/ 뚫린 구멍으로 들려오는 들풀들의 밝은 웃음 속에서/ 나 그렇게 서서히 죽어갈 수 있다면……//

21C 콜로세움 / 여정
컴퓨터 안의 3D캐릭터가 나를 잡아당기는 밤(?), 빨려든다, 우린 같은 편이 되어 적(?)과 싸우고 있다, 달(?)이 부서지고 3D캐릭터의 뼈(?)가 부서진다, 모니터 가득 피(?)가 튄다, 죽음(?)의 문이 열리고, 3D캐릭터는 그곳으로 치워진다, 버튼 하나로 다시 태어난다, 나는 적(?)이었던 3D캐릭터와 같은 편이 되어 우리편(?)이었던 3D캐릭터와 싸우고 있다, 죽음(?)의 문은 계속 열리고, 닫히고, 다시 열리고, ……// 알고 보면 3D캐릭터들이 모두 같은 편(!)이 되어 나와 싸우는 게다, 해(!)가 부서지고 내 뼈(!)가 부서지고 있는 게다, 시계 안에 내 피(!)가 튀고 얼룩지고 있는 게다, 내가 죽음(!)의 문으로 끌려가고 있는 게다, 나만 치워지고 있는 게다, 죽음의 문은 열리고, 닫히고, 다시 열릴지 모르는(!) 게다// 지금 컴퓨터 밖의 3D캐릭터는 컴퓨터 전원을 끄고 죽음의 문 주위를 얼쩡대고 있다, 어느새 창밖에는 해가 달로 모습을 바꿨고 장롱은 침대로 모습을 바꿨다. 3D캐릭터는 침대에 누워 잠을 자고 있고 나는 어디에도 없다, 나는 아주 가끔 3D캐릭터의 꿈속에서나 잠시 모습을 드러냈다 사라진다//

애인 13호 / 여정
벌레 11호의 첫사랑은 이브다 이브는 재산목록 10호인 원룸 APT에 살고 있다 이브는 아침마다 재산목록 12호인 빨간색 티뷰론을 타고 유령회사에 출근한다 가끔 이브의 첫사랑이기를 꿈꾸는 벌레 11호는 이브가 없는 이브의 APT에서 하루 종일 꿈틀댄다 이브의 재산목록 9호인 ACE 침대 위에서, 이브의 재산목록 6호인 21″컬러 TV 와 이브의 재산목록 7호인 4헤드 VTR 사이에서 꿈틀댄다 꿈틀댈 때마다 채널이 바뀌고, 채널이 바뀌어도 향기가 나지 않는 시간들이 벌레 11호를 이브의 재산목록 3호인 LG 냉장고 앞으로 끌고 간다 냉동실에서 배스킨라빈스 31을 꺼낸 벌레 11호는 쿼터통 안에서 꿈틀댄다 4가지 맛에 취해 꿈틀꿈틀꿈틀꿈틀댄다// 이브의 재산목록 8호인 에로이카 전축에서 검은 음표들이 꿈틀대며 기어 나온다 벌레 11호의 몸 속으로 기어 들어가 꿈틀꿈틀꿈틀꿈틀꿈틀꿈틀꿈틀꿈틀꿈틀꿈틀꿈틀꿈틀꿈틀 검은 알들을 낳는다 알 1호를 깨고 이브의 첫사랑이 웃고 있다 알 2호를 깨고 이브의 애인 2호가 웃고, 알 3호를 깨고 LG 냉장고가 웃고 있다 알 4호를 깨고 이브의 애인 4호가, 알 8호를 깨고 에로이카 전축이, 알 12호를 깨고 빨간색 티뷰론이, 웃고웃고웃고웃고웃고웃고웃고웃고웃고 있다 알 13호는 아직 껍질을 깨지 못한 채 알 10호 안에 있다 알 10호 안에서 하루 종일 꿈틀대는 벌레 11호는 아직 껍질을 깨지 못한 이브의 재산목록 13호다//

ACE 침대 위의 ♂♀ / 여정
인조인간♂와 인조인간♀가 ACE 침대 위에 나란히 누워 업그레이드를 하고 있다 19990831칩을 빼내고 19990901칩으로 갈아 끼우고 있다 인조인간♂♀는 늘 그렇듯 업그레이드를 하기 위해 오늘도 크로스를 하지 않은 채 일찍 불을 껐다// AM 06:00 탁상시계가 Alarm의 팔을 뻗어 인조인간♂♀의 귀를 잡아당기고 눈꺼풀을 콕 집어 올리면 그들은 좀더 빠른 속력으로 움직이기 시작한다 19990901㎒로 달려가 우유를 꺼내고 19990901㎒로 콘푸레이크를 태운다 19990901㎒로 달려가 지하철을 타고 용량이 꽉 찬 객실을 헤매다가 19990901㎒로 회사에 간다 회사에는 늘 그렇듯 現 ㎒ + α 의 서류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 헉헉대며 서류를 먹다보면 헉헉대며 밤이 오고 인조인간♂♀는 Down·Reset·Down·Reset 되며 집으로 돌아온다 까막까치를 타고 오는 견우와 직녀처럼 그들은 칠월칠석날 같은 ACE 침대 위에 나란히 누워 또 업그레이드를 하고 있다 19990901칩을 빼내고 19990902칩으로 갈아 끼우고 있다 늘 그렇듯 오늘도 불은 일찍 꺼졌다//

바코드機♀를 위한 랩소디 / 여정
소녀에서 여자로/ 女子에서 ♀로의 업그레이드// 창밖엔 태양이 떠 있는데/ ♀의 두 눈엔 비가 내리네// 사람들이 숫자들에 끌려다니고 있어/ 숫자들이 사람들의 살을 파먹고 있어// ♀의 수정체에 어린/ 창살들 - 숫자들이 뱉어낸 그 수많은 뼈다귀들// ∥♀는 백마 탄 왕자님을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모른다∥♀를 스쳐가는 혹은 스쳐간 남자들은 모두∥얼룩말을 탄 ♂이거나 숫자들에 끌려다니는 줄무늬 옷을 입은 ♂들뿐∥♀의 눈이 밝아지면 밝아질수록 ♀의 망막에 쌓여가는 줄무늬들∥♀를 가두고∥♀는 줄무늬로 세상을 가두고∥비는 계속 내리는데∥젖지 않는 사람들∥철판 위에서 뼈 없는 닭갈비를 먹으며 뼈 없는 얘기들을 뱉어내는데∥백마 탄 왕자님이 지나갔는지도 모른다∥얼룩말을 탄 ♂들과 숫자들에 끌려다니는 줄무늬 옷을 입은 ♂들에 뒤섞여∥줄무늬 ♂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는 백마와 얼룩말을/ 모른다 ♀는 비와 창살과 줄무늬와 뼈다귀를// 지금 창밖엔 줄무늬 태양이 ♀의 살에 빛살 혹은 빗살을 긋고/ ♀는 햇살이 부서지는 빗속을 거닐며/ ♀에서 女子로 여자에서 소녀로 소녀에서 태아로 사라져간다//

케이블 가이 / 여정
케이블이 달을 꽁꽁 묶는 밤, 나는 달의 화장터로 끌려간다. 걸친 옷이 하나 둘 불타오르고 벌거벗은 나도 불타오른다. 내 살 굽혀지는 냄새가 케이블 속을 떠돌고 나는 어느새 유령이 되어 환생할 자궁을 찾는다. 이곳 자궁들 속은 너무 환하다. 빛이 내 눈을 파먹는다. 눈 먼 내가 자궁 속에 있다. 비닐에 뒤덮힌 내가 자궁 속의 나를 바라보고 나를 그리워하고 나는 그리움에 북받쳐 비닐을 찢고 나를 만난다. 나는 나를 부둥켜 안고 살을 섞는다. 깊은 잠에 빠져든다.// 자궁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잠이 깬다. “축하합니다. 임신입니다.” 모니터가 내 움직임을 잡고 있다. 자궁의 주인은 덜미잡힌 나를 끌고 또 어디론가 가고 있다. 모니터가 자궁의 주인을 꽁꽁 묶는 날이면 자궁 속은 화장터다. 이 자궁 속도 너무 환하다. 기계음이 내 살을 찢어댄다. 사지가 찢긴 내가 자궁 밖에 있다. 검은 비닐에 뒤덮힌 내가 끊어진 탯줄을 바라보고 탯줄의 주인을 그리워하고 나는 그리움에 북받쳐 검은 비닐을 찢고 탯줄의 주인을 만나기 위해 다시 케이블 속을 떠돈다.// 케이블 속 대부분의 엄마들은 처녀다. 성경에 이르길, 처녀가 잉태하사 아기를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했다. 예수 1호, 예수 2호, 예수 3호, ……가 케이블에 꽁꽁 묶여 달의 화장터로 끌려간다. 걸친 옷이 하나 둘 불타오르고 예수 1호, 예수 2호, 예수 3호, ……도 불타오른다. 예수 1호, 예수 2호, 예수 3호, ……의 살 굽혀지는 냄새가 케이블 속을 떠돌고 예수 1호, 예수 2호, 예수 3호, ……는 어느새 유령이 되어 환생할 처녀의 자궁을 찾는다. 이곳 자궁들 속은 너무 환하다. 눈부시도록.//

고정된 사내 / 여정
벽에 붙박인 그 사내는 사각의 틀 속에 갇혀 정육점의 고기마냥 걸려 있다. 머리 윗부분이 잘린 오른쪽 귀가 잘린 그는 시선을 왼쪽 아래에 두고 눈동자를 움직이지 않는다. 입술에는 초승달을 베어 물고 왼쪽 새끼손가락에는 링반지를 끼고 턱을 괴고 있다. 링반지 속에는 그 사내의 영혼 같은 한 여자가 가루가 되어 섞여 있다. 그 사내는 하반신이 없다. 그녀에게 갈 수 있는 길은 하반신과 함께 사라졌고 그녀 또한 그 길과 함께 사라졌다. 그는 늘 벽에 붙박여 꿈결 같은 그 길을 그녀와 함께 걸었던 그 마지막 길을 다시 거닐곤 한다. 그 길에는 풀냄새가 초록초록 싱그럽고 그녀의 젖빛 살냄새 또한 향긋하다. 간혹 그 사내가 뜬눈으로 가위에라도 눌리는 날이면 도로를 이탈한 트럭이 풀들을 짓누르고 그녀의 젖빛 살냄새를 붉은 피로 물들이며 달려온다. 그럴 때면 풀들조차 비명과 함께 하반신이 잘려나간다. 그런 날이면 벽에 붙박인 그 사내의 고정된 두 눈 속에서 피눈물이 마른 나뭇가지 꺾이는 소리를 내며 흘러나오고 그 사내가 붙박인 그 벽조차 붉게 붉게 물들어 노을이 된다.//

칼질 / 여정
나는 그녀의 손을 거머쥐고 지하 레스토랑으로 들어간다// 나는 돈까스, 그녀는 비후까스/ 메뉴판이 우리를 조금 갈라놓는다/ 하지만,/ 우리는 똑같이 수프를 떠먹는다// 나는 돈까스, 그녀는 비후까스/ 수프를 담았던 빈 접시가 우리를 조금 더 갈라놓는다/ 나는 돈까스 위에 그녀를 살짝 올려놓는다/ 그녀는 비후까스 위에 나를 살짝 올려놓는다/ 나는 왼손으로 고기를 누르고 오른손으로 고기를 자른다/ 그녀는 오른손으로 고기를 누르고 왼손으로 고기를 자른다/ 나는 6번의 칼질로 그녀를 19조각 낸다/ 그녀는 5번의 칼질로 나를 16조각 낸다/ 하지만,/ 우리는 중간중간 똑같이 샐러드를 먹는다// 나는 커피, 그녀는 주스/ 음식을 담았던 빈 접시가 우리를 완전히 갈라놓는다// 나는 오른손으로 사막의 태양이 이글거리는 블랙커피를 마신다/ 그녀는 왼손으로 남극의 빙산이 둥둥 떠 있는 오렌지 주스를 마신다/ 하지만,/ 우리는 더 이상 똑같이 먹을 음식이 남아 있지 않다// 나는 그녀를 자리에 두고 카운터로 가서 음식값을 치른다/ 나는 그녀를 자리에 두고 지하 레스토랑 계단을 오른다//

식탁에 박힌 눈알들 / 여정
식탁에 눈알이 박혀 있다/ 아버지와 뼈다귀가 마주 앉아 식사를 하고 있다/ 식탁에 박힌 눈알들이 일제히 뼈다귀를 노려본다/ 아버지의 젓가락이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뼈다귀의 젓가락은 느리게 움직인다/ 식탁에는 짐승들의 눈알이 있고 식물들의 눈알도 있다 바다의 눈알들도 있고 허공의 눈알들도 있다/ 그 눈알들이 계속 뼈다귀를 노려보고 있다/ 아버지의 젓가락이 식탁 위에 놓여진다/ 식탁에는 빈 아버지와 빈 그릇만 남아 있다/ 뼈다귀의 젓가락이 조금 빠르게 움직인다/ 눈알들이 하나씩 사라지고 있다/ 뼈다귀의 젓가락이 조금 더 빠르게 움직인다/ 짐승들의 젓가락이 조금 더 빠르게 움직인다/ 짐승들의 눈알도 식물들의 눈알도 모두 사라지고 있다/ 뼈다귀의 젓가락도 식탁 위에 놓여진다// 식탁과 빈 그릇 사이, 아버지의 눈알 두 개가/ 온몸에 눈알들을 달고 사라지는 그 뼈다귀를 노려보고 있다.//

인형의 방 / 여정
태양이 빛을 잃었다. 달은 너무 멀리 있다. 짐승들이 비린 내장을 들어내고 부드러운 솜털로 속을 채웠다. 나무들은 광합성을 하지 않고도 살아남는 법을 배웠다. 굳은 열매들이 그 가지 끝에 매달렸다. 사람들은 인형이 되어 낙엽처럼 나뒹굴고 있었다.// 밤이 와도 달은 먹구름 속에만 갇혀 있었다. 노란 비명조차 새어나지 않았다. 인형들이 어둠을 타고 내 방으로 숨어들었다. 발자국마저 부드러운 소리를 냈다. 나는 방 한구석에 헝겊뭉치처럼 버려져 있었다. 인형들이 몰려와 내 살을 찢어댔다.// 인형들이 내 피를 뽑아내고 내장을 들어냈다. 성대를 울리던 비명마저 입안에서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내 방은 비린 냄새로 가득 찼고 내 속은 솜털로 가득 찼다. 나는 인형들의 인형이 되어 가벼워진 몸으로 누워 있다. 일으켜 세우면 눈을 뜨고 누이면 눈을 감는 내 어린 날의 그 플라스틱 인형처럼 언제나 미소를 머금고 있다.// 내 눈꺼풀이 걷히는 밤이면 굳은 달이 노란 비명을 토해낸다. 달은 빛을 내지 못하고 비명은 노란 헝겊에 갇혀 굳어 있다. 나는 빛 한 점 새어들지 않는 혹은 새어나지 않는 방에 서 있다. 그래도 미소만은 잃지 않는다.//

좌석버스 안에서 / 여정
작게크게/ 전봇대, 가로등, 그녀 다시/ 전봇대, 전봇대, 가로등, 그녀 다시/ 가로수 하나, 둘, ....., 그녀 다시/ 그녀가 나타나면 흐려지는 풍경, 다시/ 세피아, 액센트, 누비라, 무쏘, 그녀 다시/ 그녀 다시, 그녀 다시, ......./ 그녀가 나타나면 사라지는 풍경, 다시//

늙은 방 / 여정
더 늦기 전, 늙은 방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잠든 어미의 품속으로 들어가 늘어진 세월 끝에 매달린 젖꼭지 만져봐야 하는데, 멀어진 어미냄새 가까이서 다시 맡으며 어미가 걸었던 수만 갈래 길 같은 주름을 바라봐야 하는데, 그 주름 속 아직 지지 않은 꽃송이 몇이나 될까 헤아려봐야 하는데, 늙은 방, 문은 늘 밖에서 닫혀 있고 나는 늘 문 앞에서만 서성이는데, 더 늦기 전, 늙은 방으로 들어가 어미의 가는 숨소리에 매달려봐야 하는데, 어미의 가랑이 사이로 고개를 들이밀고 들어가 어미의 귀로 듣는 새마을노래 다시 들어봐야 하는데, 어느새, 어미의 머리 위엔 허연 눈만 가득 쌓여 내 가슴속으로 조금씩 녹아들고 있는데, 더 늦기 전, 더 늦기 전에.//

네게 거짓말을 해봐?! / 여정
피노키오야, 피노키오야, 물고기 뱃속이 너무 어둡지 않니? 차라리 거짓말을 해버려. 어차피 뿌리 없는 날들. 네 코라도 키우렴. 거짓말은 네 코의 유일한 물과 양분. 어서어서 자라나 물고기의 살을 뚫고 밖으로 나오렴.// 피노키오야, 바다가 무섭다고? 수많은 해골이 가라앉아 있는 바다가 무섭다고? 어차피 넌 뿌리 없는 나무. 가벼운 몸짓으로 파도를 타렴. 네 코엔 아직 생장점이 살아있어 빛을 향해 달려가고. 어서어서 거짓말을 하렴. 어서어서 가라앉지 않게.// 사람들이여, 피노키오가 살아 돌아왔어요. 어서 톱질을 시작해요. 긴 코를 잘라 집을 짓고 긴 코를 잘라 가구도 만들어요. 톱질에 맞춰 거짓말을 시켜요. 톱질에 맞춰 더 많은 거짓말을.// 할아버지, 할아버지, 또 물고기 뱃속이에요. 이번 물고기 뱃속은 너무 넓어요. 끝이 없어요. 사람들은 모두 제 콧구멍 속에다 집을 짓고 제 콧구멍 속에서 먹고 마시고 즐겨요. 시집가고 장가가고 또 집을 짓고 도망가려 하지 않아요. 아무리 거짓말을 해도 닿지 않는 날들. 물고기 뱃속은 눈부시도록 환하기만 한데 자꾸 코가 간질거려요. 자꾸 재채기가 나려고 해요.//

지하철((지옥철)) / 여정
덜컹댄다. 지하철은 大地母神의 질 속을 용두질치고 있다. 승객들은 모두 XY XX 염색체로 앉아 있거나 서 있다. 나는 그 성염색체들 틈새로 窓을 보고 있다. 역과 터널이 스쳐갈 때마다 빛과 어둠이 번갈아 스며든다. 그때마다 내가 사라졌다 나타났다 되풀이한다. 어둠에 기댄 내가 더 선명하다. 내가 사라질 때마다 지하철 문이 열리고 닫히고 그때마다 승객들은 수정을 꿈꾸며 사정과 생성을 되풀이한다. 반복이다. 밑도끝도 없는 이 용두질. 덜컹 댄다. 노선도도 덜컹대고 노선도를 바라보는 내 눈알들도 덜컹댄다.// 이번 역이 전부 사정될 역이란다.// 비틀댄다. 벽과 타일, 에스컬레이터와 플라스틱 의자, 그리고 冷 음료자판기와 溫 음료자판기 전부 비틀댄다. 사람들도 비틀대고 길들도 비틀댄다. 비틀대지 않는 건 나뿐이다. 冷溫이 교차하는 걸음으로 계단을 오른다. 흙냄새가 나지 않는 大地母神의 질 속을 다시 바라본다. 벽과 타일, 에스컬레이터와 플라스틱 의자, 그리고 冷 음료자판기와 溫 음료자판기, 저 많은 피임기구를 지하철에 사정된 내가 콘돔 속을 걷고 있다. 말라가는 내가 희뿌옇게 웃고 있다. 흙에 닿지 못하는 내 발자국들이 한 点 한 点 얼룩이 되어 밖을 향한다.//

한밤의 기초공사 / 여정
중장기의 거친 호흡이 달빛을 흔들어대는 밤, 덤프트럭은 내 가슴 한가운데 굵은 바퀴 자국만 남겨 놓고 잠을 싣고 멀어져 간다. 퍼내어도 퍼내어도 끝이 없는 흙더미, 내 가슴에 뚫린 구멍으로 비쳐드는 달빛이 너무 야위었다. 뿌리째 뽑혀버린 버드나무, 귀신처럼 머리를 풀어헤치고 내 가슴속을 떠도는 밤. 나는 기억한다. 그녀의 푸른 웃음과 그 뿌리 깊은 사랑을, 기초공사가 시작되기 며칠 전 그녀는 어느 갑각류의 껍질 속으로 뿌리째 떠 나버렸고 나만 홀로 어둠 속에 남아 헤드라이트 불빛을 밝혔다. 내 살을 갉아대는 굴착기의 소음 속에서 나는 떠올린다. 내 살을 뚫고 세워질 그 건물의 견고한 외벽과 곳곳에 설치될 도난경보시스템을.//

불면 / 여정
수도꼭지에서 물이 새고 있다. 내 귓속에 물이 차 오르고 있다. 박쥐우산을 쓰고 걸어가는 이 길은 언제나 스텐(stainless)이었다. 비틀어도비틀어도 잠겨지지 않은 날들이 또독또독 다가오고 있다 밤이 와도 해는 지지 않았고 먹구름이 몰려와도 해는 사라지지 않았다 비가 내려도 대지는 타들어만 갔다 퍼석퍼석해진 하늘엔 늘 먼지만 자욱했다. 별 하나 뵈지 않고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달조차 뵈지 않는다 자꾸 모래바람만 불어대고 내 살점이 또독또독 떨어져나가고 있다. 사막을 횡단하는 낙타의 두 눈 속에 뼈다귀만 남은 시체가 한 구식 놓여 있다 선인장마저 쪼그라들고 있다// 허우적대고 있다 식인상어가 내 몸 속에서 이빨을 드러내고 있다 달을 물어뜯고 별을 집어삼키고 있다 수면 위로 떠오른 방주에 식인상어의 이빨 만한 구멍들이 뚫려 있다 비둘기의 날개가 젖어들고 셈과 함께 야벳의 아랫도리가 젖어들고 있다. 방주를 만드는 노아의 망치소리가 내 귓속을 두드리고 갈보리 언덕에서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히고 죽은 나사로가 썩은 내를 풍기며 무덤에서 걸어나오고 있다. 베드로의 귓속에서 닭이 세 번 울어대고 그 울음소리에 선악과 열매가 떨어지고 있다 요단강에서 요한이 물로 세례를 주고 모세의 지팡이가 홍해를 가르고 노예들이 그 갈라진 홍해를 또독또독 건너가고 있다// 수도꼭지에서 햇살이 떨어지고 있다 마른 잎들이 어둠 속에서 온몸을 뒤척이고 있다 길 잃은 어린양의 울음소리가 규칙적으로 돋아나고 나는 이름 없는 호숫가를 거닐고 있다. 수면 위로 익사체 한 구가 떠오르고 나는 불어터진 그 익사체를 건져내고 있다 나는 젖은 주머니를 뒤적이고 가죽지갑을 꺼내고 그 가죽지갑 안에 있는 신분증을 바라보고 있다 신분증 안에는 내 사진이 덤덤한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다 나는 수면이 거울인 양 수면에 비친 내 모습을 바라보며 고개를 떨구고 있다 수도꼭지에서 또독또독 눈물이 새고 있다//

셋방에는 / 여정
셋방에는/ 해, 하면 달, 하고/ 달, 하면 해, 하는/ 부부가 산다// 셋방에/ 해와 달이 동시에 떠 있고/ 비마저 내리는 날/ 사물들은 투명한 날개를 움직이며/ 힘차게 날아오른다/ 천둥소리 들리는 벽,/ 벼락맞은 거울,// 셋방에는/ 불, 하면 물, 하고/ 물, 하면 불, 하는 부부가/ 깨진 거울 속에서/ 살을 섞고 있다// 해와 달의 신음소리/ 불과 물의 신음소리/ 정字와 난字가 부딪치는 소리/ 사이,/ 기형아의 울음소리 들려온다//

비가 / 여정
비가, 하루종일 내린다. 비가, 사람들의 발목을 자르고,/ 비가. 사람들의 무릎을 자르고, 비가,// 사람들은 모두 어디로 가고, 키 큰 나무들만 머리통만 바꼼히 내밀고,// 비가, 키 큰 나무들의 머리통을 출렁출렁 씹어 삼키는 비가,/ 고층 빌딩의 허리를 자르고, 비가.// 고층빌딩도숲은 산도, 출렁출렁 씹히고 씹히는 나날들,// 비가, 별을 삼키고, 비가, 태양을 삼키고, 비가 무지개여/ 안녕 -----//

혼혈아 ㅡ겨울로 들어서는 어느 길목에서 나는 쓴다 / 여정
현충로역에서 충혼탑으로 가는 길/ 벚나무들이 허공에 꽃을 피우고 있다// 내 머리는 made in U. S. A/ 내 두 눈은 made in Japan/ 내 상반신은 made in England/ 내 하반신은 made in China/ 내 허리는 made in Italy 내 오른손목은 made in Hong Kong/ 내 왼새끼손가락은 made in Mexico/ 내 두 발은 made in Korea// 국적도 불분명한 내가/ 국적도 불분명한 길을 걷고 있다//

모니터에 비친 자화상 / 여정
날마다 게임에 빠져 허우적댄다. 키보드는 키를 두드리게 하고 마우스는 버튼을 클릭하 한다. 키보드와 마우스는 나와 함께 내 골을 파내는 게임을 하고 있다. 게임이 진행될 수록 나는 차츰차츰 멍해진다. 내 골은 외장형이 아닌데, 나는 꼭두각시처럼 앉아 있다. 모니터는 내 눈알을 탐내고 스피커는 내 고막을 탐낸다. 내 신체부위는 아이템이다. 모니터가 내 눈알을 먹는다. 스피커가 내 고막을 먹는다. 그들의 생명수치가 올라간다. 내 골은 이제 외장형이다. 모니터 화면에 비친 내가 해골 같은 얼굴로 나를 보고 있다. 내 눈알이 빠져나간 자리에는 캐릭터가 캐릭터를 죽이고 있다. 내 고막이 없는 귓속으로 비명소리와 함께 토막난 시체들이 매장되고 있다. 나는 여전히 꼭두각시처럼 앉아 있다. 어디선가 내 골이 나를 끌어당긴다. 의자는 잠시 내 엉덩이를 밀어내지만 키보드와 마우스가 내 손을 놓아주지 않는다. 밀고당기고하는 사이, 모니터 속의 캐릭터가 마법약을 먹는다. 마법수치가 올라간다. 캐릭터가 마법을 걸어 나를 일으켜 세운다. 나는 그 캐릭터의 부하가 되어 다른 캐릭터들과 싸우고 있다. 시간이 지날수록 내 생명수치는 내려간다. 하지만 아무 문제없다. 그 캐릭터는 뼈다귀도 살려내는 흑마법의 대가니까. 골이 없는 나는 이제 내장형이다.//

아니, / 여정
인자는 내 애인의 이름이다. 아니, 인자는 디아블로 게임의 내 캐릭터 이름이다. 인자는 지금 절망의 평원을 지나 지옥망령들의 도시로 이동하고 있다. 활을 쏘며 온갖 몬스터들과 싸우고 있다. 아니, 인자는 지금 어느 공장외벽 앞에 서 있다. 벽을 긁거나 그림을 그리면서 벽화보수공공근로를 하고 있다.// 혹한에도 아랑곳없이 참꽃이 피었습니다/ 혹한에도 아랑곳없이 은행잎이 돋았습니다// 인자는 추위와 공해에 시달리고 있다. 아니, 인자는 콜드 공격과 포이즌 공격을 받고 있다. 움직임이 둔해지고 피가 줄어들고 있다. 인자는 몬스터들을 피해 피가 든 힐링포션 Healing Potions을 먹는다. 아니, 인자는 행인들의 시선을 피해 도시락을 먹는다. 인자의 배가 불러온다. 아니, 인자의 피가 차오른다. 인자는 다시 몬스터들과 싸우기 위해 달려가고 있다. 아니 인자는 다시 벽화보수공공근로를 하기 위해 벽을 향해 걸어가고 있다.// 혹한에도 아랑곳없이 참꽃이 피었습니다/ 혹한에도 아랑곳없이 은행잎이 돋았습니다// 인자는 작업도구를 챙기고 있다. 아니, 인자는 아이템을 정리하고 있다. 레벨이 낮은 아이템을 레벨이 높은 아이템으로 바꾸고 있다. 레벨이 오른 인자가 레벨이 높은 아이템으로 레벨이 높은 몬스터들과 싸우기 위해 불길의 강으로 내려가고 있다. 아니, 동상에 걸린 인자가 페인트로 얼룩진 방한복을 입고 취미생들을 가르치기 위해 작업실로 이동하고 있다.// 혹한에도 아랑곳없이 참꽃이 피었습니다/ 혹한에도 아랑곳없이 은행잎이 돋았습니다// 인자는 그림을 가르치고 있다. 아니, 인자는 패시브와 매직스킬 Passive & Magic Skills을 배우고 있다. 인자는 디아블로와 싸우기 위해 생츄어리 Sanctuary 사원 안으로 들아간다. 아니, 인자는 잠을 자기 위해 이불 속으로 들어간다. 눕자마자 깊은 잠에 빠져든다. 아니, 인자는 떼거지로 몰려드는 몬스터들의 공격을 받아 순식간에 죽고 만다. 오늘도 나는 인자의 시체를 보며 디아블로 게임을 끝낸다. 아니, 오늘도 나는 인자의 그림자조차 보지 못한 채 하루를 보내고 있다. 아니, 오늘도 나는 하루종일 인자와 함께 지내다가 하루를 보낸다. 아니,// 혹한에도 아랑곳없이 참꽃이 피었습니까?/ 혹한에도 아랑곳없이 은행잎이 돋았습니까?//

897살 먹은 사내와 자판기월드 / 여정
897살 먹은 사내가 자판기월드로 들어간다. 감시카메라의 렌즈가 그 사내를 따라 움직인다. 897살 먹은 사내는 자판기 1호 앞에 선다. 자판기 1호는 그 사내의 몸 속에 있는 바코드를 읽는다. 897 살 먹은 사내가 자판기 1호에 있는 몇 개의 버튼을 누른다. 그 사내는 업데이터된다. 정치·경제·사회·문화·교양, 버튼의 수만큼 자동결제 된다. 897살 먹은 사내가 자판기 2호로 간다. 자판기 2호는 그 사내의 건강상태를 체크한다. 모니터에 그 사내의 건강상태가 찍혀 나온다....... 오른쪽 눈을 갈아 끼우십시오 그리고 위장의 기능이 약화되었으니 업그레이드를 하십시오...... 그 사내는 오른쪽눈알버튼과 위장버튼을 누른다. 버튼의 수만큼 자동결제 된다. 897살 먹은 사내가 자판기 3호로 간다. 자판기 3호는 그 사내의 정신상태를 체크한다. 모니터에 그 사내의 정신상태가 찍혀 나온다.......애국심과 준법정신이 53%로 위험수위에 있습니다...... 그 사내는 버튼을 눌러 애국심과 준법정신을 91%까지 끌어올린다. 버튼의 수만큼, 끌어올린 %만큼 자동결제 된다. 897살 먹은 사내가 자판기 4호로 간다. 자판기 4호는 그 사내가 누른 버튼의 수만큼 끌어올린 %만큼 영양소를 공급한다. 모니터에 공급되는 영양소의 수치가 그려진다....... 단백질 –OK·지방 –OK·탄수화물-OK·비타민 -OK·무기염류 - 잔액이 부족합니다 %를 낮추거나 취소버튼을 누르십시오....... 그 사 내는 취소 버튼을 누르고 자판기월드 중앙에 있는 고객용 의자에 앉는다. 그리고 주위를 둘러본다.// 자판기 5호-바이오리듬이나 여러 감정들을 체크 조절해드립니다/ 자판기 6호-불필요한 기억들을 제거해드리거나 아름다운 추억을 심어 드립니다 (추억 다량확보)/ 자판기 7호-다양한 컬러로 피부색을 염색해드립니다(색상표 참조)/ 자판기 8호 - 원하는 스타일의 애인이나 친구를 만들어드립니다(아바타 avata 만들기 이용)/ 자판기 9호-신체부위에 필요한 특수기능장치들을 설치해 드립니다// 897살 먹은 사내는 잔액 부족으로 한번도 가보지 못한 자판기들을 둘러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난다. 감시카메라의 렌즈가 멈췄다가 그 사내를 따라 움직인다. 897살 먹은 사내가 자판기월드를 나가면서 혀를 차며 중얼거린다./ "이렇게 살 바엔 차라리 일찍 죽는 게 나아"/ 감시카메라가 민감한 반응을 일으키며 그 사내에게 벌금을 징수한다. 물론 자동결제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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