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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느낌

박성준 시인

부흐고비 2022. 7. 28. 07:40

박성준 시인, 문학평론가
1986년 서울특별시에서 태어나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교 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2009년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을 수상하며 시단에 나왔으며, 2013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평론부문에 당선되어 문학평론가로도 활동한다. 시집으로 『몰아 쓴 일기』, 『잘 모르는 사이』가 있다. 2015년 박인환문학상을 수상했다. 현재 '는' 동인.

 



물 / 박성준
종이는 단호해진다// 누구나 액자 파는 가게 앞이 한 번쯤 필요했던 것이다 민은 지나치게 지나친 요구를 한다 하소연이다 절취선처럼 늘어선 얼굴들과 이따금씩 돌발적인 모래바람은 주민들의 구멍 난 부위를 다 감추기에 모자랐다// 염려를 놓지 않아도 언젠나 부주의한 사람들은 곧 잘 사라진다 밤이면 그간의 것을 탕진해버린 도박꾼 같은 얼굴을 하고 유리 바깥으로 흘러나오는 일부는 움직임을 멈춘다 목숨은 사회였다// 다 간격 때문이었다고 민은 흩어진 모래들에게 고함을 지른다 각자의 이유가 있겠으나 슬픔 또한 이 도시의 평균치를 마련하는 수많은 위험의 한 종류일 뿐// 공감은 액자속에 가급적 갇혀 있는 입장을 취한다 민의 그리움은 불황이다 사인은 뚜렷하지 못한다// 우산은 굉장히 편안해 보인다//

뜨거운 곡선 / 박성준
기념하고 싶은 날을 만듭니다 기억이 잘 나지 않는 꿈이/ 꿈을 꿉니다 나는 내 숨소리에서 네가 가장 두렵습니다// 남자가 안개처럼 눈을 감으면 만나지 못한 방들은 햇빛이 됩니다/ 이때 여자는 눈을 감고 겨우, 냄새에 대해 생각하곤 합니다// 새들이 제 그림자를 쫓아가 울면 맥박은 조금 더 분명해졌을까요/ 어떻게 한 번쯤 죄인이 되지 않고서 누군가를 그리워할 수 있는지// 먼 곳에서 물소리가 들립니다 무슨 말이든 해달라는 얼굴로/ 늘상 고함을 쳐도 좀체 구름 떼는 짐승 바깥으로 돋지 않고// 용서나 허락이 필요한 아침입니다/ 창문들이 어디론가 메스껍습니다// 손톱처럼 웃던 여자는 하품을 하다가 눈물을 / 종이에는 의자가 숨어 있고 물속에는 죄다 수술 자국뿐입니다// 벌써부터 도착해 있는 자목련은 남자의 이마를 닮았습니다/ 신작로 위에 분분하던 잿빛들은 놀랍게도 무릎이 아닙니다// 대체 이게 다라면, 남자는 계단을 내려가고 여자는 계단을 붙잡아 지웁니다/ 우리는 평평하게 숨을 쉬고 있습니다/ 나는 나에게 거절당한 적이 있습니다// 하품을 하면 눈물이 나는 이유는/ 꿈에서나 슬퍼할 일을 먼저 예감했기 때문입니다//

토포필리아 / 박성준
비가 옵니까 아니 눈이 맑습니다// 여기가 벽이로구나 아니 향기가 있었습니다 정적입니다 그럼 백색이구나 아니 가지 않은곳입니다 도착이 없는 도착이었지요 그건 상실이겠지 바다이거나 수증기입니다// 움직이거나/ 움직임을 멈추거나// 이상하거나/ 이미 상한 뒤거나// 죄송합니다/ 오늘은 아무도 죽지 않아서 일거리가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내가 주인이 아니었습니다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럴 리가 그럼 여기가 벽이로구나 아니요 향기가 있었습니다 누가 왔다가 갔구나 아니요 잠시 버릇을 놓쳤습니다// 죄송합니다/ 땅이 이동합니다/ 구름 대신에//

아껴 쓴 일기 / 박성준
나는 왜/ 열 살부터 너라는 이름의 평전을 쓰기 시작했니?// 동무야, 화단 밖에는 너보다 일찍 다녀간 통증이 있단다/ 부르자마자 입술과 헤어지는 말이 있단다/ 꽃을 감싸고 있단다// 저 꽃은 꽃이 아니려고 애쓰는 동안에만 꽃인데/ 나무야. 온갖, 젊지도 않은 모양으로 구름을 쑤시는 필체가 있단다.// 어머니보다 긴 이름의 여자가 있단다./ 대책 없이 모르는 날씨/ 누이야. 숨을 쉬기 시작했니?//

저 바깥으로 향하는 한결같은 피의 즐거움 / 박성준
호스를 끌어다가 책장에 물을 준다/ 이제 더는 자라지 못할 것이기 때문에/ 이게 마음이다/ 목소리 속에 공터가 있다면/ 공터를 지나가는 벙어리 대신 말을 앓다가/ 두 눈 딱 감고 몇천 년쯤 말을 앓다가/ 두 눈 딱 감고 몇천 년쯤 말을 앓다가/ 너는 이미 죽었다고/ 추문을 당하고 싶다/ 살아온 날들보다 더 많이 산 것 같은 책들이/ 다시 가볍게 말라가는 동안/ 종이는 나이테를 생각한다/ 울퉁불퉁 울어버린 공간만큼/ 뿌리나 그늘이 있었던 적을 생각한다/ 활자들이 부서지고 빻아지고 물 안에서 저자들이/ 이리저리 부유하다가 가라앉고 또 문드러지고/ 배열을 바꿔 주인 없는 자리를 문 벌레들이/ 온몸을 기어 다녀도 그늘을 빌려 쓰는 이게/ 마음이다/ 물을 먹은 책들이 다시 가벼워지는 동안/ 종이는 무슨 말을 또 붙들고 있나/ 꼭 한 명쯤 불구를 만들어내는 가족력 때문에/ 언젠가 제 몫을 다해 미치려고 한 적이 있었던 것처럼/ 이제 성격이 되어버린 병은 자주/ 간밤에 환청을 데리고 들어오고/ 나는 마음 없는 마음자리에 맘에 들지 않는 그늘자리를 찾아/ 숨을 놓치고 싶은 그런 마음/ 물에 젖은 책들은 모두 선인장처럼/ 잎이 되지 못한 뾰족한 포기처럼/ 훌륭한 학살의 마음/ 황홀한 전쟁의 마음/ 행복한 야만의 마음/ 호스를 끌어다가 책장에 물을 준다 우연을 끌어다가/ 마음에 시간을 준다/ 선인장은 제 속을 적시는 대신 가시를 바깥으로 두고 있고/ 뼈 대신 가시를 품고 사는 물고기들은 물 바깥이/ 이미 죽음이란 것을 직감해 오래전/ 눈을 퇴화시켰다/ 두 눈을 딱 감고 몇천 년쯤 시간을 참아야/ 마음이 방치해둔 책에서는 버섯이 자라날까/ 악몽도 병균이라 꿈에서라도 버림을 받고 꿈에서도/ 식욕이 돌았다/ 무슨 말을 더 하고 싶다는 듯 낼름/ 책에서부터 혀를 내민 것들을 나는 가만히 만진다//

비 내린 비린내 / 박성준
물고기가 보고 싶어 수족관에 갔다 물고기가 있다/ 바다가 없는데 물고기가 있어 저 물고기는 슬프다/ 비가 내리고 있다 우산을 접고 뾰족해져 문을 연다// 신문을 보던 남자는 다가와 주문을 요구하고 나는 슬픔을 채 추스리기도 전에 두리번, 남자가 긴 목으로 나를 본다 이때 나는 가장 짧아진다// 광어를 주문하고, 주문된 대로 수족관에서 원인을 찾는다 기다린다 지루하다 나와 아무런 상관도 없는 결과// 전혀 슬프지 않다 아무래도 슬프지가 않아서 매운탕이라는 이름이 참 싫다 물고기머리탕, 물고기뼈탕, 가시탕이라고 부를 것이지 왜 하필 매운탕이란 말인가// 매운탕이 맵지 않다면 누가 슬플까/ 맵게 해주세요 남자는 나를 가만히 본다// 물고기 살은/ 새하얀 계단처럼 접시에 담겨 있다/ 언젠가 키스를 했다가/ 계단에서 뺨을 맞았다 싱싱하게 부풀어 오른 왼쪽/ 홀로 남아, 내가 서 있던 그 자리를/ 젓가락으로 집어/ 오물오물 씹는다// 여기서 이 살이 가장 슬프다/ 내 살이다/ 남자는 소주를 권하고 다시 신문을 뒤적이고/ 밖은 비가 내리고 있다// 비리지 않은 물고기는 슬픔을 모른다/ 매운탕은 자꾸 더 맵다//

나무의 약속 / 박성준
나무를 생각합니다. 대지는 의견을 감추는 법을 가르칩니다. 고백이 아니더라도. 음악은 나무를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산을 오르는 사람은 산을 알지 못하고, 직립을 한 이후부터 종이는 누구도 믿을 수가 없습니다. 피아노를 치면서 피아노가 희박해집니다. 산길은 누구 혼자서 높이를 이해했다는 증거가 아닙니다. 아무것도 붙잡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나무의 후렴은 할애된 공간보다 먼저입니다. 이를테면 석공이 돌 속에서 부처를 꺼내 왔다든가 향불 연기 속에다 절간을 지었다는 풍문이 풍경 소리로 노승의 그림자를 흔들었었다고 한들, 피아노는 여전히 뿌리가 없습니다. 불편은 계단입니다. 각자의 몫으로 넘어지기 좋은 그림자와 오차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나무였을 때를 생각하며 엽록으로 울렁거리는 느림의 명치 곁에는 잘 깎아놓은 불상이 있습니다. 피아노가 모르는 것을 나무가 알고 있습니다. 희망이 흉기가 되기도 합니다. 또 어떤 불상은 토르소처럼 보이기도 하지요. 피아노는 그늘을 모르고 있습니다.//

빠빠라기 / 박성준
음악을 듣는다. 혼자라는 나의 문명이 더 이상 나쁘지 않고, 모르고 있던/ 한 생애를 다 겪고 난 것처럼 얼굴이 얼굴을 모르려고 할 때가 있다.// 목소리 속에 살고 있는 너무 많은 귀신들.// 나의 연인. 바보. 오래만이야. 그때 또 다시. 왜 그랬는지. 너는 너로서. 내 안에 아직.// 나를 알던 사람들은 모두 나를 모른다. 때마침 느껴봤던 매혹들을 모두 다정이라 부른다.// 트랙이 돈다./ 희망은 폭력이었다.//

그대가 있음으로 / 박성준
어떤 이름으로든/ 그대가 있어 행복하다// 아픔과 그리움이 진할수록/ 그대의 이름을 생각하면서/ 별과 바다와 하늘의 이름으로도/ 그대를 꿈꾼다// 사랑으로 가득찬 희망 때문에/ 억새풀의 강함처럼/ 삶의 의욕도 모두/ 그대로 인하여 더욱 진해지고/ 슬픔이라 할 수 있는 눈물조차도/ 그대가 있어 사치라 한다// 괴로움은 혼자 이기는 연습을 하고/ 될 수만 있다면/ 그대 앞에선 언제나/ 밝은 모습으로 고개를 들고 싶다// 나의 가슴을 채울 수 있는/ 그대의 언어들/ 아픔과 비난조차도 싫어하지 않고/ 그대가 있음으로 오는 것이라면 무엇이나/ 감당하며 이기는 느낌으로/ 기쁘게 받아야지// 그대가 있음으로/ 내 언어가 웃음으로 빛난다//

기계들의 나라 / 박성준
물구나무서기를 하면 심장이 머리보다 위에서 뛴다. 이제 생각을 할 수 있을 것만 같다. 세상에! 생각하는 심장이라니? 머릿속이 다 쏟아질 것 같은 기분입니다.// 심장에서 생각한 생각이 온몸을 돌아 말초신경까지 전달된다. 생각은 바깥으로 빠져나오고 싶지만 피가 나기 전까지는/ 생각은 생각으로 그친다.// 그것을 우연이라고 부르죠. 생각이 없고 심장만 있는 것. 무슨 마음이 여기에 남아서 심장을 털어놓는 것.// 생각이 심장으로 다시 돌아온다. 이제 숨을 쉴 때마다/ 내 몸은 생각이다.// 머리가 터질 것 같다고! 괜찮아 심장이 터지지는 않을 테니까. 심장이 터지면 속으로 했던 생각들이 분출되겠지? 아니다. 생각이 그칠지도 모른다. 어슬렁거리며 저 풍경들이 내 심장 속으로 이제 다 들어올지도 모른다. 내가 우연이 될지도 몰라. 사건이 될지도 몰라.// 너는 무슨 생각으로 그런 말을 하니? 그럼 어떤 생각으로 무슨 말을 해야 합니까. 말을 마세요. 더 지칠 뿐입니다.// 물구나무서기;/ 나는 우연을 이해해보려고 몸을 뒤집었다. 움직이지 않아도 더 빨리 뛸 수 있다. 심장은,// 심장에서 나온 말이 지구를 들고 중력을 거부하고 신을 거부하고 두 발로 허공을 딛고 우주에서 힘이 가장 센 존재처럼 으르렁거릴 수 있게 한다. 마음이 안 가는 곳을 모두 거절할 수 있게 한다.// 무슨 말이 필요하니? 생각 있는 말이 필요합니다. 아니요. 생각이 없는 진짜 말이 필요합니다. 당신, 우연입니까? 우리 여기가 우연입니까?/ 아니요. 병든 사람입니다. 좀처럼 편해질 수 없는 사람입니다. 물구나무서기; 온몸으로 하는 생각. 모르는 마음을 만나려고 더 큰 벌을 받는다.// 그토록 그리워한 우연을 만나면/ 내 주먹이, 내 심장보다 조금은 더 컸으면 좋겠다.//

유월 / 박성준
건물 외벽에다 벽걸이 시계를 수십 개나 걸어놓은 철물점 남자에 관해 이야기를 하고 싶다. 그러나// 나는 그를 모르고/ 그 또한 나를 몰라// 대화를 나눈 적도 없는 사이였으니 무슨 이야기를 더 할 수 있나, 말을 잃은 사이// 그가 모자를 벗자 그의 휑한 민머리가 드러나고, 그 위로 수리할 수도꼭지를 겨드랑이 사이 끼고 집에 들어온 적도 있었던 것 같은 낯빛이었던가, 저 햇빛은// 어느 날인가 철문점 한길에 욕실 의자 같은 것에 쪼그려 앉아 성경을 읽고 있는 그를 가만히 훔쳐본 적이 있었지만, 끝내// 그는 나를 보지 못했다.// 뻐꾸기가 울어서 슬픈 날보다 슬퍼서 우는 뻐꾸기를 기억하는 날들이 많았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왜 인간이 우는 이유가 꼭 슬퍼서라고 말하고 싶은지, 건물 외벽에 멈춘 시계를 보면서 끄덕이게 되었다.//

덧니 / 박성준
문을 잠그고 나면, 꼭 당겨본다./ 당겨지면서, 당겨지면서, 나는 시위/ 나는 네게 시위를 한다./ 나일론실은 여기서 저기로, 길게/ 또 짧게, 아니, 더 늘어져 있어// 문을 닫아건다.// 문은 열리지 않으려는 힘으로 나를 붙잡고/ 나는 당겨지려는 힘으로, 내내 시시해져서, 더 시시하게/ 문에게 안심을 준다.// 이름을 바꾼 애인의 어색한 이름을 발음해보면서/ 입술이 얇은 애인의 입속에, 불을 켜두면서/ 흔들리는 것들은, 저 흔들리는 것들은// 문은 모른다./ 흔들리는 것에 대하여/ 이곳과 저곳은 종이컵 수화기/ 말해도 서로 몰라줄 사태, 인기척은// 문의 심장처럼, 온다./ 똑. 똑. 똑똑하지 않은 나는, 문의 안쪽, 너는 안쪽/ 생각해주면서, 안쪽에서만 시위를 턴다.// 라색수술로 애인의 바뀐 시력에 대해서 생각한다./ 차례, 차례 변심해가는 먼 내일에 대해서 생각한다.// 획, 되돌아서는 팔목을 잡아채고, 문처럼, 문을 등 뒤에 두고,/ 너를 내 앞으로 둔다. 저기 밖으로 문을 닫아건다./ 너는 문을 닫는다는 사태. 이제/ 나는 문, 너는 수수께끼, 답이 빤한 난센스// 서로 팽팽해져서는 서로 팽팽해진다./ 단순하게/ 말도 없이, 말도 안 되게, 흔들린다. 흔들려본다.// 입속이라면 모를까. 컵 속이,/ 인기척을 갖고 뛴다.// 문은 시위,/ 문은 만일에 나, 나는 용서할 수 없는 너// 누군가는 누구가가 위해 서운해져서 답답하고/ 문제는 풀리지 않아서 여전히 있고/ 나는 바깥을 모의하면서 차분해져간다.// 누군가 날/ 꼭 잊어주길 바랐다./ 포개어지면서, 포개어보면서//

과제 / 박성준
우리에게 아주 덕망이 높았던 교수는 돌연 강의실에서 담배를 피우면서 여러분께서 지금 못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아느냐고 질문을 해왔다 목소리는 낮았고 매우 단호했기 때문에 몇몇 여학생들은 그걸 폭력으로 받아들이고 강의실을 박차고 나갔다 대다수의 학생들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믿을 수 없다는 듯 갸우뚱 교수를 올려다 보았다 종이를 찢을 때마다 벌레소리가 들린다거나 손금에 서식하고 있는 새에 대해 말해야겠다는, 혹은 순간이동을 할 수 있다는 가벼운 농담조의 이야기들은 그 덕망 높은 교수의 재미없는 위트 정도로 받아들일 수 있었지만, 이렇게 직접적으로 어떤 실천에 대해 질문하는 일은 수십 년간 강단에 있으면서도 없었던 일이다 썩은 과일은 술이 되고 술을 마시면 씨가 없는 과일처럼 결국에는 조용해지듯이, 아무도 말하지 않는 강의실 안에서 교수는 누구든 말을 시작할 때까지 기다려주기를 작정했다 개중에 용기가 있던 학생이 제 말 속에 사투리를 억누르며, 그럼 교수님께서는 우리가 무엇을 못하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하고 정해진 답을 물었으나, 그런 종류의 빗겨나간 질문들로는 이와 같은 침묵을 깨기가 어려웠음으로 교수는 세상에서 가장 인자한 얼굴로 담배를 교탁에 비벼 꼈다 표현되는 것은 그뿐이었다 모두에게 필요로 하는 시간이 지났으나 모두에게 적당한 결과는 생성되지 않았다 그리고 우리의 그 덕망 높았던 교수는 할당된 시간을 다 채우고는 짐을 챙겨 강의실을 빠져나갔다 안심한 학생들은 차례차례 그 뒤를 따랐고 다음 시간은 또 어떻게 견뎌야 할지 왠지 모를 부채감을 가지고 희희덕거렸다 아무도 없는 강의실에서 교탁에 담배꽁초를 치우는 학생이 있었다 학생은 다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오히려 / 박성준
누가 내 편이 되어줄까// 독이 든 은수저처럼 입에 문 말들이 검게 변할 때 삼덕공원에서 담배를 피운다 연기는 왜 푸르지 않을까 생각이 생각만큼 저릴 때쯤 교복을 입은 아이가 다가와 담배 두 갑만 사달라고 부탁한다 돈은 드릴 테니 아무 것도 묻지 말아달라고, 딱 말보로 두 갑이면 된다고 한다 그토록 모르던 바람은 누군가의 몸을 살다나온 숨이라 너 그러면 안 된다고 말하려던 찰나, 언니들이 안 사오면 죽이겠다고 꼭 사가야 된다고, 아이는 모르는 팔을 잡고 흔든다 여기서 무슨 말을 해야 독이 되려나, 허나 말 하지 못하고 담배 두 갑을 사주고 난 후 나는 몇 분전보다 조금 더 파래진다 꾸벅 인사를 하고 아이는 왜 한 번 이쪽을 돌아봤을까 모르는 사람이 우연히 이름을 불러줬으면 좋겠다 담배 한 대를 더 피우고, 대체 나는 누구의 편일까 생각한다 내일에 살고 있을 아직 모르던 내가 겨우 그리워지는 순간, 침묵은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기 위해 평생을 쓴다// 삼덕공원을 지나 모텔 골목, 그 아이가 뒷문을 온몸으로 밀고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 말보로 두 갑을 손에 꼭 쥐고//

몽상가(夢想家) / 박성준
돼지는 집중한다. 혼신의 힘을 다해 제 위장을 움직이면서 고기가 자란다. 돼지는 날씬하다. 돼지는 차분하고, 고기는 중력을 향해 늘어지기 위해서 수없이 서로를 껴안는다. 고기들의 연대감은 시끄럽고 돼지의 뒤집힌 코는 수그려서 먹기가 편한 형태로, 열등하다. 목숨을 걸고 소화를 시키려는 집단의 고요는 비우려는 것이 아니라 다시 채우기 위해 유혹이 깊다. 돼지는 자라지 않는다. 한 번도 몸을 사랑한 적이 없고 한 번도 하늘을 올려다 본 적이 없다. 전생으로부터 알아차린 일관성 있는 식사의 궁리는 저절로 외로워지기 위해서다. 탄력 있는 웃음이 되기 위해서다. 고요한 고통을 위해 돼지는 막다른 운명을 택한다. 축사 바닥에 쓸리고 있는 찰랑거리는 배는 돼지의 유일한 불감이다. 돼지는 울음으로, 살찐 머릿속의 말을 다 옮겨 적지 못한다. 기꺼이 고기가 되기 위해 심장이 뛴다. 생각이 날씬하다. 그런 집중.//

회복기의 노래 / 박성준
이제는 괴롭지 않다/ 나는 여전히 더러운 것을 아름답다 치장할 용기가 없으나/ 다시 타오르는 대지의 울렁거림과 태양의 비스듬한 고해,/ 산중의 바위들이 불어 대는 입김들을 예감할 수 있으니/ 조용한 그날의 봄과 나는 오래 싸우고 있는 중이다// 세상 어디에도 죽어서 집을 짓는 자유는 없고/ 어디로 갈 것인가, 물음을 청하는 백골은 없다//
*// 누이야/ 어떤 날은 아비의 형이라는 기운이 찾아와서 굶주림을 주고 가고 온몸에 가려움만 놓고 사라진다 다른 날은 그 형의 배다른 당숙이란 분이 나타나서 온종일 제 말 좀 들어달라고 울다 간다// 할애비는 내 정수리를 밟고 서서 종종 깨끔질을 하고, 편두통을 주고, 내 애인의 조상이란 분이 찾아 와서는 다락에 자물쇠 좀 풀어주라 휘리릭, 휘리릭 풀어달라고 꼬라지를 내고 간다// 슬퍼 목 놓아 웃어버리자니 나라는 것이 꼭 이런 날 뿐인가 하여 이런 날 뿐인가 하고, 여간 해서 웃음이 오르지 못하고, 이 생의 없는 기운들과 싸우다가, 나는 뒤도 없이 나를 떠나고만 싶었다// 누이야 안부를 전해오지 않는 누이야, 보라// 저물수록 저 혼자서 가는 강물과 현실을 멸시하며 웃는 친절과 허름한 옛집에서 술 한 독을 내오는 질투만이 있을 뿐/ 나는 전혀 아프지 않다//
*// 지난날의 내 기억이 정확하다면/ 아무도 없는 방 안에서 홀로 책을 읽다가, 몇 줄만 책을 읽다가, 그 책을 꼭 껴안고 한 반 만 년만 잠이 들어도 좋을 먼 곳에서 나는 눈을 떴다 다른 곳에서// 내 이름을 부르는 음절들/ 나는 숨을 쉬기 위해서 술을 마셨다/ 나는 나를 공격했다// 이곳의 모순과 이곳의 이해가 잠깐은 궁금한 순간이 찾아왔다 모르는 내가 몽유 속으로 찾아온 데도 반갑지 않았다/ 나는 나를 간신히 그리워할 줄 아는 영혼이었고 피가 돌지 못하는 봄이었다// 누군가는 나를 찾아와 주겠지?/ 오들오들 내일에 굶주렸다 일어나보면 노랗게 젖어 있는 베개의 얼룩과 구겨진 이불보가 고작 여기서 나를 부활시킨 전부였다 곧이어 빛과 파도와 대지의 고운 향기가 나의 삶을 제압했다// 때때로 육체의 찬란함 속에서 쉬이 매혹 당하여 새삼스레 노래를 느낄 형편도 뭣도 없이/ 나는 내 뛰는 육체에 설랬다//
*// 누이는 아직도 병과 싸우는 중이다// 얼마나 더 외로운 뒷모습으로 윷동저고리를 갈아입고, 느닷없이 꽃이 떨어지는 나무의 자리를 찾아 고이 입김이나 불어주며, 괘를 던지고 있는지 나는 모른다/ 자유란 무엇인가 늙음이란, 말 할 수 없음이란, 기억이란,/ 내 기억이 정확하다면/ 죽어서 괴로운 것은 귀신이요, 살아서 노래하는 것은 무당이니, 누이야// 살아있다는 증명이 오직 병뿐인 당신/ 나는 숨을 쉬기 위해서 통증을 만든다//

좋은 이름을 골라 중얼거리고 싶은 / 박성준
존경해온 그에게 뺨을 맞았다./ (많이 먹는다는 이유에서였다)// 특별한 이유를 찾을 순 없지만/ 이것은 그의 진심이다.// 술자리 말미에서는 호사스러운 지인으로부터 궁금하지 않은 옛 애인의 소식을 접하게 되었지만 나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모든 게 분위기 탓이다)// 쏟아지는 저항심을 누르려고 오른쪽 볼을 부볐지만 뺨을 맞은 곳은 왼쪽이라는 슬픔/ 잘못 선택된 감정.// 거기 있거나/ 거기에 있지 않는, 그래서// 그 꽃을 버리기로 작심했다. 꽃을 어떻게 버려야하나 어디에다 버려야하나 쓰레기는 관급봉투에 버리는 것으로 배웠지만, 일단 물부터 마셔야했다 (무릎을 갉아먹고 싶어) 마음에서 이미 쓰레기라고 판단한 꽃이라면 종량제 봉투를 선택해보자. 여기서 그 꽃이 드라이플라워라면 굳이 음식물쓰레기봉투를 택하지 않아도 무방하다. 음식물쓰레기로 취급되는 것들의 목록을 적는다.// 이마를 맞으면서 뽑은 앞니./ 아무도 축하해주지 않는// 비닐 벽을 타고 흐르는 생크림 케이크./ 아무도 축하해주지 않는// 어두운 길에서 나를 선택한 고양이./ 아무도 축하해주지 않는// 나는 폭력에 노출되었어요./ 아무도 축하해주지 않는// 공원 화장실에서 낳은 아기/ 아무도 축하해주지 않는// 생일 축축합니다 생일 축축합니다. 사랑하는/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 사랑합니다 고객님/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 (모든 노력은 터무니없이 실패)// 치욕을 슬픔으로 가장한 얼굴이 돼서, 검지에 봉투 매듭을 걸고 복도를 걷는다./ 대다수의 경우에서 선택할 수 있는 것이 단 두 가지라는 게 진실.// 내가 모르게 된 많은 사람들은 차곡차곡 행복해지고 있다는 생각./ 다행히 오늘은 꽃을 버릴 수 있는/ 목요일.// 내가 겪은 실패가/ 여전히 어디선가 고통 받고 있을 것으로 믿는다.//

나는 섬이다 / 박성준
나는 섬이다/ 외로우니까 섬이다// 휘파람 불어도 좋은/ 고독한 섬이요/ 파도가 몰아치는 섬이다// 안에 그리움을 놓고/ 닿지 않는 뱃길에 기다림을 놓는/ 외진 섬이다// 독한 용솟음에 힘을 돋우는/ 하늘을 둔/ 힘겨워도 깨지지 않는 섬이다/ 결코 망가지지 않는 섬이다.//

랑 / 박성준
남자는 말을 하고 문을 닫고 사라진다 남자가 사라지고 문이 남는다// 문이 여자를 보고 있고 문은 여자를 남긴다// 남겨진 여자는 남자가 한 말에 대해 생각하면서 여자에게 남겨진 말을 생각한다// 남자가 남긴 말이 여자의 머릿속에 들어가 있다 문을 닫고 사라졌는데 머릿속에 말은 남아 있다// 문을 가만히 본다/ 순간 문이 여자에게 말을 건다// (문이 여자를 보고 있고 문은 여자를 남긴다)//​ 과제 때문에 오랜만에 책장에서 박성준 시인의 시집을 펼쳤다. 그러다가 우연히 랑이라는 시를 봤다. 예전에 봤을 때는 별 생각 없이 지나친 문장이었지만, 오랜만에 나의 자랑 이랑을 보다가 다시 생각났다. 내 마음대로 오역하자면, 김승일 시인의 시 나의 자랑 이랑에 대한 답가 같은 것이 아닐까. 물론 나의 자랑 이랑의 시적화자도 그렇다고, 이랑도 아닌 제 3자의 입장에서 본 답가. 남자는 사라졌다. 문은 여자에게 말을 건다./ 예전 위대한 캐츠비에서 나오는 대사가 기억난다. '벽을 사랑한 남자가 있었다' 그렇기에 문을 사랑하는 여자도 있지 않을까. 누군가 떠난 문을 사랑하는 여자가 있을 거라고, 랑이라는 시를 보면서 문득 생각났다.//

애타는 마음 / 박성준
아무도 랑의 말을 믿지 않는다 심지어 랑이 태어나던 순간에도 대다수는 랑을 인간이 아닌 다른 것이라 했다 누군가는 랑에게 묻는다 어떤 시간에서 왔느냐고 랑이 대답을 아끼면서 시간이 생성되었다 랑이 대답하자 랑은 사라진다 랑은 연기였고 랑은 미래였다 누군가가 스스로 랑이라고 주장하는 사례가 있었으나 그 또한 랑이었다 랑은 늘 랑이다 랑은 늘 혼자였지만 혼자처럼 보이지 않는다 놀라운 일이다 랑이 혼자라는 사실은 랑을 아는 혼자만이 알 수 있는 일, 아무도 랑을 믿지 않는다 때문에 어디서든 뜻밖에 랑이 나타나 랑의 말을 듣는다 랑은 공원에 앉아 있었다//

안아주는 사람 / 박성준
저곳을 본다 저곳을 바라본다 저곳에서 말하는 사람이 말을 하고 있다 불이 꺼지고 말을 놓친다// 꺼진 불 때문에 불의 아름다움을 느낀다 이해해야 한다 불에서 피가 나거나 불에서 다시 불이 붙더라도 저곳은 불이 있던 자리// 처음 맡는 냄새가 있었다/ 장소를 잃어버렸다// 저곳을 본다 저곳을 바라본다 저곳에서 말하는 사람이 피를 흘린다 내용을 알 수 없는 어둠이 이글거린다//

수증기 / 박성준
내일 오후, 애인이 떠나면서 선물한 벽지로 그는 도배를 할 것인가/ 그들은 서로에게 던지는 평서문에 대해 고민을 하는가/ 선량하다 이악스럽다 해맑게 억세다 삐뚤빼뚤 피가 흐른다? 무슨 말을 시작해야 좋을까/ 다정한 주름 밖으로 성대를 잘라낸 개처럼 편안하게 웃는 것, 그들에겐 부족한 것은 없는가/ 목이 마를 때면 송곳으로 방바닥에 애인은 그의 이름을 긁어주곤 하는지/ 그들은 서로에게 무능해서 착한 사람들/ 왜 이별은 가벼워지기 위해 뿌리가 길까//

비가 / 박성준
아- 하고 입을 벌리면 어, 하고 대답합니다 네게 아무것도 묻지 않아도 거기에 있었습니다/ 안 됐지만 이미 결정이 난 일입니다// 때마침 비가 내리고 비는 내립니다/ 나비는 비를 맞습니다 나비는 비와 다릅니다 나비를 피하려고 더 독하게 내리는 비, 나는 고개를 짧게 가로저었습니다 다만 열어 둔 창처럼 어, 하고 대답도 잘 해 봅니다// 리본은 여전히 신경질적입니다/ 되돌릴 수 없을 때 되돌리기 싫어집니다// 도시락을 싸 갈 수 없는 아이가 소풍날 비가 오기만을 기다렸던 꿈처럼/ 비가/ 이미 내리고 있습니다// 어느 부끄러운 장면들을 생각하면서/ 나비는 비를 모릅니다 비는 나비를 겪습니다/ 창밖이 허용한 만큼의 바깥을 겪습니다/ 저기 나비는 날고 비가 떨어지는 중입니다// 너에게서 길들인 장소들이 멈출 때/ 꼭 용건이나 통증을 만들어야만 몸을 느낄 때/ 소식을 뜨거운 환부처럼 감췄습니다// 익숙한 무표정에서 내가 얼마나 아팠는지 들켰을 때는 어느 쪽이든 더 많이 생각을 하고 난 이후의 일입니다// 늦었습니다/. 몸은 매듭입니다// 잘 알고 있던 조금의 용기는/ 약도, 병도, 기념이 되지도 않았습니다//

돼지표 본드 / 박성준
유리잔에 깨진 손잡이를 붙이다가/ 본드의 빵빵하게 부른 배를 만진다/ 벌러덩 뒤집힌 코를 잘 막아두지 않아/ 폭식성에 찌든 누런 군침들이 본드 입구에 말라붙어 있다/ 짧은 다리에서 흘러나온 끈끈한 길/ 돼지가 무거운 발을 내딛고 있는 걸까/ 누런 고무 화합물이 살 굽는 냄새로/ 목 비튼 지문을 간직하고 떨어져 나간다/ 돼지의 걸음 뒤로 유리잔과 손잡이는/ 서로 잊었던 시간을 지운다, 감정도 없는/ 축축한 살을 꼭 껴안고 있다/ 식탐이 말라붙은 환각 속에서/ 짧은 목으로 돼지가 먼 하늘을 되뇌어본다/ 머리 위에서부터 망명한 저 바람은/ 알프스 동굴까지 외치*―외치! 굳은 몸을 부르며/ 살찐 미라의 주검 직전 표정을 돼지에게 문질러놓았다/ 감긴 눈꺼풀 사이에서 잃어버린 웃음들이 흘러나온다/ 물렁물렁한 살 안쪽을 쭉 쥐어짤 때마다/ 식육점 갈고리에 두고 온 몸이 달그락거리고/ 흔들리는 오후 한때가 본드 주둥이 끝에서 굳어가고 있다/ 저 차갑고 허전한 육체/ 얼마나 맛있게 굳어갈 주검의 준비 과정인지/ 돼지는 울음소리 한 번 내지 않고 기꺼이 틈이 된다/ 유리잔과 손잡이 사이 얼어붙은 강줄기가/ 웃다 멈춘 순간의 눈꺼풀만큼이나 단단하다/ * 외치: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살이 찐 미라.//
* 209년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 당선작

결혼 홈쇼핑 / 박성준
주문한 남편을 생각합니다 새벽이 무서워 손톱 끝에 봉숭아 꽃물 들이며 홈쇼핑을 켜지요 몸속에 물관들이 단단히 차오르고 새 남편의 그림자가 잉크처럼 번집니다 세 시간을 잤을 뿐인데 꿈속에서 삼 년을 산 것 같은, 헛것들과 허튼 꿈만 꾸고 놀다 갑자기 밀린 빨래가 생각난 듯, 엉킨 몸들 사이에서 제 몸 찾아 건조대로 가지요// 몸에 집게 자국만 깊게 남아도/ 잃어버린 것들을 참아내야 할 시간// 방들이 헬륨 풍선처럼 떠오르고 있는데 누가 갈비뼈 아래로 꾹꾹 초인종을 누르나요? 어젯밤 새 남편들의 가슴 근육을 누르던 중매쟁이 쇼호스트처럼 띵동― 띵동― 내부로 흐르는 작은 떨림, 수화기를 들자마자 결혼 행진곡을 듣습니다 가라앉은 폭죽 냄새를 휘저으며 금방, 울 것 같다고 온몸 떨지요// 구입한 남편 이력이 전국 방방곡곡 텔레비전 전파를 타고 전송되면 전화 한 통의 짧은 연애, 오래 간직하고 싶은데 그렇게 지불한 시간은 반품도 안 된다지요 사용해보시고 선택하란 말 다 거짓말이야 남편이 쾅쾅쾅 자꾸 문을 두드리는데 두려워, 꽃을 참을 수 없어 활짝 홈쇼핑을 켭니다// 문밖에서 새 남편이 패키지로 데려온 작은 손, 딸아이면 어떻고 아들이면 어때요 자동 주문 전화가 보내준 남편인데요// 현관문을 잡고 망설입니다 몸이 열리기도 전에 배달될 남편만 생각하던 새벽 이렇게 꽃물 든 몸속에 집을 짓지요 주문한 절반의 생을 잡지 못해 웃으며 결혼 행진곡을 흥얼거리는 표정, 시들기로 작정한 꽃처럼 휩니다//
* 209년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 당선작

샴! / 박성준
계단이 날마다 옷을 벗어요 꿈틀거리던 척추가 이제 아프지 않죠 계단 중앙을 뚫고 깊어지는 가로등이 구불거리는 등짝에 주홍색 스타킹을 입힐 때마다 벗었다 내팽개치는 다리들 낭자한 빛의 의족들이 골반을 잊는 중이죠// 밤은 시퍼렇게 환한데 이 길 걷다가 나만 뜨거워져서 죄다 취소하고 싶은 벽이랍니다 모든 움직임은 뼈를 그리워한 주제가처럼 흘러내리고 모양을 좀체 바꾸지 않던 등짝도 뻐근해져 당신은// 감각을 주워다 더 멀리 밀어버리고 있는데 나는 왜 자꾸 당신 척추에 가라앉고 있나요 지독한 길들이 흉부를 꿰매고 또 헐렁한 계단을 꿰매고 태어나기도 전에 포개어진 주홍빛 그늘이 겹칠 때를 찾아// 검은 강 흐르지요 모두 거울이 깔린 계단이랍니다 당신과 내가 갈라지면서 할퀴고 매니큐어를 칠하고 당신을 딛는 순간 나는 당신 몸속으로 빨려 들어가죠 흩어진 허공의 주인들은 여기서 웅성거리는데 여보세요 어디 계세요 내 척추를 찾아도 허전한 이 느낌은// 손톱처럼 잘려나간 숨소리가 미리 파놓은 무덤으로 가 눕고 계단이 맨살로 밤을 견뎌요 까닭 없이 나를 버린 통증이 한 번 더 내 빈 곳을 생각하고 있어요//
* 샴 : 샴쌍둥이.
* 209년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 당선작

아비 디스크 조각모음記 / 박성준
아비의 허리가 덜 바른 시멘트처럼 무너졌을 때 LCD 모니터가 꺼지는 날이었어요 가루로 날리던 굳은 척수가 봄꽃보다 먼저 핀 선산에서, 쓰러진 목소리들이 피어오르는 그런 날이었지요 사뿐히 흐르던 바람이 징검돌처럼 아이콘 몇 개 방바닥에 띄울 때 나, 몰래 가보았지요 그 능선 아래로, 열병 난 컴퓨터가 조각난 아비 허리를 끼워 맞추고 있더랍니다// 꼬리뼈부터 간지럽게 아지랑이 피어오르며 분해되는 조각들 몇몇은 휴지통으로 몇몇은 아비가 바르다 만 시멘트 벽으로 풀풀 봄볕 좋아 날리는 마음, 제집 하나 갖는 게 소원이라던 소목은 휜 못처럼 척추를 잃어버려 집 안에서도 물렁물렁해졌다던데 그 물렁한 눈빛 속에 들어가 보면 아비만 척추를 잃은 것이 아니더랍니다 중심을 잃어버린 것들이 저마다 곧게 서서 서로가 중심이라 싸우는 꼴이 여간 사나워// 저 저 공장 굴뚝 좀 봐라/ 불빛을 제 혈관으로 흘려보내는 입간판들 곧게 선 것은 어떻고// 하여도, 장지 날 축대 하나 세울 여력 없는 가계는 참 물렁물렁 부드럽고 포근했지요 상여 차가 지붕에 사이렌을 달고 급히 당도한 곳, 정리를 마친 디스크 조각들이 처음 제자리를 찾는 그 빈 곳, 이제 속도를 내고 가시겠군요 내 아비! 날아간 몇 조각이 모니터 속 허공을 채우고 빈자리는 감은 눈꺼풀 속처럼 어두웠던지라 벽을 지고 들어가시는 연체동물, 나는 보지도 못했지요 초기화된 바람이 아비 눈자위에 흰 구름을 불러 모으고 있어요//
* 209년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 당선작

목소리 / 박성준
아무도 그 우물이/ 땅의 성대였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뒤란 깊숙이 비바람이 스미면/ 우물벽 틈사이 이끼의 뺨을 스쳐/ 우물 수위를 조절하던 성대,/ 바람의 기억을 간직한 물결은/ 우우, 남 몰래 돌아 울었다/ 땅의 목소리는 삼베적삼 향이 났다/ 툇마루에 뒤틀려 앉은 어머니가/ 더듬더듬 젖무덤을 찾는 아이처럼/ 까치발 들어 두레박을 내렸다/ 사라진 시간을 길어 올리며/ 땅은 가르랑 가르랑 가래가 끓고/ 후박나무 잎새로 입술을 떨었다/ 달빛의 사연을 함구한 장독들이/ 어머니 대신 곰삭아 부풀어 오르고/ 농민시위 현수막이 수의처럼 울었다/ 나는 내 왼쪽 갈비뼈 쯤에서/ 유년의 노랫소리를 만지작거렸다/ 점점 어둠으로 침식하는 목소리가/ 밤새 우물가에 풀벌레를 키워냈다/ 그 우물이, 어머니의 성대였다는 것을/ 아무도 알지 못했다.//
* 만해축전 전국고교생 백일장 대통령상(박성준이 안양예고 3년일 때 수상)

혀의 묘사 / 박성준
잣말을 하는 누이에게, 누이야. 그만 그쳐라./ 혼자라는 성질만 가지고 가서 스스로 벼랑이 되어라. 하고/ 둘이라는 혀를 가진 나에게/ 내가 그토록 그리워한 것이 다른 네가 아니라 입속 다른 형식인/ 나라는 것을 중얼거리다 보면/ 건강한 묘지로 가 무덤을 핥아대는 입은/ 나처럼 내 입인가, 나와 멀어질, 나 같은, 네 입인가.// 나는 얼음으로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다. 꼭두각시 목소리로 새벽을 외치거나 얼굴에서 얼굴을 뺀 얼굴로 누이는 누워 있었지. 누이야. 가기 전에 혀만 빼놓고 가라. 잠시라도 좋으니 쓰러진 담을 용서하고 가라.// 기침을 할 때마다 돌덩이들 쏟아져 나오고 춤꾼들은 절벽 끝에서 덩실덩실 숲에게 시위를 하는데, 누이야. 숲은 혼자의 것. 혼잣말이 아니다. 숲에게 소유된 나무들의 신성함을 보아라. 말에게 꼭두짓을 하고 밤에게 주목을 끈들. 나는// 온도에 민감함 액체일 뿐./ 붙잡아줄 수 없는 말이 없어/ 누이야 섭섭해, 머리 쓰다듬고 가지 마라.// 말을 옮기기가 싫다. 목소리야. 내 몸과 헤어지지 마라./ 입술을 두고 헤어질 각오로 순간, 순간 나는 나를 두고 나에 관한 말이다. 그저 오해다.// 말이 두고 온 혀/ 말에서부터 변형하는 혀, 말 때문에 다른 혀를 부르다가 복수가 된 혀, 둘이서는 먹을 수도 없고, 말할 수도 없어. 혀에서// 혀까지/ 묘지가 서는 입속/ 말은 입술과 헤어진 형식이지만 입술은 심장과 멀어진 상태라는 것을/ 나는 또 사라진다.// 필요 이상 잊을 일도 반드시 흉이 아닌데 물소리나 나는 내 갈빗대 사이에서 증발하는 것이 곧 죽음이라고/ 예감하지 말고 가라. 가능성이란 온도는 내게, 주지도 말고 가라.// 누이야 말 좀 하고 가라. 한술 미각에게 색을 주고 나에게 이름을 주고 가라./ 무덤을 열고 꽃봉오리처럼 흔적으로 다시 가라.// 꿀꺽꿀꺽 나를 깨물고 나를 다 마시고 가라. 말에게 피를 주고 말에게 칼을 주고 가라. 혼자서 말하지 말고 같이 말에서// 살다 가자.// 미안, 중얼중얼 싫다, 멀리 가라. 벙어리로 다시 태어나 묘지로 가자. 서로에게 혼잣말로 같이 가자.//

그 옛날 혀가 되지 못한 냄새들 / 박성준
주먹을 쥔 손가락 속으로 들어간/ 손수건은 새가 되었다/ 그러나 다시 장막은 처 지고 뒤엉킨 필름처럼/ 새는 혀를 갖고 있지 않아/ 또한 암전 속에서 우리는/ 입술 위에 올려놓은 지붕을 나눠 덮는다/ 주머니를 나누고/ 가격 당한 손찌검을 나누고/ 너의 붉은 뺨은 대체/ 어디서 찾아야만 하니? 나비넥타이는/ 벌레였던 적이 없고 빈손에서 튀어나온/ 꽃가루들은 향기였던 적이 없으니/ 맹인이 된 여자가 어떻게 딱/ 거리를 알아채고 뺨을 때릴 수 있었는지/ 왜 아치형 새장을 보고 예배당에 조아린/ 벙어리를 생각하게 됐는지/ 나는 모국어를 사랑한 적이 없으나/ 내가 배운 말이 나를 이토록 사랑할 줄이야/ 울렁거리는 시계추 앞에/ 좀처럼 말문이 막혀버리는 고립/ 눈 깜짝할 사이 홀연히 사라져/ 손수건으로 돌아간 새의 찰나를/ 여행이라 부르고 나면/ 나는 내게 잠깐 기대고 갔던 모든/ 기울기들을 대체 무엇이라 부르나?/ 모서리만큼 혀를 잃고/ 새처럼 부리를 벌려 밤새 종을 친다/ 그러나 종의 내부에는 공간이 없어/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그저 마술처럼//

고통의 축제 / 박성준
귀신은 고통이 없다.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고백만 한다. 뭐가 부끄럽니? 억울해요. 촛불 속으로 무수히 손목들을 받히고, 머리를 모서리에 받혔어요. 밖으로 피가 나는 것보다 안에서 터진 피가 더 성숙하다. 왜? 누이가 앓았던 병은 신병이니까.// 신도 병을 갖나? 신은 병을 갖지 않고 병을 준다./ 병을 모르는 것이 신이니까. 병신이니까./ 고백이라도 들어보자. 저 로맨틱한 ; 나는 죽어서 당신 몸속에 병균으로 태어나고 싶어요. 누이는, 이름도 모르는 할애/ 비, 동자신, 후궁 첩신에게 고백을 받았지. 이제 병을 얻었나? 얻지 않았다. 손목을 그은 건 누이 자신, 혼잣말로 나를 부르는 건 누이 혼자, 나는 고통스럽다.// 귀신 배꼽을, 핥아봤다고? 고통스럽다. 그게 말이나 되냐? 아무래도 혼잣말은 둘이 하는 말, 혹은 셋이 하는 말, 둘 간, 셋 간, 우리는/ 간이 아프도록 술을 마시고, 고통스럽다. 고통스러워./ 아픈 걸 단순히 고통이라 부를 수 없다. 고통은 고통이고 아픈 건 아픈 거다. 배꼽이 그렇다.// 뚱뚱하면 배꼽이 깊다고? 깊다 ; 때도 잘 낀다. 더 깊은 배꼽이었으면 좋겠고, 귀신처럼 생각이, 생각이, 자주 그쳤으면 좋겠다. 누이의 배꼽은 얕고, 누이를 생각하면 귀신 배꼽이 궁금하다./ 이상하게 중독성이 있는 냄새, 나는// 배꼽이 가렵다. 고백을 한다. 사람이다. 난 사람이에요? 여긴 꿈이지./ 그래 꾸민 사람인 거지. 귀신은, 누이는// 모르는 사람한테 고백을 받는다. 쉽게 치마를 열고 돈도 받는다. 신당에 향불을 세운다. 이제 아프지도 않아요. 병도 아니지. 병은 꼭 아프지만 아픈 건 꼭 병이 아니란다./ 아니오. 병도 병신이고 아픈 것도 병신이에요. 나는 병이 싫어요.// 그림자에도 배꼽이 있을까? 병균이 있을까? 몸이 아니라 빛 때문에 - 그래 빚 때문이어도 좋다. - 왜곡된 그림자는 자주 병신 같다. 병신! 고백도 못하고 병신 같은 것./ 왜 팔 없는 귀신, 다리 없는 귀신을 병이라 부르지 못할까?/ 뱀의 머리를 깨무는 꿈이 잦아 물어본 말인데, 누이에게 물어본 말인데, 나는 귀신과 병신의 차이가 여전히 궁금하고/ 허리가 반으로 딱 잘린 뱀이 서로 헤어진 몸을 여기, 저기, 두고, 꿈틀거린다. 살려는 건가. 죽으려는 건가. 귀신에게 고백을 하지. 살려는 건가. 죽으려는 건가.// 고백에는 고통보다 죽음이 따르나?/ 나는 누이를 따르기 싫다. 아니요. 고백 ; 나는 내 배꼽을 미친 듯이 혐오합니다. - 고통이 따라도 좋다. - 왜 누이는 할애비 제자가 되는 대신, 밤의 여자가 되었는가? 고백하세요. 사람으로 태어나서 귀신만 찾아다니며 누이는 왜 내게 고통스럽다 고백만 하는가./ 괜찮아요. 다 괜찮아요. 얼굴은 보지 않고, 누이의 볼만 어루만지며, 병든 내 손이여.// 오래 전에 죽은 사람처럼 고통이 없다. 누이가 차마 나를 보지 못하고/ 나, 귀신처럼 외로워져서//

배우(俳優) 4 ㅡ경외심 / 박성준
‘코끼리가 코가 길다’/ 코끼리는 코 때문에 코끼리일까?/ 끼리끼리 살다가 끼리끼리 죽어서/ 코끼리일까?// 내 문장에는 주어가 둘일까?/ 내가 둘일까?// ‘박성준이가 성준이가 길다’ 이거나 ‘박성준이가 박가 길다’라 하면/ 비문일까? 오문일까?// 부럽다 저 코끼리/ 코피 나게 쪽쪽 빨아줘야지// 다른 경우를 생각해도 좋다? 좋을까?// ‘나는 손금이 없다’/ ‘나는 없다’ ‘손금이 없다’// 동일할까? 일동- 할까? 차렷!// 이참에 ‘박손금’으로 이름을 바꿔 볼까? 보일까?// 박손금은 손금이 없다/ 나는 네가 없다// 나는 귀신이다//

삭* / 박성준
애인의 아이를 지우고 건너온 밤/ 도무지 어디가 아픈 줄을 몰라서 울음이 났다/ 그토록 발작하던 햇빛은 다 어디로 갔는지/ 자신에게서 빠져나와 모두 제 자신에게로 돌아가는 저녁/ 책가방 대신 애인을 업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빠져나간 것이 있다는데 더 무거워진 애인/ 그 중력이 싫었다/ 가슴팍에 돌돌 말린 우주야/ 한 근 떼 온 소고기가 손끝에서 잘랑거리는/ 거추장스러운 중력이 싫었다/ 핏물이 다 빠지지 않은 소고기에 미역을 둥글게 풀며/ 지구가 자꾸 돈다는 게 갑자기 느껴졌지만/ 다 기분 탓이라고, 아랫배를 쥐고, 자꾸 나오지 않는 오줌을 싸겠다/ 애쓰는 애인에게 나는 느닷없이 화를 낸다/ 다 기분 탓이라고/ 애인은 내 화를 다 받아주면서 짜증 대신/ 화장실 문을 닫는다/ 아무것도 흐르지 않는 변기에서 물이 흘렀으면 좋겠다/ 어딜까 지도에도 없는 그 땅/ 나는 그날 애인 대신 밤새 오줌을 쌌더랬는데/ 가고 싶다는 곳으로 좌표를 찍으며/ 그토록 꿈을 꾸고 싶었다/ 우리가 서로를 꼭 안고 달로 가는 꿈/ 6분의1만큼 줄어든 통증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먼 우주에서 온 것 같은 초음파 사진을 만지며/ 애인은 속삭였다/ 나는 하나도 아픈 곳이 없었다/ 노란 달이 다 빠져나가도록 지구와 달이 서로를 외면하면서/ 사진 속에 멈춰 있었다//
* 지구 둘레를 공전하는 달이 지구와 태양 사이에 위치해 지구에서 달을 관찰할 수 있는 상태, 갑자기 나타나거나 사라지는 모양을 나타내는 말.

정체와 불명 / 박성준
달걀을 삶는 동안 소식을 들었다/ 그가 돌아왔다는 것이다/ 가끔씩 본분을 잊고 튀어나오는 기대 때문에/ 얼마나 많은 그늘이 육체를 다녀갔는지/ 다 알 수는 없지만/ 소금을 꼬집어/ 누군가의 끓는점을 잠시 가라앉힌다/ 명치끝에 걸린 슬픔을 다 누르려면 얼마나 많은/ 소금에 간섭당해야 하나/ 고백이란 그런 것이다/ 그에게도 한때 격정을 벗 삼아 몇 통의 아름다운 유언을 적었던 필체가 있었다/ 간판에 손글씨를 쓰러 다니던 바퀴도 있었고/ 달에 귀가 돋을 때까지 얼룩을 떨어뜨리며 믿던/ 싱싱한 골목도 있었을 것이다/ 다 끓기 전에 꺼내도 됩니까, 긍정하지 않아도/ 그가 돌아왔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 몸의 기울기를 갖으리라/ 설탕을 문질러 손톱 사이 검정들을 지우는 저녁이면/ 이불 속은 늘 춥고 어둡다는 걱정, 기다려라/ 소식보다 기적은 대부분 무슨 이야기부터 감시해야할 확신으로 오고 있으니/ 달걀을 삶는 동안 그가 다녀갔을 것이다/ 끓는 물속에도 구름이 있다고 믿고 싶어지는/ 미세하게 깨진 달걀에서 흰 자가 풀려나온 것을 보는, 그런 동안에도//

비굴과 굴비 / 박성준
1// 이복형은 나를 인마라 불렀다. 어디서든 이름 대신 인마가 찾아오면/ 나는 형이 있는 쪽으로 달려가 무릎을 꿇었다./ 그때마다 꿇었던 무릎, 그 무릎을 나는 약속이라 부른다./ 바닥에 불도 들지 않아 시리도록 딱딱한 약속, 아니야 다시는 안 그럴 테니 용서해달라고/ 모르는 죄를 고하는 약속, 새끼손가락을 거는 대신 무릎을 걸겠다고 약속하고/ 이복형은 인마에게 벌을 내린다.// 벽에 붙은 거울은 구멍이 아니야. 그러나 거울을 보고 나는 뺨을 때린다./ 거울 속에 배경으로 서 있는 형의 얼굴에 미소가 돌 때까지/ 한 대, 한 대 숫자를 큰 소리로 세며/ 인마는 내 뺨을 때렸지./ 더 아플 것이라고 약속을 하고,/ 약속에 쥐가 나도록 최선을 다했다./ 그러자 형은 웃는 대신 인마의 머리통을 때렸다. 이제 다 끝난 것이라고/ 인마는 웃었다.//
2// 변성기가 오지 않은 형은 싸가지가 없었다./ 엄마는 형이 없을 때만 형을 다루는 데 불편을 토했다. 나도 토했다. 눈물 나게 맞지 않으면 눈물을 만들려고 입에 손을 넣고 토했다./ 그때마다 엄마 옆에는 인마가 있었다./ 집에서 인마는 어디서든 다루기 쉬운 약속이었고 형이고 엄마고 할 것 없이 내가 인마, 전마, 얌마가 될 때마다, 나는 목이 쉰 형의 목소리를 상상했다.// 아빠는 이복형의 머리를 자주 쓰다듬었고 형은 개처럼 잘도 웃었다./ 엄마는 오늘 저녁 식사를 할 때도 나를 제일 늦게 부를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개자식─// 이복형은 아빠를 곧잘 따르다가도 방문을 닫고 들어가면 아빠를 개자식이라 부른다. 개자식을 아빠라고 부르진 않는다./ 방문 너머로 다 듣고도 아빠는, 못 들은 척 안심을 한다./ 엄마는 조용히 주방에서 굴비를 굽는다. 생선을 많이 먹어야 욕도 잘한다고// 굴비 살 속에 숨어 있던 물기들이 기름에 타는 소리, 몸속에 챙겨둔 물들이 타는 냄새가 온 방 안을 흥분시켰다./ 가시를 말해주지 않아도 이복형은 굴비를 잘 발라 먹는다. 또 아무리 흥분이 되더라도 차근차근 형은, 절대 나를 개자식이라 부르지 않는다.//
3// 인마는 무릎을 꿇고 약속을 한다. 다시는 생선을 먹지 않겠어. 다시는 인마라 불리지 않겠어. 다시는 무릎 꿇지 않겠어. 인마가 일어선다. 일어서니 훌쩍 자라 밖이 보인다.// 창밖에는/ 야 인마, 개자식아 하고 아빠 멱살을 잡고 때리는, 모르는 남자들// 이복형은 단숨에 남자들 앞으로 달려가 튼튼해진 무릎을 꿇었다. 다 약속된 포즈였다.//

것들과 들것 / 박성준
불이 나간 전구를 오래 바라보고 있을 것/ 자판기 반환구에 이따금씩 주머니에 있던 동전들을 모두 털어둘 것/ 토끼에게 콘택트랜즈를 먹이로 줘볼 것/ 오랜 줄을 기다렸다 차례로 되었을 때 돌아서볼 것/ 아는 길을 물어물어 찾지 못해 헤매어볼 것/ 제 살 어딘가를 딴 곳인 듯 오래 깨물어 흔적을 만들 것/ 도통 알 길이 없는 외국어 강의를 경청해 볼 것/ 물어뜯은 손톱 대신 먼저 웃을 것/ 책상에게 물을 줘볼 것/ 모르는 사람을 향해 내 이름을 힘껏, 불러볼 것//

방화범이 지은 집 / 박성준
불을 놓으면서 사내는 옷장의 복부에 관해 생각한다/ 뿌연 이중창 속 침대로 걸어가는 아이의 실루엣을 생각한다/ 나팔꽃처럼 번지는 한 송이의 불빛이, 바깥을 향해 조용히 흔들릴 때/ 풀어놓은 불이 사납게 방 안을 짖으며 날뛸 때/ 눈 없는 인형이 춤을 추기 시작할 때/ 몸 안팎에 챙겨놓은 사물의 색과 연기들이 떠오르면서, 순결해질 때/ 주검보다 먼저 사내에게 악수를 청하는 것에 대해 생각한다/ 죽은 줄만 알았던 범인이 진실을 뒤집어 밟고 걸어올 때/ 걸어 다니면서 온몸으로 구두 자국을 찍는 느낌표와 날마다 추방당할 곳으로 기어 들어가는 검은 외투에 관하여 생각한다/ 범인 얼굴을 물음표로 만드는 사건이 축 하고 옷걸이에 늘어질 때/ 서로가 서로에게 좀더 견고한 손잡이가 되어줄 때/ 옷장에 숨어든 아이에 대해 생각한다/ 옷장 속에서 다리를 끌어안고 고개를 무릎 속으로 침몰시키는, 아이의 긴 잠에 대해 생각한다/ 살이 고요를 향해 녹아가는 것을 생각한다/ 범인이 씩, 웃음을 짓는 착란에 관해 생각한다/ 불길과 사내가 침묵할 때/ 불길하게 불길이란, 서로에게 얼굴 없는 청자가 될 때/ 옷장 속 아이 몸에 달라붙은 인형이 툭 떨어졌을 때/ 주검을 수습하면서 생각한다/ 수습되지 않는, 다른 주검의 집에 관해 생각한다//

괄호에 관한 모럴 / 박성준
여기 저기/ 온다 온다// 요술가위 역 중화요리 신선루/ 돌아가는 삼색봉/ 빨강, 파랑, 흰색 대신/ 목 잘린 긴 머리의/ 노란 여자// 보이지 않는다/ 엎지르다 만// 볕을 따라 인도 턱을 넘어 올라오는 오토바이/ 멈추고 나서야 투명해 보이는 바퀴살/ 샤방샤방 스킨케어 칠판입간판 앞으로 흘러가고 흘러가던 담배 연기/ 본다/ 한길에 수건을 널어놓은 바지랑대/ 새하얀 바람소리 붉은 간판/ 대아 아구찜·탕/ 유리벽에 아구탕·찜/ 벽 너머 흐린 에메랄드풍 버티컬/ 맥박을 떨어뜨리는 실외기 소리/ 보이지 않는다 보지 않아서// 이층에는 연세 이문 소아과/ 일층에는 우량아 약국/ 유리문에 매달린 종소리/ 멀리서부터 약, 약, 약, 붉은 글씨들/ 온다 오지 않아서/ 오기로 했던 사람// 처방전을 팔랑인다/ 이층 창가에 흘러내려 구겨진 블라인드/ 볕을 정리하는 손/ 간호조무사의 발갛게 달아오른 손바닥/ 보이지 않는다/ 전신주를 방해하던 가로수 가지가 모두 잘려나갔다던 그 계절// 고개를 숙이며 참새 한 마리 배수구 창살 속으로 들어가는 잠깐 사이, 등 뒤로 근린공원 정자에는 순식간에 늙은 노인들 꾸벅 졸다 일어난 오후의 선홍빛, 눈꺼풀을 날개삼아 날아가는 저 나비들처럼 신문을 보다 말고 나를 오래 응시하는 여자/ 점원// 금이빨 삽니다/은수저 삽니다/ 빨강, 파랑, 흰색 바탕 입간판/ 우리동네 작은 공간 나들가게/ 사요나라/ 그 나라에 가서 살고 싶어/ 보고 싶은 곳을 두고 있는 힘껏 혀를 깨문다/ 간다간다/ 저기 우리//

외국어연수평가원 / 박성준
건물에 들어가서 보았다/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는 백인/ 길을 묻다가 지갑을 떨어뜨리는 여자/ 농구코트 안에서 달리는 인간들// 눈을 감으면 제 자리를 찾는다// 하나를 살리기 위해/ 여럿을 죽이고 있다는 생각// 건물은 밖으로 계단을 토해놓았다// 이만큼 이토록 높이를 가진/ 건물의 입구//

오늘의 효능 / 박성준
찬물에 카레를 풀었다. 그것은 뭉쳐 있지만 차분하고, 무겁지만 곧 헤어질 줄 안다. 카레를 푸는 당신 곁에는 작은 일에도 심장이 뛰는 그가 있고, 마음에서 한 사람을 지우고도 여전히 탁해질 수 있는// 기회가 있다. 그곳에서 카레는 조용하고 밝고 금빛으로, 가장 굉장한 사건인 양 녹아든다. 내색하지 않았지만, 그는 분명 나를 싫어한다. 성질은 차갑고 독이 없다.// 간을 맞추지 않아도 되는 충분한 음식, 다 알고 있지만 쉽지 않은 일을 멀쩡하게 해야 할 때, 카레 풀어낼 완벽한 물이 냄비에 쏟아진다. 여기서는 안 되는 일이라도 불순물 없이 고운 그 말이 찬물에// 카레를 녹인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휘젓는 냄비 속으로 얼굴을 쏟아낸 그는 까닭 모를 슬픔으로 기울어진다. 무엇인가 집요하게 찾아내겠다는 결의로, 그곳에 동의할 일이 있어 끄덕였던 봤던 표정으로// 당신은 카레를 만드는 그를 보고 있고 나는 당신을 충분히 사랑하지 않는다. 그 사람에게도 추억 같은 것들이 있을까. 다행이라는 말은 너무 어려서 고민할 필요도 없이 분명히 그는 처음,// 나에게 가레를 끓여준다. 카레는 어디서나 풀리고 언제나 어울린다. 숨소리였을까. 단지 꿈이었을까. 그때로 가고 싶었던 같다. 못 들은 척 헛디딘 카레의 공동체로 물은 차고// 그와 나와 당신은 그리고 넷이서 카레를 먹는다. 풀 수 없는 것들이 나와 당신 사이에서 녹고, 당신은 누구를 싫어했을까. 아프다는 사람은 멀쩡해져서 돌아온다. 찬물을 카레에 푼다. 이것은 더 이 상 물이 아니다.// 나에게 없는 세상. 타는 소리는 아는 사람의 살 냄새였다.//

대학 문학상 / 박성준
시를 열심히 쓰던 동기들은 모두 어머니가 아팠다. 암부터 관절염까지, 최근에 흰머리가 늘었다는 것도 쉽게 병으로 바뀌었다. 한 날 술자리에서/ 가장 아픈 엄마를 가진 동기가 더 좋은 시를 쓸 수 있다고 우리는 은연중에 동의했다. 우리는 좋은 시를 쓰고 싶었다. 서로가 서로의 불행을 부러워하면서, 읽고, 찢고, 마셨다.// 담배를 피울 때도 침 뱉는 연습이 중요했다. 몇 밀리짜리 담배인지가 중요한 녀석, 얼마나 더 많이 읽었다고 제목을 잘 외우는 녀석, 인디음악에 미쳐 있는 녀석, 영화와 시를 착각하는 녀석, 풀이름, 꽃 이름을 잘 아는 녀석, 녀석들./ 녀석들은 모두 좋은 시를 썼다./ 엄마가 아팠으니까.// 우리는 서로가 모르는 부분만 걸러 듣고, 더 새로운 것을 알고 있어야 좋은 시를 쓴다고 생각했다. 덜 아픈 엄마를 더 아프게 생각하면서 우리는 모두 절실해졌다./ 때문에 더 새롭지 않으면 덜 새로운 시를 쓰고 있다고 믿었다. 자신이 덜 새로워질까 봐, 말을 아끼는 동기들이 늘어났다.// 형식적으로 그들은 모두 엄마가 아팠다. 모두 시골 출생이었고, 흡연자였다.// 책 제목과 영화 제목과 음악 제목과 풀이름, 꽃 이름에 미쳐 있는, 이름에 미쳐 있는 그들, 시보다 제목이 더 근사했다./ 자신의 시는 내용이 형식을 압도하는 형식이라고, 서로 다른 사투리를 쓰면서, 서울말도 여기선 쉽게 사투리가 되면서, 서로의 담배를 돌려 피웠다. 축축했다. 너무나도 증상이 같은 엄마와 너무나도 같은 병을 앓는 시간이 계속되었다.// 열심히 투고하던 동기들은 공평하게 서류 봉투를 나눠 가졌고, 늘 항상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늘 술을 마셨다. 연말연시에 더 심했다. 시에서 누구보다 밀고 당기기를 잘했고, 치고 빠지기를 잘했다.// 과방에서 책을 태우다가 불을 내기도 했다. 과방 복도에 소화기를 뿌려 학교에 대자보가 붙기도 했었다. 그들은 서로가 범인이라고 자랑을 하고, 그 거짓말을 들어주면서 더 진지 하고, 친해졌다.// 그리고 등단자가 나타났다./ 우리의 모임이 해산되었다.// 시인은 덜 새로운 시를 쓰기 위해 담배를 끊었고, 그제야 우리의 아픈 엄마가 더 예뻐 보 이기 시작했다.//

 

 

 

78세 원로 시인 "난해한 요설도 시인가"… 젊은 신진 시인 "글쓰기 방식이 다른 것"

78세 원로 시인 난해한 요설도 시인가 젊은 신진 시인 글쓰기 방식이 다른 것 계간지 시인수첩 좌담회서 허영자·박상수·박성준 시인 논쟁 허영자 - 난해시 정리해 자아반성 녹여야 박상수·박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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