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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태환 시인
1960년 부천 출생. 고려대학교 사범대 국어교육과, 동대학원 국문과 석사, 박사.
1984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계해일기」가, 한국일보에 「최익현」이 당선하여 등단,
시집으로 『북한산』, 『수화(手話)』, 『별빛들을 쓰다』, 『복사꽃, 천지간의 우수리』가 있으며 시론집 『미당 시의 산경표 안에서 길을 찾다』, 비평집 『경계의 시 읽기』, 세상읽기 『오늘의 빵에 관하여』 등이 있다. 제2회 윤동주 서시 문학상, 2017 시와 표현 작품상 수상.
최익현 / 오태환
1/ 엎드려서 울고 있다/ 낮게 내려 앉은 대마도의 하늘/ 성긴 눈발, 춥게/ 뿌리고 있다./ 바라보고, 또 바라보아도/ 서릿발 같은 바람소리만/ 어지럽게 쌓이는/ 나라의 산하/ 불끈 쥔 두 주먹이 붉은/ 얼굴을 감춰서/ 설악 같은 울음이 가려지겠느냐./ 파도같은 분노가/ 그만 가려지겠느냐./ 어둡게 쓰러지며 울고 있다./ 희디 흰 도포자락/ 맑게 날리며/ 성긴 눈발, 뿌리고 있다./ 눈감고 부르는/ 사랑이 무심한 시대에/ 하염없이 하염없이.// 2/ 바다가 보이는 곳/ 한 채의 유림이 춥게/ 눈발에 젖어 있다./ 희고 작은 물새 하나가/ 끌고 가는 을사/ 이후의 정적/ 너무 크고 맑구나./ 서럽게/ 서럽게 황사마다 사직의/ 흰 뼈를 묻고/ 일어서는 낫, 곡괭이의/ 함성이 들린다./ 불길 타는 순창의 하늘/ 말발굽 소리의/ 눈발, 희미하게 날린다./ 문득 돌아다 보아/ 무심한 이역의 들판/ 거칠게 대숲 쓰러지는/ 얼굴이 더 이상/ 서책도 필묵도 아닌데/ 자주 찬 바람이 일고 있다./ 몇 닢, 눈발을 따라.// 3/ 얼마를 더 용서하고/ 이 이상 얼마나/ 많은 눈물을 뿌려야 하랴./ 자꾸만 하늘빛은/ 낮은 곳으로 모여들고/ 뇌성같은 마음/ 다 하지 못한 난세의 꿈은/ 그냥 한이 되고/ 물살이 되고 만 것을/ 왜 저리 눈발은 화사한지./ 지척마다 희게/ 몰려서 나는지./ 깨끗한 두 눈알이 남아서/ 적막에 이르는/ 바닷길은 너무나 멀다./ 조금씩 세상의 저녁은/ 어두워지고/ 푸르고 큰 바다는 저렇게 잔잔한데./ 무정함도 간절함도/ 없이 저렇게 조용한데.
* 1984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별빛들을 쓰다 / 오태환
필경사(筆耕師)가 엄지와 검지에 힘을 모아 철필로 원지 위에다 글씨를 쓰듯이 별빛들을 쓰는 것임을 지금 알겠다// 별빛들은 이슬처럼 해쓱하도록 저무는 것도 아니고 별빛들은 묵란(墨蘭)잎새처럼 쳐 있는 것도 또는 그 아린 냄새처럼 닥나무 닥지에 배어 있는 것도 아니고 별빛들은 어린 갈맷빛 갈맷빛 계곡 물소리로 반짝반짝 흐르는 것도 아니고 도장(圖章)처럼 붉게 찍혀 있는 것도 아니고 더구나 별빛들은 반물모시 옷고름처럼 풀리는 것도 아니고// 별빛들은 여리여리 눈부셔 잘 보이지 않는 수평선을 수평선 위에 뜬 흰 섬들을 바라보듯이 쳐다봐지지도 않는 것임을// 지금 알겠다 국민학교 때 연필을 깎아 치자(梔子)열매빛 재활용지가 찢어지도록 꼭꼭 눌러 삐뚤빼뚤 글씨를 쓰듯이 그냥 별빛들을 아프게, 쓸 수밖에 없음을 지금 알겠다// 내가 늦은 소주에 푸르게 취해 그녀를 아프게 아프게 생각하는 것도 바로 저 녹청(綠靑)기왓장 위 별빛들을 쓰는 것과 하나도 다르지 않음을 지금 알겠다
홍어 / 오태환
쐐한 박하(薄荷)잎 향기가 쓸쓸했다 썩은 두엄더미와 썩은 볏짚 속에서 삭힌 한 철 내내// 비뚜로 구겨진 채 검게 빈 구강, 아직 선득선득한 배지느러미, 방패연같이 납작하고 흐린 몸피, 미늘 같은 가시가 돋친 꼬리, 울금빛 애까지 샅샅이// 항구의 그림자처럼 어두워졌겠다 항구의 그림자에 항구의 그림자가 포개진 것처럼 어두워졌겠다
불완전연소의 허기 / 오태환
콧속과 인후를 양잿물에 재 놓은 것 같다/ 뱃살 한 점에 미나리를 얹고 양념간장을 찍어 입안으로 가져간다 그러니까 소주잔을 곁들인 무심한 젓가락질은/ 다만 그것의 쓸쓸함과 내통하거나, 그것의 어둠에 독하게 부역하는 일// 이 숨죽인 식욕을 채우는 저녁나절, 눈발 날리는 항구의 저녁나절
뿔·2 / 오태환
꽃이 하늘기슭에서 뵐 때 맞춤인 것처럼, 뿔은 꽃 옆자리에서 돋칠 때 품새가 제격이다 꽃도 돋을볕처럼 밝게 핀 것일수록 좋다 뿔은 하마하마 참고 기다린다 그런 때 뿔은 때깔도 물내 해사한 곱돌마냥 그럴싸하지만 무장무장, 솟구치는 힘도 세지기 때문이다// 지금 물정에는 어쩐지 모르지만, 대개 경운기나 트랙터 따위 농기계가 들어오기 전이겠다 별똥밭 천칭자리에 생강꽃 같은 봄물이 우련 번질 무렵, 사람으로 치면 사춘기 가량 되는 부사리소의 뿔 언저리에 진달래꽃을 두어 송이 따다가 매다는 습속이 있었다 부사리소가 두 뿔 사이에 진달래꽃을 걸어 달고, 워낭을 달빛이 미어지게 은입사(銀入絲)된 물소리처럼 흔들며 타박타박 걷는 모습은 꽤 멋스럽게 비치곤 했지 싶다 하지만 눈치 재바른 이들의 생각은 좀 다르다 부사리소는 그냥 살갑게 걷는 게 아니라, 짜장 그 흐벅진 두 뿔로/ 진달래꽃 두어 송이를 하염없이 하염없이 들이받고 있었던 거였다// 내 사랑도 뿔이 꽃을 들이받듯 했으면 좋겠다
늪 / 오태환
다슬기 다슬다슬 물풀을 갉고 난 뒤/ 젖몽우리 생겨 젖앓이하듯 하얀 蓮몽우리/ 두근두근 돋고 난 뒤/ 소금쟁이 한 쌍 가갸거겨 가갸거겨/ 순 草書(초서)로 물낯을 쓰고 난 뒤/ 아침날빛도 따라서 반짝반짝 물낯을 쓰고 난 뒤/ 검정물방개 뒷다리를 저어 화살촉같이 쏘고 난 뒤/ 그 옆에 짚오리 같은 게아재비가/ 아재비아재비 하며 부들 틈새에 서리고 난 뒤/ 물장군도 물자라도 지네들끼리/ 물비린내 자글자글 産卵(산란) 하고 난 뒤/ 버들치도 올챙이도 요리조리 아가미/ 발딱이며 해찰하고 난 뒤/ 명주실잠자리 대롱대롱 交尾(교미)하고 난 뒤/ 해무리 환하게 걸고 해무리처럼 교미하고 난 뒤/ 기슭어귀 물달개비 물빛 꽃잎들이/ 떼로 찌글어지고 난 뒤/ 螺銓(나전) 같은 물이슬 한 방울 퐁당!/ 떨어져 맨하늘이 부르르르 소름끼치고 난 뒤/ 민숭달팽이 함초롬히 털며 긴 돌그늘, 얼핏/ 아주 쬐그만, 고요가 어슴푸레 눈을 켜고 난 뒤
안다미로 듣는 비는 / 오태환
처마 맡에 널어 말린 동지(冬至)께 무청처럼 간조롱히 뿌리는 비는/ 한 치 두 치 나비 재며 한 냥쭝 두 냥쭝 저울에 달며 는실난실 날리는 비는/ 일껏 발품이나 팔며 그늘마다 구름 기슭 볕뉘처럼 움트는 비는/ 전당포(典當鋪)도 못 가 본 백통(白銅) 비녀 때깔로 새들새들 저무는 비는/ 꺼병아 꺼병아 애꾸눈서껀 엿장수서껀 칠삭둥이서껀/ 안다미로 눈칫밥만 멕이다가 나무거울로 낯짝 가리고 내리는 비는
* '께'는 '그때쯤'이라는 뜻이고, '무청'은 당연히 알겠고, '간조롱히'는 '가지런히'라는 말이다. '쭝'은 '무게'라는 의미의 접사고, '는실난실'은 사전에는 '성적 충동으로 인해 야릇하고 잡스럽게 구는 모양'이라고 적혀 있긴 한데 그보다는 앞서 자리 잡고 있는 '나비'를 따라 읽어 보면 어떨까 싶다. '볕뉘'는 '작은 틈이나 그늘진 곳에 잠시 비치는 볕'이고, '새들새들'은 '조금 시들어 힘이 없는 모양'을 그린 말이다. '꺼병이'는 원래 '꿩의 어린 새끼'를 가리키는 단어인데, '옷차림 따위의 겉모습이 잘 어울리지 않고 거칠게 생긴 사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라고 한다. '서껀'은 '무엇이랑 함께'라는 뜻을 지닌 조사이고, '안다미로'는 '담은 것이 그릇에 넘치도록 많이'라는 의미다. 마지막으로 '나무거울'은 '겉모양은 그럴듯하나 실제로는 아무 쓸모도 없는 사람이나 물건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인데, 그냥 '나무로 만든 거울'이나 '나무'로 여겨도 재미있겠다 싶다. 이렇게 찾아 놓고 읽어 보니까 어떤가. 저 봄비가 그저 주룩주룩 내리지 않고 "간조롱히" "는실난실" "새들새들" "안다미로" 내리지 않는가. 가끔 조금만 수고를 보태면 환해지는 시가 있다. 이 시가 그렇다.(채상우 시인)
능소화 / 오태환
누구는 징역이라 읽었고 누구는 노을빛 띄운 바다를 보았다 벼랑 위에서 발을 헛디뎌 추락하기/ 직전의 그, 아슬아슬한 허공/ 또는 허공의 탁란// 담홍들이 이슬에 팡! 젖은 채 하들하들 떤다/ 담홍들이 담홍째로 무너져서 지네 발치께에 착! 착!/ 쟁여지는데// 저편 양달에서는 죽은 자들끼리 모여 그림자도 없이 울고 있다// 어떤 손은 덩굴을 데리고 또/ 그늘 같은 벼랑을 그늘처럼 타고 오르는데/ 그늘처럼, 한사코 타고 오르는데// 누구는 징역이라 읽었고 누구는 노을빛 띄운 바다를 보았다
옥수수밭에서 / 오태환
옥수수밭이 일여덟 마지기는 너끈하겠다 너무 맑아서 여차하면 살을 베일 것 같은 늦가을의 하늘 숫돌에 갈 듯 초록을 가으내 갈아내고, 겨우 남은 햇노란 줄거리며 햇노란 잎사귀가 햇노란 햇살을 받으며, 또 햇노랗게들 사각이며 지천이다 바람이 일 때마다 사각사각 사각사각 햐! 노을구름떼처럼 모였다가는 배돌며 또 싹 빠지는 그 햇노란 사각과 햇노란 사각의 찬란한 틈서리들을 보면, 그냥 국으로 숨만 쉬어도 한 상 뻐개지게 차려 먹은 듯싶다// 햇노란 옥수수밭에 싸락눈이 내린다 은단(銀丹) 같은 싸락눈이 바람이 일 때마다 이리저리 쟁반 기울어지듯 짜르르 짜르르 몰리더니, 햇노란 줄거리며 햇노란 잎사귀에 가서 일일이 부딪는다 싸릉싸릉 싸릉싸릉 청까지 튕기며, 아주 쬐끄맣고 투명한 그늘처럼 뛰어올랐다가는 자빠지고 자빠졌다가는 또 허천나게들 부딪는데, 싸릉싸릉 튕기는 맵시가 비장 속까지 햇노랗게 기뻐 죽겠단다
상강(霜降) 무렵 / 오태환
환하게 볕드는 주방 싱크대 오른쪽의 마블상판 위에 흰 커피잔 두 개가 포개져 있다 커피잔이 조금씩 들썩이더니, 하나가 다른 하나의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하나의 목덜미에 자기 목덜미를 비비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 손으로 허리를 안은 채 다른 손으로 허벅지를 밀어올리고, 아랫배를 누르며 올라타려 한다 커피잔 하나는 간신히 숨을 참으며 깍지 낀 두 손으로 다른 하나의 목을 힘껏 끌어당긴다 커피잔 하나가 소리를 죽이고 다른 하나의 마른 입술을 자신의 마른 혀로 핥는다 커피잔 하나는 목덜미가 하얗게 드러나도록 고개를 젖히면서 허리를 비튼다// 가스레인지와 후드팬 사이 흰 타일을 붙인 A4용지 두어 장 넓이의 벽면 위에 죽은 남자와 죽은 여자가 누워 있다 죽은 남자가 죽은 여자의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죽은 여자의 목덜미에 자기 목덜미를 비비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 손으로 허리를 안은 채 다른 손으로 허벅지를 밀어올리고, 아랫배를 누르며 올라타려 한다 죽은 여자는 간신히 숨을 참으며 깍지 낀 두 손으로 죽은 남자의 목을 힘껏 끌어당긴다 죽은 여자가 소리를 죽이고 죽은 남자의 마른 입술을 자신의 마른 혀로 핥는다 죽은 여자는 목덜미가 하얗게 드러나도록 고개를 젖히면서 허리를 비튼다// 느닷없이 전파잡음 같은, 춥고 어두운 울음소리가 귀청을 꿰뚫고 지나갔다
춘사(春思) / 오태환
애초엔 도린결 따라 옮기며 켜 들더니, 성냥불 탁탁 당겨놓은 듯 으슥한 심짓불만 다문다문 켜 들더니, 말짱 고드름장아찌 희미론 나무거울 꼴값인 줄 여겼더니, 아파라 수수꽃다리 자운영 모란 바람꽃 꽃그늘 속에서 불에 덴 듯 아파라 얼레지 영산홍(映山紅) 수양벚꽃 찔레 산수유(山茱萸) 노루귀, 느닷없이 후림불로 번지는 천지의 꽃그늘 그늘에 덴 듯 몸알이 아파라 천년을 저지른 사랑이 저런 빛깔로 도지는구나 식겁할 후림불로 도지는구나 아버지의 아버지 훨씬 더 먼 아버지 적 그리움이 맨발인 채로 어귀마다 뒤란마다 작신작신 다시 도지는구나 해바른 봄날 감잎애순 덖어내듯 아픈 몸알서껀 덖어낼까나 몸알의 그리움 덖어낼까나 차라리 맹독(猛毒)의 향내처럼 덖어낼까나 소슬한 무쇠솥 혼자서 머리에 이고 자꾸 몸알 가무는 봄날 천년을 더 사랑하고 싶은 봄날 천년을 더 죽고 싶은 봄날
맨드라미 / 오태환
맨드라미가 하늘귀에 흥건히 엎질러졌다 잔인하도록 맑은 선홍들이 발뒤꿈치까지 다투어 엎질러졌다 꼭지마다 화살촉 비슷한 것을 비죽비죽/ 비집고 나오는 구름들의 수급(首級)/ 그, 무슨 근성 같은 것의 황폐하고 또 황폐한 칠갑/ 어떤 화살촉 비슷한 것은 닭살처럼 오톨도톨 묽어졌는데/ 붉은 줄기에 도래매듭으로 엇나가게 매달린 붉은 잎새 잎새 잎새가 꼭 사시미칼에 베인 상처자국 같다/ 무참히 붉어/ 차라리 그늘에 보랏빛을 비치는/ 선지피의 황홀한 결사(結社)// 아무도 모르게 죽어가던 구석기의 혈거인류(穴居人類)가 가을하늘에 고요히 마지막 눈을 적시며 바라봤을지 모르는/ 이제 막 쌍살벌 한 마리가 노란 햇볕을 먼지처럼 털며 비껴 나는
묘비명 / 오태환
내가 눈으로 세상을 탕진한 것은 희미한 노을 몇 잎뿐이었고/ 내가 귀로 세상을 탕진한 것은 궂은 빗소리 몇 마디뿐이었고/ 내가 입으로 세상을 탕진한 것은 쓴 소주 몇 잔뿐이었고/ 내가 손으로 세상을 탕진한 것은 부질없는 시(詩) 몇 줄뿐이었는데/ 세상이 한번 나를 탕진하니 이렇듯 되고 말았다
천마산 물소리 / 오태환
내 그대의 물소리 안으로 들어가리 상수리나무 물푸레나무 푸른 그늘 사이사이 저렇게 달빛이 환해서 그대 물소리의 내장內臟까지 찬란히 비쳐 보이는 밤이면 그대 물소리의 붉고 고운 실핏줄 조심조심 헤치며 내 그대의 물소리 안으로 들어가리 들어가서 그대 물소리의 서늘한 냄새에 취하며 놀리/ 내 그대의 물소리 안으로 들어가 살리 달빛 저렇게 밝아서 휘파람새 티끌같이 긁힌 울음 하나에도 내 가슴가죽 미어지도록 두근거리거든 그대의 물소리 안으로 들어가 살리 철벅철벅 그대의 물소리 밟으며 들어가서 내 살아있음의 그리움도 안타까움도 아린 살 벗듯이 한 겹씩 한 겹씩 모두 벗어버리고 다시는 다시는 나오지 않으리/ 드디어 내 몸의 살가죽이며 가슴뼈며 아름답게 썩어지리 썩어져 그대의 물소리 되리 그리하여 무릎까지 흰 달빛에 빠지며 한 누리 그대 물소리의 즐거운 무덤 이루리
고분에서 / 오태환
어느 손〔手〕이 와서 선사시대 고분 안에 부장(附葬)된 깨진 진흙항아리나 청동세발솥의 표면에 새겨진 글씨들을 닦아 내듯이 가만가만 흙먼지를 털고 금속때를 훔쳐 글씨들을 맑게 닦아내듯이 누가 내 오래 된 죽음 안에 새겨진 글씨들을 맑게 닦아내 줬으면 좋겠다 내 몸이 쓴 글씨들을 육탈시켜 줬으면 좋겠다 내 몸을 저 어둠 속의 별빛들처럼 맑게 육탈된 글씨들인 채로 염습해 줬으면 좋겠다 그래서 저 별빛들처럼 맑게 육탈된 글씨들인 채로 내 몸이, 더 죽고 싶다 사랑이여
이런 꽃 / 오태환
순 허드레로 몸이 아픈 날/ 볕바른 데마다/ 에돌다가/ 에돌다가/ 빈 그릇 부시듯 피는 꽃
복사꽃, 천지간(天地間)의 우수리 / 오태환
삐뚜로만 피었다가 지는 그리움을 만난 적 있으신가 백금(白金)의 물소리와 청금(靑金)의 새소리가 맡기고 간 자리 연분홍의 떼가, 저렇게 세살장지 미닫이문에 여닫이창까지 옻칠경대 빼닫이서랍까지 죄다 열어젖혀버린 그리움을 만난 적 있으신가 맨살로 삐뚜로만 삐뚜로만 저질러 놓고, 다시 소름같이 돋는 참 난처한 그리움을 만난적 있으신가 발바닥에서 겨드랑이까지 해끗한 달빛도 사늘한 그늘도 없는데, 맨몸으로 숭어리째 저질러 놓고 호미걸이로 한사코 벼랑처럼 뛰어내리는 애먼 그리움, 천지간(天地間)의 우수리, 금니(金泥)도 다 삭은 연분홍 연분홍떼의
무너밋골 달빛 / 오태환
하릅강아지 누렁강아지 귀때기처럼 돋는 달빛/ 양지머리 뒷사태 斤이가웃 맑은 국거리로 한소끔씩 뜨는 달빛/ 으슥한 도린결 도린결만 뒤지고 다니는 따라지 달빛/ 마른장마 맞춰 벼르다 벼르다 듣는 감또개 같고 감꽃 새끼 같은 달빛/ 잘 잡순 개밥그릇이나 설거지하듯 살강살강 부시는 달빛
그 고요에 드난살다 / 오태환
고요에 드난사는 건 나뿐이 아니지 싶다 곰비임비 헛발질이나 하면서, 순흘림체로 물색없이 지저귀어 쌓는 무너밋골 소쩍새도 매한가지다 잘 마른 유기鍮器나 마블링이 근사한 꽃등심, 아니면 화려한 진사辰砂 때깔로 숨어 지내다가, 생각나면 닻별떼나 희치희치 비치는 어둠끼리도 그렇다// 어차피 개구멍받이로 진배없지만, 고요에 염치불구 드난사는 것 중 상등품上等品은 아무래도 빗소리다 지하철도 시내버스도 끊긴 밤, 후미진 변두리로 변두리로 옮기며 듣는[落] 빗소리다 흰 발바닥이나 보이며 놀다가, 쓰러진 자전거 바큇살을 적시고 수유사거리 안마방 찌라시를 적시고 새벽 두 시, 인사불성으로 집을 찾는 취객의 두 어깨를 가만가만 적시는 빗소리다 변두리마다 하루걸러 이틀 사흘 놋낱같이 놋낱같이 내리는 빗소리에 귀기울이면// 드난사는 깜냥에 드난밥이나 축내며, 수척한 몸알이 괜시리 또 아프다 쥐뿔도 그리운 게 있을 리 없는데, 웃자란 고들빼기처럼 허투루로다가 쇠기만 하는
토란잎에 빗물 듣다 / 오태환
다문다문 움트더니 내가 다니는 휘경여고 내가 점심 먹으러 가는 길섶 한데서 그 가위 같은 애순(荀)들이 어린 목덜미 드러내더니 붐비며 솜털 송송 드러내더니 해찰이나 하더니 아뿔싸, 어느새 평(坪)가웃 잎새들을 펼쳐들더니 휘엉청 소란한 綠靑들을 펼쳐들더니// 내가 한눈팔며 점심 먹으러 가는 길섶 장맛비 듣더니 떼벼룩처럼 튕기는 것들 새벽녘 노을 비낀 개밥바라기처럼 뭉친 것들 투명하고 성근 빗금만 치는 것들 자개빛깔 같은 것들 너무 잘아 그냥 아롱아롱 비치는 것들 새똥처럼 찌익 갈기는 것들 싸릉싸릉, 탁, 따그르르르 샐쭉해서 따로따로 뒹구는 것들 안 그래도 소란한 綠靑들이 귓불을 발갛게 켜고 헌사를 떨더니// 내가 밥 다 먹고 돌아오는 길에도 그 손가락만큼 굵은 잎맥으로 장마철 빗방울들을 고스란히 살리며 조롱조롱 살리며 헌사를 떨더니 나 참, 지네들끼리 새치름하며 물구나무 곤두박질 풍장 떨더니
감나무에서 감잎 지는 사정을 / 오태환
감나무에서 감잎 지는 사정을/ 말해서 무엇하리/ 하, 몸의 귀 지천으로 창궐터니/ 귓불마다 진사(辰砂)무늬 철화(鐵華)무늬로/ 가생이를 두르며 쟁강쟁강 잉걸불 켜더니/ 참지 못하고/ 참지 못하고/ 지네들끼리 저 지경으로 붐비며 지는/ 사정을 더 말해 무엇하리/ 아슴아슴 꿈으로나 재우는/ 내 어린 첫사랑쯤 들키건 말건/ 검은 가지 곁가지 어름마다/ 하필이면 제일 깊고 투명한 하늘을 골라/ 무슨 참 독하기도 한 각운(脚韻)처럼/ 툭! 툭! 당기며 끊는/ 지네들 사정이야 말해 무엇하리
언해諺解 / 오태환
하늘기슭에다 글씨들을 쓰고 있었습니다 너도밤나무 은행銀杏나무 물푸레나무 떡갈나무서껀 심까지 맑게 갈아 글씨들을 쓰고 있었습니다 닢, 닢일란 죄다 환하게 발등 밟히며 조난당하며 더 환하게 길을 내준 하늘기슭 쐐기글씨 같고 매듭글씨 같은 것들을 마구잡이로 쓰고 있었습니다 하늬하늬 하늬바람을 따라 해찰하는 나뭇가지들의 그 청명하고 눈부신 비유譬喩들을 내가 눈치채건 말건, 쌀쌀한 하늘빛도 덩달아 반짝반짝 가을 개울물처럼 속을 다, 비치며 해찰하며 일렁거렸는데요// 어떤 글씨는 삐끗 갈빗대를 접질리고 어떤 글씨는 아예 운韻도 안 비치고 어떤 글씨는 밝게 이마께부터 오리고 다른 글씨는 순 햅쌀빛깔로 서두르고 또 다른 글씨는 투명하게 개털이나 날리고 있었는데요 수선이나 피우고들 있었는데요// 어느덧 산구름 언저리부터 금니金泥를 두르더니 왼 하늘이 지초당초무늬로 사르고 있습디다 아무래도 감지柑紙빛 산그늘 너머 무슨 병란이 일어났는가 싶었는데, 그런데, 그, 숱한 글씨들도 느닷없이 되게, 저리 화려한 화재火災를 겪다니요 정강이뼈며 울대뼈며 빗장뼈며 할 것 없이 푸슥! 푸슥! 푸슥! 푸슥! 잉걸불 긁히며 으리으리 물수제비뜨며 허천나게 그 화재火災를 모조리, 당해내는 글씨들의 기쁜 다비茶毘라니요
섹스에 관한 참 건조한 은유, 또는 몸의 만다라(曼茶羅) / 오태환
1./ 섬 안으로 들어가는 것처럼 나는 그녀 안으로 들어가고 싶다//
2./ 그녀의 머리칼이 소스라치며 일렁였다 잠깐, 희붐하게 떨리는 한숨소리 나는 한손으로 귀밑머리를 헤치고 목덜미에 가문 입술을 문질렀다 연분홍 유두가 등잔불 심지같이 도두 켜졌다 소슬소슬 소름 끼치며 물처럼 보드라운 젖가슴 먼지까지 등피의 먼지까지 푸른 연필까지 저물녘 어스름까지 죄다 허벅지뿐인 그녀의 방에서, 그녀의 허벅지를 흰 배처럼 밀면서도 그녀의 수평선을 향해 그녀의 흘수선을 온몸으로 밀면서도 밀면서도/ 내가 나를 다시, 들키고 싶다//
3./ 어떤 이가 말했다 그의 음경은 흑단(黑檀)의 藏經처럼 검고 화려하다 누리에 가득 차 있다 또한 허공처럼 예리해서 새벽 두시의 빗소리든 천산북로의 印朱빛 사막이든 하늬바람 하린 모가지든 버히지 못할 게 없다 다른 이가 말했다 그것의 지극함은 冷金紙에 쳐 올린 靑梅같이 소슬하고 어엿하니, 문득 맑은 文字가 무심히 반야般若에 이르렀다고 할 만하다//
4./ 바람이 분다// 그때/ 내가 한 번 더 죽은 그곳//
5./ 시의 언어는 가능하면 구체적이어야 한다는 문장은 자명해 보인다 그래야 언어가 간섭하는 이미지도 머릿속에서 더 분명한 윤곽으로 조직될 수 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 보면 교열에 걸리지 싶다. 허술할 뿐만 아니라 거짓말이란 혐의가 짙다 시의 언어가 모호할 수밖에 없는 것은, 모호해야 하는 것은 안타깝지만 숙명적이다 그것은 내 몸속에서 裝幀된 여자들이 모조리 모호하다는 사실만큼 숙명적이다/ 나는 들숨이 날숨을 누르듯이, 위의 꽃이 아래의 꽃을 누르듯이 그녀들의 겨드랑이 안으로 발뒤꿈치 안으로 흰 목덜미 안으로 들어가고 싶다 모호가 모호를 누르듯이 그녀들의 行間 안으로, 行間의 섬 안으로 울면서
낙화유수(落花流水) ―백담 시편·5 / 오태환
새끼손톱만한 것들이, 꼭 속손톱만한 것들이, 연보라와 연분홍과 하양 들이 개울물 위에서 길을 트고 있다 하물며 어떤 치들은 돌돌돌돌 물소리까지 내고 있다 낙화유수랬다 나도 지금까진 꽃잎이 그냥 물에 떠서 흘러가는 줄 알았다 쬐끄만 개울물서껀 가을꽃잎들이 저렇게 다투어 길을 트는 광경은 처음인데/ 어떤 하양은 홑청에 바늘로 맑게/ 시침질하듯이 하고/ 또 어떤 하양은 햇빛 같은 물방울들을/ 얇은 습자지에 베껴 쓰듯이 하고/ 어떤 연보라는 물살을 한 눈금/ 두 눈금 곱자로 재듯이 하고/ 또 어떤 연보라는 소금쟁이처럼 잡았다/ 당겼다 미끄러지기만 하고/ 또 어떤 연분홍은 연분홍끼리/ 수면을 울력하듯 떠메고 다니며/ 분주히들 길을 트고 있다// 가을꽃잎들이 트는 그 길을 내가 한눈팔 듯이 구경하는 사이 수십만 년은 또 거뜬히 흘러갔겠다
게와 연꽃 —백담 시편 15 / 오태환
애기솔방울만큼 쬐끄만 게 한 마리가 다락같은 연꽃을 덮쳤다// 딴전이나 피우며 슬금슬금 꽃대궁을 기어오르더니, 연밥 연근 다 놔두고 정수리까지 기어오르더니, 그 숱한 다리로 다짜고짜 안다리메치기에다가 호미걸이다// 하기사 으리으리 흰 연꽃도 서슬엔 꼼짝없이 얼이 빠져 버렸음직한데// 녀석은 그 위에서 시치미 딱 잡아떼고 못물에 폭싹 젖은 게딱지째 들썩거리며 품는 재미가 한창이다 걷는발서껀 집게발서껀 는실난실 일일이 내두르는/ 햐! 허공중의 후배위라니/ 때 맞춰 얄미운 산들바람도 는실난실 작정하고 불어제껴 쌓는데// 이끼 머금은 돌탑 너머 저녁놀빛은 잇바디를 적멸보전 청기왓장 처마 끝까지 드러내고 파안대소다
월하정인(月下情人) / 오태환
녹청 기와 담장 넘은 그믐 달빛에/ 담천(曇天) 같은 시래기 시래깃국 그믐 달빛에/ 싸잡아서 한 냥 서 푼어치에/ 마음을 들켜/ 화들짝 불잉걸 데듯 하는 사연을 아시나요/ 아흐레 낮녘 지당(池塘)에 낀 떼수련(睡蓮)서껀/ 거문고처럼 기댄 조릿대서껀 청매(靑梅) 송아리서껀/ 그냥 국으로 고개를 튼 생강꽃서껀/ 울컥울컥 봄꽃 찌클어진 그 자리/ 쟁강쟁강 꽃그늘/ 속손톱만큼씩 한 그늘만 닿아도/ 한사코 비장(脾臟) 속까지 데듯 하는 사연을 아시나요/ 여울 기슭 비오리 새끼처럼 모가질 감고 부벼도/ 삽짝 건넌 눈맞춤 같은 슬픔뿐인데요/ 입안 가득 은비녀 무는 슬픔뿐인데요/ 물 같은 가슴가슴 물이랑 일듯 소름이 돋쳐/ 하냥 사늘히 엎지르기나 할 따름인데요/ 반물모시 쓰개치마/ 겹으로 동이고 여민 열 예닐곱 사연일랑/ 백마금편(白馬金鞭)은 고사하고/ 물색없는 불목하니처럼 훔쳐가세요/ 아예 보리누름께 명화적패처럼 앗아가세요
* 월하정인(月下情人) : 신윤복(1758~ ?), 『혜원전신첩(蕙園傳神帖)』 안에 있는 그림(282⨉352). 「月沈沈夜三更 兩人心事兩人知」라 쓰여 있다. 간송미술관 소장.
설송도雪松圖 1174×527 / 오태환
동지冬至를 삭朔 가웃 지나 단양端陽땅 능호지관凌壺之觀 띠풀로 엮은 처마기슭이 희붐하다 밤새 문진文鎭처럼 여며 누른 노여움이 눈발 날리는 엄동嚴冬의 새벽계곡처럼 수척瘦瘠하다 문득 벼루를 내어 곱은 손으로 먹을 가니 소맷자락과 늙고 초망草莽한 목덜미 속으로 눈보라 치다 세상 소롯길 따라 명리名利를 배운 적 없으니 냉금지冷金紙에 쳐올린 백매白梅도 자최눈밭에 성근 개발자국만 못하고 맑은 진사辰砂를 갈아 관지款識를 해도 갈댓잎 어름을 해찰하는 푸른 새우떼만 못하다 해끗한 머리털은 다 닳은 붓끝처럼 모지라져 비녀를 이기지 못하는데 귀빠지고 이빠진 서안書案과 자개문갑文匣이 어슬녘 된추위에 쩡! 쩡! 얼어터지는 듯싶다 이[虱]와 빈대의 한낱 사흘치 시량柴糧도 못될 몸의 폐가에 눈보라 치다 하마 흰 장짓문에 들이치는 눈보라처럼 발바닥이며 등골이며 허파며 창자 속까지 밝고 춥게 눈보라 치다 그 폐가에서 듣는 아득하고 머흐로운 우렛소리 외딴 슬픔
* 이인상李麟祥(1710~1789), 종이에 수묵.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세한도歲寒圖 233×1083 / 오태환
손 : 먹을 갈아 한 번도 송백松柏을 갈겨 본 적 없고 붓을 들어 한 번도 누옥陋屋일지언정 적셔 본 적 없지 싶은데 그 허드레 비꽃처럼 무심한 졸박拙朴에서 담담하고 쌉싸름한 산나물향 같은 게 우련히 배어납니다 그 향은 고요함에서 우러나온 것입니까 쓸쓸함에서 우러나온 것입니까// 주인 : 무논의 가을게를 거친 술의 안주 삼아 맑게 끓여 먹든 봄꽃의 채홍彩紅을 안주 대신 바람결에 섞어 청주잔에 타 마시든 비스듬히 취해 듣는 생황苼篁 같은 송뢰松籟와 녹기금綠綺琴 같은 물소리가 달리 들릴 리 없겠지요. 무릇 경물景物이란 스스로 온전한 법이거늘 귀로 들으면 고요함이고 마음으로 들으면 쓸쓸함이니 어찌 둘이겠습니까// 손 : 듣자니 그림에는 연경燕京에서 구한 귀한 서책書冊을 선물한 제자를 향한 애틋한 심사가 담겼다고 합디다// 주인 : 상한 돌가자미처럼 비린내가 진동하는 부유腐儒가 작은 구리종鐘과 세발솥에 새긴 글씨처럼 투명하리만치 맵고 예리한 한유寒儒와 섞여도 분별치 못하고 앞에서는 소맷자락에 해당화海棠花만 붉게 져도 물닭새끼처럼 호들갑스러우면서 뒤에서는 상투를 나꿔채고 등짝을 어육魚肉 삼아 도둑질하는 인심이 이즈막이라 해서 별다른 건 아니지요 공부孔夫가 아니라도 우선藕船의 어엿한 마음씀이 늘 싸하니 눈물겹습니다// 손 : 남루한 물정을 겨눈 살얼음 같은 으름장의 삼엄함도 그렇지만 그 안에 도사린 냉랭한 적막감은 차마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비단 유적流謫의 황량한 풍정을 베낀 때문은 아니리라 여겨지기도 합니다만// 주인 : 오랜 유폐생활에 지친 늙은이에게 겨우 붓자루를 부여잡을 힘 말고 무엇이 더 남아 있겠습니까 생애를 벼려 온 재주는 달팽이뿔 사이의 거리도 가늠하지 못하고 이적까지 궁리한 학업은 닥풀에 묻은 자벌레똥보다도 가볍습니다 그저 찻잎이나 찌고 서안書案에 향이나 사를 따름입니다// 손 : 선생의 묵적墨跡에서 배어나오는 적막감이 종당 어슬녘처럼 차고 맑게 식은 재와 같습니다 이쯤에서 선생께서는 「불이선란不二禪蘭」에 몸소 발跋한 유마거사維摩居士의 무언無言으로 사양하시겠지요 그런데 하마면 가뭇없이 흐려질 그 성글고 수척한 붓놀림일란 되레 눈 덮인 해안의 기암절벽奇巖絶壁을 홀로 버히며 쏘는 해동청海東靑의 매섭고 으리으리한 기상이 비칠 지경입니다// 주인 : 다만 연지硯池에 먹물이 마른 까닭이겠지요/ (하니 손이 껄껄 손뼉을 쳐 웃고는 석경石徑을 되짚어 돌아갔다)
(시집에 나오는 어휘) *하릅강아지/ 한 살이 된 강아지 - 하릅(1살), 두습(2살), 사릅(3살), 나릅(4살), 다습(5살), 여습(6살), 이릅(7살), 여듭(8살), 아습(9살), 담불(열릅, 10살), 두 담불(20살)로 부른다.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라는 속담의 하루는 하릅에서 왔다고 함 *도린결/사람이 별로 가지 않는 외진 곳
*서껀/체언의 뒤에 붙어, 해당 체언과 다른 것들을 아울러 가리키는 뜻을 나타내는 보조사. 영어의 with와 비슷
*곰비임비/ 물건이 거듭 쌓이거나 일이 자꾸 계속되는 모양을 나타내는 말
*반물모시/ 쪽[藍]을 사용하여 짙은 검은색을 띤 남빛으로 염색한 것.
*비오리/ 기러기목 오리과에 속하며 한반도 전역에서 겨울을 나는 흔한 겨울새
*불목하니/ 절에서 밥 짓고 땔나무하고 물긷는 일을 맡아서 하는 사람
*보리누름/보리가 누렇게 익어가는 때
*조리복소니/크고 좋던 물건이 차차 줄어들거나 깍여서 볼품이 없이 된 것
*고수련/앓고 있는 사람의 모든 편의를 보아줌
*노박이/1. 줄곧 계속하여 2. 오래도록 한곳에 고정되어서
* 드난 밥/ 집안이 기울어, 남의 집에 곁들어 드난살이하면서 먹는 밥은 '드난밥'이다. 눈칫밥과 같은 말. 밥에도 여러 가지 이름이 있다. 가마솥에 지은 밥은 '가맛밥'이다.
*희치희치/ 피륙이나 종이 따위가 군데군데 쏠리어 뭉쳐서 미어진 모양을 나타내는 말
바다, 내 언어들의 희망 또는 그 고통스러운 조건·2
―Anno Domini 2011년 4월 29일 / 오태환
<1>/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 ■■■■ ■■■■ ■■■ ■■■■■ ■■■,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 ■ ■■ ■■ ■■ ■ ■■■■ ■■ ■■■■■, ■■■ ■■■, ■■■■ ■■■ ■■■ ■■ ■■■■, ■■■■ ■ ■■ ■■ ■■ ■■■■ ■■■■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과,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 붉은 쉐나임을 벗어 돌 위에 개켰다 이마에 탱자나무가시관을 뒤집어 쓴 그는 온전히 흰 팬티바람이었다 진작 목공질하여 땅바닥에 박아두었던 나무십자가를 등지고 서서, 잠시 어떤 생각에 잠겼다가 이내 허리를 굽혔다 왼손에는 펜치가 오른손에는 망치가 들려 있었다/ 그는 자기 오른쪽 엄지발가락과 집게발가락 사이의 우묵한 살집을 겨누어, 'ㄴ'자로 구부린 쇠못을 펜치로 고정시킨 뒤, 망치를 내리치기 시작했다 그의 망치질은 서두르거나 망설이는 기색이 없었다 그리고 오른발의 복숭아뼈에 왼발의 복숭아뼈가 어슷하게 겹치도록 천천히 앉음새를 고쳤다 오른발과 마찬가지로 왼쪽 발등에도 힘과 각도를 침착하게 제어하며, 굵은 쇠못을 때려 박았다 딱, 딱, 딱, 망치소리가 폐채석장 이곳저곳에서 불찌처럼 작고 예리한 잔향을 일으켰다/ 잠깐 숨을 가다듬고, 그는 십자가에 등을 맡긴 채 도르래로 무거운 화물을 끌어올리듯이, 윗몸을 일으켜 세우려 애를 썼다 끝이 없을 듯 위로, 위로 향하는 오랜 굴신이 큰창자의 연동운동 같기도 했다/ 그는 듬성듬성 검은 거웃이 난 채 낡은 양가죽가방처럼 처진 아랫배를, 미리 십자가 중턱에 결박해 두었던 압박붕대로 비끌어맸다 오른손을 뻗쳐 근처에 갈무리한 식도(食刀)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압박붕대 틈으로 비죽이 불거진 자신의 오른쪽 옆구리에 그것을 푹! 쑤셔서 돌렸다 시동키박스에 시동키를 꽂아서 돌리듯이, 자신을 어디론가 운행하려는 듯이 사위는 새소리 하나, 벌레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식도(食刀)를 내려놓고 핸드드릴을 골랐다 왼쪽 손바닥의 검지뼈와 중지뼈 사이에 드릴날을 곤두세웠다 드륵, 드륵, 드르르르, 짧게 쥐이빨 갈리는 소리를 내는가 싶더니, 그것은 순식간에 손바닥을 관통했다 그는 구멍 뚫린 왼손으로 오른손의 핸드드릴을 받아 쥐려 했다 그의 동작은 전파간섭에 노출된 구형모니터처럼, 버퍼링이 걸린 VOD화상처럼 무너졌다가 끊기기를 몇 차례나 거듭했다 오른쪽 손바닥의 신경과 힘줄을 피해 조심조심 핸드드릴의 방아쇠를 당겼다 그는 두 손바닥을 나란히 모아 찬찬히 살폈다 상처자리가 석유시추용 천공 같았다 풀모기가 달겨드는지, 그가 불현듯 코앞의 허공을 휘젓는 시늉을 했다 어찌 보면 허공과 하이파이브를 하는 성싶기도 했다/ 십자가 상단에 고정했던 밧줄을 끌어내려, 천천히 자신의 아래턱을 매달고 나서 뒤통수 쪽으로 매듭을 조였다 그의 프로세스는 설계기사가 제도판 위에 컴퍼스와 곱자로 제도하듯 정교했다 그는 이내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양팔을 축 늘어뜨린 채 한동안 빈 철사옷걸이처럼, 무심하게 건들거렸다 터무니없이 밝게 벗겨진 정수리 언저리에서 땀방울들이 송글송글 맺혔다가는, 탱자나무가시관과 흰 털이 건성드뭇 뒤섞인 두 눈썹과 콧등을 타고 내려와, 허벅지와 발등께로 사정없이 굴러 떨어졌다/ 그는 기운을 수습하여, 십자가의 왼쪽 팔걸이에 동여매 두었던 압박붕대 틈으로 왼팔을 비벼 넣었다 빈 치약튜브에서 치약을 쥐어짜내려는 것처럼, 마지막 젖심까지 쥐어짜내려는 것 같았다 그리고 와인오프너로 와인병의 코르크 마개를 비틀 듯이, 먼저 손봐 놨던 쇠못의 미늘에 자신의 왼쪽 손등을 비틀어 박기 시작했다// Eli Eli Lama Sabachthani!// 그늘 한 점 들지 않고, 하얗게 내리쬐는 폐채석장의 양달 멀리서 바라보면 그는, 머큐로크롬을 흥건히 묻힌 채 꽂아 논 면봉 같을 거였다//
<2>/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 ■■■■ ■■■■ ■■■ ■■■■■ ■■■, ■■■ ■■■■■ ■■■ ■■■, ■■■■ ■ ■■ ■■■■, 장사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 ■■■ ■■■ ■■, ■■ ■■ ■■ ■■, ■■■ ■■ ■■ ■■■■■■// 둘째 날, 영서내륙지방으로부터 발달한 불안정한 기압골을 따라 국지성 폭우가 쏟아졌다 비는 그가 수신하지 않은 주민세납부독촉장을 적시지 못했고, 평생 분주히 싸다닌 개인택시의 주행거리를 적시지 못했고, 지난여름 땀을 뻘뻘 흘리며 혼자서 닭곰탕 국물을 뜨다가 문득 들었던 잡념을 적시지 못했고, 차상위계층 신청서를 꾹꾹 눌러 작성하는 전처의 모나미볼펜을 적시지 못했고, 그가 공짜로 수선해 준 동료기사의 등유보일러와 3단변속 자전거를 적시지 못했다 비는 그가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사내가 어쩌다 한눈을 파는 것같이, 그저 쏟아져 내렸다/ 셋째 날 오전, 양봉업자와 전직 목사가 SUV차량을 타고 그의 지성소(至聖所)까지 와서, 나무십자가 여기저기 검정 비닐봉투처럼 매달린 그를 발견했다 양봉업자가 지역경찰에 신고했다 그 사이 전직 목사는 핸드폰카메라를 이용하여, 그의 주위를 빙빙 돌면서 다양한 포즈와 각도로 촬영을 하고 있었다
바다, 내 언어들의 희망 또는 그 고통스러운 조건·6
―점경들 / 오태환
여름/ 연(蓮)밭의 오후 개들이 지네끼리 서로 밝게 핥아주고 있다 녹청(綠靑)의 깊은 잎사귀에 포갠 개가 뒷다리를 들어 올리면 줄거리에 무쇠 저울추같이 매달린 개가 밝게 사타구니를 핥아주고 진흙뿌리 틈에 볕뉘처럼 스민 개가 갈기를 털면 연(蓮)꽃 난간 아래 잠든 개가 밝게 연분홍 똥구멍을 핥아준다 두레박을 기울이듯, 양달을 따라 가슴들을 기울이며 느린 윗입술과 굵은 발바닥을 번갈아 핥아주는, 저 슬프고 간절한 개들의 참을 수 없이 밝은 혀 개들의 전생까지, 샅샅이 비치도록 밝은 적막// 가을/ 잎새를 죄다 버린 나무들과 나무들이 능선에서 실뜨기하듯 늦췄다가 당기고 당겼다가 늦추는, 그 섬세하고 투명한 간격을 바라볼 때면 나는, 내 가장 춥고 오래된 죽음까지 들키고 만다// 겨울/ 바람이 분다 해변의 피아노// 봄/ 나는 마당에 피는 꽃들을 목격하며 생각했다 꽃이 피는 것은 분명히 지금 벌어지는 사건이지만, 동시에 아직 벌어지지 않은 사건이며 금세 벌어질 사건이다 이미 벌어진 사건이기도 하고 이전에 벌어진 적이 없는 사건이기도 하다 꽃이 피는 것은 또, 아주 오래전부터 여태까지 연쇄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사건일 수도 있다 그러니까 앞으로 결코 벌어질 리 없는 사건이란 점은 부정하기 어렵다// 또, 봄/ 영원히 입증할 수 없는 꽃들의 흉흉한 알리바이
바다, 내 언어들의 희망 또는 그 고통스러운 조건·16
—검은 색에 대하여 / 오태환
조금때의 달빛, 그녀의 살들이 해안선을 따라 찰랑거린다 태엽 풀리듯 조금이 진행될 때마다 태엽 풀리듯 투명해지는 살들, 혹은 몸의 경계// 조금때의 달빛 아래 조금때의 달빛처럼 투명한 그녀의, 젖은 빗장뼈에서 수란관과 자궁점막에서 느슨한 허리에서 신장(腎臟) 피질의 푸른 실핏줄돌기에서 흰 발바닥에서, 또 흰 발바닥에서 검은 꽃이 피고 있다 도르래로 감아올리듯이 피는 검은 꽃 손톱만한, 더 작은 톱니바퀴끼리 옆으로 밀면서 죄면서, 피는 검은 꽃 호미 날같이 세우는 검은 꽃 지렛대로 끌어당기듯이 피는, 화물(貨物)처럼 기울며 피는 검은 꽃 벼랑 같은 검은 꽃 그녀의 투명한 해안선 샅샅이 검은 꽃들이 한사코 검게, 더 검게 피고 있다// 검은 꽃들의 투명한 숙주(宿主) 검은 꽃이 피기 전부터 검은 그림자처럼 울던 그녀가, 다시 검은 그림자처럼 울고 있다 조금때의 달빛 검은 색의, 쓸쓸하고 오래된 평화
바다, 내 언어들의 희망 또는 그 고통스러운 조건·22
―그녀의 와디Wadi / 오태환
그녀의 문을 열고 들어가면 그녀의 와디가 보이네 새울음 소리가 모래처럼 새는 모래의 경첩 그녀의 문을 열면 그녀의 와디가 몸 안에서 몸 안으로 흘러 온몸이 흘러 모래 속의 모래 또 그 모래 속 모래의 가장 뜨겁고 마른 시간까지 흐르네// 모래의 지평선을 벗고 지평선 위에 치는 번갯불을 벗고 손목시계 벗듯 벗고 나는 그녀의 와디 속으로 망명하려네 모래의 푸른 시집(詩集)과 모래의 푸른 햇볕을 벗고 양말처럼 벗고 흰 발바닥으로 망명하려네 그녀의 와디 속으로 깊게 더 깊게 망명하려네 모래의 초분(草墳)을 모래의 숨을 모래의 북회귀선을 모래의 인기척을 모래의 윤곽과 그늘을 벗고 까마득히 벗고// 모래인 채 내가 한사코 무릎걸음으로 망명할 수밖에 없는 거기 모래의 대낮 대낮에 운석(隕石) 떨어지는 그녀의 와디가 보이네 한사코 가랭이뿐인 그녀의 슬픈 와디가 보이네
바다, 내 언어들의 희망 또는 그 고통스러운 조건·26
―내게 사랑이 있었네 ① / 오태환
내게 사랑이 있었네 봄이 와서 허천나게 꽃이 피면, 벌서듯이 서서 그대를 생각하는, 수척한 사랑이 있었네// 종아리를 걷고, 허천나게 꽃이 피면 꽃으로 매 맞고 싶은 사랑이 있었네 꽃으로, 꽃째로 매 맞으며 환하게, 아프게 그대 쪽으로 새는 마음이 있었네// 봄이 와서 허천나게 꽃이 피어서, 한사코 그대 쪽으로 새는 몸이 있었네 내게 그대 쪽으로, 수척하게 새기만 하는 슬픈 몸이 있었네
바다, 내 언어들의 희망 또는 그 고통스러운 조건·28
―10분 전에, 또는 몇 발짝 전에 아무 일도 안 일어났던 것처럼 / 오태환
휘파람을 불며 그가 걷네 달빛이 눈발처럼 밝게 그늘을 켜는 골목 휘파람을 불며 그가 걷네 골목이 골목끼리 골목을 돌아 골목 안으로, 어쩌면 바깥으로 접어드는 그 골목// 달빛이 밝게 휘파람을 불며 걷네 어제 날짜 신문지 속에서 달빛의 테두리가 더 밝게 휘파람을 불며 걷네 그녀가 뒤돌아보네 으슥하게, 마치 잊고 있었다는 듯이 으슥하게 뒤돌아보네 골목이 골목끼리 골목을 돌아 골목 안으로, 어쩌면 바깥으로 접어드는 그 골목// 어깨에 묻은 눈발을 툭,툭, 털어내며 계단을 올라 현관을 들어서듯이 그가 어깨에 묻은 달빛을 툭,툭, 털어내며 그녀에게 들어서네 여태 휘파람을 불며 그녀에게 들어서네// 10분 전에, 또는 몇 발짝 전에 아무 일도 안 일어났던 것처럼
바다, 내 언어들의 희망 또는 그 고통스러운 조건·29
―내게 사랑이 있었네 / 오태환
내게 사랑이 있었네 늘 그대 등 뒤에서 환한 섬들 같은 사랑이 있었네 늘 그대 등 뒤에서, 무장무장 가무는 섬들 같은 사랑이 있었네// 내게 사랑이 있었네 저 수평선 끝까지 그 너머까지, 내가 섬들보다 미리 가서, 그대 등뒤에서 아득하게, 아득하게 더 죽고 말 사랑이 있었네
바다, 내 언어들의 희망 또는 그 고통스러운 조건·30
―메리 벨 메리 벨 / 오태환
지금 어디 가는 거니? 메리 벨 메리 벨 푸른 손 은초롱꽃 푸른 꽃눈처럼 흔들며 께끔발로 사방치기 놀이하듯 실구름 해사하게 밟으며// What happens if you choke someone, do they die?// 지금 어디 가는 거니? 메리 벨 메리 벨 봄바람 봄바람끼리 모여 실뜨기 놀이하는 환한 하늘을 지나 노랑나비하양나비 송아리째 참수되는 환한 하늘을 지나// Oh, I know he’s dead, I wanted to see him in his coffin// 지금 어디 가는 거니? 메리 벨 메리 벨 한입 허벅지게 웃음 베어 물고 뉴캐슬 스코츠우드의 폐가를 지나 지금 어디 가는 거니? 폐가의 그늘을 접듯 가위를 접고/ 가위를 접듯 폐가의 그늘을 접고// Fuck of we murder watch out Fanny and Faggot// 그, 음악 메리 벨 메리 벨 으슥하게 옆얼굴을 누설하며 으슥하게 실고추처럼 실금 간 옆얼굴을 누설하며 지금 어디 가는 거니? 그, 음악 같은 메리 플로라 벨
바다, 내 언어들의 희망 또는 그 고통스러운 조건·31
―우리가 불가역적 계약, 혹은 불가역적 사건이라 믿는 것들에 대해 ① / 오태환
모래로 된 개무릇 모래로 된 가자미새끼 모래로 된 풀쐐기 모래로 된 개구리밥 모래로 된 장구애비 아니면, 모래로 된 혼천의渾天儀 모래로 된 한데 똥// 모래처럼 수북한 인종들이 지하철 4호선 플랫폼으로 모래처럼 엎질러진다 모래비가 오려나 봐 수십억 년 황폐해진 모래의 비계飛階, 또는 모래의 비상구 모래바퀴를 단 역세권의 1톤 픽업이 아무데서나, 가망 없이 모래처럼 주저앉고, 모래 문신을 한 모래인종 하나가 그 옆에서 식은 모래의 식은 순대국밥을 뜨고 있다 세금 탈루범과 앵벌이 들이 모래처럼 잠입하는 남태령역, 모래의 골목 쯧쯧 모래비가 올 것 같다니까 모래비가 곧 올 것 같지? 어디선가 모래인종들의 혀와 입술이, 입술과 혀가 모래처럼 서로 스며들다가 모래처럼 흩어지며 무산되는 어슬녘// 모래가 모래끼리 모여 모래의 월식月蝕을 바라본다 하기야, 어차피, 과연 캄브리아기紀나 그 이전부터 자행된 모래의 접선, 또는 모래의 내통// 모래로 된 외륜선 모래로 된 짚신벌레 아니면, 모래로 된 미분과 적분 모래로 된 화훼花卉 모래로 된 접시저울 모래로 된 중력방정식 모래로 된 트럼펫
바다, 내 언어들의 희망 또는 그 고통스러운 조건·32
―귀신고래가 있다 / 오태환
귀신고래는 있다 은허殷墟의 귀갑수골문龜甲獸骨文 안에도 이도백하二道白河의 푸르게 망가진 객잔客棧 안에도 귀신고래는 있다 믿기 어렵겠지만, 귀신고래는 있다 거품벌레가 문득 풀썩 무심히 뛰어오르는 게성운과 그믐 사이의 얕은 체적 속에도 귀신고래는 있다 그대의 붕괴된 홍채 속에도 귀신고래는 있다 자동차보험료영수필증에도 영등포구청의 공무원복무규정집에도 귀신고래는 있다 나 사랑해? 꼴깍꼴깍 마른침을 삼키며 열중熱中하는 애인들의 손길에도, 손길의 모호한 떨림에도 귀신고래는 있다 분명히 귀신고래는 있다 마카로니웨스턴 영화에도 귀신고래는 있다 등자鐙子에도, 명랑한 시거연기에도, 총알이 뚫고 지나기 전부터 자꾸 삐뚤어지며 증발하는 창백한 과녁에도 귀신고래는 있다 그러니까 울산 세죽리 조개무지의 고요와 소란 속에도 귀신고래는 있다 문풍지처럼 얇고 시리게 밤을 앓는 누군가의 소주잔 안에도 귀신고래는 있다 얄궂은 노릇이지만 부인否認할 수 없는 곳에도 귀신고래는 있고, 더욱 부인否認할 수 없는 곳에도 귀신고래는 있다 명왕성에도 귀신고래는 있다 모퉁이마다 질그릇처럼 조그맣게 얼어터진 미신고 행려병자의 시체와 벽돌담장 위에서 캄캄하게 흥건한 봄꽃, 귀신고래가 있다
바다, 내 언어들의 희망 또는 그 고통스러운 조건·33
―우주의 복도를 지나기 위한 사소한 질문 ② / 오태환
*/ 1991년 이탈리아와 오스트리아 접경의 알프스 산중에서 발견되었다 5,300년 동안 빙하 속에서 썩지 못한 채 버텨 온 그는 갈색 눈의 인도유럽인종으로 밝혀졌다 그의 이름 외치Ötzi The Ice Man는 처음 모습을 드러낸 지역명에서 유래한다 그는 곰가죽 모자를 쓰고 풀잎망토를 걸쳤으며, 염소가죽을 묶은 정강이보호대를 했다 어깨에 박힌 돌화살촉과 피부 따위에 묻은 여러 사람의 혈흔으로 보아, 다른 부족과 교전하던 중 계곡으로 추락해 사망한 듯하다 구리도끼와 화살통, 주목朱木을 깎은 화살이 함께 발견되었다 그는 라임병을 심각하게 앓고 있었을 뿐 아니라, 편충 같은 기생충에도 감염된 상태였다 죽기 두 시간 전쯤 섭취한 것은 아이벡스의 육포와 소맥小麥이었다// */ 쇄골 근처에서 별빛들이 흘러내렸다 별빛들의 흐린 깊이에 느리게 감긴 채, 그는 양젖을 담은 가죽부대처럼 조심조심 숨을 기울여 털어내고 있었다 폭설과 얼음의 별빛들이 천칭자리와 안드로메다은하와 춘분점의 어둠을 비껴, 가파른 속도로 떠나갔다 어떤 별빛들은 횡경막과 충수돌기를 시침질하듯이 더듬었고, 어떤 별빛들은 회색늑대와 눈표범처럼 주위를 기웃거렸다 그가 양젖을 담은 가죽부대처럼, 전 중량을 기울여 마지막으로 숨을 털어내며, 마지막으로 바라본 것은 무엇일까 알프스의 빙하 속에서 자신의 전 중량을, 5,300년 내내 바로 저 캄캄한 별빛들로 염습을 하며, 5,300년 내내 바라본 것은 무엇일까
바다, 내 언어들의 희망 또는 그 고통스러운 조건·35
―죄가 깊다 내가 주섬주섬 이슬을 저지르며 / 오태환
내가 너에게 가는 동안 뿔뿔이 맺힌 이슬을 짓밟으며, 마당귀에 빨랫줄에 햇빛의 시렁에 맺힌 이슬을 짓밟으며, 차마 짓밟으며 가는 동안 이슬이 이슬끼리 들키고 말 듯이, 내가 허파 속까지 맑게 들키며 남모르게 들키며 너에게 가는 동안// 내가 너를 생각하는 동안 내가 너를 탕진하는 동안 수유동의 아침마다 수유동의 아침이 이슬을 생각하면서 이슬을 탕진하듯이, 내가 너를 탕진하고 말 때까지// 나는 이슬의 푸른 맨발 나는 이슬의 푸른 무덤 죄가 깊다 내가 주섬주섬 이슬을 저지르며
바다, 내 언어들의 희망 또는 그 고통스러운 조건·36
―500년 된 잉카의 소녀미라를 위한 아가雅歌 / 오태환
내게 입 맞추기를 바라니 네 사랑이 석류石榴 속 잇바디보다 붉게 젖었구나 나는 자면서도 톡! 톡! 네가 문 두드리는 소리를 듣는다 예루살렘의 딸아 피부가 흑요석처럼 검고 아름다워서 나는 은하수가 은성殷盛한 한 채의 밤, 송곳니가 자개처럼 굳고 아름다워서 나는 갈기를 세운 한 채의 늑대 보아라 너와 내가 쉴 침대의 지평선에 저렇게 인주印朱빛 초승달이 뜨고 광야가 뜨고 얕은 새들이 뜨고 낚시미늘 같은 대상隊商 두어 떼가 뜨고 있다// 내 누이 내 신부新婦야 청혼 전부터 네 혀에는 수금水禽이 노는 갈릴리호수가 있고, 밀화와 법랑의 목덜미에는 흰 창포와 흰 박하와 흰 침향목이 자란다 네 소란한 머리칼은 청금과 흑금의 이슬밭을 둘렀다 드디어 네 젖가슴과 젖꼭지는 백합의 알뿌리처럼 밝고, 잔디를 디디는 어린 사슴의 발굽처럼 향기롭다 네 허리는 탄식하듯이 느리고 가늘다 네 강의 하구河口가 레바논의 상아망루처럼 부풀다가 어느새 바빌론시市의 우기雨期처럼 범람하는구나// 내가 청의를 벗었으니 다시 입겠으며, 내가 유향油香으로 발을 씻었으니 다시 더럽히겠느냐 너는 다만 울 듯이 왼손으로 내 이마를 받아 괴고, 다만 계수桂樹의 꽃향기를 싸서 접듯이 오른팔로 내 허벅지를 안을 뿐이다// 여인의 무리 가운데 어엿브구나 내 사랑아 네 몸알의 어엿븐 초분草墳 위에 운석隕石 하나가 빗금을 그으며 내렸다 날이 저물고 돋을볕 서고 또 날이 저물어서, 내가 차라리 몰약沒藥의 작은 언덕과 사향麝香의 작은 언덕으로 간다
바다, 내 언어들의 희망 또는 그 고통스러운 조건·37
―이런 빛깔 / 오태환
이런 분홍을 아시나요 건드리면 은단銀丹처럼 쏟아지는 분홍을 바람도 없이 하잔한 분홍을 분홍의 실화失火 분홍의 재해災害 분홍의 지루한 미제사건 분홍, 하고 속삭이면 외딴 분홍이 또 분홍을 힐끗 누설하지요// 이런 분홍을 아시나요 사막의 지평선처럼 저무는 분홍을 우제류偶蹄類의 뿔처럼 돋는 분홍을 분홍끼리 모여 분홍끼리 붐비면서 무릎걸음으로 닳고 있잖아요 저 별빛 모서리까지 닳고 있잖아요 분홍의 위험한 천수답天水畓 그대 가슴의 위험한 천수답天水畓// 눈독 들여도 소용 없어요 분홍의 벼랑이 분홍의 벼랑을 밀고 있군요 샅샅이 분홍인 채 밀고 있군요 분홍의 발바닥 사늘한 꿈의 발바닥 발각되고 나서도 여전히 분홍인 광속으로 분홍인
바다, 내 언어들의 희망 또는 그 고통스러운 조건·38
―이런 음악 / 오태환
폭탄벌레는 폭탄벌레 우엉잎에서도 폭탄벌레 문지방에서도 폭탄벌레 지붕엣 너와처럼 휘인 폭탄벌레 바람이 부나요? 폭탄벌레 폭탄벌레일수록 폭탄벌레 사금파리처럼 금 간 폭탄벌레 10분 전에도 폭탄벌레 그러니까 폭탄벌레 수평선 같은 폭탄벌레 일식日蝕 같은 폭탄벌레 팡! 하게 젖은 폭탄벌레 조리복소니 폭탄벌레 아무리 멀어도 폭탄 벌레 심지만 남은 폭탄벌레 선득선득 폭탄벌레 우두커니 폭탄벌레 하늘염전 너머 폭탄벌레 애꾸눈 폭탄벌레 암달러상 폭탄벌레 우물보다 깊은 폭탄벌레 폭탄벌레도 폭탄벌레 한 냥 서 돈쭝 폭탄벌레
바다, 내 언어들의 희망 또는 그 고통스러운 조건·39
―우리가 불가역적 계약, 혹은 불가역적 사건이라 믿는 것들에 대해 ⓶ / 오태환
허리를 개켜 쟁인 곳에 다른 허리가 스며들었다 종아리를 괴면 얼굴이 엎질러졌고, 얼굴이 엎질러지면 두 무릎을 누설했다 반쯤 내려 뜬 눈이 낚싯바늘 같다 뒤통수의 그늘들은 호두알처럼 얇게 굴러다녔다 사타구니가 더 어두워지는 동안, 흰 발바닥 한 켤레가 마저 낡아 갈 것이다 무거운 닻을 건져 올리듯이 팔꿈치들과 아래턱들이 숨죽여 가라앉았다 외딴 길에서 외딴 귀는, 아직 자욱이 젖은 채다 공중에서 느리고 푸르게 닳고 있는 손톱 어떤 허벅지는 귀이개처럼 수척했으며, 어떤 가슴은 문짝 떨어진 경첩처럼 달캉거렸다// 한번 섬으로 간 새는 다시 오지 않았고/ 한번 스친 바람은 다시 불지 않았다/ 프놈펜 근교 쯔응아익의 남서 방향, 그믐달 낀 캄퐁사옴의 검은 해변/ 흐린 빗장뼈만 남은 채 그녀는/ 폐선처럼 모래톱에 처박혀 필사적으로, 나부꼈다// 1977년 5월, 또는 그 이전이나 이후
바다, 내 언어들의 희망 또는 그 고통스러운 조건·41
―내게 사랑이 있었네 ③ / 오태환
내 안에 저렇게 눈보라 쳐서, 흰 눈발로 차마 붐비는 사랑이 있었네/ 내 안에 저렇게 눈보라 쳐서, 차마 흰 눈발의 무릿매 맞는 사랑이 있었네/ 내 안에 저렇게 눈보라 쳐서, 차마 흰 눈발의 유성우(流星雨) 속에 잠드는 사랑이 있었네/ 내 안에 저렇게 눈보라 쳐서, 흰 눈발의 고요에 차마 가슴 데는 사랑이/ 흰 눈발처럼 쉬지 못하고 차마 에도는 사랑이, 내 안에 저렇게 눈보라 쳐서
바다, 내 언어들의 희망 또는 그 고통스러운 조건·43
―그것 ⓶ / 오태환
거울을 보며 머리를 헹구는, 그대의 방심 속에도 있다 그것은 黄道를 따라 먼지처럼 부유하는 흰긴수염고래 곁에도 있고, 그것은 제타함수의 수천 광년을 횡단하는 완보벌레의 완보 곁에도 있다 사과를 베는 그대 果刀의 푸르고 견고한 속도 안에도, 그것은 있다 망가진 자전거 가 무심히 돌리는 페달 그러므로 그것은// 日蝕을 숨죽여 바라보는 공사장의 모래 속에도 있다 하루치의 주검이 동짓날 마른 무청처럼 가벼워질 때, 어느 전리층 아래에선 숫돌에 갈 듯이 또 우레가 칠 것이다 그 찰나에도 그것은 있다 그대의 새벽에도 그대의 다음날 새벽에도 있다 성냥불처럼 꺼지는 투구꽃들의 희미한 尾行 그것은 어깨에 묻은 빗물을 털어내다가 불쑥 든 잡념 속에도 있고// 그것은 아무도 모르게 허드레 물살에 젖는, 한강 둔치의 흐린 구석에도 있다 바람이 부는데 처음 보는 누군가가 한눈을 팔고 있다 폐결핵의 으슥한 행려의 날들 달걀프라이처럼 맺히는 밤하늘의 안드로메다은하 안에도, 간石器의 밝은 돌화살촉과 더 밝은 돌모루 안에도 그것은 있다 어제 그대가 친 풍금 곁에도 풍금의 고요 곁에도
바다, 내 언어들의 희망 또는 그 고통스러운 조건·44
―조용한 생 / 오태환
그는 염장이, 요즘 쓰는 말로 장례지도사였다 선천적 성대기형으로 말을 하지 못했다 애면글면 입술과 혀를 놀려서, 아무리 말하려 해도 자모음이 버무려지지 않은, 단수된 수도꼭지에서 나는 듯한 바람소리만 서늘하고 헐겁게 샜다. 그가 하루에도 몇 구씩 시체의 선득선득한 살점을 알코올과 탈지면으로 세척하고 냉구들장처럼 딱딱한 관절을 주물러 펴며, 매번 드는 생각은 그때마다 세계가 믿을 수 없을 만큼 조용해진다는 것이었다 식은 부지깽이 같은 팔다리를 흰 창호지로 묶거나 검게 가문 낯에 밑화장을 할 때도, 오동나무 관을 補空으로 채워 넣을 때도 매한가지였다 염습을 할 때마다 세계가 그렇게 조용해지는 게, 자신이 태어나면서부터 줄곧 벙어리였기 때문이라는 얼토당토않은 그의 확신은, 수십 년이 지나도록 점점 더 또렷해질 따름이었다// 휴대폰 문자로 난생처음 해고를 당한 그는 상조회사 쪽에 까닭을 따지는 대신, 자판을 두드려 바다로 가는 고속버스를 예매했다 바다가 보이는 벼랑 끝에서 그는 누구에겐가 뭐라 말하려 애를 썼다 하지만 성대를 비집고 나오는 것은, 짜장 단수된 수도꼭지에서 새는 성싶은 서늘하고 헐거운 바람소리가 전부였다 그는 허리께에서 백만 톤은 됨직한 거대하고 뜨겁고 투명한 무쇠닻[?]을 꺼내 천천히, 젖심까지 기울여 바닷물 속으로 부리기 시작했다 이제 많이 늙은 그의 눈시울에서 시나브로 낮별 하나가 희미하게 結露되고 있었다
바다, 내 언어들의 희망 또는 그 고통스러운 조건.45
―소금평원, 볼리비아 우유니Uyuni / 오태환
내가 죽어서 캄브리아기 이전부터 선캄브리아기 이전부터 죽어서, 머나먼 소금평원에 비치는 하늘처럼 염장되리 허파 속까지 발톱 속까지, 푸르게 드넓게 염장된 채 한 번 더 죽으리// 내가 죽어 나 태어나기 이전부터 그대 태어나기 이전부터 죽어, 머나먼 소금평원에서 온몸을 들키며 비행하는 혜성이 되리 혜성이 되어, 까마득히 온몸을 들키며 한 번 더 죽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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