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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봄.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다. 솔직히 말해서 봄이 언제 시작돼서 언제 끝나는 것인지 나는 정확하게 모른다. 어떤 사람들은 새해를 맞이하기가 바쁘게 새봄이 왔다고 기뻐하며 축복의 인사를 나눈다. 아직 바람이 차고 대지가 녹기도 전에 외투를 벗어 던지고 '희망찬 봄'을 구가한다. 그들에게는 봄이 길다.

우리나라에서는 입춘이 지난 뒤에도 눈이 내리고, 녹기 시작하던 땅이 다시 얼어 붙는다. 봄은 이름뿐이라고 하며, 여전히 외투로 몸을 감싸는 사람들도 있다. 주춤주춤 올 듯 말 듯 하다가 마침내 봄이 오기는 온다. 그러나 이젠 정말 봄이 왔구나 하고 가슴을 펴 볼까 하면, 어느 사이에 벌써 뜨거운 태양이 내리쬐는 여름과 마주치게 된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봄은 허무하게 짧다.

젊음, 옛날에는 '청춘(靑春)'이라는 말이 흔히 쓰였다. 얼마나 싱싱하고 희망이 가득한 말인가. 나에게도 정녕 젊은 날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언제 왔다가 언제 갔는지도 모르는 사이에 '할아버지'라는 칭호를 얻기에 이르렀다. 봄다운 봄을 구가할 겨를도 없이 그것이 사라졌듯이, 나의 젊음도 그렇게 사라지고 말았다. 꿈 같은 젊음.

봄을 길게 누리는 사람이 있듯이 젊음을 길게 누리는 사람도 있다. 항상 마음을 젊게 갖고 희망으로 내일을 내다 봄으로써, 언제나 젊은이처럼 밝고 명랑하게 사는 사람들이다. 마음의 젊음을 따라서 몸도 오래도록 젊어 보인다.

같은 값이면 긴 봄을 가지고 살도록 계절의 변화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좋을 듯하다. '청춘'이라는 말이 상징하듯 싱싱한 젊음을 오래 간직하도록 사는 것이 바람직함은 더욱 두말할 나위도 없다.

세상에는 양지도 있고 음지도 있다. 밝음도 있고 어둠도 있다. 살다 보면 기쁨과 마주치기도 하고 슬픔과 부딪치기도 한다. 불쾌한 일과 유쾌한 일이 새끼줄처럼 꼬여 돌아가는 세상에서 우리는 오늘을 살고 또 내일을 맞이한다.

밝고 기쁜 측면에 불빛을 밝히고 보면 한없이 밝고 기쁜 세상이요, 어둡고 슬픈 측면에 조명을 들이대면 한없이 어둡고 슬픈 세상이다. 어느 쪽에 불빛을 밝히든 그것은 그 사람의 자유이다.

물론 모든 사람이 똑같은 상황에 놓여 있는 것은 아니다. 평생을 주로 양지바른 곳에서 사는 사람도 있고, 평생의 대부분을 어둠침침한 그늘 속에 던져진 채 사는 사람도 있다. 운명의 장난이라고도 하고, 사회의 구조적 잘못에 책임이 있다고도 한다. 그 책임이 누구에게 있든지 그늘 속에 던져진 사람들로서는 속상하고 화나는 현실이 아닐 수 없다. 밝고 기쁜 측면에 불빛을 밝히면 한없이 밝고 기쁜 세상"이라는 말에도 울화통이 터질 것이다.

그러나 알고 보면 양지바른 곳에서 사는 사람들에게도 말 못할 어둠과 슬픔이 있고, 그늘 속에 던져진 사람들에게도 찾아보면 빛과 기쁨이 있다. 다만 그 정도의 차이가 너무 크다는 사실에 문제가 남는다. 하지만 결국 누구나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기는 매양 일반이다.

나는 이제까지 어느 편이었느냐 하면 삶의 어두운 측면에 불빛을 밝히고 바라보는 버릇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기에 나의 봄은 해마다 짧았고, 나의 청춘은 억울할 정도로 덧없이 흘러갔다.

나는 한국 사람들 가운데서 특별히 비참하고 그늘진 지대에 던져진 편은 아니다. 그리 넉넉하지는 못하나 양식 걱정은 안 해도 좋을 정도의 농가에서 태어나 비교적 순조롭게 자랐고, 지금은 누가 보아도 양지쪽에 가까운 구릉지대에 살고 있다. 그런 내 눈에 왜 삶의 어두운 얼굴이 더 크게 보이는지 잘 알 수 없다. 아마 신경이 두툼하지 못한 기질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내가 나라를 빼앗긴 약소 민족의 일원으로 태어나서 여러 차례의 전쟁을 겪으며, 험악한 꼴을 많이 보았다는 사실도 관계가 있을 것이다.

삶의 어둡고 우울한 측면을 외면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눈길을 돌리고 못 본 척한다 해서 나쁜 사실이 없어지지는 않는다. 차라리 똑바로 들여다보는 시선이 있는 곳에서라야 시정(是正)의 실마리도 풀릴 것이다.

그러나 어둡고 그늘진 가운데서도 밝고 고마운 것을 찾아보는 시선은 더욱 값진 시선이다. 어둠 속에서 한 줄기 빛을 찾아가며 운명을 사랑하라고 한 것은 니체의 보배로운 교훈이다.

이미 지난 날이야 어찌하랴. 앞으로나마 밝고 아름다운 일들을 애써 찾아보며 살고 싶다. 그러면 앞으로는 나에게도 좀 더 긴 봄이 함께 할 것이다. 사라진 젊음이 되살아나지는 못하더라도, 노소를 불문하고 모든 켜의 삶에 그런대로 살맛이 있다는 것을 터득하게 될 것이다.

 



김태길(1920~2009): 수필가, 철학자. 호는 우송(友松). 충북 충주 출생. 일본 동경대학 법학부 수학, 서울 문리대 철학과 졸업. 동 대학원 졸업, 미국 Johns Hopkins 대학원 철학과 졸업(철학박사). 도의문화저작상 수상했으며, 서울대학교 교수, 철학연구회 회장, 대한민국학술원 회장 등을 지냈다.

주요 저서로는 『윤리학』, 『한국 대학생의 가치관』, 『존 두이』, 『새로운 가치관의 지향』, 『웃는 갈대』, 『변혁 시대의 사회 철학』, 『빛이 그리운 생각들』, 『검은마음 흰마음』, 『마음의 그림자』, 『삶을 어디서 찾을 것인가』, 『흐르지 않은 세월』 등 다수가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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