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수필 읽기

소꿉 친구 / 김태길

부흐고비 2023. 4. 21. 14:06

두메 산골의 하루 해는 어린 나에게 지루하기 짝이 없는 시간이었다. 겨우 세 가구가 모여 살던 우리 이웃에서는 사람을 만나기가 어려웠고, 어른들은 일손이 바빠서 어린아이 상대할 여가가 없었다. 형들과는 나이 차이가 너무 많아서 친구가 되기 어려웠다.

우리 집 바로 이웃에 '언년'이라는 여자아이가 살고 있었다. 나이는 나보다 한 살 위였고 얼굴은 수수한 편이었으나, 살림이 가난해서 늘 남루한 옷을 걸치고 있었다. 아이들의 훈육에 신경을 쓸 만한 여유가 거의 없는 가정에서 자란 탓인지 언년이는 한마디로 야생마 같은 아이였다.

세 가구 이웃에는 언년이밖에 같은 또래가 없었다. 자연히 자주 만나게 되었지만, 아주 절친한 사이는 아니었다. 남자는 남자끼리 놀아야 한다는 유교식 교육의 영향 때문이었는지, 또는 언년이네가 양반이 아니라서 너무 가까이 지내지 못하도록 어른들이 은연 중에 작용을 했기 때문이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

아마 언년이가 아기자기한 성격의 아이가 아니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아기자기하게 정겨운 사이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우리는 자주 함께 어울려서 놀았다. 세발자전거나 스카이콩콩 따위는 이름도 모를 때고 장난감이라고는 풍선 한 개 없던 처지라, 혼자서 노는 방법은 거의 없었다.

사금파리 쪼각과 나뭇잎과 수수깡 정도가 가진 것의 전부였던 산골 어린이들이 가장 많이 하고 논 것이 소꿉장난이었다. 우리들의 소꿉장난에서 주도권을 잡은 것은 언제나 언년이었다. 저는 엄마 노릇을 할 거니까 나더러는 아빠가 되라고 배역을 지정해 주고는 여러 가지의 지시를 내리곤 하였다.

그 애는 참 아는 것이 많아서 나에게 가르쳐 준 것도 많았다. 아빠는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하는 것이라는 식으로 친절하게 가르쳐 주었다. 수수깡으로 안경 만드는 방법을 가르쳐 준 것도 언년이었고, 소나무 가지의 속껍질을 갉아 먹는 방법을 가르쳐 준 것도 언년이었다.

언년이 나에게 가르쳐 준 것 가운데는 요즈음 식으로 말하자면 '성교육의 첫걸음'에 해당하는 것도 있었다. 도대체 어디서 그런 것을 배워 왔는지 이것저것 많은 것을 가르쳐 주었지만, 나는 끝내 그 아이의 우수한 제자가 되지 못했다. 나보다 아는 것이 많은 언년이에게 존경심을 느꼈어야 좋은 제자가 될 수 있었을 터인데, 그렇지 못했던 까닭에 학습에 대한 열성이 부족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언년에 대해서 뜨거운 애착을 느끼지 못한 내가 가장 좋아한 동무는 연옥이었다. 연옥도 나보다 한 살 위였으나 키는 작았다. 이름은 귀여웠지만 평범한 사내아이였다.

우리 집과 연옥의 집 사이는 꽤 떨어져 있었다. 육, 칠 세 어린이 걸음으로는 아마 20분 가까이 걸렸을 것이다. 인가가 없는 호젓한 오솔길을 걸어서 나는 자주 연옥이네 집을 찾아갔다. 발이 푹푹 빠지는 눈길을 밟고 아침 일찍 찾아간 일도 있었다. 이렇게 추운 날 어떻게 왔느냐고 하면서 연옥 어머니가 꽁꽁 언 손을 잡고 화로 불가로 끌고 갔다. 더러는 '밤마실'을 가고 싶은 충동을 느끼기도 했으나, 밤나무 가지에 목을 매달아 죽은 여자 귀신이 나올지도 모른다는 어른들의 이야기가 무서워서 단념하곤 하였다.

연옥은 성질이 온순하고 욕심을 부리거나 떼거지를 쓰는 일이 없어서 좋았다. 자주 만나다 보면 가끔 싸우기도 할 나이였으나, 연옥이 착한 아이였던 까닭에 그런 일이 없었다. 그리고 연옥이네 집에서는 산에서 붙잡아 온 노루 새끼 두 마리를 키우고 있어서, 그것들이 얼마나 컸나 궁금하여 자주 가 보게 되었다.

언년은 열 살쯤 되었을 때 누군가의 민며느리가 되어서 산마을을 떠나갔고, 나도 초등학교에 다니기 위해서 외가댁 신세를 지게 되어 연옥이 곁을 떠났다. 방학 때 집에 왔을 때는 역시 연옥과 가깝게 어울리게 되었으나, 언년은 차차 망각 속으로 사라져 갔다.

연옥과의 사귐도 중학생 시절까지는 그런대로 지속이 되었으나, 고등학교에 들어간 뒤부터는 점점 멀어져 갔다. 공통의 관심사나 화제가 없어서 자연히 서먹서먹해 졌던 것이다.

민며느리가 되어서 떠나갔던 언년이 다시 산마을에 나타난 것은 아마 오륙 년 뒤였을 것이다. 쪽을 찐 성숙한 여자가 되어 짙은 화장을 하고 다녔다. 처음에 갔던 시집을 뛰쳐나와 술집 접대부로 전전하다가 돌아왔다는 소문이었다. 언년측에서는 창피스럽게 여기고 기피하는 기색이 전혀 없었으나, 위험한 사람 같은 생각이 들어서 내가 슬슬 피하는 꼴이 되었다. 언년이 20대 초반에 세상을 떠난 것으로 안다. 연옥도 50세 전후에 타계했다는 소문이다. 82년에 40여 년만에 옛 산 마을을 찾았을 때, 아무도 아는 사람을 만날 수 없게 된 고향이 무척 쓸쓸하게 느껴졌다.

아이들 큰어머님께서 최근에 서울로 이사를 오셨다. 조카들이 시골서 농장을 경영하다가 그만두고 서울 살림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팔순을 바라보는 고령이시나 기력이 좋아서 농장 일을 많이 돕고 계시다가, 이젠 아주 편하게 되신 셈이다. 큰어머니께서도 그렇게 된 것을 처음에는 매우 흡족하게 여기셨다.

그러나 한 20일 지난 뒤부터는 일거리 없는 것을 큰 고통으로 느끼기 시작하셨다. 하루 해가 너무나 길고 지루한 모양이었다. 우리 집에 와서 며칠 지내시는 동안에도 줄곧 담배만 태우시는 빛이었다.

일거리 대신 비슷한 연배의 가까운 친구가 있어도 좋을 것이다. 몰두할 수 있는 일거리나 뜻이 맞아서 만남이 즐거운 친구나 둘 가운데 하나는 있어야 한다는 것.

누구나 다 아는 이 평범한 상식이 새삼스레 절실하게 느껴지는 것은 내 정년 퇴직이 앞으로 멀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김태길(1920~2009): 수필가, 철학자. 호는 우송(友松). 충북 충주 출생. 일본 동경대학 법학부 수학, 서울 문리대 철학과 졸업. 동 대학원 졸업, 미국 Johns Hopkins 대학원 철학과 졸업(철학박사). 도의문화저작상 수상했으며, 서울대학교 교수, 철학연구회 회장, 대한민국학술원 회장 등을 지냈다.
주요 저서로는 『윤리학』, 『한국 대학생의 가치관』, 『존 두이』, 『새로운 가치관의 지향』, 『웃는 갈대』, 『변혁 시대의 사회 철학』, 『빛이 그리운 생각들』, 『검은마음 흰마음』, 『마음의 그림자』, 『삶을 어디서 찾을 것인가』, 『흐르지 않은 세월』 등 다수가 있음.

공지사항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Total
Today
Yesterd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