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수필 읽기

시어머니와 며느리 / 김태길

부흐고비 2023. 4. 21. 14:07

고부간의 갈등에 관한 이야기는 어린 시절부터 자주 들었다. 많은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나는 늘 며느리 편이었다. 우리나라 전통 사회의 시어머니들이 너무 심했다는 생각이 들었고, 며느리 시절에 부당한 구박을 받은 여인이 시어머니가 된 뒤에는 옛날 생각을 하고 좋은 시어머니 노릇을 함직도 한데, 사실은 그 반대임에 놀라기도 하였다.

그러나 요즈음은 시어머니에게 동정이 가는 이야기를 자주 듣는다. 내 나이와 신분이 시어머니에게 가깝게 되었기 때문이기보다는 세상의 판도가 달라졌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양지에 그늘이 지고, 음지가 양지로 변한 것이다.

어떤 여자 교수가 미국에서 보고 들은 이야기는 약간 충격적이다. 그 교수는 미국의 여러 양로원을 돌아보았으며, 그곳에서 한국의 할머니들을 여러분 만났다고 하였다. 한국 할머니가 어떻게 미국 양로원에까지 오게 되었느냐고 물었더니, 처음에 미국에 온 것은 아들과 며느리의 초청 때문이었고, 한동안은 손자 손녀 보아주며 잘 지냈으나, 그 아이들이 장성한 뒤로는 할 일이 벗어져서 결국 양로원으로 밀려났다고 하소연을 했다는 사연이다.

며느리의 푸대접으로 늙은 시어머니의 말년이 외롭다는 이야기는 우리 주변에서도 흔히 듣는다. 장남만이 아들이냐고 푸념이 잦은 맏며느리의 눈총을 견디지 못하여 아들 삼형제의 집을 차례로 돌며 한 달씩 사는 팔십대 고령 할머니의 이야기가 서글픈 것은, 세 며느리 가운데 반가워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기 때문만은 아니다. 반가워하지 않는 데 그치지 않고 노골적으로 싫어하는 까닭에 할머니는 외롭다. 손자와 손녀까지도 할머니를 '남'이라고 생각한다.

홀어머니의 숙식은 큰아들 집에서 맡고, 용돈은 둘째와 셋째의 집에서 분담하기로 한 집안도 있다. 생각은 좋으나 이 방법도 그리 순조로운 것은 아니다. 한 달에 한 번씩 드리게 마련인 그 용돈을 할머니가 몸소 받으러 다녀야 하는데, 그 '수금' 이 몹시 부담스럽다는 이야기다.

모든 며느리가 그런 것은 물론 아니다. 요즈음도 시부모에게 효성스러운 며느리가 있다는 이야기를 더러 듣는다. 다만 인구는 느는데 착한 며느리의 수는 줄어드는 추세에 있는 듯하여 세상이 서글프다.

어느 날 치과에 갔더니 차례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대기실을 메우고 있었다. 그 가운데에는 늙은 시아버지를 모시고 온 며느리도 있었다. 80세가 가까워 보이는 시아버지를 삼십대 후반으로 보이는 며느리가 이모저모 보살피는 정경이 훈훈하고 고마웠다. 할아버지 차례가 왔을 때, 며느리는 진료실까지 따라 들어가는 자상함을 보였다. 그러나 끝에 가서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었다. 치료비 이만 오천 원을 며느리가 내지 않고, "아버님 돈 가지신 것 있어요?" 하며 시아버지 주머니에서 돈이 나오도록 만든 마지막 광경에 나는 '역시 그런 것인가' 하는 실망을 느꼈다.

'오는 정에 가는 정'이라고 시어머니가 하기에 따라서 며느리의 태도가 달라지기도 한다. 우리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사는 어느 교수 댁은 고부간에 의가 좋기로 소문이 났다.

시어머니가 며느리를 딸보다도 더 아낀다고 따님이 불평을 한다는 말도 들리고, 며느리는 친딸처럼 시어머님을 따른다는 소식도 들린다. 그 댁은 시부모가 모두 계실 뿐만 아니라 아직도 두 분이 모두 활동할 수 있을 정도로 체력이 왕성하고 경제력도 풍부하다. 두 분의 나이가 너무 들어 힘을 잃은 뒤까지 오늘의 미담이 계속되기를 나의 일처럼 바라는 마음이다.

부모의 활동력이 왕성하고 경제력도 풍부한 동안에는 부모와 자식의 사이가 원만하다가, 부모가 늙어서 무력하게 된 다음부터 아들과 며느리로부터 푸대접을 받게 되었다는 이야기도 들린다. 어떤 친구는 일찌감치 재산을 지식에게 물려주고 마음 편하게 살려고 했던 것이 푸대접을 재촉한 결과가 되었다고 후회하기도 하였다.

` 안방에서 듣는 시어머니 말 다르고 부엌에서 듣는 며느리 말 다르다고 하였다. 요즈음 나는 주로 시어머니 쪽 이야기를 듣는 편이다. 내가 직접 시어머니들과 이야기할 기회는 적지만, 아내가 친구들에게 들은 이야기를 전하게 되므로 결국 늙은 세대의 이야기를 자주 듣게 된다. 세상 며느리들의 말을 들으면, 아마 전혀 다른 각도의 이야기도 상당히 많이 있을 것이다. 새며느리 시절에 두부 한 쪽이나 김 한쪽도 마음대로 못 먹은 이야기며, 외출 나갔다 돌아올 때 버스 대신 택시 탔다고 야단맞은 이야기 등 시어머니의 흉도 적지 않을 것이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오늘의 시어머니도 과거에는 며느리였으며, 오늘의 며느리도 장차 시어머니 될 날이 있는 것이 정상적이라는 사실이다. 며느리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 바로 시어머니의 자리에 앉는 사람은 드물며, 며느리 경험만 있고 시어머니 노릇 한 번 못해 보는 사람은 우리나라의 통념으로는 별로 다행한 편이 아니다.

콩과 보리는 처음부터 씨가 다르지만, 젊은이와 늙은이는 씨가 따로 없다. 젊은이는 늙은이의 과거상이고, 늙은이는 젊은이의 미래상이다.

사회상의 풍조나 사람들의 생활 태도는 일종의 전통이므로 일조일석에 달라지지 않는다. 오늘의 젊은이들이 오늘의 젊은이들로부터 받는 사랑과 미움을 내일의 늙은이들은 내일의 젊은이들로부터 받게 된다.

미래를 계산하고 현재를 사는 것이 언제나 옳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사람은 젊어서나 늙어서나 사람답게 살아야 하며, 젊어서는 좀 고생을 하더라도 늙은 뒤에는 편안하게 살다 가는 것이 바람직한 삶의 모습이라는 생각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끝이 좋으면 모든 것이 좋다.'는 서양의 속담은 동양 사람에게도 지혜가 될 수 있다.



김태길(1920~2009): 수필가, 철학자. 호는 우송(友松). 충북 충주 출생. 일본 동경대학 법학부 수학, 서울 문리대 철학과 졸업. 동 대학원 졸업, 미국 Johns Hopkins 대학원 철학과 졸업(철학박사). 도의문화저작상 수상했으며, 서울대학교 교수, 철학연구회 회장, 대한민국학술원 회장 등을 지냈다.
주요 저서로는 『윤리학』, 『한국 대학생의 가치관』, 『존 두이』, 『새로운 가치관의 지향』, 『웃는 갈대』, 『변혁 시대의 사회 철학』, 『빛이 그리운 생각들』, 『검은마음 흰마음』, 『마음의 그림자』, 『삶을 어디서 찾을 것인가』, 『흐르지 않은 세월』 등 다수가 있음.

공지사항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Total
Today
Yesterd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