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옷을 입는 방식에도 예절이라는 것이 있는 모양이나, 나에게는 그것이 공연한 부담으로 느껴 질 때가 많다. 여름에도 의관을 단정히 하고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었던 옛날 양반의 정신이 나에게는 희박한 편이어서, 옷이라는 것은 몸에 편하도록 입는 것이 좋을 것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다.

더운 여름날에는 셔츠 바람으로 다니고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넥타이라는 것을 생략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그러나 배짱이 그다지 두둑한 편이 아니어서, 나 하고 싶은 대로 못하고 관습이라는 것에 얽매여 살고 있다. 누가 무엇이라고 말하는 것도 아닌데, 다른 사람들과 옷차림이 다르면 공연히 마음이 불안하다. 남의 이목에 신경이 쓰이는 것이다.

나와는 정반대로 아주 파격적인 옷차림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모두 되 돌아볼 정도로 희한한 모습으로 유유히 큰 거리를 활보하거나 칵테일 파티 장소에 나타나는 사람을 간혹 보게 된다. 나와 잘 아는 친구 가운데도 그런 사람이 있어서, 왜 그렇게 하느냐고 물어본 적이 있다. 여러 사람의 주목을 끌기 위해서라고 그는 태연하게 대답하였다.

그 친구와 나는 옷차림에 대한 태도가 크게 다름에도 불구하고 근본적으로는 하나의 공통점을 가졌다. 남의 이목을 의식하는 마음이 바탕에 깔려 있다는 공통점이다. 남의 이목을 의식한다는 것은 나 자신을 의식하는 마음의 반영이고, 나 자신을 돋보이게 나타내고 싶은 마음과 동 전의 앞뒤를 이룬다.

자기를 나타내고자 하는 마음 또는 나를 돋보이게 하고 싶은 심정은 거의 모든 사람이 일반적으로 가지고 있는 공통된 심리가 아닐까 한다. 다른 사람들의 눈에 별로 이상하지 않게 보이고 싶은 것도 나의 영상(映象)을 위하는 마음이요, 보통사람들과 다르게 보이고 싶은 것도 나의 영상을 위하는 마음이다.

남에게 좋게 보임으로써 다른 어떤 실질적 이익을 얻고자 하는 이해타산이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많은 경우에 우리는 남에게 좋게 보이는 것 그 자체를 간절하게 바란다. 비록 무의식적일지는 모르나, 우리에게는 남의 찬양을 받고 싶은 은근한 소망이 있다. 인간을 사회적 존재로 규정하는 이유의 일부가 이 소망에 있을 것이다.

서두에서 옷차림 이야기를 끄집어낸 것은 그것이 비근한 예로서 머리에 떠올랐기 때문일 따 름이다. 사실 남자가 자기를 나타내는 방법 또는 수단 가운데서 옷차림이 차지하는 비중은 아 주 사소한 편이다. 남자들은 주로 완력, 직함, 명성, 업적 등을 통해서 자기를 나타내고자 하 며, 더러는 큰 저택이나 고급 승용차로 자기를 과시하기도 한다.

우리는 왕왕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을 우리 자신과 혼동한다. 어마어마한 저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자기 자신이 어마어마한 인물이라고 느끼기 쉬우며, 훌륭한 자동차를 가진 사람은 자기가 진정 훌륭한 인물이 되었다고 느끼기 쉽다. 값비싼 보석을 몸에 지닌 여자는 자기 자신 이 값진 사람이라고 느끼기 쉬우며, 고급 가구를 장만한 여자는 그런 것을 갖지 못한 동창생보다 자기가 월등하게 잘난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나 자신은 무엇으로 나의 자아를 나타내고자 하는가? '자아'라는 것을 의식(意識)의 체계라 고 보는 내 생각이 옳다면, 자아 그 자체는 보이거나 들릴 수 없는 무형(無形)의 존재이다. 그래도 나는 나의 자아를 나타내고 싶은 인간적 충동을 초월할 수는 없으며, 무엇인가 형태 있는 것의 힘을 빌려서 나 자신을 표현해야 한다. 나는 주로 무엇을 통해서 나 자신을 표현하는가? 나의 소유(所有)를 나 자신과 혼동하는 속물근성이 나에게 전혀 없다고는 장담하기 어렵다. 때묻고 낡아빠진 옷을 걸치고 어지럽기 짝이 없는 서재에 앉아 있는 내 모습을 여성 방문객 앞에 태연하게 드러내 놓을 수 있을 정도로 나는 초연한 인간이 못 된다. 다만 소유물에 대한 나의 관념은 비교적 소극적인 편이며, 고급스러운 소유물을 통하여 나 자신을 과시하고 싶은 적극적인 의도는 거의 없다고 말해도 거짓이 아닐 것이다.

한창 젊었던 학창 시절에는 거울에 모습을 비춰 보면서 한참 동안 머물러 있었던 기억이 있다. 나의 몸을 나의 자아로 생각했다는 증거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늙어서 허망하기 짝이 없는 모습이 되었으니, 몸을 내세워서 나를 나타낸다는 것은 생각조차 하기 어렵다.

어린이 시절에 내가 쓴 글이 교지(校誌)에 실렸을 때 은근히 자랑스럽게 느껴졌던 기억이 있다. 글이 잘 되었다거나 못되었다는 평가에 앞서서, 내 것이 활자화되었다는 그 사실이 자랑스러웠던 것이다. 교지 아닌 일반 잡지에 처음 나의 글이 실렸을 때는 더욱 자랑스러웠다. 윤리학에 관한 나의 책이 단행본으로 처음 나왔을 때도, 그 내용은 변변치 못한 것이었으나, 무슨 큰일이라도 해낸 것처럼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나 인쇄물이 흔하게 나돌게 되었고 명색이 학자인 덕분에 내가 쓴 것이 활자화될 기회가 흔하게 된 뒤부터는 글이 신문이나 잡지에 실렸다든지 단행본으로 나왔다는 것으로 자랑을 느끼는 일은 없어졌다. 그 대신 내가 쓴 것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평판에 신경이 쓰이기 시작했다. 내 글이나 책이 칭찬을 받으면 내 사람됨이 칭찬을 받은 것이나 다름없이 기뻤다.

그러나 글이 칭찬을 받았다고 해서 그 글이 참으로 잘 되었다고 단정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며, 글을 잘 썼다고 해서 글쓴이의 인품이 반드시 훌륭하다고 보기는 더욱 어려운 일이다. “글은 사람이다."라는 말이 있기는 하지만, 글을 통해서 '사람'을 제대로 볼 수 있기 위해서는 남다른 통찰력이 필요하다. 글은 잘 쓰지만 사람은 그다지 신통치 않은 경우도 흔히 있다.

냉철하게 생각해 보건대, 자기를 나타내고자 하는 그 마음 자체가 어리석은 욕망이며, 내가 가진 것 또는 나의 솜씨가 칭찬을 받았다고 해서 반드시 나 자신의 사람됨이 훌륭하다고 보는 착각도 어리석은 심정이다. 그러나 인간이기에 우리는 그 어리석음을 버리지 못하고 계속 이렇게 살아간다.



김태길(1920~2009): 수필가, 철학자. 호는 우송(友松). 충북 충주 출생. 일본 동경대학 법학부 수학, 서울 문리대 철학과 졸업. 동 대학원 졸업, 미국 Johns Hopkins 대학원 철학과 졸업(철학박사). 도의문화저작상 수상했으며, 서울대학교 교수, 철학연구회 회장, 대한민국학술원 회장 등을 지냈다.
주요 저서로는 『윤리학』, 『한국 대학생의 가치관』, 『존 두이』, 『새로운 가치관의 지향』, 『웃는 갈대』, 『변혁 시대의 사회 철학』, 『빛이 그리운 생각들』, 『검은마음 흰마음』, 『마음의 그림자』, 『삶을 어디서 찾을 것인가』, 『흐르지 않은 세월』 등 다수가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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