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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테뉴를 읽다가 책장을 덮고 집 근처의 공원으로 나갔다. ‘죽음은 살아 있을 때나, 죽었을 때나 그대에게 관여치 않는다니… 왜냐하면 둘 다 그대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라는 여운을 안고 늘 가던 자리에 가서 앉았다. 오늘따라 풍성한 숲 그늘이 보기 좋다. 쓰르라미란 놈이 세차게 울어댄다. ‘인생은 쓰라려 쓰라려 쓰라려’ 그렇게 들은 일본 시인 이싸(一茶)가 생각난다. 목청 찢어지게 울 수 있는 고작 며칠이 전부인 삶을, 쓰라리고 쓰라린 우리네 삶을 돌아보게 한다. 미생물의 왕성한 번식, 감각의 확산에도 불구하고 여름은 내게 생명의 계절이 아니라 언제나 죽음의 계절로 기억되는 것은 우리 가족뿐만 아니라 내가 좋아하는 작가들의 대부분도 여름에 죽었기 때문이다.

누군가 여름을 환각(幻覺)이라고 말했다는데 보들레르야말로 환각의 여름만을 살다 간 생애가 아닌가 한다. 봄, 가을도 없이 작열하는 태양 아래 숨 막히는 폭염의 인생만을 살다 간 듯해서 그를 찾아가는 내내 마음이 편치 않았다. ‘나에게는 하루하루가 만년(晩年)이었다’는 다자이 오사무(太宰治)도 여름을 넘기지 못하고 집 앞에 있는 다마카와 상류로 뛰어들었다. 헤밍웨이가 방아쇠를 당겨 캐첨 산자락을 뒤흔들던 것은 7월 2일 새벽이었다. 7월 24일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음독자살, 이 날은 우리 어머니의 기일이기도 하다. 반 고흐의 총성 일발이 울린 것은 7월 29일. 푸른 보리밭 앞에서 놀란 까마귀 떼가 흩어지던 하늘을 보고 돌아온 것도 하마 10여 년 전의 일이다. 어렵게 자살을 선택한 반 고흐, 다자이 오사무와 아쿠타가와의 나이는 눈부신 30대였다.

정신병원에서 숨진 모파상, 보들레르 그리고 슈만도 여름을 벗어나지는 못했다. 이들은 모두 40대였다. 어떤 기운이 나를 그쪽으로 내몰았던 것일까. 내 발길이 닿는 곳은 보들레르가 숨진 돔가 1번지의 정신병원, 모파상이 숨진 블랑쉬 박사의 병원, 시인 네르발이 목을 맨 파리의 비에유 랑떼른느의 골목길이거나 관속의 시신이 비틀린 고골의 무덤,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가스 자살한 마리나 맨션, 다자이가 뛰어내린 미타가의 다마카와 상류. 아쿠타가와가 자살한 현장을 찾아 그가 살던 다바다 촌을 헤매 돌며 그들의 시간 속으로 가고 있었다.

오랫동안 나는 죽음이라는 문제에 붙잡혀 있었다. 6‧25 피란 중 산골 뒷방에서 본 다섯 살짜리 여동생의 시신, 미명 속에 꼼짝 않고 앉아계시던 어머니와 그 앞에 흰 천으로 덮여 있는 작은 물체가 보였다. 주검과의 첫 대면이었다. 그로부터 10여 년 뒤 중학생이던 남동생을 또 떠나 보내야 했다. 자유당정권의 탄압으로 일찍 옷을 벗어야 했던 아버지의 분노, 실직. 집안의 기둥이던 장남의 급사, 어머니가 정신줄을 놓기 시작하던 무더운 여름, 나는 방문을 닫아걸고 거미줄 같은 원고지칸에 매달렸다. 고등학교 2학년 때였다. 미8군에서 주는 약을 한 주먹씩 먹으면서 미아리 공동묘지에 누운 동생의 무덤을 어머니 모르게 찾아다녔다. 허난설헌의 <곡자(哭子)>를 그 애에게 읽어주며 오누이의 정을 다지기도 했다.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는 사자(死者)의 공간. 그곳에 가면 이상하게 마음이 편안했다. 푸른 하늘과 흘러가는 구름과 바람과 햇볕과 고요 그리고 푹신한 잔디. 동생의 등에 기댄 듯 무덤에 기대어 한나절씩 책을 읽다 돌아오곤 했다.

그 후 택지개발로 쓸려나간 동생의 무덤, 이장 공고를 통보받고도 시간을 놓쳐버린 그 잘못을 어디에다 빌랴. 지금도 묘지 찾아다니는 버릇은 그때 잃어버린 무덤에 대한 어떤 특별한 보상심리가 뒤따른 것인지도 알 수 없다. 무연고자들의 화장처리를 떠올리며 홍제동 뒷산에 올라 굴뚝에서 피어나는 누런 연기를 보며 황망히 서 있기도 했다. 바람결에 와 닿는 누린내 속에서 동생의 실체를 느껴보려고 애썼다. 그것이 죽음의 냄새인가 똑똑히 기억하고 싶었다. 우리의 삶과 죽음을 구름에 비교하며 구름은 본래 실체가 없는 것이니 그것마저 놓아야 한다지만 말처럼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것을 화두처럼 50년이나 품고 지냈다.

“죽음이란 원래 없는 것이오. 영혼의 불멸성을 인정한다면 부스럼 딱지와도 같은 시신은 아무렇게나 해도 무방하지 않은가?” 이런 선사의 말씀으로 한 가닥 위안을 삼기도 하고 “흙으로 돌아간 나는 결국은 흙이 되어 없어져 아무것도 없는 공(空)으로 화하고…” 도연명의 「자제문(自祭文)」을 읽으면서 마음을 달래기도 했다. 죽음이 알고 싶었다. 죽음에 관한 기록이면 무엇이든지 간에 밑줄을 긋고 가위로 오려서 스크랩해온 지 20여 년, 그것들은 몇 권의 책으로 묶여져 나오기도 했다.

작가 묘지기행을 다룬 졸저 『인생은 아름다워라』에서 29명의 작가를 만났지만 아무래도 못다 한 사연이 있는 것 같아 도중에서 봉을 뜯는 나그네처럼 다시 23명의 작가 무덤을 찾아 지치도록 걸었다. 그러는 가운데 나는 52명의 작가들이 죽음에 이르는 최후의 모습이 어떠했으며 작품 속에 나타난 사생관은 무엇인지 갈수록 궁금했다. 특히 「밤으로의 긴 여로」를 쓰는 내내 울어서 눈이 빨개져 서재에서 나왔다는 유진 오닐의 고통, 아쿠타가와 류노스케가 겪은 유전의 공포를 생각하며 딴 세계에 갇혀있는 그들의 가엾은 어머니를 생각하면서 나는 내 아픔을 씻어 내렸다. 작가의 고통에 동참하는 일은 단순한 위안을 넘어 영혼을 정화시키는 씻김굿과도 같은 의식이 아닐까 생각한다.

세상에서 유일하게 남긴 재산은 ‘때로 눈물을 흘렸다는 것 뿐’이라던 알프레드 뮈세. 기이한 추악미를 예찬했던 보들레르. ‘슬픔과 아름다움은 하나’라던 안톤 체호프. ‘예술이 삶을 주도해야 한다.’던 오스카 와일드. 슬픔과 아름다움에 유달리 민감했던 그 작가들을 나는 사랑한다. 스스로 천형(天刑)에 처해진 시인 보들레르. 스스로 저주의 시인이 된 폴 베를렌느, 또한 베를렌느처럼 동성애로 불행하게 된 오스카 와일드. 스스로 인간 실격자가 된 다자이 오사무, 에드가 앨런 포, 모파상, 랭보, 뮈세 등은 관능적 쾌락에 탐닉하며 마약과 알코올 중독, 혹은 자살 기도, 매독과 정신착란을 겪으면서도 작품에서만은 완벽함을 추구하는 까다로움을 보였다. 그들은 진짜 작가였다.

혼신의 힘을 다해 영혼에 불을 지피고 자신의 감성에서 뽑아낼 수 있는 한, 선율을 뽑아내고는 애처롭게 그들은 지상에 엎어지고 말았다. 그들의 생애는 온몸을 도구로 삼은 예술가로서의 처절한 한 판 결투였다. ‘아름다움’에 바쳐진 순교에 다름 아니었다. 우국충절로 민족혼이 된 노신이나 굴원, 빅토르 위고, 인도와 바꾸지 않겠다던 셰익스피어. 그리고 ‘죽음 앞에서 최고의 순간을 누린다.’는 괴테, ‘죄를 거쳐 예수로’라고 D〮H 로렌스에게 칭송된 도스토 예프스키. ‘이 사람은 하느님을 닮았구나.’하고 막심고리키는 톨스토이를 추앙했다. 여기까지 도달한 이들과 빅토르 위고, 예이츠, 임어당 같이 대기만성한 작가들의 죽음만이 훌륭한 것이 아니었다. 모든 작가들의 죽음은 존엄하다. 피 흘려 몸으로 쓴 전기요, 작중 인물과 부합된 그들의 실제 죽음은 이슬에 매달린 안타까운 광휘였다.

베를렌느가 죽어나간 카페가 된 그의 집에 앉아 있었다. 벽면에 새겨진 시구 「하늘은 지붕 위로」를 보고 있자니 그의 음성이 들려오는 듯했다. ‘오, 그곳의 너, 무엇을 하였기에/ 끊임없이 울고만 있느냐…/ 너의 젊은 날을 어떻게 보냈더냐?’ ‘어떻게 보냈더냐?’ 그의 물음은 어느새 나를 향해 있었다. 문학에 대한 열망을 잠재우고 나 또한 여름만을 지낸 듯 살다가 퇴직한 남편을 따라 겨우 파리에 온 것은 나이 육십. 그러고도 이제 십 년의 세월이 더 보태졌다. 그렇게 알고자 했던 죽음은 이제 더 이상 타자의 죽음이 아닌, 지금은 내 등짝에 바짝 붙어 그와 동거중이다. 여러 증세를 겪으며 몸으로 죽음을 학습하는 중이다. 오온(五蘊∶몸의 구성요소)의 그 해체를 짚어보게 된다. 몸이 무거운 날은 그대로 땅속에 묻히는 심정으로 드러눕는다. 그러면 얼마 지나서 나는 한 줌 흙으로 화하겠지. ‘무덤에는 봉토도 안 할 것이며 비석도 세우지 않은 채로 세월과 더불어 스러지게 하리라.’던 도연명의 심정이 된다. ‘세월과 더불어 스러지겠다.’ 여기에 생각이 멎자 온몸이 모래바람을 일으키며 사방으로 흩어지는 게 느껴진다. 상상 속에서 내 몸은 산화된다. 결국은 한줌 바람이다.

‘인생은 어차피 허깨비(幻), 끝내는 공(空)과 무(無)로 돌아가리라.’던 도연명의 ‘귀무공(歸無空)’을 요즘 좌우명으로 삼고 지낸다. 그걸 외우면 마음이 매인데 없이 넉넉해진다. 몸속에 이상 징후가 느껴지면 이내 소동파를 떠올리며 ‘내게 아직 조물주가 부여해주신 육신이 있으니 운명이 명하는 대로 영고성쇠의 끝없는 순환을 겪게 내버려둘 따름이라’는 그걸 내게 적용시킨다. 가급적 몸에서 마음을 떼려고 노력한다. 천연덕스럽게 자신의 이름을 부르며 ‘낙천(樂天)아 낙천아! 병들면 죽고, 죽으면 쉬도록 하여라.’라고 하던 백거이의 탄성이 나를 겨냥해 크게 울린다. ‘그래 그렇게 누워 쉬자’고 생각하니 누워있는 심신이 말할 수 없이 편안해진다. 죽음이 이런 거라면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다. 나는 밤마다 릴케의 ‘완전한 죽음을 끌어 안고 깊은 잠에 드는 것 뿐’이라는 그 깊은 잠을 꿈꾼다.

인사동 거리를 지나다 ‘참! 그들은 죽었지.’란 생각이 문득 들 때, 아직 살아있는 나 자신이 신기하게 느껴지며 진공상태에 떠있는 존재처럼 여겨질 때가 많다. 엘미러의 우들론 공동묘지를 찾아가 마크 트웨인의 무덤 앞에 섰을 때도 같은 심정이었다. 덩그러니 큰 집에 혼자 남겨져 천착한 것은 오직 죽음 뿐. 그의 유고집 『불가사의한 이방인 NO. 44』에서 그의 사생관을 엿볼 수 있다. ‘이방인이 시계를 거꾸로 돌리자 이미 치렀던 장례식을 다시 치르고 영구차와 장례 행렬은 엄숙한 분위기로 후진하고… 파라오, 다윗과 골리앗 등 셀 수 없이 많은 왕들이 지나갔다. 그들의 뼈에서 나는 덜커덕 소리 때문에 얼마나 귀가 멍해졌던지, 우리는 자신의 생각마저도 거의 할 수가 없었다. 그때 NO. 44가 손을 한 번 휘젓자 우리는 어느새 텅 비고 소리도 없는 세계에 서 있었다’고 마크 트웨인은 말한다. 나는 바위에 걸터앉아 이 장면을 떠올리며 잠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일념(一念)이 무량겁인 듯했다. 텅 비고 소리도 없는 세계에 잠겨 있었다. 무량겁이 또 한순간인 듯했다. 그때 NO. 44가 인쇄소 직공에게 일러준 말이 떠올랐다.

‘인생 그 자체는 하나의 환상적이고 한바탕 꿈일 뿐이야. 존재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 모든 것은 꿈이지. 하느님과 인간, 이 세상, 태양과 달, 수많은 별들. 이 모든 것들이 하나의 꿈이야. 꿈이고말고. 그것들은 존재하지 않아. 텅 빈 공간과 너를 제외하고는 존재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

마크 트웨인이 설파한 ‘인생’ 그것은 ‘아무것도 없는 텅 빈 공간’이다. 거기에 막이 오르면 사뮈엘 베케트의 극중 인물이 나타나 ‘고도’를 기다린다. 그는 언제 오는가? 『고도를 기다리며』에서처럼 인간의 기다림이란 텅 비어있는 무대의 시간뿐. ‘아무도 이곳에 온 일이 없고, 아무도 여기를 떠나지 않았으며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고 작가는 말한다. 왜냐하면 와도 온 바가 없고, 간다고 해도 갈 바가 없기 때문이다. 일찍이 태어난 적도 없고 죽은 적도 없다는 것을 예이츠는 그의 시집 『탑』에서 ‘죽음과 삶은 본래 존재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무덤이 즐비한 사자(死者)들의 공간, 텅 비어있는 무대의 시간뿐, 그들을 생각하며 나는 잠시 내 존재를 생각했다.

이제 여름이 그 종언을 향해 서서히 눈을 감듯, 나도 그렇게 쉬고 싶다. ‘삶과 죽음에 싸늘한 시선을 던져라. 말 탄자여, 지나가라’던 예이츠. ‘하늘을 본받고 나를 버린다’는 나츠메 소세키의 ‘칙천거사(則天去私)’를 내 가슴에 담는다. 이들 위대한 영혼과의 만남, 이것만으로도 고단한 내 이번 삶은 충분히 의미 있었다. ‘인생은 어차피 환(幻), 끝내는 공과 무로 돌아가리.’라던 도연명의 얼굴이 다시 여기에 겹쳐왔다. 이들의 무덤 앞에 서면 내 영혼에 불이 켜진 듯 눈앞이 환해졌다. 태어나지도 죽지도 않았다는 불생불멸(不生不滅)의 도리를 소동파는 「적벽부」에서 좀 더 쉽고 간명한 언어로 풀이한다. ‘그대는 저 물과 달을 아는가? 흘러가는 것은 이와 같다지만 그러나 일찍이 가는 것만이 아닌 것을, 차고 기움이 (盈虛) 저와 같으나, 마침내 소장(消長)할 수 없음이라.’ 물은 흐르되 다 흘러가버린 적이 없고, 달은 만월이 되거나 기울어 초생달이 되어도 달은 끝내 없어지거나 사라지지 않는다. 영허소장은 현상계의 작용일 뿐, 본체는 변하지 않는다는 것. 우리의 생사 또한 이와 같아서 생로병사라는 현상계의 작용을 거칠 뿐 그 본체는 변하거나 없어지지 않는다는 설리(說理)로써 그는 우리를 위로한다. ‘소동파 기념관’에서 「적벽부」를 다시 볼 수 있었던 것도 큰 기쁨이었다.

릴케는 ‘현상과 본체’를 다른 말로 표현한다. “존재하라. 그리고 동시에 비존재의 조건을 알라.” 존재와 비존재, 그것은 현상과 본체의 다른 이름이며 『반야심경』의 물질이 공이며 (色卽是空) 공(空)이 물질인 것과 다를 바 없다. “비존재의 조건을 알 때, 인간은 자유로워진다. 그것은 성숙한 존재가 되었기 때문이다.” 「두이노의 비가」에서 릴케가 죽음을 묘파한 대목이다. “성숙한 인간은 무르익은 과일이 나무에서 떨어지듯 죽음에 대한 원한이 없다. 죽음은 완전한 죽음을 끌어안고 깊은 잠에 드는 것뿐이다.” 죽음은 인간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 안에 있으며, 인간 삶의 핵심이며 진주처럼 인생을 빛나게 하는 것 역시 ‘죽음’이라고 말한다. 때가 되면 무르익은 과일이 나무에서 떨어지듯 그렇게 죽음을 수용하기란 사실 쉽지 않다. 릴케도 ‘성숙한 인간’에 한정하고 있다. 릴케보다 두 해 늦게 태어난 헤세도 존재와 비존재를 터득한 때문인지 만년에 그의 죽음도 평안했다.

“사랑하는 형제인 죽음이여! 오라. 나는 여기에 있다. 와서 나를 잡아라. 나는 너의 것이다.”

헤밍웨이 또한 헤세처럼 죽음더러 어서 오라고 손짓한다. 고기 한 마리 잡지 못하고 84일을 바다에서 헤매는 늙은 어부, 산티아고는 밤과 낮이 바뀌는 동안 삶과 죽음의 투쟁을 계속한다. ‘네가 날 죽이고 있구나. 고기야.’라고 노인은 생각했다. 하지만 너는 나를 죽일 권리가 있어. 난 여태까지 너처럼 거대하고 아름답고, 태연하고 고결한 존재를 보지 못했단다.

“내 형제야. 이리 와서 날 죽이렴. 누가 죽이고 누가 죽던 난 상관하지 않으마.”

그는 바다에서 혼자 하늘과 바다와 대화를 나누며 자연과 하나가 되는 합일을 경험한다. 자연의 요구에 몰두하지 않는다면 결국은 ‘삶을 속이게 되는 것’이라던 헤세의 말이 떠오른다.

“우리가 사는 것은 죽음을 두려워하다가 끝내는 죽음을 사랑하게 되기 위해서”라던 그의 말을 이따금씩 반추하게 된다. 어떻게 하면 헤세처럼 죽음을 사랑하게 될 수 있을까.

중국인답게 순천관(順天觀)을 가진 임어당은 “인생에는 선(善)도 없고 악(惡)도 없다. 계절에 따르면 모두 다 선(善)이다. 자연(사계절)에 순응하며 살아간다면 ‘인생은 한 편의 시’처럼 살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그는 셰익스피어를 ‘대자연과도 같은 이’라고 극찬해 마지않았다. “셰익스피어는 인생을 널리 있는 그대로 보았다. 그는 대자연 그 자체와 같았다. 그는 그저 살았고 인생을 보았고 그리고 죽은 것에 지나지 않았다.” 여기에다 임어당을 대입해 본다. 그리고 그가 좋아하던 소동파와 도연명도 대입해 본다. 그들은 하나같이 모두 대자연 그 자체와 같았던 사람들이다. 그들은 그저 살았고 인생을 널리, 있는 대로 바라보았으며 그리고 죽은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들의 삶과 죽음은 일출과 일몰처럼 다만 보통 있는 일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달관의 경지가 아니고서는 어찌 흉내라도 내겠는가.

몽테뉴도 자연을 따르라고 충고한다. “당신이 이 세상에 들어온 것 같이 이 세상을 빠져나가라. 당신이 생각도 두려움도 없이 죽음에서 삶으로 건너온 것과 동일하게 이번에는 삶에서 죽음으로 건너가라. 당신의 죽음은 우주 질서의 여러 부품 중 하나다. 이 세상의 생명의 한 부분이다.”라고 일러 준다. 철저하게 죽음에 대비하자던 스토아 철학에 경도되었던 몽테뉴가 죽음과 고통 따위는 자연에 맡기고 즐겁게 살자는 에피큐리언이 된다. 그는 감각적 쾌락에서조차 정신을 개입시켜 쾌락이 전인적(全人的)인 것이 되기를 바랐다. 현재를 즐기되 집착 없는 이 경지를 몽테뉴는 ‘완성’이라는 말로 표현했고 예이츠는 그것을 ‘존재의 통일’로 표현했다.

보르도의 ‘아키텐 박물관’에 있는 몽테뉴의 묘소를 찾았다. 침상 위에 토기로 빚은 키 작은 한 남자가 누워있었다. “죽음은 그대가 살아 있을 때나 죽었을 때나 그대에게 관여하지 않는다. 살아 있을 때는 그대들 생존해 있으므로. 죽었을 때에는 벌써 세상에 없으므로. 그대가 남겨놓고 가는 시간은 그대가 출생하기 전과 마찬가지로 본래 그대의 것이 아니었다. 그 둘 다 그대의 것이 아니다.”

동양의 현자와도 같은 이 사람의 무덤 앞에 서니 또 내 영혼에 불이 켜진다. ‘둘 다 그대의 것이 아니기 때문’을 낮게 그러나 힘주어 되뇌고 있었다. 이들의 정신이 도달한 마지막 정점을 향해 내 눈높이를 따라가는 행위는 바로 그들의 영혼과 만나 내 영혼에 불을 켜는 일에 다름 아니었다. 태어날 때, 성현(聖賢)의 언행을 본받고 하늘에다 지식을 쌓는다는 산천대축(山天大畜) 괘를 본괘로 그리고 일시(日時)에 귀문(鬼門)관살을 타고난 때문일까. 좀 더 가까이 무덤 앞에 다가가 그들의 체취를 느껴보고 싶었고 그들의 사생관을 알고 싶었다. 그리고 데인 상처처럼 쓰라린 약자의 인생을 다룬 문학 말고는 다른 것에는 관심이 덜했다.

인생은 쓸데없는 노고(勞苦)라는 허무의식과 도로(徒勞)라는 생각을 내게 일찍이 심어주었던 가와바타 야스나리를 찾아가는 날은 종일 비가 내렸다. “죽음의 직접적인 원인을 볼 수 있는 죽음은 싫다. 그러나 죽음의 원인이라는 것은 그 사람의 전 생애라고도 할 수 있다.”는 가와바타 야스나리. 가마쿠라 묘지를 찾아가던 날의 암울하던 심정, 온 산에 까마귀 떼가 시야를 어지럽혔다. 그의 작중 인물도 대부분 자살로 끝난다. 가와바타는 ‘작품 쓰는 일은 자기 내부에서 허무의식이라고 하는 독을 제거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허무를 짚고 그것을 넘어서지는 못했다.

‘…허무야. 너는 너 자체를 깨물어 죽여라!’ 공초 오상순은 「허무 혼의 선언」에서 이같이 선언한다. 동인지 『폐허』를 창간하며 ‘허무’와 대결한다. 온갖 유위(有爲) 무위(無爲)의 차별상을 적멸의 세계에 넣고 그 일체상(一切相)을 무(無)로 환원시킨다. 끝내는 허무가 허무 자체를 교살(絞殺)하는 절대 허무의 세계와 만난다. 참구하던 의심은 타파되고 실체 없음을 깨달아 마친 공초(空超) 선생. 육신이란 연기(緣起)에 의한 환형(幻形), 그 공(空)을 아셨기에 그분은 어디에도 머무르지 아니하고 다만 ‘흐름 위에 보금자리 친 나의 혼’이었다. 세월의 풍화로 무덤의 형태조차도 애매한 그분의 묘소 앞에 섰다. “자유가 나의 일생을 구속하였구나!” 그분의 마지막 육성이 들려왔다. 무소유, 무정처(無定處)로 평생을 그토록 구가하던 자유가 당신의 일생을 구속하였다니? 실로 마지막 순간까지 계속된 자기 점검(點檢), 그런 확인 같은 게 아니었을까? 본래 무아(無我)인데 어느 자리에 속박과 자유가 따라붙겠는가? 넌지시 그걸 우리에게 알리기 위해 던진 한 마디의 의미 있는 물음으로 되돌아왔다.

추색이 완연한 선생의 유택 앞에 서니 그분의 낮은 음성이 내 가슴 위로 울려왔다. “나는 밤마다 죽음의 세계를 향하는 마음으로 자리를 깐다. 다음 날 다시 눈을 뜨면 나의 생은 온통 기쁨과 감사, 감격으로 가득하다” 그때 까닭 모를 감사와 감격의 물결이 좁은 내 가슴속 골을 타고 뜨겁게 흘러내렸다. 주야와 생사(生死)가 번갈아 갈마드는데 다시 눈을 뜨면 그것으로 ‘너의 생은 감격일지니 그렇게 살아라.’ 하는 말씀으로 들려왔다. 나는 두 손을 모으고 밀레의 그림 속 풍경이 되었다. 해는 지려하는데 움직이려고 하지 않는 말처럼 그런 육신을 이끌고 예까지 왔다. 이제 여름이 그 종언을 향해 서서히 눈을 감듯, 나도 그렇게 쉬고 싶다.

‘삶과 죽음에 싸늘한 시선을 던져라. 말 탄자여, 지나가라’던 예이츠. ‘하늘을 본받고 나를 버린다’는 나츠메 소세키의 ‘칙천거사(則天去私)’를 내 가슴에 담는다. 이들 위대한 영혼과의 만남, 이것만으로도 고단한 내 이번 삶은 충분히 의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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