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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물며, 골목 바람도 리듬을 탄다. 느긋한 바람이 강아지풀을 쓰다듬으며 살랑거리다가도 남쪽 동백꽃 내음을 골목으로 부려 놓을 만큼 세차게 불기도 한다. 빨랫줄에 널려있는 시래기가 왜바람 따라 바스락거린다. 거칠어진 바람에 돌쩌귀 빠진 철대문이 덜커덩덜커덩 녹을 닦는다. 바람의 장단에 골목은 부풀었다가도 이내 고요한 풍경이 된다. 사람이 만드는 바깥바람에도 골목은 술렁대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잠잠해진다. 후미진 골목의 리듬이다.

​ ‘슬로우슬로우 퀵퀵’ 휘파람 불 듯 발음해야 하는 이 말을 내가 맨 처음 들었던 때는 골목이란 골목을 죄다 이어 나만의 세상을 만들던 어린 날이었다. 바다에서 불어와 골목을 휩쓸다가 숲을 타고 산등선 너머로 사라지던 바람을 뒤쫓는 일이 당시 아이들의 놀이였다. 순간순간 속도를 바꾸는 바람이 어디선가 빈 빵 봉지 하나를 데려와 골목을 휘젓기라도 하면 동네 아이들의 머릿속이 고소한 빵 냄새로 가득 차오르곤 했다. 언덕길로 끊일 듯 이어지는 골목은 비좁았고 숱한 대문들을 귀처럼 달고 있어서 모르는 게 없는 방물장수의 가벼운 입처럼 소문들이 넘쳐났고 소문의 주인공 중에는 아버지도 있었다.

​ 아무리 발버둥 쳐도 가족을 건사하는 일이 뜻대로 되지 않아서였을까. 겨우 장만한 단층집이 당신을 안심시켜서일까. 들리는 소문에 아버지가 춤바람이 났다는 것이었다. 지쳤던 삶에 처음으로 불어온 산들바람이었을 지도 모른다. 한창 뛰어다닐 자식들이 주인집 눈치를 살피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으로 생의 한겨울을 잘 넘긴 스스로에게 선물하듯 사교춤을 배우신 모양이었다. 아이들이 듣는 어른들의 이야기란 아무리 가까이에서 들어도 꿈속의 일인가 싶게 아득했다. 들어서는 도통 모를 사교춤이라니, 실눈을 뜨고 봐야 겨우 보이는 아지랑이처럼 실체를 알 수 없었다.

​ 같은 골목에 사는 가장 몇이 돈벌이를 좇아 사철 내내 여름이라는 사우디로 날아가서 아낙네 몇은 과부 아닌 생과부의 날들을 보냈다. 눈치 볼 남편이 없는 집에 아름드리 벚나무를 하얗게 들어 올리는 봄날이 왔다. 유난히 얼굴이 거뭇해서 ‘깜상’이라는 별명을 가진 외숙이 엄마도 그들 중의 하나였다. 골목을 지나가기라도 하면 날이 흐려진다는 농담거리가 되던 그녀의 낯빛이 벚꽃잎처럼 발그레 생기가 돌았다.

​ 걸핏하면 끊기는 수돗물과 시간제 급수로 집집마다 두었던 대형 고무통을 매일 아침 장독인 양 행주로 훔치던 그녀가 가장 먼저 부엌문을 박찼다. 바지런한 손은 얼굴 치장으로 더욱 바빠졌고, 반찬거리였던 오이를 잘라 얼굴에 빼곡히 붙였다. 먹기에도 아까운 것을 얼굴에 쳐바른다고 엄마는 혼잣말로 흉을 봤다.

​ 가끔은 꽃무늬 치마를 빼입고 전축이 있는 우리 집에 들르기도 했다. “슬로우~~슬로우~~ 퀵퀵” 아버지는 그녀 등에 손을 얹고 밀다가 허리춤을 잡아채 당기기도 하면서 가뜩이나 좁은 안방을 돌고는 했다. 서툰 발놀림에 발등이 밟혀도 웃으며 음악에 몸을 맡긴 채 평소와는 다르게 사뭇 너그럽던 아버지. 그럴 동안에도 엄마는 방구석이나 부엌 귀퉁이에 쪼그리고 앉아 도라지 껍질을 도루코 면도날로 까는 부업에 여념이 없었다. 그때 까던 도라지 껍질을 깜상 아줌마로 여겨 살점이 더 깎여 나갔는지 어땠는지 모르겠다. 먼발치에서 보면서 덥수룩한 파마머리로 몸빼 바지를 걸친 채 평상시처럼 납기일을 맞추기 위해 바삐 움직일 뿐이었다. 엄마의 무던한 반응을 보아버린 탓일까. 나는 아버지의 춤바람이 그리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고 여겼던 것 같다. 멀찍이 떨어져 기껏해야 손만 맞잡고 있는 것뿐이었으니까. 빙그르르, 몸을 돌릴 때의 그녀가 연분홍 꽃잎 같은 치맛단을 활짝 펼쳤다. 봄바람이 방바닥에서도 일었다.

​ ‘슬로우슬로우 퀵퀵’은 인간이 만들어낸 가장 본능적이고 완벽한 리듬이라고 사교춤 예찬론자는 말하지만 이 리듬이야말로 카오스 이후의 지구를 여전히 푸른 지구로 유지하는 자연의 운영체계가 아닐까 생각한다. 세계를 이루고 있는 숱한 생명이 어울려 사는 질서의 운율 말이다.

​ 꽃이 피고 씨앗을 바람에 실려 보내거나, 열매를 맺는 일은 아름다운 여정이자 춤이랄 수 있다. 봄이면 목련 나무는 묵은 가지마다 솜털 껍질에 싸인 봉오리를 맺는다. 그 봉오리 속에 겹겹이 들어앉아 있는 하얀 꽃잎은 겨울부터 뿌리가 천천히 밀어 올린 슬로우슬로우의 결실이다. 등불 켜듯 환하게 피었다가 철퍼덕 바닥으로 꼬꾸라지는 화장花葬은 순식간에 퀵퀵 이뤄진다. 일생이 슬로우인 꽃나무는 숱한 퀵들로 이어져 땅에서의 한살이를 다음 계절로 순환한다. 어떻게 보아도 ‘슬로우슬로우 퀵퀵’ 아닌가.

​ 차고 더운 대기의 흐름과 뭍에 와서 온몸을 내던지는 바다의 무한 반복되는 리듬을 생각한다. 나뭇가지 속 잠든 잎을 깨우는 봄바람이 한여름의 태풍으로, 가을 아침의 서릿바람이 겨울날 황소바람으로 옮겨가는 박자를 듣는다. 계곡물도 아다지오로 느긋하던 물결이 어디서는 소용돌이로 포르티시모로 웅장해진다. 어디서는 바닥을 쓸거나 안단테로 에돌아 지나간다. 물결의 보폭이 리듬을 타고 바다에 이른다. 인간은 지구상의 동물 중에서 가장 오랫동안 부모의 보살핌 아래 성장한다. 어린 날의 느릿함이라고 말해도 좋을 보살핌의 기간은 인간되기에 필요한 슬로우 시기라고 이해해도 좋지 않을까.

​ 희로애락의 강약도 곡선을 그린다. 왜 좋은 것은 계속 좋을 수만은 없을까. 또 나쁜 것은 끊임없이 나쁜 것만을 재생하지 않다는 게 얼마나 다행인가. 행복과 불행이 오르락내리락 번갈아 움직인다. 행복하다 싶으면 불쑥 불행이 끼어들고, 불행하다 싶다가도 홀연 행운으로 생의 흐름이 바뀐다. 반쯤의 느림과 다른 절반쯤의 빠름의 되풀이가 일상을 느슨하게 놓았다가 팽팽하게 긴장하게 한다. 아픔 다음엔 빛나는 것들이, 비움 다음엔 다시 찾음이, 지나온 거기와 지금의 여기, 이렇게 서로 다른 폭을 엇갈리거나 마주쳐서 우리는 웃고 우는 무늬를 수놓는다.

​ 아마 그때 깜상 아줌마가 춤을 추지 않았더라면 그녀는 살면서 중심을 잃거나 자기 자신의 리듬에서 낙오했을지도 모른다. 느리거나 빠른 인생의 동선에서 그때 그녀는 어떤 흐름을 탔던 걸까. 이제 아버지는 겨울바람도 일지 않는 안방에서 리모컨을 오르락내리락 돌리며 얼마 남지 않을 여생의 슬로우 기간을 보내는 중이다.

​ 결국 ‘슬로우슬로우 퀵퀵’의 리드미컬함이 나를 지금에 다다르게 한 주역이다. 먼 우주로 빠져나가 바라보면 이 지구는 탄생과 소멸의 길 어디쯤을 지나고 있을까. 어제와 오늘을 닫고 연 공전과 자전, 밀물과 썰물, 눈앞에서 펼쳐지는 밤과 새벽과 한낮을 우리는 느긋함과 단호함, 부드러움과 박력으로 살아낸다. 오늘도 나의 발걸음은 슬로우슬로우 퀵퀵이 펼쳐낼 리듬을 따라 내딛는다.
// 2023 전북도민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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