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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떠올릴 때마다 가슴 더워 오는 추억의 노래가 있다.
유년의 동구길을 짓까불며 오가면서 부르던 동요들. 그중에서도 ‘나 어른이 되면’이라는 노래이다.
홍진의 더께가 묻지 않아 하얀 광목 빛처럼 눈부셨던 그 순진무구했던 날들.
어른들의 오염된 가치와 일탈된 행동들에 실망한 나머지 도리질을 하며, 어른이 되면 주변의 어른들을 반면교사 삼아 어른다운 어른이 되겠다는 다짐을 하며 목청을 높여 그 노래를 불렀다.
지금도 그렇지만 내 좁은 시야 탓인지 내 주위에 어른다운 어른은 없었다.
비록 머리에 하얀 서리 내리고 얼굴의 검버섯들이 그동안 어른들을 스쳐 지나갔던 세월의 무게를 증거하고 있었지만, 내 이상형의 어른들은 찾을 길 없었다.
그리하여 나는 빨리 내 몸의 나이테가 더해지기를 갈망했고, 그만큼 어른이 되면 하고 싶은 일도 많았다.
무엇보다 아이들을 진정으로 보살펴 주는 자상하고 넉넉한 어른이 되고 싶었다.
유독 텅 빈 집에서 혼자 지내야 했던 날들이 많았던 그 시절. 학교가 파하고 흙먼지를 뒤집어쓴 채 어머니를 부르며 들어서지만 집안은 거의 텅 빈 폐가처럼 을씨년스럽게 나를 멀뚱하게 맞았다.
결국 혼자 고개를 떨구고 책가방을 내던지고 부엌으로 들어가 솥단지를 열면 찐 고구마 몇 알만이 오도마니 누워있었고, 그때마다 허연 버짐이 얼굴에 가득했던 남루한 나의 유년은 목이 메일까 냉수를 들이키며 고구마의 노란 속살에 코를 박기 일쑤였다. 그렇지만 배 속에 아귀가 들었는지 나의 허기는 도무지 회복될 줄을 몰랐고, 결국 부엌을 나와 나처럼 허기로 충혈된 동무들과 먹을 만한 것들을 찾았다.
그때는 몰랐다. 일터인 밭과 바다에서 삶의 뿌리를 캐느라 주린 배를 움켜잡고 있었던 부모님들의 고통을 몰랐다.
오히려 항상 집을 비우고 물오이처럼 커야 할 자식의 먹거리조차 변변히 챙겨주지 못하는 부모님들의 무책임에 눈을 흘기며, 내가 어른이 되면 내 아이들만큼은 배불리 먹이겠다고 몇 번이나 다짐했다.
대수롭지 않은 일로 길거리에서 멱살잡이를 하고, 술이 취해 주사를 부리는 어른들도 감당하기 힘들 만큼 혐오감을 주었다.
아이들에게 모범을 보이지는 못할망정 손가락질 받을 일을 일삼는 어른들을 보며 어른이 되면 일적불음(一滴不飮)을 맹세했고 무엇보다 이웃들을 사랑하며 오순도순 살아가는 사람이 되겠다고 굳게 맹세했다.
역시 세상살이의 고단함을 몰랐고 술을 권하는 서민들의 팍팍한 삶을 그때는 까마득히 몰랐기 때문이었다.
세월의 물살에 쓸리다 보니 이제 나도 어른이 되었다.
가장으로서 가정을 꾸리고, 사회 구성원의 당당한 일원이 되었다. 그런데 오늘의 내 모습은 과연 어떤 모습인가. 어느덧 지천명(知天命)의 거울에 비친 나 자신을 보며 소스라치게 놀란다. 차라리 혀를 깨물고 싶은 부끄러움에 처연함을 숨기지 못한다. 유년의 그날. 나 어른이 되면을 호기롭게 부르며 꿈꾸었던 내 미래의 자화상은 어디로 갔는가. 대신 그 옛날의 그토록 혐오했던 어른들을 꼭 닮은 얼굴이 거울 속에서 부끄러움에 어찌할 줄 몰라 한다.
직장생활을 핑계 삼아 아이들과 오붓한 시간 한 번 갖지 못하는 무책임한 가장의 얼굴. 삶의 정도를 일탈하기를 밥 먹듯 하면서도 그럴듯한 변명과 자기기만으로 일관하는 뻔뻔한 중년의 얼굴. 이웃에 대한 배려는 고사하고 아집과 이기로 끝내 다른 사람의 가슴에 생채기를 내며 희희낙락하는, 후안무치의 어른이 오늘 바로 내 자신의 모습이라는 것을 확인해야 하는 아픔 때문이다.
만시지탄의 중년. 그렇지만 후회와 번민으로 보내기에 나의 여생은 넉넉하지 않다.
따라서 이제부터라도 내가 꿈꾸던 어른의 정도를 걸어가 보아야 하겠다.
집안의 행복과 평화를 지탱하는 가장으로서의 역할에 소홀함이 없어야 하겠다.
평생의 반려인 아내와의 사랑을 회복하고, 아이들에게 자상한 아버지로 거듭나야 하겠다.
주변의 불우한 아이들에게도 따뜻한 시선을 건네주고 그들에게 드리워진 불행의 그늘을 걷어낼 한 줌 햇살 같은 도움의 여지가 있다면 망설이지 말고 베풀어야 하겠다.
남들보다 더 많은 부를 갖기 위해, 남들보다 더 높은 자리에 오르려고 남들에게 딴지를 걸며 아등바등했던 지난날의 소승적 사고와 가치를 벗어던지고, 이웃들과의 아름다운 동행을 통해 더불어 사는 마음 따뜻한 어른의 길을 걸어가야 하겠다.
무엇보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루를 채색해야 하겠다.
이 땅에 태어난 것에 감사하고, 내 몸을 키워준 자연에 감사해야 하겠다.
사람이란 지위와 사회적 지위를 마련해준 부모님과 고마우신 분들에 대한 보은을 하나하나 실천해야 하겠다.
비록 보잘것없는 초동급부지만 나로 인해 내 가족과 이웃들이 조금이라도 행복해질 수 있다면, 얼마나 뜻깊은 인생이 되겠는가.
시나브로 일몰에 젖어드는 창가에 앉아 망연히 정원을 내다보는데, 차가운 초겨울 한천(寒天)을 이고 있는 동백나무에서 핏빛 동백꽃 몇 송이 소리없이 진다.
나도 머지않아 이 세상이란 나무에서 너울같이 쓰고 있는 세상의 명리(名利) 다 벗어던진 전라(全裸)의 몸으로 홀로 낙하해야 하겠지.
세상에 나와 실존의 의미 하나 남기지 못한 채, 허무라는 이름으로 세상과 결별해야 하겠지.
상념이 이어지며 눈시울이 젖어 오는데 문득 아내의 목소리가 나를 현실로 돌려세웠다.
"집에 계실 때 마당이라도 한 번 쓸어 주면 어디가 덧난답디까?"
평소 아내의 거듭되는 지청구에도 게으른 암소처럼 뭉기적 거리던 내가 빗자루를 찾아들고 마당으로 나서자, 오히려 놀라 크게 벌어진 아내의 눈동자에 붉은 노을빛이 가득하다.
// 2023년 영주일보 신춘문예 수필 당선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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