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늙은 강아지가 좋다. 눈물이 그린 세월의 흔적, 윤기 없는 털이 서로를 꼭 붙든 모습,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회색 눈동자, 이 모든 것이 좋다. 인생의 고난을 반려견 똘똘이의 황혼기와 함께했기 때문일까. 길을 걷다 보면 피부가 마모된 개들에게 유독 시선을 빼앗긴다.

첫 직장이라는 절벽에서 호기롭게 뛰어내린 젊은 독수리는 날개가 부러져 추락하고 말았다. 날개 꺾인 독수리를 가장 오랜 시간 지켜본 건 황토색 새치 가득한 요크셔테리어였다.

일원도 못 버는 백수가 똘똘이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이라곤 자전거 앞에 바구니 하나 매다는 것뿐이었다. 다리가 닳고 닳아 걷지 못했던 작은 강아지는 바깥바람을 좋아했다. 앉는 것조차 힘든 늙은 아이를 위해 바구니에 푹신한 천도 깔았다. 유일한 단골 승객을 조수석에 태우고 올림픽공원 몇 바퀴 돌고 나면 다시 공부할 힘이 났다. 시험에 합격한 그해 성탄절에는 똘똘이를 별나라로 보내줄 나무상자를 마련해야만 했다.

추수 없는 모내기의 새참 같았던 똘똘이. 이만큼 고마운 동물을 다행히 또 한 번 만날 수 있었다. 참새 친구 박새다. 야생동물 박새와 사는 세계가 달라 가끔씩 조우할 수밖에 없지만, 만날 때마다 입에 달린 정으로 가슴을 쪼고 거기다 행복의 박씨를 심어놓았다.

젊은 날 충남 서산에 손님으로 가 있던 적이 있다. 초대장을 보낸 이는 식객이 2년 3개월 동안 밥이나 축내며 얹혀사는 꼴은 두고 보지 못했나 보다. 개구리 무늬 옷과 기다란 총을 주고 보초를 세웠다. 하얗고 낡은 글씨로 헌병이라 적힌 감색 바가지를 이고 멀뚱멀뚱 서 있으면 낯선 이방인을 찾아주는 관대한 이들을 만날 수 있었다.

손바닥 위에서도 굳건히 땅굴을 파내려는 불굴의 노동자 땅강아지, 귀족적 몸짓에 식성은 아이 같던 사슴벌레, 한밤중에 손바닥만 한 나방을 으적으적 씹어 먹으며 '이런 진미도 모르시오?'라며 한심하다는 듯 쳐다보던 고양이. 가장 반가운 손님은 단연 박새다. 박새의 방문에 삭막했던 초소는 눈 깜짝할 새에 사랑방으로 변한다.

오동통한 몸뚱이에 착 달라붙은 머리는 누가 콩하고 꿀밤을 쥐어박아 슬며시 부어오른 혹처럼 생겼다. 머리라는 독립된 신체의 일부분으로 이름 짓기도 민망한 것을 요리조리 돌려대는 자태가 사뭇 앙증맞다. 화가가 붓으로 콕 찍어준 얼굴의 눈(雪)은 화룡점정이다. 얼굴에 하얀 점을 찍어줘야 박새인 것이다.

요란하게 노니는 모습을 보노라면 얼굴에 허옇게 콧물을 묻히고 온 동네를 헤집는 골목대장이 떠오른다. 엄마가 밥 먹으라 외쳐도 초병과 술래잡기하느라 바쁜 개구쟁이를 보면 밥은 먹고 다니는지 슬슬 걱정된다. 그런 생각이 들 때쯤 나방 한 마리 홱 낚아채 이리 메치고 저리 메친다.

초소에 서 있으면 나의 주적은 북한도 아니요 미국도 아니요, 천천히 흐르는 시간이다. 마실 나온 작은 새는 강력한 적군에 함께 대항할 든든한 아군이다. 새의 언어를 들으며 상념에 빠지면 시간 가는 줄 모른다. 박새야 너는 왜 박새인 것이냐? 사람처럼 밀양 박(朴)을 쓰지는 않겠지. 작지만 통통한 몸집을 보건대 얇을 박(簿)자도 아니다. 충남 서산에서 보았던 것을 경기 광주에서도 만났으니 넓을 박(博)자를 써 박(博)새라고 해야겠다.

경기도 광주에 마련한 신혼집은 산허리를 잘라 평평하게 다진 터에 묘비처럼 박힌 아파트였다. 그 앞 삼거리에서 하루종일 경적이 울렸다. 어느 겨울 눈 내린 다음 날 경적을 뚫고 쪼르르 눈 녹는 소리가 들렸다. 밖을 내다보았다. 박새 한 마리가 방충망에 붙어 거미줄에 걸린 날벌레 시체를 쪼아 먹고 있었다. 추워서 두툼하게 부풀린 몸집을 보니 굶주린 척조차 할 줄 모르는 것 같았다. 박새의 순박함이 유난히 야속했다.

박새가 다시 찾아올까 싶어 창가에 쌀알을 올려둔 순간, 작년 여름의 일이 번개처럼 머리를 스쳤다. 찌는 듯한 무더위에 거미가 들끓는 여름이었다. 방충망에 옹기종기 집 짓고 사는 거미 가족을 보면 집안에 가져다주는 복을 감당할 수나 있을까 싶어 걱정될 정도였다. 거실로 들어오던 사춘기 거미를 바깥으로 내보내려는 찰나, 옆에서 치이익 하는 소리와 함께 알싸한 냄새가 풍겼다. 아내가 분사하는 살충제마저 향기로 느끼는 것이 신혼이라던가. 신혼이라는 묘약에 홀려 방충망 거미집에 부딪치는 살충제를 막지 못했다.

레이첼 카슨은 『침묵의 봄』에서 DDT를 비롯한 맹독성 살충제를 '침묵의 살인자'라 부른다. 독이 든 벌레를 삼킨 새는 봄이 와도 지저귈 수 없다. 숲과 들판은 새들의 공동묘지가 된다. 아내가 살충제를 분사한 것은 책이 나온 지 50년 넘게 지난 후로, 반세기나 흐른 지금 살충제의 독성은 예전만 못하다. 게다가 살충제를 뿌린 지 6개월이나 지났다. 머릿속으로 합리화해 보지만 방충망에 붙어 벌레를 쪼아 먹던 박새는 그 후로 본 일이 없다. 박새는 찬란한 봄을 맞이할 수 있었을까.

나무는 고요하고자 하지만 바람은 그치지 않고, 박새를 사랑하고자 해도 기다려주지 않는다. 사랑의 무게를 잴 수 있는 천칭 한쪽에 똘똘이를, 다른 한쪽에 박새를 매달면 정확히 균형을 이룬다. 하지만 사랑하는 방법은 자못 다르다. 세상에 딱 하나뿐인 개체이고 추억 속에서 항상 마주할 수 있는 똘똘이. 셀 수 없이 많은 개체이지만 쉽게 만날 수 없는 박새. 사랑법은 다르다.

동물 한 마리를 사랑해본 사람은 많아도, 하나의 종(種) 자체를 사랑해본 사람은 드물다. 종(種)을 사랑한다는 것. 그것은 북극성만 관찰하던 사람이 은하수를 발견하는 것이다. 종(種)을 사랑하는 마음은 누구나 발견할 수 있다. 편리함에 길들여져 잠깐 잊고 있지만, 인간은 누구나 마음속에 생명을 사랑하고 환경을 아끼는 마음이 있다. 단 한 마리의 동물이라도 사랑해본 적이 있다면 그 마음을 더 수월하게 발견할 수 있다.

종(種)을 사랑하는 마음이 발견이라면, 사랑하는 방법은 발명이다. 박새를 사랑하는 마음을 발견하는 데 그치지 않고, 사랑하는 방법을 발명하고 싶다. 쉬이 곁을 내어주지 않는 박새를 위해 그들의 터전인 쪽빛 하늘과 숲을 되돌려주려 한다. 번거로워도 카페에 텀블러를 가져가면 플라스틱 공장은 더 느리게 돌아간다. 두 번 움직여도 이면지를 쓰면 나무를 덜 베어낸다.

나의 소박한 사랑법이 잿빛 하늘에 갇힌 박새에게 당장은 작은 빛에 불과할지 모른다. 그래도 깜깜한 바다에서 작은 빛을 향해 노를 젓듯이 꾸준히 실천할 것이다. 작은 빛이 점점 큰 빛이 되듯 다른 방법도 자연히 알게 되겠지. 빛이 점점 다가와 태양처럼 커지는 날을 상상하며 지구를 비춰본다. 지구를 둘러보니 사랑해야 할 존재들이 참으로 가득하다.
// 2023 매일신춘문예 당선작

'수필 읽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몇 초의 포옹 / 조남숙  (1) 2023.05.13
‘슬로우슬로우 퀵퀵’ / 서은영  (1) 2023.05.13
나 어른이 되면 / 고경실  (1) 2023.05.13
내 작품의 누드 모델 / 허창열  (0) 2023.05.10
엄마와 종이학 / 김향용  (0) 2023.05.10
공지사항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Total
Today
Yesterd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