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수필 읽기

Y의 하루 / 최장순

부흐고비 2023. 6. 4. 04:04

그가 오늘의 기분을 고른다. 기분은 Y혹은 y. 바로 나다.

존재감은 목에 감기는 그 순간부터이다. 엄숙할 때의 나는 Y, 바람에 날리듯 경쾌한 기분의 나는 y라서 때때로 달라지는 그의 감정을 살핀다.

옷장에는 서른 남짓한 내 동료들이 있다. 신입 몇을 제외하면 대부분 한물갔다. 오래된 친구들을 그가 선뜻 내치지 못하는 것은 그날그날 기분과 분위기에 맞는 구색을 맞추기 위함이다. 그는 오늘 빨간 바탕의 흰 점박이 나를 골랐다. 가장 무난한 선택이다. 어제의 한랭전선을 밀어내고 맑은 고기압을 회복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어제는 며칠 동안 시장조사를 하고 통계를 내어 작성한 보고서가 퇴짜를 맞은 날. 보고서를 훑던 상사가 그의 머리 위로 비행접시를 날렸다. 핏발선 상상의 목에 묶인 기분만큼 그의 기분도 있는 대로 구겨졌다. 생각 같아서는 상사의 기분을 확 졸라매고 싶었지만 행동은 고분고분, 대답은 예스였다. 그의 목울대에서 꿀꺽하는 소리가 내 방향키를 타고 배꼽까지 내려왔다. 비굴을 위장한 순종, 어깨에 힘이 빠져나간 그의 얼굴이 창백했다. 나를 홱 잡아당기는 거친 손. 그러나 그뿐, 그는 아무런 반박도 내뱉지 않았다. 그의 붉으락푸르락하는 얼굴을 긴장된 눈으로 바라보는 것은 내 고역이다. 이럴 때 나는 섣부른 감정이 폭발하지 않도록 그를 더욱 조일 수밖에 없다. 그가 양복 윗 저고리 안쪽에 넣고 다니는 마지막 패, 사표를 던지지 않은 것도 그 때문이다. 나를 쉽게 벗어 팽개친 K 과장은 어느 골목 포장마차 주인이 되었다고 하고, H 차장은 아직도 전전긍긍이라는 동료의 말을 상기하면서 그는 나를 더 바짝 추켜올릴 뿐이었다.

서류뭉치와 씨름하고 전화기에 매달려 목청을 높일 때면 목을 잠시 느슨하게 풀고 싶지만 긴장을 푸는 것은 금기사항. 그는 오히려 내가 얌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지 확인하려는 듯 나를 습관적으로 만지곤 한다. 그가 잠시 숨을 고르는 때는 점심시간이다. 빌딩 숲을 빠져나온 군상들 속에 허기는 또 다른 한 끼를 위해 골목으로 들어간다.

자판기 커피로 식곤증을 잠재운다. 내 매듭을 늦추어놓은 만큼 허리띠도 느슨하게 늘여 놓고 농담을 불러오거나 멀리 산을 둘러보기도 한다. 옥상에서의 자투리 시간은 낮잠만큼이나 달콤하다. 버릇처럼 고층 빌딩의 층수를 세어보다가 문득 승진을 꿈꾸기도 하는 하루의 허리에 해당하는 시간, 남은 오후를 버티기 위한 긴 호흡은 필수다. 온몸에 고루 충전을 마치고서야 그토록 목줄을 거머쥐던 의자에 낙관주의자로 가장한 엉덩이를 붙인다.

오늘도 결재서류가 한 몫을 더 보탠 날이다. 보고서가 무사통과되는 것이 과원들에게 줄 수 있는 대가이고 보상이지만 통과는커녕, 이곳저곳에 잔뜩 혹을 붙여 나왔다. 눈치를 보는 일이 어디 윗사람뿐이겠는가. 꼬인 매듭은 그날로 풀어야 한다. 샌드위치 맨이 된 그가 골목 단골집으로 파고든다. 꼬리를 물고 이어진 물뱀을 닮은 y들이 그의 뒤를 따른다. 아침의 근엄함과 한낮의 비굴함을 던져버린 목 풀린 나도 독기 빠진 그를 안내한다. 서로 울뚝불뚝한 욕설과 이유도 모를 화풀이를 술에 섞어 마시고 나면 2차에서 3차로 분위기를 갈아탄다. 이때쯤 나는 폭탄주에 벌겋게 달아오른 그의 머리에 질끈 매인 열두 발 상모가 되기도 하고, 또 때론 그의 손놀림에 놀아나는 소리 없는 색소폰이 되기도 한다.

썰물처럼 사람들이 빠져나간 도시에서 우리는 한 종족, 야행성 방울뱀이 되어간다. 이성을 마비시키는 조명 아래 억눌린 노래를 다 토해낸 그가 S자 물결모양으로 거리로 나선다. 도시에서는 직선 보행보다 사선을 걷는 것이 상책이라는 것쯤은 터득한 그다. 자신의 존재를 과시하려는 신경질적인 오토바이 경적이 후렴처럼 들리고 도시가 침묵 속으로 가라앉는 자정을 넘긴 거리. 그들은 파김치가 된 노예처럼 우리들에 이끌려 뿔뿔이 흩어진다.

이제 내 역할은 그의 하루가 돌아갈 안식처로 안내하는 일이다. 단전에 남아있던 비상용 전류마저 다 소진한 그의 배터리를 충전소와 연결 잭에 끼워야 한다. 그를 비웃듯 낄낄거리던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그가 꼿꼿해졌다. 흔들리던 가장의 자존심을 일으켜 세운 것이다. 안과 바깥이 마주치는 현관에서 승전을 알리는 로마의 병사처럼 소리친다.

"무사 귀환했노라!"

나의 하루도 구겨진 채 쓰러진다. 고통, 억압, 분노 따위는 어두움이 다 삼켜버리겠지. 낡은 충전기 속에서 무릎을 가슴까지 끌어올린 그마저도.

이제 그를 올가미에서 풀어줄 차례, 나는 늘 그랬던 것처럼 내 시침에 분침을 얌전히 포개어 벽장 안 침실로 파고든다. 그의 잠꼬대는 안주 접시에 올려놓았던 상사를 씹는 소리이거나, 낮에 헤아리다 포기한 고층빌딩의 층수를 마저 세고 있는 것이리라. 바깥세상이 궁금한 귀들이 어둠 속으로 몰려들지만 오늘은 말하고 싶지 않아 굳게 입을 닫아버린다.

나는 안다. 충전을 마친 아침이면 그가 변함없이 나를 고른다는 것을. 그리고 신발 끈을 조여 매듯 또다시 가장의 책임이 내게 묶여 세상으로 나갈 것이다. 내일의 기상도가 어떻게 변할지 모르지만 난 개의치 않을 작정이다. 그는 여전히 내게 목을 맡길 것이고 나도 여전히 그의 존재를 드러내는 기분, 넥타이니까.

'수필 읽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골죽 / 지영미  (1) 2023.06.04
두부 예찬 / 최민자  (0) 2023.06.04
봉별기 / 이상  (5) 2023.06.04
나의 어머니 사임당의 생애 / 율곡 이이  (0) 2023.06.04
목수 / 김훈  (0) 2023.06.04
공지사항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Total
Today
Yesterd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