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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인연의 빗금 / 박하성

부흐고비 2023. 6. 4. 04:19

강을 건너야 할 나룻배는 보이지 않는다. 나룻배로 양쪽을 이어주던 뱃길은 끊어진 지 오래다. 커다란 돛에 팽팽한 바람을 담고 낙동강을 오르내리던 황포돛배도 흔적이 없다. 제방 위에 박제처럼 전시된 돛배의 모형만이 메마른 뭍에 닻을 내리고 젖은 그림자를 말리고 있을 뿐이다. 강의 내밀한 이력이 켜켜이 쌓인 강바닥을 콘크리트 다리로 우악스럽게 딛고 서 있는 무심한 삼강교가 세월의 비정함을 느끼게 한다.

​ 세 강이 만난 곳이다. 태백에서 발원하여 모데미풀을 적시고 온 낙동강이 안동을 지나 서쪽으로 흐르다가 이곳에서 남쪽으로 크게 방향을 튼다. 소백산에서 발원한 내성천은 비룡산을 감고 휘돌아 용틀임을 하고, 문경의 사불산을 떠나 흘러온 금천을 온몸으로 맞아들인다. 세 강은 한줄기 낙동강이 되어 도도한 장강의 물결을 이루며 흐른다. 이렇게 수천수만 년을 흘렀으리라.

​ 예천군 풍양면 삼강리에 있는 삼강주막은 조선의 마지막 주막이다. 장삿길이나 과것길로 문경새재로 이어지는 영남대로를 따라 오가는 사람들은 이곳 삼강나루에서 나룻배로 강을 건너야 했다. 또한 낙동강 하류인 구포나루에서 강을 거슬러 온 배들이 이곳에 닻을 내리고 잠시 머물다 가던 곳이다.

​ 한때는 제법 흥청거렸던 곳이다. 여러 채의 주막과 뱃사공 숙소, 나그네의 숙소가 있었고, 이곳저곳에서 장이 서기도 했다. 일제강점기에 대홍수로 집들이 떠내려 간 뒤에도 삼강주막은 이 자리에 남아 나루를 지켰다. 홀로 주막을 지키던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그 해 경상북도는 삼강주막을 민속자료 134호로 지정하였다. 그리고 주변에 사공 숙소, 나그네 숙소 등을 복원하였다.

​ 주모가 떠난 주막은 따가운 여름 햇살이 독차지하고 있다. 강바람도 더위에 지쳤는지 너덜너덜 힘겹게 제방을 넘어온다. 나는 주막 뒤편으로 돌아가 좁다란 툇마루에 걸터앉는다. 십여 평 남짓 초라한 주막이지만 얼마나 많은 사연들이 이곳에 남겨졌을까. 바람이 들려주는 고단한 삶의 흔적들이 배어 있는 주막의 이야기를 듣는다.

​ 낙동강 하류 구포에서 소금을 싣고 온 뱃사공의 모습이 보인다. 막걸리 한두 잔이 안동포를 잔뜩 지고 온 봇짐장수의 어깨에 힘을 보탠다. 투전판의 시끌벅적한 고함소리가 요란한 매미소리에 섞여 강을 건너간다. 소 값을 흥정하는 눈치 싸움의 승자가 회심의 미소를 짓는다. 이따금 시인묵객이 나타나 풍월을 읊고 붓을 놀린다. 나는 뱃사공도 되고, 봇짐장수도 되고, 시인묵객도 된다.

​ 툇마루를 벗어나 부엌으로 들어갔다. 주모의 외상장부 앞에서 마음이 숙연해진다. 울퉁불퉁한 흙벽에 고대 메소포타미아에서 점토판에 새겨 사용했다는 쐐기문자를 닮은 빗금들이 세로로 길고 짧게 그려져 있다. 짧은 선은 막걸리 한두 잔, 긴 선은 한 주전자란다.

​ 주막의 편년체 역사 기록이다. 글을 모르는 주모가 흙벽에 음각한 외상 장부는 주모만 해독할 수 있는 신성한 고대 문자다. 외상을 갚으면 가로줄을 그어 표시했다고 하는데 아직 가로줄이 그어지지 않은 빗금들이 마음을 짠하게 한다. 저 물비린내 물씬 나는 이름들 중 더러는 나중에 이곳을 찾기도 했을 것이다. 그리곤 남아 있는 빗금의 쐐기 몇 개를 가로줄 대신 자신의 가슴에 아프게 옮겨 박고, 허위허위 강물처럼 흘러가기도 했을 것이다.

​ 인연을 생각해본다. 그들은 무슨 사연이 있어 세로 빗금 위에 가로줄을 칠 수 없었을까. 사람의 인연은 씨줄 날줄로 엮어지고 짜일 것인데 가로줄이 없는 저 단절된 인연들은 어떤 내력을 지니고 있을까. 정작 좋은 인연조차 오래 이어가지 못하고 살아온 내 부끄러운 자신을 보는 듯하다. 되돌아보면 나로 인해 끊어진 인연의 고리가 훨씬 많다는 자괴감에 마음이 무겁다.

​ 주모가 새긴 빗금들은 시간을 거슬러 사람들을 호명하고 있다. 나는 내가 알던 사람들 이름을 떠올려본다. 잊힌 이름도 있고 아픈 이름도 있다. 놓지 말았어야 할 사람이 있고, 가까이 하지 말았어야 하는 관계도 있다. 어찌 됐든 내가 부족한 탓이었고, 그것들은 내가 안고 가야 할 부끄러운 몫이다. 고마움을 느끼면서도 한발 더 가까이 다가가지 못하고, 소중한 인연임을 알면서도 관계 유지에 소홀했다.

​ 머물지 못하는 것이 강의 숙명일까. 어느새 자리를 슬쩍 옆으로 비킨 회화나무 그늘이 나를 일으킨다. 나는 다시 제방에 올라선다. 강물은 건너편 산 그림자를 거꾸로 담아 품고 흘러간다. 한껏 돛이 부푼 황포돛배들은 돌아오지 않아도 이물과 뱃전에 부딪치던 강물의 기억은 바다에 담겼다가 수증기로 증발하고 다시 비가 되어 내성천, 금천, 낙동강으로 돌아와 흐를 것이다.

​ 강물은 물푸레나무처럼 무겁고 질기던 주모의 생을 추억할지 모른다. 어쩌면 소금장수의 퀴퀴한 짚신 냄새, 객주들의 단수 높은 흥정 소리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주모의 입담처럼 걸쭉한 막걸리에 얼큰하게 간이 밴 주정꾼의 의미 없는 독백을 들려주거나 제 몸의 상처를 제가 핥는 짐승처럼 절망을 모르는 사내의 묵직한 신음소리를 기억하고 있을지 모른다.

​ 서쪽으로 해가 기운다. 나는 삼강에 잠시 내렸던 닻을 감아 올리고 떠날 채비를 한다. 그리고 강물처럼 언젠가 다시 돌아올 것이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물줄기처럼 사람들도 이곳을 찾아서 빗금과 가로줄을 보며 생각에 잠길 것이다. 그들은 주모의 외상장부처럼 누군가를 호명하고, 강물을 바라보며 끊어진 인연을 생각할 것이다. 그리곤 강물처럼 어디론가 흘러갈 것이다.

​ 내 가슴엔 수많은 빗금 세로줄이 새겨져 있다. 다만 이 세로줄의 주인공은 모두 나 자신이다. 살다보면 하나씩이라도 가로줄을 칠 수 있는 날이 올까. 누군가 나를 호명하지 않아도 내가 나를 호명하여 빗금을 지우는 그런 날이 올까.
// 제9회 경북일보 청송 객주 문학대전 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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