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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속담으로 쓴 자서전 / 최미아

부흐고비 2023. 6. 25. 21:36

강아지 발바닥만한 섬에서 태어났다. 순풍에 돛 달고 세월아 네월아 지냈다. 앞길이 구만리 같은 호시절이었다. 집안 살림은 죽이 끓는지 밥이 끓는지 모르고 책만 들여다보는 아버지는 밤마다 호랑이 담배 먹을 적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객지에 있는 자식들에게 보내는 편지를 쓸 때는 내가 방바닥에 엎드려 아버지가 불러주는 입말을 받아 적었다. 당구 삼 년에 폐풍월이라고 그때부터 호랑이 그리려다 고양이를 그리기도 했지만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를 끼적거리고는 했다. 고슴도치도 제 새끼는 함함하다고 한다더니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다르다고 아버지는 내가 소설가가 되리라 굳게 믿었다. 오르지 못할 나무는 쳐다보지도 말아야 하는데 앉아 삼천리 서서 구만리인 아버지의 믿음에 나도 꿈을 꾸게 되었다. 참깨가 기니 짧으니 하는 우물 안 개구리로 사는 것에 뉘가 났다.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 하는데 갈잎을 먹고 싶었다.

​ 말은 제주도로 보내고 사람은 서울로 보내랬다. 집 떠나면 고생이고 우물가에 애 보낸 것 같다고 말렸지만 초년고생은 양식 지고 다니면서도 한다 했으니 나중에 삼수갑산을 갈지라도 개나 걸이나 다 가는 서울로 가고 싶었다. 서울은 눈 감으면 코 베어 먹는 곳이라 했다. 서울이 무섭다 하니까 과천서부터 기었다. 서울에는 겉 다르고 속 다를지는 몰라도 말은 청산유수고 씻은 배추 줄기 같은 사람들이 난다 긴다 하면서 살고 있었다. 나는 어디 가도 꾸어다 놓은 보릿자루였다. 촌닭 장에 나온 것 같았고 개밥에 도토리 신세였다. 아무리 냉수 마시고 이 쑤셔봐야 알아주는 이가 없었다. 남이 장에 간다고 나도 거름지고 나섰다가 바로 끈 떨어진 두레박 신세가 되었다. 나오느니 눈물이요 터지는 게 한숨이었다.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 강산도 변한다는 십 년 동안 오라는 데는 없어도 갈 데는 많아 고삐 풀린 말처럼 뛰어다녔다. 쇠털 같이 많은 날 도랑물 수돗물 다 마시다 보니 절에 가서 젓갈 얻어먹을 정도가 되었다. 서울에서는 남이 지게 지고 제사를 지내건 말건 다들 내 코가 석 자니까 감 놔라 배 놔라 하지 않았다. 살다보니 빛 좋은 개살구에 속빈 강정들도 많았지만 제 눈에 안경인 남자 만나 귀밑머리를 풀었다. 키 크면 싱겁다지만 겉볼안이라고 속은 어질 것 같았다. 하늘의 별따기처럼 천신만고 끝에 깎은 밤 같은 아들 둘 낳고 나니 용이 비 만난 꼴이라 입이 함박만 해졌다. 사는 것이 누워서 떡 먹기처럼 쉬워 보였다.

​ 남편이 사업을 시작했다. 바늘 넣고 도끼 낚을 심보는 아니었다. 핑계 없는 무덤 없다고 나라 경제가 어려워져 마파람에 호박꼭지 떨어지듯 옴나위도 못하고 넘어갔다.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지고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졌다. 부자는 망해도 삼 년 먹을 것이 있다는데 부자가 되기 전에 망했다. 가지고 있던 모기 눈물만한 것들을 곶감 빼먹듯 빼먹고 나니 옛 보릿고개가 따로 없었다. 발바닥에 불이 일고 입에 단내가 나도록 돌아쳐도 산 넘어 산이고 옹이에 마디인 날들을 견디느라 부처님 가운데 토막 같던 남편은 비 맞은 장닭이 되었다.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는데 방안 풍수인 나는 이불 속에서 활개만 치고 있었다. 석 달 장마에도 푸나무 말릴 볕은 난다. 고생 끝에 낙이 오고 쥐구멍에도 볕들 날이 있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고 음지가 양지 되고 양지가 음지 된다. 옛말 그른 데 없다.

​ 넘어진 김에 쉬어간다고 글공부를 시작했다. 늦게 배운 도둑질에 날 새는 줄 몰랐다. 비단 올이 춤추니까 베올도 춤추고 숭어가 뛰니까 망둥이도 뛰었다. 남들은 누운 소 똥 누듯 하는데 나는 재주가 메주여서 선무당 장구 탓하고 서투른 과방이 안반 타박하듯 했다. 들은 풍월 얻은 문자로 아는 척 하고 되글 가지고 말글로 써먹고 공자 앞에서 문자 썼다. 꿈인지 생시인지 등단도 했지만 글은 가뭄에 콩 나듯 책에 실렸다. 허나 느릿느릿 황소걸음 걷다보니 여기까지 왔다. 말이 씨가 된다. 소싯적 꿈 소설가가 아니어도 엎어치나 메어치나 매한가지 수필가가 되었다. 미꾸라지 용된 격이다.

​ 강산이 세 번 변했다. 차 치고 포 치던 남편도 이빨 빠진 호랑이에 날 샌 올빼미 신세다. 내 글 읽고 입찬소리로 옥에 티 가려내더니 이제는 쓰다 달다 말이 없다. 서로 소가 닭 보듯 닭이 소 보듯 하지만 척하면 삼천리고 메떡 같은 말도 찰떡같이 알아듣는다. 미운 정 고운 정 다 든 남편과 검은 머리 파 뿌리 되도록 알콩달콩 살고픈 마음 굴뚝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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