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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가시에 찔리다 / 마경덕

부흐고비 2023. 6. 30. 06:45

1. 나뭇가시
어느 시인이 말했다. 한숨이 화가 되어 깊은 병이 들면 엄나무 생가시를 가마솥에 삶아 마시라고. 세상 가시에 찔려 죽을 만큼 아플 때는 가시나무의 가시가 곪은 상처 터트려 주는 명약이라 하였다. 어릴 적 손가락에 가시가 박히면 어머니는 탱자나무 가시로 가시를 빼내었다. 바늘은 쇳독이 있지만 나뭇가시는 독이 없다고 늘 나뭇가시를 챙기셨다.

엄나무, 유자나무, 두릅나무, 석류나무 대추나무도 가시를 가지고 있다. 모두 제 몸을 보호하기 위함이다. 나무는 열매를 버릴지언정 가시는 버리지 않는다.

2. 바늘쌈지
“봄 두릅은 금이요. 가을 두릅은 은”이라는 말이 있다. 가시가 억센 것일수록 약효가 좋다는 두릅나무는 당뇨병 환자에겐 생명의 나무라고도 불린다. 우연히 산기슭에서 만난 두릅나무는 가시투성이 막대기에 달랑 잎 하나 매달고 있었다. 민머리에 솟은 새순 하나가 나무의 전 재산인 셈이다. 다가오는 발소리에 잔뜩 긴장했으리라. 잎을 잃고 나면 꽃을 피울 수가 없는 나무는 제 몸 깊숙이 숨은 둥근 꽃을 본 적은 있을까? 온몸에 가시를 꽂은 나무는 영락없는 바늘쌈지다.

3. 도깨비바늘
귀침초라 불리는 도깨비바늘이 옷자락을 물고 집에까지 따라왔다. 갓털에는 거꾸로 된 가시가 있어 갈고리처럼 물고 늘어진다. 이름 그대로 바늘처럼 날카로워 따끔따끔 살을 파고든다. 야산이나 들에 자라는 도깨비바늘, 제 영역을 넓히려고 아무나 붙잡고 따라온다. 발 묻을 곳도 없는 도시까지 나와 쓰레기통에 버려질 줄 짐작이나 했을까? 저를 구해줄 도깨비방망이도 없는 녀석이 산과 들을 다 꿰매려는 듯 바늘 끝을 세우고 도깨비란 이름을 얻어 살아간다. 도꼬마리도 도깨비와 같은 국화과(科), 온몸을 덮은 가시로 지나가는 발목을 몰래 붙잡고 먼 곳까지 왔다. 그런데 왜 엉뚱한 국화과일까? 호랑이와 사자가 고양이와 한 가족이듯 향기로운 백합도 독하고 매운 마늘 양파와 한 핏줄이다. 자연은 학연 지연도 따지지 않는다.

4. 우럭아가미
다른 어종에 비해 맛이 뛰어나 횟감이나 매운탕감으로 잘 나가는 우럭, 연안의 암초밭에 살며 머리에 거칠고 날카로운 가시가 돋아 있어서 ‘sting fish’라고도 부른다. 녀석은 암초밭에 살아서 뼈가 단단하다. 날카로운 아가미 뼈는 물갈퀴를 가진 오리발처럼 납작하게 펼쳐져 있다. 언젠가 매운탕을 먹다가 아가미뼈를 삼켰는데 내시경으로 들여다보니 식도에 걸려있었다. 가시 하나 때문에 사나흘 병원 신세까지 져야 했다. 녀석은 물갈퀴를 달고 어디까지 헤엄쳐 가고 싶었을까? 바다가 아닌 몸에 갇히길 거부한 우럭은 식도를 물고 놓지않았다. 우럭이 돌밭에서 살 수 있는 것은 단단한 가시를 가졌기 때문이다.

5. 도관이 오빠
돈이 아버지의 먼 친척인 오갈 데 없는 도관이 오빠는 눈칫밥을 먹으며 단칸방에 얹혀살았다. 종일 물 긷고 군불 때고 장작 패는 일이 전부였다. 말이 좋아 친척이지 머슴과 다를 바 없었다. 땅딸한 키에 다부진 체격을 가진 그가 휘두르는 도끼날에 통나무가 단번에 잘려 나갔다. 그러나 돈이 엄마는 일 잘하는 그를 눈엣가시로 여겼다. 고봉밥을 먹는다고, 눈치코치 없다고 타박이었다. 단칸방에 끼어 자는 도관이 오빠는 차디찬 윗목에서 벽만 보고 잔다고 했다. 잠들면 누가 업어 가도 모를 만큼 잠귀가 어둡다고 했다. “음식 먹기 싫은 건 내다 버리기나 하지, 사람 싫은 걸 어쩌누.” 세상에서 가장 먹기 힘든 밥은 눈칫밥이었다. 눈엣가시였던 도관이 오빠는 그 가시를 꾸역꾸역 삼키고 온몸에 가시가 돋아났다.

6. 다기(茶器)
다기는 오래 쓰면 실금이 간다. 뜨거운 물에 수없이 데이며 조금씩 금이 가는데, 그 모습이 마치 실핏줄 같았다. 손때 묻은 고가구가 멋스럽듯 이가 빠지고 금이 간 다기도 멋이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누군가 하얀 다기 세트를 보내왔다. 실금이 간 푸른 찻잔은 사라지고 눈부시게 흰 다관이 녹차를 우려내고 있었다. 하지만 맛이 달랐다. 가느다란 실핏줄을 돌아 나온 은은한 녹차 맛은 사라지고 없었다. 실금은 다기의 터져버린 핏줄이었다. 아름다운 상처였다.

7. 가시면류관
왕이 쓰는 면류관은 제왕(帝王)이 정복(正服)을 입고 갖추어 쓰던 관으로 국가의 대제(大祭) 때나 왕의 즉위 때 화려한 오채(五彩)의 구슬꿰미를 늘어뜨려 왕의 위엄을 과시했다. 반면 가시면류관은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힐 때 로마 병정이 예수를 조롱하며 머리에 씌웠던 초라한 형관(荊冠)이다. 가시면류관은 예수의 고난을 상징한다. 멜깁슨 감독, 제임스 카비젤 주연인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를 관람한 사람들은 예수의 머리에 씌여진 가시면류관을 기억할 것이다. 가시가 머리를 파고들어 피가 흐르는 그 모습은 눈 뜨고 볼 수 없는 참극이었다. 가시는 찌르는 성질이 있어 무조건 파고든다. 찔림을 당하는 자는 고스란히 고통을 받아야 한다. 예수를 믿는 자는 누구나 가시면류관을 써야 하고 그가 갔던 길을 걸어야 한다. 우리네 삶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가는 것과 무엇이 다르랴. 나 역시 가시면류관을 쓰고 그를 따라 간다. 신림동 작은 교회를 향해 가는 도중 몇 명의 나사로를 만나고 흰 지팡이를 만나고 찬송가를 듣는다.

8. 초록 발톱
호랑가시나무는 고양이새끼 발톱처럼 날카롭다. 하여 '묘아자(猫兒刺)나무'라고도 하고 날카로운 가시에 호랑이가 등을 긁는다 하여 '호랑이등긁기나무' 라고도 한다. 그 사나운 가시도 상대에 따라 등긁개가 될 수 있다니, 호랑이쯤 되면 등긁개도 이만해야 하지 않을까? 사철 도톰한 푸른 잎사귀에 육각형 모서리에 솟아난 가시가 호랑이처럼 강한 피부를 가진 동물의 등긁개로 알맞다고 만들어낸 이야기가 아닐는지….

이해리 시인은 한 몸 안에 감미로운 향기와 날카로운 맹수의 발톱을 함께 키우는 나무라고 했다. 망국의 황녀가 자결을 결심할 때 알몸에 바르는 독약 같은 향기, 발톱은 그 향기를 사수하기 위해 외부로 뽑아 든 칼날이라 한다. 시인은 그 애틋한 이중성 안엔 무슨 쓸쓸한 비밀을 숨겼는가, 묻는다.

언젠가 호랑가시나무 울타리를 본 적 있다. 초록 가시들이 한데 엉겨 '위리안치'처럼 그 집을 빙 둘러싸고 있었다. 바람도 통과할 수 없는 울타리엔 초록 발톱이 무성하였다. 그 싱싱한 발톱 속에서 징글벨이 울리고 크리스마스가 카드가 튀어나왔다. 맹수의 발톱을 품은 나무, 등이 가려운 호랑이가 밤에만 다녀가는지 잎잎이 호랑이 냄새가 묻어 나왔다.

9. 혓바늘
혀에도 바늘이 있다. 몸이 지치면 혓바닥에 숨었던 바늘들이 솟아 혀를 찌르기 시작한다. 구내염은 몸이 피곤하면 입안이 헐거나 혓바늘이 돋는 ‘입병’. 혀는 심장 다음으로 피가 많이 사용되는 곳으로 면역력이 떨어지면 가장 먼저 손상된다고 한다. 사람의 입 속에는 500여 종의 세균이 존재하는데 침에는 항생물질이 들어 있어 입안으로 침입하는 세균을 1차적으로 방어한다. 침이 마르면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입안 점막도 약해져 염증이 생긴다. 몸의 상태를 제일 먼저 알리는 입은 건강의 바로미터(barometer), 따가운 혓바늘은 몸이 전하는 몸의 말이다. 찌르지 않으면 알아듣지 못하는 나에게 혀가 바늘을 세워 자꾸 나를 찌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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