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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정신일도 하사불성 / 김성언

부흐고비 2023. 6. 30. 06:50

근본주의 혹은 원리주의라 하면, 초기 기독교 정신에 기초해 부패의 소굴 바티칸을 매섭게 질타하다가 화형을 당한 피렌체의 수도사 사보나롤라, 아니면 주자학의 원리에 따라 임금 언행을 꼬치꼬치 간섭하다가 사약을 받은 조선의 거유 조광조 선생을 떠올리실지 모르겠습니다.

한데 고교 시절 제 친구 가운데도 두 분 못지않게 근본주의자라 불러 전혀 손색이 없을 녀석이 하나 있었습니다. 기말고사가 박두했는데도 삶의 근본은 시험에 있지 않다며 엉뚱한 개똥철학서나 읽다가 시험 종료 땡 하면 바로 책상머리에 앉아 다음 시험 계획표를 날짜별 분 단위로 짜느라 밤샘을 하는데, 그 계획이란 게 고3이란 놈이 공부를 근본부터 한답시고 중1 과정 제1과부터 새로 시작하는 식이었습니다. 물론 계획표 작성에 기진맥진해 정작 본 게임은 시작도 못 해 기권하는 게 필연지사였지요. 딴 아이들은 링컨 대통령의 게티즈버그 연설문을 해석하는데 지는 '굿모닝, 하와유?' 하고, 남들은 미적분을 푸는데 지는 인수분해를 하겠다니 그게 어찌 현실을 직시하는 자의 소행이겠습니까. 그 위인이 서예는 제법 익힌지라 바람벽에다 왕희지 서법으로 '정신일도 하사불성'이라 일필휘지해놓았는데, 뜻을 물었더니 "어허, '정신을 한군데 집중하면 무슨 일인들 이루지 못하리'란 뜻이여. 이 무식한 친구야!" 하고 일갈하는 것이었습니다.

돌이켜보건대, 저도 계획이라면 그 괴물 못지않게 타의 추종을 불허할 인간이었습니다. 국민학교 3학년 때 백지에 국사발로 원을 그려놓고 24시간을 표시한 다음, 7시 기상→양치질→예습→학교→복습→밤 9시 꿈나라 식으로 생활계획표를 만든 걸 시작으로, 2018년 바로 어제저녁까지도 모든 과업을 뒷전으로 미룬 채 복잡 찬란한 계획표를 창조하는 일에만 몰두했지요. 그러나 아아! 칠십 나이 되도록 그 장밋빛 계획은 단 한 번도 성사된 일이 없었음을 이 자리를 빌려 부끄럽게 광고하나이다.

근데 다들 경험이 있으시겠지만, 그 계획표 위에 근사한 문구나 표어가 하나 떡 버티고 있어야만 화룡점정이요, 금상첨화가 아니었겠습니까. '노력', '성실' 따위는 소학교 급훈에나 어울릴 구상유취(口尙乳臭)한 단어이니, 적어도 '구르는 돌에는 이끼가 끼지 않는다'나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 '진인사대천명' 정도는 되어야 장차 조국의 동량이 될 인물에 어울리는 경구가 되겠지요. 제 친구처럼 '정신일도 하사불성'을 주문처럼 외우다가 '정신잃고 인사불성'이 되는 극히 예외적인 경우도 있겠지만, 사실 '정신일도'야말로 이 하찮은 삶에서 그래도 무언가 업적을 이루어 소문자로나마 역사에 이름을 남기려 소원하는 이들이 모든 행위의 푯대로 삼아 마땅한 준칙일 겁니다.

퇴직 후 그토록 일편단심 갈망하던 자유를 되찾아 혼자서 맘껏 게으름을 피우고 있는데, 어떤 이들이 "우리 나이야말로 정신을 집중해 인생 이모작을 설계할 꿈의 나이지!" 하고 꼬드기거나 혹은 "나이 들어 정신줄 놓고 빈둥대면서 사람 안 만나면 치매가 바로 찾아와!" 하고 협박하더군요. 은근히 겁도 나고 해서 뭔가 정신일도할 일거리를 찾던 차에 아내가 지상의 과제를 부여함으로써 저에게 희망의 동아줄을 던져주었으니, 과연 인생의 등대이자, 삶의 길라잡이 역할을 사양하지 않은 거지요.

제 또래나 형님들께서도 동참하시면 어떠하실는지요. 그건 바로 멸치 배따기, 생강껍질과 마늘껍질 벗기기, 콩깍지 까기입니다. 농담이 아니라 아내와 마주 앉아 이 네 가지 과업에 골몰하다 보면 세상의 모든 번뇌와 잡념이 종적을 감추고 따사로운 행복과 평화가 비둘기처럼 찾아오더군요. 아무 의미 없어 보이는 일상의 되풀이야말로 기실 조물이 부여한 삶의 근본이자 자연의 리듬이 아닐까요. 시성 두보 말마따나 이 외에 다시 무얼 더 얻으려 발버둥하겠습니까. 도연명처럼 내 삶에 끝이 있음을 아는 자가 참 진리를 깨달은 자이리니 아아! 팝가수 짐 리브스의 친근한 목소리를 빌려 모두에게 안녕을 고합니다. 아디오스 아미고! 아디오스 계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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