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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아버지의 손가락 / 이강엽

부흐고비 2024. 4. 24. 04:58

                                                                                               (대구교육대학교 국어교육과 교수)
1.
집 정리를 하다가 옛날 앨범이 하나 나왔다. 접착식이다 보니 잘 붙어있는 것까지는 좋은데 문제는 너무 달라붙어버린 데 있다. 사진과 앨범이 한 몸이라도 된 듯 찰싹 붙어버린 것이다. 이러다가는 사진을 다 버릴 것 같아서 지체 없이 떼어내기 시작했다. 딸애가 인터넷을 검색하더니 헤어드라이어로 열을 가한 후 떼면 잘 떨어진단다. 다행히 잘 떨어지는 편이어서 조심조 심 한 장 한 장 떼어냈다.

그러다가 초록빛 한복을 입고 환하게 웃고 계신 아버지 사진을 한 장 발견했다. 평소와 다르게 곱게 입고 계셨다. 아버지의 회갑날이었던 것 같다. 그런 날이 아니고서야 저렇게 차려입고 계실 리가 없다. 왼손으로는 술잔을 든 채 오른손으로 누군가를 가리키시는 포즈였다. 잔뜩 취기가 오르셨는지 기분이 좋아 보이시는데, 내 눈은 바로 그 오른손에 멈추었다. 순간 울컥했다. 엄지와 검지의 두 마디쯤이 뭉뚝하게 잘려나가 있다. 아버지는 목수셨다. 대목(大木)이셨지만 가구도 잘 만드시고 당신 도장까지 손수 파서 쓰실 정도로 솜씨가 좋으셨다. 그러나 당시 목수의 벌이로 7남매를 부양하기에는 역부족이었고, 이일 저일 닥치는 대로 하신 모양이다. 어디선가 장총의 개머리판을 깎는 일을 맡으셨는데 그게 화근이었다. 처음 쓰는 기계 연장에 그만 손가락 마디가 절단난 것이었다.

2.
10년 전쯤, 첫 연구년을 맞았다. 1년 동안 외국에 나가 연구를 하는 게 관례였지만 나는 국내 대학에 머물렀다. 홀어머니께서 연로하셔서 나가기가 쉽지 않았던 까닭인데. 대신 틈을 내 서 집 인근의 목공소를 찾았다. 아버지 살아생전에 배우지는 못했지만 아버지처럼 목수일을 하고 싶었던 것이다. 목공소 바닥에 앉아 일주일 내내 전동드릴 쓰는 법만 익히는 고행이었 다. 목공소 사장님께서 힘들지 않느냐고 물어왔지만 일일이 손으로 작업하셨을 아버지를 생각 하면 별일이 아니다 싶었다.

그렇게 목공소 세 군데를 옮겨 다닌 끝에 그럭저럭 소소한 가구를 만들 수 있게 되었다. 그래봐야 교자상이나 식탁, 책상, 서랍장, 책장 등속의 간단한 것들이었지만 내가 쓸 가구를 내가 만들어 쓴다는 게 여간 기쁜 일이 아니었다. 몇 개는 또 만들어서 선물도 하고 몇 개는 기념품처럼 잘 모셔두기도 했으며, 동료 교수가 나무 집기를 손봐달라고 해도 이내 달려갈 수 있었다. 그렇게 목공 일을 하고는 온몸에 톱밥을 붙인 채 가구 하나를 등에 지고 들어오는 나를 보며 어머니께서 그러셨다. "늬 아버지가 너 하나는 연장 짊어지지 않게 한다고 공부하라 했 는데, 어째 늬가 목수일을 한다니?" 그러나 말씀은 그렇게 하셔도 영 나쁘지만은 않은 눈치였 다.

부모 입장에서라면 그런 식으로라도 대 잇기를 하려는 자식이 기록해 보였을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그런 대 잇기의 이면을 보자면 상황은 정반대이다. 어릴 때 비록 가난하게 지냈지만 다른 건 몰라도 얼레나 썰매만큼은 내 것이 동네에서 최고였다. 또, 평생 공부하겠다고 작정한 아들에게 아버지께서 만들어 주신 책장 3개는 나의 보물 1호이다. 못 하나 박지 않고 뒷판도 없이 조립식으로 만든 책장이 근 40년이 되도록 멀쩡하게 유지되다니 놀랄 따름이다.

이렇게 쓰다 보니 내가 아버지를 잘 따르는 착한 아들처럼 보이겠지만 사실로 말하자면 그렇지 못했다. 초등학교 2학년 때, 그때는 우리나라가 경제개발계획을 세워서 산업화된 국가를 만들겠다고 야단이 난 때였다. 그래서 미술 숙제로 받은 그림 주제도 '발전하는 우리나라'였다.

그러나 서울 변두리에서 아카시아꽃을 따먹으며 지내던 내가 발전하는 우리나라를 어디서 찾 는단 말인가. 하는 수 없이 아버지께 스케치북을 내밀었다. 아버지께서 대충 스케치를 해주시 면 거기에다 색칠을 입혀볼 심산이었다.

아버지께서 잠시 생각한 후 쓱쓱 그려주신 것은 고속도로 인터체인지였다. 8자 모양의 길이 얽혀있었는데, 나비 같기도 하고 뱀 같기도 했다. 그러나 고속도로를 나가본 일이 없고 있었더라도 유심히 보지 않았을 나로서는 그게 무엇인지 당최 이해할 수 없었다. 그것이 우리나라의 발전과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그러나 그때만 해도 아버지 말씀에 토를 달던 시절이 아니 었다.

무어라 불만을 말하지는 못한 채, 아버지 몰래 그 스케치를 지우고 5층짜리 회색 건물을 하 나 그려서 냈다. 그게 내가 보았던 가장 높은 건물이었다.

그림만큼은 곧잘 그렸던 나도 그것만큼은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다고 다 그렇게 엇나간 것만은 아니었다. 성인이 되자 아버지의 기술이 필요한 일이 생겼는데, 콘크리트못 같은 것을 박을 때 특히 그랬다. 아버지께서는 두세 번 치면 못이 잘 들어가는데 내가 치면 번번이 튀기 일쑤이고 무엇보다 위험했다. 그래서 여쭈었다. “아버지, 어떻게 하면 못을 잘 박아요?" 그러자 아버지는 싱긋 웃으셨다. "못은 아무리 잘 박아도 '못 박았다'고 해. 그러니까 되는 대로, 마음껏 박으면 돼." 아버지의 충청도식 유머였으나, 그 이후로는 신통하게 아무 데고 못을 잘 박았다.

잘 박으나 못 박으나 매 한지라면 그냥 마음껏 박고 나 보는 것이라는 배짱이 문제를 깔끔하게 해결해주었다. 군대 공병대에 가서도 남보다 월등했던 기술은 그것 하나였지 싶다.

3.
내 연구실 책상 왼편에는 연필통이 있고, 그 안에는 여러 필기구와 함께 젓가락 한 벌이 꽃혀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불결하게 젓가락을 거기다 꽂아두고 쓰느냐고 하겠지만, 사실은 아버지께서 쓰시던 젓가락이다. 아버지의 손가락 두 개가 제 구실을 하지 못한 탓에 여느 젓가락은 자꾸 손에서 미끄러진곤 했다. 그래서 아버지께서는 모가 반듯하게 난 사각 막대 형태의 젓가락만 쓰셨다. 나는 그걸 오래도록 기억하기 위하여 내 눈에 가장 잘 보이는 곳에 아버지의 젓가락을 꽂아두고 있다. 아버지께서는 그 젓가락으로 자식들 생선 가시를 발라주시곤 했 다.

일전에 가족 모임에서 둘째 누나가 내 손을 보더니 이야기했다. “너는 손이 꼭 아버지를 닮았어.” 막내 누나가 말을 보탰다. “아버지는 험한 일을 하셨어도 손이 참 부드러웠지.” 그러나 누나들도 잘 모르는 것이 있을 것이다. 아버지는 외출하실 때면 막내아들인 내 손을 꼭 쥐고 다니시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아버지의 손가락 끝이 내 손에 닿곤 했다. 여느 아버지에게서는 손가락 끝과 손톱이 만져질 그 자리에 말랑말랑한 살결의 촉감이 부드럽고 따뜻하게 전해졌다 그 아버지의 손끝에서 이어져 내려온 내 손가락에서는 오늘도 온갖 것들이 쏟아져 나온다. 아버지께서 남겨주신 서가에서 책을 빼내 책장을 넘기기도 하고, 그날 지워버린 아버지의 스케치를 따라 그림을 그리기도 하고, 아무렇게나 해도 잘 된다는 믿음으로 여기저기 망치질을 하기도 한다. 어쩌면 지금 이 글을 쓰는 키보드 위에서도 아버지의 손가락이 함께할 것만 같 다. 온전한 손가락이 부드럽게 움직인다.

해가 바뀌면 오래된 앨범에서 곱게 떼어낸 사진을 보며 그림을 한 장 그려야겠다. 다행스레 아버지의 손재주가 도와주어서 그 말랑말랑한 촉감이 그대로 살아나고 호탕한 웃음까지 피어나면 좋겠다. 참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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