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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김치와 고등어 / 백금태

부흐고비 2024. 4. 25. 00:37

김치와 고등어 / 백금태 시큼한 김치 한 쪽을 썩둑썩둑 썰어 냄비 바닥에 깔았다. 양파와 파도 길쭉길쭉하게 잘라 옆에 곁들였다. 그 위에 금방 어물전에서 사 온 살아 펄펄 뛸 것 같은 고등어를 손질하여 얹고 고춧가루를 듬뿍 뿌렸다. 고등어가 잠길 듯 말 듯 물을 잘박하게 붓고 가스 불을 댕겼다. 시간이 흐를수록 온 집안이 김치의 시큼한 맛과 고등어의 구수한 냄새에 푹 빠졌다. 몇 년이나 냉장고 밑바닥에 묵혀 있던 김치와 고등어가 서로를 품으며 깊은 맛을 뿜어낸다.

그 김치는 부산에 사는 언니가 삼 년 전에 담가 준 것이었다. 직장 다니는 동생이 안쓰러운지 툭하면 김치 상자가 택배로 배달되곤 한다. 그해는 동생에 대한 언니의 사랑이 더 깊었는지 아니면 바닷가에 사는 것을 자랑이라도 하고 싶었는지 멸치젓, 새우젓, 갈치젓 등 갖가지 젓갈을 듬뿍 넣은 김치는 소금과 진배없었다. 그것은 어린 시절 된장 단지에 박아 놓았던 무장아찌 맛이었다. 김치 줄기 한 가닥이면 밥 한 공기는 거뜬히 먹고도 남을 지경이었다. 그 김치는 우리 집 식탁에 올라오는 횟수가 점점 줄어드는가 싶더니 어느 날부턴가 아예 자취를 감추고 김치냉장고 속에 들어박히는 처량한 신세가 되었다. 냉장고 안의 김치통들이 씻고 닦고 몇 번을 한 동안에도 그것은 애물단지처럼 냉장고 밑바닥에 웅크리고 있었다. 버리려고 뚜껑을 열면 언니의 얼굴이 어른거렸고, 벌건 양념을 묻힌 언니의 손이 김치를 뒤척이고 있었다. 나는 마지못해 다시 뚜껑을 닫아 냉장고 밑바닥에 밀쳐놓았다. 그것은 음식물 쓰레기통으로 내몰릴 운명을 몇 번이고 맞으면서도 숨죽인 채 그렇게 곰삭아 가고 있었다.

냄비에는 고등어의 비릿한 냄새를 품으며 묵은 김치가 뭉근하게 익어 가고 있다. 그것은 마치 열일곱 신부와 열아홉 신랑이 만나 칠십 년 가까이 푹 절인 어머니와 아버지의 삶이 익어가고 있는 것 같다.

절에서 아버지 49제를 지내고 돌아온 날이었다. 몇 달간의 병원 생활에 책장에 꽂혀진 책이, 책상 위에 놓여진 아버지의 지필묵이 먼지를 뽀얗게 뒤집어쓰고 있었다.주인 잃은 표를 온몸으로 드러내고 있었다. 병원에서의 아버지는 아기 같았다. 서슬 퍼랬던 위엄은 어디 가고 여리고 나약하기 그지없는 아버지였다.

생전의 아버지는 무척 엄했다. 아버지는 불의를 보고 참지 못하는 성격이었다. 원리 원칙에 한 치의 오차도 용납하지 않았다. 아버지에게는 밖에서나, 집에서나, 아이나, 어른이나 간에 예외가 없었다. 그래서 아버지에게는 ‘백장군, 백 호랑이’ 란 별명이 따라다녔다. 아내인 어머니마저도 아버지 앞에서는 순한 양이었다. 어머니가 벌벌 떠니 아버지께서 별다른 꾸중도, 매 드는 일도 거의 없었지만 자식들도 덩달아 벌벌 떨었다.

가지 많은 나무 바람 잘 날 없듯 여러 자식들은 쉴 새 없이 일을 만들었다. 어머니는 그럴 때마다 바람막이를 하느라 휘청거렸다. 세찬 바람이 몰아칠 땐 어머니마저 아버지의 호된 꾸지람을 피해 갈 수 없었다. 어머니는 아버지 앞에서 점점 더 작아져만 갔다.

언젠가 오빠는 사소한 다툼으로 친구의 코뼈를 부러뜨린 적이 있었다. 오빠에게 어떤 불호령이 떨어질런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어머니는 뒤주에서 쌀을 퍼냈다. 아버지 몰래 물어줄 치료비를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뒤주에서 쌀을 퍼내는 일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자식 수만큼이나 잦았다.

자식들의 허물을 껴안은 채 숨죽여 사는 어머니의 고충을 아버지는 알았으리라. 자식들의 숨구멍이 바로 어머니였을 테니까. 그렇지만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단 한 번의 속내도 내보이지 않았다. 그것이 아버지의 자존심이었고 가장의 위엄이었는지도 모른다.

아버지는 바깥출입이 잦았다. 냉장고 밑바닥에서 숨죽이며 곰삭아 가는 묵은 김치 같은 어머니와는 달리 아버지는 넓은 바다를 유영하는 고등어처럼 자유로운 삶을 사셨다. 어머니는 모든 걸 삭인 채 전형적인 한국의 여인상을 자처하며 사셨는지도 모른다.

어머니는 종종 아버지의 험담을 풀어내곤 하셨다. 그것이 어머니의 꽉 막힌 가슴을 뚫는 유일한 돌파구였으리라. 그렇게 사시는 어머니가 무척 안쓰러울 때가 많았다. 우리는 어머니가 아버지에 대한 도타운 정도 없는 줄 알았다. 그냥 자식 때문에 살아가는 것으로 여겼다. 우리 형제들은 아버지의 죽음으로 숨죽여 사시던 어머니에게 자유가 도래했다고 믿었다.

49재를 끝낸 후, 어머니는 아버지의 영정을 만지며 말씀하셨다.
“영감이 나를 지독히도 숨 막히게 하더니…….” 어머니의 얼굴엔 후련함이 감도는 듯했다.

그날 저녁, 자식들은 어머니의 자유에 힘을 실어 드리고 싶었다. 그래서 아버지 생전에 어머니가 뱉어 내시던 아버지에 대한 험담을 입에 담기 시작했다. 나는 어머니를 위하는 양 입을 열었다. 아버지의 험담을 겨우 몇 마디 풀었을까. 방에 계시던 어머니가 바람을 일으키며 마루로 달려 나오는 찰나 내 등에는 번갯불과 천둥이 내리쳤다. 어머니가 내 등을 사정없이 후려친 것이었다. 팔순을 넘긴 노인의 손맛이 아니었다.

“못난 놈들. 자식들이 애비를 욕하다니. 그것도 죽고 없는 애비를…….”

어머니는 눈물을 훔치며 방으로 들어가신 후 문을 걸어 잠갔다. 아버지의 완고함에 안쓰럽기만 했던 어머니, 팔십 평생을 아버지의 그늘에서 소금에 절여진 배추마냥 풀 죽어 살아오셨던 어머니였다. 아버지의 부재(不在)가 어머니에게는 훨훨 날아갈 듯 자유롭고 후련할 것이라 여겼던 자식들의 좁은 소견이 아버지와 어머니의 묵은김치 같은 시큼한 정을 미처 깨닫지 못했던 것이었다.

요즘은 하나 아니면 둘, 그것도 모자라 아예 무자식으로 살아가는 부부들도 있다. 하나, 줄도 아닌 여덟 자식을 낳고 키우며 쌓인 미운 정, 고운 정의 두께가 자식들이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두터웠나 보다. 어머니가 인고의 시간을 견디며 곰삭은 묵은김치라면 아버지는 살아 펄펄 뛰는 고등어였다. 하지만 살아 펄떡거리는 고등어와 숨죽은 묵은김치와는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았다. 그래도 칠십여 년이란 세월이 냄비 속의 김치와 고등어가 서로를 품듯 어머니와 아버지의 궁합을 맞추었나 보다. 오랜 세월에 익은 어머니와 아버지의 곰삭은 정은 묵은김치와 고등어가 어우러진 맛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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