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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에는 경내 구석구석에 핀 꽃 무리뿐이다. 찬란하게 빛나는 청화쑥부쟁이에 매료되어 경배하듯 허리를 펼 줄을 몰랐다. 무엇보다 밀짚모자 아래 낯빛이 맑은 동그란 얼굴과 작은 체구에 스님의 모습이 잊히질 않는다. 정작 법당에 모신 주불이 어떤 분인지, 정사의 법력은 알지 못하고 온갖 식물과 풍경에 취한 모습이다. 4년 전 선배가 꽃을 좋아하는 나와 어울리는 절집이라고 데려간 곳이 바로, 보현정사이다.

전국의 산사를 행선(行禪)하듯 돌아다녔는데 인연은 따로 있다. 보현정사의 풍경이 좋아 철마다 지인을 데리고 오갔다. 봄에는 벚꽃과 수선화, 빨간 홍도화에 매혹되어 어지러울 정도이고, 여름이면 시원한 계곡물 소리를 따라 으아리와 인동초, 수국 등속이 향기롭다. 가을에는 앞 뒷산의 단풍이 붉고 곳곳에 가을꽃 무더기로 찬란한 곳이다. 여러 해 내가 본 보현정사는 꽃으로 장엄한 화엄(花嚴)의 세계이다. 그 곁에는 시도 때도 없이 꽃을 가꾸느라 애쓰시는 현공스님이 계신다.

사월 어느 봄날인가. 며칠 전부터 산사의 봄을 보고 싶어 한달음에 달려간다. 눈부처처럼 빼어난 절경이 들어앉은 산사. 적광전 댓돌에 앉아 느긋이 한 폭의 명작을 호젓이 누리고 싶어서다. 멀리 삼각산의 모습을 한 주흘산과 가까이에는 너와집이 옹기종기 앉은 선방과 스님의 거처가 그림 같이 펼쳐진다.

또한, 백 가지 꽃이 휘황한 백화산의 풍경이 그리워서다. 산사의 운치는 말로 형용할 수 없고, 다양한 품종의 꽃과 나무의 천국이 따로 없다. 그날도 스님은 대지와 한 몸인 양 잔뜩 구부려 풀을 뽑고 계신다. 풀을 뽑는 것조차 죄인 양 '천도재라도 지내야 할 것 같다' 라고 우스갯소리를 하시는데 그 말이 진심으로 들린다. 스님과 동안에 격조하였는데, 우리 부부를 알아보니 그저 반가울 뿐이다.

스님은 우주 만물을 화엄(華嚴)의 세계로 구축하는 분이다. 꽃구경만 하고 돌아가려는 미욱한 중생을 붙잡아 불교를 제대로 알게 한 분이다. 스님은 정녕 화엄(花嚴)이 아닌 화엄(華嚴)의 세계를 펼치시는 분이다. 다년간 전통 문화유산을 찾아 전국의 산사를 돌아다니며 글을 썼지만, 정작 불교에 관한 산 지식을 제대로 모른다. 한 시간여 밤길을 달려가 스님의 체험에서 우러난 강의를 듣고 자정이 넘어 귀가하길 삼 개월. 내 생애 참으로 생각지도 못한 진리를 탐구한 시간이다.

이제야 산사 곳곳에 놓인 물상들이 보인다. 큰 법당 적광전은 은행나무로 조각한 비로자나불을 주불로 모신 전각이다. 법당 내부 바닥은 한 장 한 장 구운 연화 문양의 기와로 보현정사의 상징무늬란다. 나무로 조각한 연창(蓮窓) 또한, 독특한 창문이다.

도량 곳곳에 놓인 외등과 솟대 하나에도 장인의 정신이 살아 숨 쉰다. 톺아보지 않으면 보지 못할 문화유산은 우리나라 최고의 장인이 빚은 작품들이다. 장인을 남다르게 여기고 그 쓰임을 아는 현공스님의 정신이 바로 살아있는 문화유산이다. 작은 토굴에서 현재의 보현정사까지는 스님의 열정이 빚은 노고의 산물이다.

지역마다 화엄(花嚴)의 세계를 원하는가. 꽃 축제가 벌어지고 있다. 현란한 꽃 무리로 사람들을 불러 모은다. 심지어 가파도에도 논과 밭을 갈아엎고 꽃을 심어 관광객을 부른다. 상점은 봄 한 철 장사에만 힘쓰고 나머지 계절은 더위로 문을 닫는단다. 비슷비슷한 꽃 축제가 과연 우리가 바라는 지역문화일까. 아마도 아닐 것이다. 신성한 노동의 업으로 우리의 몸을 살리는 일이 먼저이리라. 꽃도 나무도 있어야 할 자리가 있다. 절집의 사계절 꽃처럼 자연미가 있어야 바라보기에도 편안하다.

무지렁이 중생은 두 세계에 경계가 없다. 화엄(花嚴)의 세계는 꽃이 있어 좋고, 화엄(華嚴)의 진리의 세계는 심오하여 좋다. 상현달과 별이 총총히 뜬 보현에서 도반과 진리를 탐구하며 화엄(華嚴)의 세계에 닿는다. 별(순수 의식)에서 마음이 멀어지면 욕망을 따라가느라 고행할 수밖에 없다. '이른 새벽에 홀로 앉아 향을 사루고 산창에 스며드는 달빛을 볼 줄 아는 이라면 굳이 불경을 아니 배워도 좋다'는 적광전 옆에 적힌 글귀를 다시금 읊조리는 청아한 달밤이다.

◆이은희 주요 약력
△충북 청주 출생 △ '월간문학' 등단(2004) △동서커피문학상 대상, 구름카페문학상, 박종화문학상, 한국수필문학상 수상 외 다수 △수필집 '검댕이' '화화화' '불경스러운 언어' 외 8권 △계간 '에세이포레' 주간 △청주문화원 부원장 △충북문화재단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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