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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불빛 / 김광

부흐고비 2024. 7. 18. 06:01

발걸음을 뗄 수가 없다. 온몸의 신경이 죄 하늘을 향해 쭈뼛거린다. 불빛 하나 없는 산길, 인적도 없고 어둠과 적막뿐이다. '툴툴'거리는 도랑물 소리마저 없었다면 난 그 자리에 주저앉아 소리 내 울어버렸을지도 모른다.

당시 전라도 지방에 큰 홍수가 들어 잦은 비로 밤공기도 매우 습했던 걸로 기억한다. 길가의 바위는 어둠 속에서 희번덕거리고 시커먼 가로수도 팔을 벌린 채 큰 소리로 울어댔다. 날렵하게 꿈틀거리는 길 양쪽의 산 능선이 들짐승처럼 등허리를 웅크리고 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기세에 눌려 겨우 발을 떼고 있는데 그나마 다행은 비가 오지 않아 달이 발등을 희미하게 비춰 주는 정도였다.

그래도 무섬증은 가라앉지 않았다. "사각"거리며 따라오는 바짓가랑이 부딪히는 소리가 자꾸 뒤를 돌아보게 했다. 부모님 몰래 집을 나온 벌이라는 생각뿐이었다. 얼마를 더 걸었을까. 마을 입구는 당최 나타날 기미가 없이 또 높은 고개 하나가 눈앞을 가로막았다. 그곳을 바라보다가 깜짝 놀랐다. 눈을 의심했다. 움직이는 물체를 본 것이다.

'저게 뭐지?' 어둠 속에서 희끄무레한 두 개의 물체가 움직이고 있었다. 아니 서서히 걸어오고 있었다. 멀리서 봐도 긴 옷차림이 사람이 맞다. '쿵' 집채만 한 바위가 날 덮치는 소리가 들렸다. 밤길은 사람 만나는 게 제일 무서운 법이다. 그것도 아무도 없는 산길에선 더더욱 그렇다. 오금이 저리고 호흡이 빨라졌다. '어떻게 하지' 부모님과 형제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할머니께 들은 도깨비 이야기가 생각나 다리가 후들거렸다. 머릿속도 하얘지고 입술도 바짝바짝 탔다. 뒤로 주춤 물러서다 쭈그리고 앉아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제법 큰 짱돌을 양손에 쥐고는 걸음을 옮겼다. 놀라기는 저쪽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흠칫거리는가 싶더니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점점 거리가 좁혀지자 더 확실히 보였다. 여자 두 명이 손을 꼭 잡고 오는데 모녀간인 듯했다.

맞은편을 지나는 동안 지축(地軸)을 울리고 지나가는 기차 바퀴 소리... 그 소리를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휴' 그네들이 지나쳐가자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 모녀가 등 뒤로 멀어져 가고 산모퉁이를 돌아서 한참을 더 가자 길옆 다 쓰러져 가는 초가에서 불빛이 새 나오는 걸 발견했다. 얼마나 반가웠던지, 마치 어머니를 만난 것 같았다.

곧장 뛰어들었다. "계십니까?" "누구...?" 헐렁한 바지를 무릎까지 걷어 올린 노인이 손전등을 비추며 밖으로 나오다 어린 학생을 발견하고 의아한 낯빛으로 바라봤다. "M내리 삼촌 댁에 가는 길인디요, 홍수 땜에 면(面)으로 들어오는 다리가 끊겼어라. 거기서부터 버스에서 내려 걸어오는 중입니다. M내리(里)는 아직 멀었습니까?" "아이고 저런, 어린 게 고생했구나. M내리? 거의 다 왔니라. 두어 마장 남았응께 큰길로 곧장 쪼끔만 더 가거라" 노인은 신발을 질질 끌며 밖으로 나왔다.

그 말에 '할아버지 여기서 쉬다가 날이 밝은 뒤에 떠나면 안 될까요?' 하고 싶었지만 아무 말도 못 한 채 인사만 꾸벅하고 돌아섰다. 하긴 어린 학생이 무슨 언변이나 숫기라는 게 있었겠는가. 두어 마장이 어느 정도인지도 모르겠고, 솔직히 그 수의 개념을 이해하기엔 내 나이가 너무 어렸다. 그저 발길을 재촉하는 것밖에 다른 수가 없었다.

노인은 큰길까지 나와서 내 등을 향해 손전등 불빛을 보내주었다. 행여 궂은 데라도 디딜까 봐 등 뒤로 보내준 불빛, 그게 시골 인심이라고는 하지만 난 그 이상으로 고마웠다. 잦은 비에도 살아남은 작물이 있었던 모양이다. 숲이 우거져 바람막이가 되어준 탓인지 비죽비죽 올라온 게 실은 마늘밭이었다. 안 그래도 간이 콩알만 해져 있던 나로선 그게 뭔지를 몰라 모두가 괴물의 돗바늘처럼 무섭게만 보였는데 손전등의 불빛이 그 정체를 밝혀 준데다 앞길까지 환하게 비춰줬으니 얼마나 고맙고 위로가 됐겠는가.

그 불빛이 조금이라도 오래 비춰 주기를 바라며 계속 뒤를 힐금거렸다. 아마도 내 눈은 그때 간절한 희원(希願)을 담고 있었을 것이다. 조금씩이긴 해도 행보에 진전은 있었던 모양이다. 멀리 마을 입구에 서 있는 커다란 당산나무가 보이고 그 뒤론 여기저기 온기(溫氣) 실은 불빛들이 보였다. 드디어 목적지가 모습을 드러냈다. '만세' 난 뛰어가며 기어이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지인들이 간혹 처음 여행은 어느 것이었냐고 묻는다. 난 당연히 중학교 1학년 때의 이 터벅거림을 내세운다. 집 떠나 산중에서 겪은 첫 경험이고 동시에 하룻밤의 짧은 시간이었지만, 감동은 작지 않았던 기억이니까. 그때의 여행은 오랫동안 나의 사고(思考)를 지배하는 바탕색이 되었다. 뿐만이 아니다. 잠방이 차림의 할아버지도 마음 깊숙이 각인되어 있다. 그때 장마로 그 지방엔 많은 이재민이 발생했다. 모두가 강퍅해지기 쉬울 때였다. 태생이 순박한 사람들이긴 해도 남을 위해 배려하는 마음을 잃지 않는다는 게 쉽지 않은 법이다.

작은 것이지만, 사람의 마음을 따뜻하게 해주는 건 무엇일까. 두고두고 잊지 못하는 건 얼마나 될까. 먹빛 배경의 시골 산길에 달빛처럼 스며들던 작은 광선 하나. 막막함과 무서움에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길을 묻던 파리한 입술의 소년, 그의 등을 쓸어주고 환하게 비춰 주던 빛이야말로 그런 구원의 신호가 아니었을까. 따뜻한 온기와 의지가 되어주고 희망으로 이끌어주던 한 줄의 빛.

지금 내 가슴에 그런 불빛 아직 번득이고 있을까.


◆김 광 주요 약력
△전남 목포 출생 △'계간수필' 등단(2004) △갯벌문학 전, 편집주간 △제3회 농촌문학상 △계간수필 수필문우회 부회장 △수필집 '숨비소리' '내게서 온 편지(여행에세이)' 외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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