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1년 제12회 경북문화체험 전국수필대전 장려상 이른 새벽, 홀로 주산(主山)을 오른다. 주산은 고령 대가야읍에 있는, 대가야 왕국의 흥망성쇠를 온몸으로 보듬어 안고 온 어머니와 같은 산이다. 왕릉전시관 뒤편의 남쪽으로 난 고분들 사이를 걸으며 대가야 역사의 숨결 속으로 빠져든다. 1천500여 년 동안이나 꼼짝없이 한자리를 지키고 서 있는 수많은 고분의 우뚝우뚝한 봉분 위로 새벽 별빛이 총총하다. 철의 왕국으로 불리며 520년 동안 대가야를 지배했던 왕과 왕족들의 700기가 넘는 무덤이 주산의 능선과 비탈에 따개비처럼 붙어있다. 그 무덤 속에는 순장(殉葬)이라는 비정한 이름으로 생목숨을 빼앗겨야 했던 이름 없는 백성들의 영혼도 숨 쉬고 있다. 당시의 사람들은 사람이 죽어서 저세상에 가더라도 이승에서와..
옛 담은 풍경을 안고 풍경은 옛 담을 안는다. 운곡서원 담장 위에 팔랑팔랑 내려앉는 은행잎은 노랑나비 군무 같다. 저렇게 많은 나비들의 춤사위라니. 기왓장 위의 이끼는 세월을 덧입었다. 은행나무가 담장을 넘보듯 나도 안쪽을 바라본다. 넓은 마당에 연이은 강당에선 앳된 도령들의 글 읽는 소리가 들려오는 듯하다. 가을은 운곡서원에서 더 깊어진다. 담장이라면 대릉원 담장을 빼놓을 수 없다. 봉긋이 솟은 여인의 가슴을 닮은 곡선의 우아함은 보면 볼수록 푸근하다. 덕수궁 돌담이 살아있는 궁궐을 안고 있다면 대릉원 돌담은 사후 세계를 껴안고 있어 서로 대비된다. 대릉원 돌담길은 벚꽃 흐드러지게 핀 봄에 가장 아름답고 덕수궁 돌담길은 은행나무 단풍이 고운 가을을 최고로 친다. 이렇듯 담은 주변풍경과 어울려 계절에 따..

나의 고래를 위하여 / 정일근 불쑥, 바다가 그리워질 때 있다면/ 당신의 前生은 분명 고래다// 나에게 고래는 사랑의 이음동의어/ 고래와 사랑은 바다에 살아 떠도는 같은 포유류여서/ 젖이 퉁퉁 붓는 그리움으로 막막해질 때마다/ 불쑥불쑥, 수평선 위로 제 머리 내미는 것이다// 그렇다고 당신이 고래를 보았다고 말하는 것은 실례다// 당신이 본 것은 언제나 빙산의 일각/ 누구도 사랑의 모두를 꺼내 보여주지 않듯/ 고래도 결코 전부를 다 보여주지 않는다// 한순간 환호처럼 고래는 바다 위로 솟구치고/ 시속 35노트의 쾌속선으로 고래를 따라 달려가지만/ 이내 바다 깊숙이 숨어버린 거대한 사랑을/ 바다에서 살다 육지로 진화해온/ 시인의 푸른 휘파람으로는 다시 불러낼 수 없어// 저기, 고래!라고 외치는 그 순간부..
옛날 중국의 곽휘원(廓暉遠)이란 사람이 떨어져 살고 있는 아내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그 편지를 받은 아내의 답시는 이러했다. 벽사창에 기대어 당신의 글월을 받으니 처음부터 끝까지 흰 종이뿐이옵니다. 아마도 당신께서 이 몸을 그리워하심이 차라리 말 아니하려는 뜻임을 전하고자 하신 듯 하여이다. 그 답시를 받고 어리둥절해진 곽휘원이 그제야 주위를 둘러보니, 아내에게 쓴 의례적인 문안 편지는 책상 위에 그대로 있는 게 아닌가. 아마도 그 옆에 있던 흰 종이를 편지인 줄 알고 잘못 넣어 보낸 것인 듯했다. 백지로 된 편지를 전해 받은 아내는 처음엔 무슨 영문인가 싶었지만, 꿈보다 해몽이 좋다고 자신에 대한 그리움이 말로 다할 수 없음에 대한 고백으로 그 여백을 읽어내었다. 남편의 실수가 오히려 아내에게 깊고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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