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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느낌

정일근 시인

부흐고비 2021. 11. 1. 09:13

나의 고래를 위하여 / 정일근

불쑥, 바다가 그리워질 때 있다면/ 당신의 前生은 분명 고래다// 나에게 고래는 사랑의 이음동의어/ 고래와 사랑은 바다에 살아 떠도는 같은 포유류여서/ 젖이 퉁퉁 붓는 그리움으로 막막해질 때마다/ 불쑥불쑥, 수평선 위로 제 머리 내미는 것이다// 그렇다고 당신이 고래를 보았다고 말하는 것은 실례다// 당신이 본 것은 언제나 빙산의 일각/ 누구도 사랑의 모두를 꺼내 보여주지 않듯/ 고래도 결코 전부를 다 보여주지 않는다// 한순간 환호처럼 고래는 바다 위로 솟구치고/ 시속 35노트의 쾌속선으로 고래를 따라 달려가지만/ 이내 바다 깊숙이 숨어버린 거대한 사랑을/ 바다에서 살다 육지로 진화해온/ 시인의 푸른 휘파람으로는 다시 불러낼 수 없어// 저기, 고래!라고 외치는 그 순간부터/ 우리는 사랑에 빠졌다// 고독한 사람은 육지에 살다 바다로 다시 퇴화해가고/ 그 이유를 사랑한 것이 내게 슬픔이란 말 되었다// 바다 아래서 고래가 몸으로 쓴 편지가/ 가끔 투명한 블루로 찾아오지만/ 빙하기 부근 우리는 전생의 기억을 함께 잃어버려/ 불쑥, 근원을 알 수 없는 바다 아득한 밑바닥 같은 곳에서/ 소금 눈물 펑펑 솟구친다면/ 이제 당신이 고래다// 보고 싶다,는 그 말이 고래다/ 그립다,는 그 말이 고래다//

가덕 대구 / 정일근
입이 큰 그 생선을 슬픔처럼 널던 날이 있었다/ 어머니는 가덕 어느 깊은 바다에서 잡은 것이라 했다// 그런 날은 어머니는 밤새 아버지를 생각하시고// 조선무 풍덩풍덩 빚어 넣어 끓인 생선국물로 속을 푸시던/ 술 좋아하시던 아버지를 생각하시고// 새벽 일찍부터 연탄아궁이 위에는 물이 끓어/ 어린 내 잠속까지 바다 깊은 곳과/ 어머니 눈물의 밑바닥이 끓는 냄새가 났다// 나도 언제 한 번 술이나 마셔볼까/ 그런 못된 다짐을 하는 사이/ 한 번씩 폭설이 내려 생선들의 아픈 옆구리가 젖었고/ 다시 마르는 사이 봄이 오고 있었다// 달력에는 아버지의 기일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홍어 / 정일근
먹고 사는 일에 힘들어질 때/ 푹 삭힌 홍어를 먹고 싶다/ 값비싼 흑산 홍어가 아니면 어떠리/ 그냥 잘 삭힌 홍어를 먹고 싶다// 신김치에 홍어 한 점 싸서 먹으면/ 지린 내음에 입안이 얼얼해지고/ 콧구멍 뻥뻥 뚫리는 즐거움을/ 나 혼자서라도 즐기고 싶다// 그렇지, 막걸리도 한 잔 마셔야지/ 입안의 즐거움이 온몸으로 퍼지도록/ 한 사발 벌컥벌컥 마셔야지// 썩어서야 제 맛내는 홍어처럼/ 사람 사는 일도 마찬가지지/ 한 세월 썩어가다 보면/ 맛을 내는 시간이 찾아올 거야// 내가 나를 위로하며 술잔을 권하면/ 다시 내가 나에게 답잔을 권하며/ 사이좋게 홍어 안주를 나눠먹고 싶다/ 그러다 취하면 또 어떠리// 만만한 게 홍어좆이라고/ 내가 무슨 홍어좆인 줄 아느냐/ 내가 나를 향해 고함을 치면서/ 세상을 향해 삿대질하면서/ 크게 한 번 취하고 싶다//

가을 전어 / 정일근
시인이여,/ 저무는 가을 바다로 가서 전어나 듬뿍 썰어달라 하자// 잔뼈를 넣어 듬성듬성한 크기로 썰어달라 하자/ 바다는 떼지어 헤엄치는 전어들로 하여 푸른 은빛으로 빛나고/ 그 바다를 그냥 떠와서 풀어놓으면 푸드득거리는 은빛 전어들// 뼛속까지 스며드는 가을을 어찌하지 못해 속살 불그스레 익어/ 제 몸속 가득 서 말의 깨를 담고 찾아올 것이니/ 조선 콩 된장에 푹 찍어 가을 바다를 즐기자// 제철을 아는 것들만이 아름다운 맛이 되고 약이 되느니/ 가을 햇살에 뭍에서는 대추가 달게 익어 약이 되고/ 바다에서는 전어가 고소하게 익어 맛이 된다// 사람의 몸속에서도 가을은 슬그머니 빠져나가는 법이니/ 그 빈자리에 가을 전어의 탄력 있는 속살을 채우자/ 맑은 소주 몇 잔으로 우리의 저녁은 도도해질 수 있으니/ 밤이 깊어지면 연탄 피워 석쇠 발갛게 달구어 전어를 굽자// 생소금 뿌리며 구수한 가을 바다를 통째로 굽자/ 한반도 남쪽 바다에 앉아 우리나라 가을 전어 굽는 내음을/ 아시아로 유라시아 대륙으로 즐겁게 피워 올리자//

마당으로 출근하는 시인 / 정일근
솥발산 산자락에 살면서부터/ 마당에 놓아둔 나무 책상에 앉아/ 시를 쓴다, 공책 펼쳐 놓고/ 몽당연필로 시를 쓴다/ 옛 동료들이 직장에서 일할 시간/ 나는 산골마당이 새 직장이고/ 시가 유일한 직업이다/ 월급도 나오지 않고/ 의료보험 혜택도 없지만/ 나는 이 직장이 천직인 양 즐겁다/ 나의 새 직장 동료들은 풀꽃과 구름과/ 바람, 내가 중얼거리는 시를/ 풀꽃이 키를 세우고 엿듣고 있다/ 점심시간, 내가 잠시 자리를 비우면/ 바람이 공책을 몰래 넘기고/ 구름이 내 시를 훔쳐 읽고 달아난다/ 내일이면 그들은 더 멋진 시를 보여주며/ 나에게 약을 올릴 것이다/ 이 직장에서 꼴지가 되지 않기 위해/ 나는 열심히 마당으로 출근한다//

쌀 / 정일근
서울은 나에게 쌀을 발음해 보세요, 하고 까르르 웃는다/ 또 살을 발음해 보세요, 하고 까르르 까르르 웃는다/ 나에게 쌀이 살이고 살이 쌀인데 서울은 웃는다/ 쌀이 열리는 쌀나무가 있는 줄만 알고 자란 그 서울이/ 농사짓는 일을 하늘의 일로 알고 살아온 우리의 농사가/ 쌀 한 톨 제 살점같이 귀중히 여겨 온 줄 알지 못하고/ 제 몸의 살이 그 쌀로 만들어지는 줄도 모르고/ 그래서 쌀과 살이 동음이의어라는 비밀 까마득히 모르고/ 서울은 웃는다//

그 후 / 정일근
사람 떠나고 침대 방향 바꾸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것뿐/ 이불과 베개 새것으로 바꾸고/ 벽으로 놓던 흰머리 창가로 두고 잔다/ 밤새 은현리 바람에 유리창 덜컹거리지만/ 나는 그 소리가 있어 잠들고/ 그 소리에 잠깬다, 빈방에서/ 적막 깊어 아무 소리 들을 수 없다면/ 나는 무덤에 갇힌 미라였을 것이다, 내가/ 내 손목을 긋는 악몽에 몸서리쳤을 것이다/ 먹은 것 없어도 저녁마다 체하고/ 밤에 혼자 일어나, 열 손가락/ 열 발가락 바늘로 따며/ 내 검은 피 다시 붉어지길 기다린다/ 이별은 언제나 예고 없이 온다는 것을/ 어리석은 사람은 어리석어 잊고 산다/ 어리석어 내 생을 담은 한 잔 물이/ 잠시 심하게 흔들렸을 뿐이다/ 단지 그것뿐이다//

그 후, 오동꽃 피다 / 정일근
불현듯 너 떠났다 슬픔에 내 살 녹아/ 내 살 속의 뼈가 뼛속의 피가 녹아/ 나는 붉은 피로 남았다/ 내 슬픔 그 피에 녹고 또 녹아/ 눈물도 붉디붉은 피눈물만 남았다/ 지난여름부터 붉은 슬픔/ 붉은 피눈물 받아준 오동나무/ 그 독까지 다 받아준 오동나무/ 오늘 보랏빛 꽃 피웠다/ 더러는 누런 추억이 등 뒤로 찾아와서/ 귓불 간질이는 낡은 휘파람 불었다/ 운명이 내 등짝 짝 소리 나게 치고 갈 때/ 돌아보지 않으려고 이 악물고 울었다/ 시를 쓰지 못하고 버려진 백지 위에/ 뚝, 뚝 떨어진 피눈물 스스로 길을 내고/ 그 길 따라 강물처럼 흘러갔다, 끝내/ 바다에 닿지 못하고 지쳐서 돌아온 새벽/ 돌아보니 오동꽃 피었다/ 사람의 슬픔은 풍화하는 것이다/ 더 아픈 주검도 풍화하는 것이다/ 바람이 나를 깨끗이 씻어/ 보랏빛 오동꽃으로 활짝/ 활짝 피었다//

녹비 / 정일근
자운영은 꽃이 만발했을 때 갈아 엎는다/ 붉은 꽃이며 푸른 잎 싹쓸이하여 땅에 묻는다/ 저절 어쩌나 저절 어쩌나, 당신은 탄식하여도/ 그건 농부의 야만이 아니라 꽃의 자비다/ 꽃 피워 꿀벌에게 모두 봉양하고/ 가장 아름다운 시간에 자운영은 땅에 묻혀/ 땅의 향기롭고 부드러운 연인이 된다/ 자운영을 녹비라고 부른다는 것/ 나는 은현리 농부에게서 배웠다, 녹비/ 나는 아름다운 말 하나를 꽃에게 배웠다/ 꽃을 묻은 그 땅 위에 지금 푸른 벼가 자라고 있다//

수세미꽃이 있는 풍경 / 정일근
쇠숟가락으로 온기 먼저 담겨 오는 민물새우뭇국 받아 들고/ 남루한 가족 모여 따뜻하게 먹는 저녁이 있었다​// 여흘여흘 흘러가던 저녁 강 깊어지며 비로소 잠드는데​// 기다릴 사람 돌아올 사람 없지만/ 바람길 따라 에두른 돌담 위로 노란 등불 맑게 켜지는 밤이 있었다.//

詩人 / 정일근
한 줄 잘 빚어 놓고/ 마침표를 찍을 것인지/ 마침표를 지워 버릴 것인지/ 오래 고민하는 시간이 있다/ 시가 문장부호 하나에/ 무거워할 때가 있다/ 시가 문장부호 하나에/ 가벼워질 때가 있다/ 그걸 아는 이가 시인이다//

조사와 싸우다 / 정일근
내 시작의 버릇 하나를 말하자면/ 시를 퇴고할 때 조사는 추려내는 것/ 예를 들자면 이렇다, 이 시의 첫 문장/ <내 시작의 버릇 하나를 말하자면>를 두고도/ 나는 오랫동안 고민할 것이다/ <의>라는 조사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내 시작 버릇 하나를 말하자면>로 고치거나/ <를>이란 조사가 불편하면/ <내 시작의 버릇 하나 말하자면>으로/ 고칠 것이다, 그 두 문장을 두고/ 밀고 당기고 여러 날을 끙끙거릴 것이다/ 이 버릇은 사실 조사와 싸우는 일/ 지난 여름에는 시집 한 권을 묶으며/ 시 속에 별처럼 뿌려진 조사와 싸웠다/ <은> <는> <이> <가> <을> <를>을/ 죽였다 살렸다, 살렸다 죽였다/ 만나는 조사마다 시비를 걸며 싸웠다/ 시를 노래하는 것은 하늘의 일이고/ 시를 다듬는 것은 사람의 일인지라/ 반복되는 노역에 몸져눕기도 했는데/ 가까이 지켜보던 아내가 웃는다/ 당신이 무슨 부처 공부하는 사람이라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냐, 며 웃는다/ 어이쿠! 답은 그 속에 있었구나/ 나는 전생에 부처 공부하다 만 땡초였는지/ 그놈 조사와 이렇게 싸우는구나/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베고/ 부모를 만나면 부모도 베라고 했으니/ 나를 죽이는 일은 나를 살리는 일이다/ 조사를 죽여 시를 살리지도 못하면서/ 나는 죄 없는 조사와 싸우고만 있다/ 어디 보자, 이 시 속에도/ 시비 거는 조사 몇 놈 있을 것이니/ 나는 또 죽였다 살렸다 할 것이다//

착한 시 / 정일근
우리나라 어린 물고기들의 이름 배우다 무릎을 치고 만다.// 가오리 새끼는 간자미, 고등어 새끼는 고도리,/ 청어 새끼는 굴뚝청어, 농어 새끼는 껄떼기,/ 조기 새끼는 꽝다리, 명태 새끼는 노가리,/ 숭어 새끼는 동어, 방어 새끼는 마래미/ 누치 새끼는 모롱이, 숭어 새끼는 모쟁이,/ 잉어 새끼는 발강이, 괴도라치 새끼는 설치/ 작은 붕어 새끼는 쌀붕어, 전어 새끼는 전어사리,/ 열목어 새끼는 팽팽이, 갈치 새끼는 풀치// 그 작고 어린 새끼들이 시인의 이름 보다 더 빛나는 시인의 이름을 달고 있다./ 그 어린 시인들이 시냇물이면 시냇물을 바다면 바다를 원고지 삼아 태어나면서부터/ 꼼지락 꼼지락 시를 쓰고 있을 것을 생각하면 그 생명들이 다 시다. 참 착한 시다.//

시詩 벌레 / 정일근
가시 속살 먹고사는 애벌레의 똥은 자주색/ 노란 배추 속살 먹고사는 애벌레의 똥은 노란배추색/ 잘 익은 벼 먹고사는 메뚜기의 똥은 황금색인데/ 시 먹고사는 시벌레는 시와 다른 색 똥을 눈다/ 향기로운 것 먹고 사는 것들의 똥은 향기로운 법인데/ 향기로운 시를 갉아먹고 사는 시벌레들은/ 된똥 줄똥 설사똥 때로는 변비에 끙끙거리며/ 피똥을 누며 사는 모양이다, 글쎄/ 신간 문예지 우편으로 받아 읽다가/ 시벌레가 시 갉아먹고 퍼질러놓은 똥이 만져질 때마다/ 지독하다 그 냄새 참 구리다/ 그런 날은 시를 쓰기도 읽기도 싫어진다//

똥과 시 / 정일근
진해 어머니 찾아가면 가장 신나는 근황은 푸짐하게 똥 싼 일, 아들이야 그렇지만 며느리가 있는데/ 한 변기 그득 똥 눈 일이 자랑이다. 속이 시원하다고, 세상 즐거움이 건강도, 푸짐한 음식도 아니고,/ 막힌 속을 다 비우는 일이라고. 자주 막히는 내 시여, 너도 이제 다 풀고 즐겁게 通하자. 푸짐하게.//

목욕을 하며 / 정일근
마흔해 손 한 번 씻겨 드리지 못했는데/ 아들의 등을 미시는 어머니 우리 어머니/ 병에서 삶으로 돌아온 내 등 밀며 우신다// 벌거벗고 제 어미를 울리는 불혹의 불효,/ 뼈까지 드러난 몸에 살과 피가 다시 살아/ 어머니 목욕 손길에 웃는 아이가 되고 싶다// 까르르 까르르 웃는 아이가 되고 싶다/ 어머니의 욕조에 담긴 어머니의 사랑이 되어/ 회귀의 강으로 돌아가는 살찐 새끼가 되고 싶다//

바다가 보이는 교실 -우리반 내 아이들에게 / 정일근
너희들 속으로 내가 걸어가야 할 길이 있구나/ 저 산에 들에 저절로 돋아나 한 세상을 이룬/ 유월 푸른 새 잎들처럼, 싱싱한/ 한 잎 한 잎의 무게로 햇살을 퉁기며/ 건강한 잎맥으로 돋아나는 길이 여기 있구나/ 때로는 명분뿐인 이 땅의 민주주의가,/ 때로는 내 혁명의 빛바랜 꿈이,/ 칠판에 이마를 기대고 흐느끼는/ 무명 교사의 삶과 사랑과 노래가/ 긴 회한의 그림자로 누우며 흔들릴 때마다/ 너희들은 나를 환히 비추는 거울,/ 나는 바다가 보이는 교실 창가에 서서/ 너희들 착한 눈망울 속을 조용히 들여다보노라면/ 점마다 고운 빛깔과 향기의 이름으로/ 거듭나는 별, 별들/ 저 신생의 별들이 살아 비출 우리나라가 보인다/ 내 아이들아, 너희들 모두의 이름을 불러 손잡으며/ 걷고 싶어라 첫새벽 맨발로 걷고 싶어라/ 너희들 속으로 내가 걸어가야 할 길이 있고/ 내가 걷고 걸어 가 닿아야 할 그 나라가 있구나//

바다가 보이는 교실10 / 정일근
참 맑아라/ 겨우 제 이름밖에 쓸 줄 모르는/ 열이, 열이가 착하게 닦아놓은/ 유리창 한 장/ 먼 해안선과 다정한 형제섬/ 그냥 그대로 눈이 시린/ 가을 바다 한 장/ 열이의 착한 마음으로 그려놓은/ 아아, 참으로 맑은 세상 저기 있으니//
* 2001년부터 7차 교육과정 중학교 1학년 2학기 국어 교과서에 수록

주머니 속의 바다 / 정일근
그 마을사람들은 바다를 주머니에 넣고 다닌다/ 설마? 하고 물어보면 불쑥 주머니 속의 바다를 꺼내 보여준다/ 놀라지 마라, 그것은 마을의 아주 어린 꼬마녀석도 할 수 있는 일이다/ 제법 사랑을 아는 나이가 된 친구들은/ 사랑으로 외롭거나 쓸쓸할 때에는/ 손바닥 위에 바다를 올려놓고 휘파람을 분다/ 아무래도 마을 어른들은 한 수 위다/ 흰 손수건인가 싶어 보면 어느새 하얀 갈치 떼로 변하고/ 손금 위로 바다를 흐르게 하고 흐르는 바다 위에 섬을 띄운다/ 아주 오래 전 그 섬을 찾아가 돌아오지 않는 사람들의 안부까지 전해준다/ 떠나오던 날 마을사람들이 주섬주섬 챙겨 선물로 건네주던 바다/ 읽다만 시집 속에 곱게 접어온 바다/ 삶에 지칠 때, 누군가가 아득히 그리울 때/ 나는 손바닥에 그 바다를 올려놓고 엽서를 쓴다/ 아침이면 사람과 함께 눈뜨는 바다/ 저녁이면 사람과 함께 잠드는 바다/ 사람과 한 몸이 되어 살아가는 바다를 나는 알고 있으니//

자연의 손 / 정일근
달개비 꽃물이 좋아 씨를 받았다/ 들길 여기저기 수북히 피어있는/ 달개비 꽃씨 받아 묵정밭에 뿌렸다/ 흔하디 흔한 것이라 편안히 싹틔우고/ 一家 이뤄 무성할 줄 알았는데/ 꽃은커녕 싹도 돋지 않는다/ 그렇게 서너 해 달개비 農事 망치고/ 사람의 손이 받는 달개비 꽃씨와/ 自然의 손이 거두는 달개비 꽃씨가/ 전혀 다른 꽃씨라는 것을 배웠다/ 나의 손은 익지도 않은 씨를 털거나/ 땅에 떨어져 늙어버린 씨를 주웠고/ 자연의 손은 손 내밀지 않고도, 꽃/ 피울 씨만 받아 꽃밭 수북수북 이뤘다/ 세상 모든 들꽃 씨앗 소중히 받아주는/ 따뜻하고 거룩한 그 분의 손 있는데/ 생명이 발아하는 때도 알지 못하고/ 나는 욕심 많은 손을 내밀었구나/ 그 손으로 꽃물 들이려 했구나/ 또 그 손으로 시를 썼구나//

어머니의 그륵 / 정일근
어머니는 그륵이라 쓰고 읽으신다/ 그륵이 아니라 그릇이 바른 말이지만/ 어머니에게 그릇은 그륵이다/ 물을 담아 오신 어머니의 그륵을 앞에 두고/ 그륵, 그륵 중얼거려보면/ 그륵에 담긴 물이 편안한 수평을 찾고/ 어머니의 그륵에 담겨졌던 모든 것들이/ 사람의 체온처럼 따뜻했다는 것을 깨닫는다/ 나는 학교에서 그릇이라 배웠지만/ 어머니는 인생을 통해 그륵이라 배웠다/ 그래서 내가 담는 한 그릇의 물과/ 어머니가 담는 한 그륵의 물은 다르다/ 말 하나가 살아남아 빛나기 위해서는/ 말과 하나가 되는 사랑이 있어야 하는데/ 어머니는 어머니의 삶을 통해 말을 만드셨고/ 나는 사전을 통해 쉽게 말을 찾았다/ 무릇 시인이라면 하찮은 것들의 이름이라도/ 뜨겁게 살아있도록 불러 주어야 하는데/ 두툼한 개정판 국어사전을 자랑처럼 옆에 두고/ 서정시를 쓰는 내가 부끄러워진다//

신문지 밥상 / 정일근
더러 신문지 깔고 밥 먹을 때가 있는데요/ 어머니, 우리 어머니 꼭 밥상 펴라 말씀하시는데요/ 저는 신문지가 무슨 밥상이냐며 궁시렁궁시렁하는데요/ 신문질 신문지로 깔면 신문지 깔고 밥 먹고요/ 신문질 밥상으로 펴면 밥상 차려 밥 먹는다고요/ 따뜻한 말은 사람을 따뜻하게 하고요/ 따뜻한 마음은 세상까지 따뜻하게 한다고요/ 어머니 또 한 말씀 가르쳐 주시는데요// 해방 후 소학교 2학년이 최종 학력이신/ 어머니, 우리 어머니 말씀 철학//

둥근, 어머니의 두레밥상 / 정일근
모난 밥상을 볼때마다 어머니의 두레밥상이 그립다/ 고향 하늘에 떠오르는 한가위/ 보름달처럼/ 달이 뜨면 피어나는 달맞이 꽃처럼/ 어머니의 두레밥상은 어머니가/ 피우시는 사랑의 꽃밭/ 내 꽃밭에 앉은 사람 누군들 귀하지 않겠느냐// 식구들 모이는 날이면 언제나/ 펼치시는 두레밥상// 둥글게 둥글게 제비새끼처럼 앉아/ 어린 시절로 돌아간 듯 숟가락 높이들고/ 골고루 나누시는 고기반찬 착하게 받아먹고 싶다// 세상의 밥상은 이전투구의 아수라장/ 한 끼 밥을 먹기 위해, 우리는/ 이미 날카로운 발톱을 가진 짐승으로/ 변해 버렸다// 밥상에서 밀리면 벼랑으로 밀리는/ 정글의 법칙 속에서/ 나는 오랫동안 하이에나처럼 떠 돌았다/ 짐승처럼 썩은 고기를 먹기도 하고/ 내가 살기 위해/ 남의 밥상을 엎어버렸을 때도 있었다// 이제는 돌아가 어머니의 두레밥상에 앉고 싶다/ 어머니에게 두레는 모두를 귀히 여기는 사랑/ 귀히 여기는 것이 진정한 나눔이라 가르치는/ 어머니의 두레밥상에 지지베베/ 즐거운 재비새끼로 앉아/ 어머니의 사랑 두레 먹고싶다//

어머니의 감성돔 / 정일근
진해 어머니 감성돔 두 마리 보내셨다/ 아마 중앙시장 어물전에서 물 좋은 그 놈들 보시고/ 산골에 엎드려 시 쓰는 내 생각났을 것이다// 크고 튼실한 놈들이라 값도 만만찮을 것인데/ 어머니 망설이지 않으시고/ 용돈 주머니 다 털었을 것이다// 마흔 중반을 살면서도/ 나는 여전히 어머니의 어린 새끼다/ 집 떠난 지 스무 해가 지났어도/ 물가에 내어놓은 어린 새끼다// 그 스무 해 혼자 헤엄을 치며/ 어머니의 바다를 멀리 떠나왔다 생각했는데/ 돌아보면 언제나 어머니의 손바닥 안이다// 어머니 무엇 좋아하시는 아직도 알지도 못하고/ 어머니의 밥상에는 무엇이 오르는지도 모르는/ 불효한 내 식탁으로 내일 아침/ 감성돔 구이가 오를 것이다// 늘 혼자 드시는 어머니의 밥상으로/ 살찐 감성돔 되어 회향하고 싶은 밤// ...어머니//

어머니의 못 / 정일근
교회에 다니는 작은 이모는/ 예수가 사람의 죄를 대신해/ 못 박혀 죽었다는 그 대목에서/ 참을 수 없다는 듯이 흐느낀다/ 어머니에게 전도하러 왔다가/ 언니는 사람들을 위해/ 못 박혀 죽을 수 있나, 며/ 함께 교회에 나가 회개하자, 며/ 어머니의 못 박힌 손을 잡는다/ 어머니가 못 박혀 살고 있는지/ 작은 이모는 아직 모른다/ 시를 쓴다며 벌써 여러 해/ 직장도 없이 놀고 있는 나는/ 어머니의 가슴에 박힌 작은 못이며/ 툭하면 머리가 아파 자리에 눕는 나는/ 어머니의 가슴에 박힌 큰 못이다/ 그렇다, 어머니의 마음속에/ 나는 삐뚤어진 마루판 한 짝이어서/ 그 마루판 반듯하게 만들려고/ 삐걱 소리나지 않게 하려고/ 어머니는 스스로 못을 치셨다/ 그 못들 어머니에게 박혀 있으니/ 칠순 가까운 나이에도 식당일 하시는/ 어머니의 손에도 그 못 박혀 있고/ 시장 바닥으로 하루 종일 종종걸음치는/ 어머니의 발바닥에도 그 못 박혀 있다/ 못 박혀 골고다 언덕 오르는 예수처럼/ 어머니 못 박혀 살고 있다/ 평생을 자식이라는 못에 박혀/ 우리 어머니 피 흘리며 살고 있다//

저 모성(母性)! / 정일근
눈 내리는 성탄(聖誕) 아침/ 우리 집 개가 혼자서 제 새끼들을 낳고 있다/ 어미가 있어 가르친 것도 아니고/ 사람의 손이 돕지도 않는데/ 새끼를 낳고 태를 끊고 젖을 물린다/ 찬 바람 드는 곳을 제 몸으로 막고/ 오직 몸의 온기로 만드는 따뜻한 요람에서/ 제 피를 녹여 새끼를 만들고/ 제 살을 녹여 젖을 물리는 모성(母性) 앞에/ 나는 한참이나 눈물겨워진다/ 모성은 신성(神性) 이전에 만들어졌을 것이니/ 하찮은 것들이라 할지라도, 저 모성 앞에/ 오늘은 성탄절, 동방박사가 찾아와 축복해 주실 것이다/ 몸 구석구석 핥아주고/ 배내똥도 핥아주고/ 핥고 핥아서 제 생명의 등불 밝히는/ 저 모성 앞에서//

아름다움에 대하여 / 정일근
영원한 것은 아름답다고 믿은 적이 있었다/ 영원히 살기를 바랐던 날도 있었다/ 그러나 삶이 나에게 가르쳤다/ 아름다운 것은 영원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내게 아름다운 것은 순간이었다/ 언제나 지나가면 사라지는 헛것이었다/ 하늘 깊이 반짝이는 새벽별이나/ 붉게 타오르는 저녁놀/ 풀잎 끝에 매달린 맑은 이슬 같은/ 내가 진정 아름다워하는 것들은/ 영원한 것은 아니었다/ 오래 기다렸던 첫눈도/ 눈이 피우는 나무의 눈꽃들도/ 결국 녹아버리고 마는 흔적이었다/ 사람의 사랑도 마찬가지였다/ 첫사랑 첫키스 같은 가슴 떨림도/ 흑백사진으로 남는 추억이었다/ 그때 사랑하는 사람에게 내가 한 약속도/ 헛것이 되고 말았다/ 내가 영원히 사랑한다고 약속했기 때문이다/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 영원한 것은 헛것이다/ 백 년 동안 색깔이 변하지 않는다는/ 백 년 사진 속에 남은 젊은 내 모습도 헛것이다/ 영원히!, 를 외치며 높이 쳐든/ 세상의 술잔도 술이 깨면 헛것이다/ 무릇 아름다운 것은 변한다/ 은현리 들판도 겨울 봄 여름 가을이 있어 아름답다/우리 집 마당의 겨울나무도/ 잎 피우고 꽃 피울 봄을 기다리고 있어 아름답다/ 지금 시드는 아름다운 꽃이여/ 꽃이 시들지 않고 영원하다면/ 나는 너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았을 것이다/ 아름다운 것은 변하는 것들에 깃든다/ 생로병사가 있어 사람도 아름다울 수 있으니/ 변하는 것은 아름다운 것이다/ 살아온 시간만큼 내가 늙어가는 것도 아름다움이려니/ 흰 머리카락 늘어가는 아내여/ 나의 아름다움이여/ 삶이 나에게 가르쳤다/ 아름다운 것은 영원한 것이 아니라/ 영원한 것은 헛것일 뿐이라고/ 변하는 것은 아름답다고//

기다림에 대하여 / 정일근
기다림이란 이렇게 아름다운 것일까/ 늦은 퇴근길 107번 버스를 기다리며/ 빈 손바닥 가득 기다림의 시를 쓴다/ 들쥐들이, 무릇 식솔 거느린 모든 포유류들이/ 품안으로 제 자식들을 부르는 시간,/ 돌아가 우리 아이들의 이름을 보르고 싶다/ 부르고 싶다 어둠 저편의 길들이여/ 경화, 태백, 중초마을의 따스한 불빛들이여/ 어둠 저편의 길을 불러 깨워/ 먼 불빛 아래로 돌아가면, 아내는/ 더운 밥냄새로 우리 아이들의 이름을 부르리/ 아이들은 멀리 있는 내 이름을 부르고 있으리/ 살아 있음이여, 살아 있음의 가슴 뛰는 기쁨이여/ 그곳에 내가 살아 있어/ 빈 손바닥 가득 기다림의 시를 쓴다/ 푸른 별로 돋아나는 그리운 이름들을 쓴다//

유배지에서 보내는 정약용의 편지 / 정일근
제1신 第一信// 아직은 미명이다. 강진의 하늘 강진의 벌판 새벽이 당도하길 기다리며 죽로차竹露茶를 달이는 치운 계절, 학연아 남해 바다를 건너 우두봉牛頭峰을 넘어오다 우우 소 울음으로 몰아치는 하늬바람에 문풍지에 숨겨둔 내 귀 하나 부질없이 부질없이 서울의 기별이 그립고, 흑산도로 끌려가신 약전 형님의 안부가 그립다. 저희들끼리 풀리며 쓸리어 가는 얼음장 밑 찬물 소리에 열 손톱들이 젖어 흐느끼고 깊은 어둠의 끝을 헤치다 손톱마저 다 닳아 스러지는 적소謫所의 밤이여, 강진의 밤은 너무 깊고 어둡구나. 목포, 해남, 광주 더 멀리 나간 마음들이 지친 봉두난발蓬頭亂髮을 끌고 와 이 악문 찬 물소리와 함께 흘러가고 아득하여라, 정말 아득하여라. 처음도 끝도 찾을 수 없는 미명의 저편은 나의 눈물인가 무덤인가 등잔불 밝혀도 등뼈 자옥이 깎고 가는 바람 소리 머리 풀어 온 강진 벌판이 우는 것 같구나.//
제2신 第二信// 이 깊고 긴 겨울밤을 예감했을까 텃밭에다 무를 심었다. 여름 한철 노오란 무꽃이 피어 가끔 벌, 나비들이 찾아와 동무해 주더니 이제 그 중 큰 놈 몇 개를 뽑아 지붕 추녀 끝으로 고드름이 열리는 새벽까지 밤을 새워 무채를 썰면, 절망을 썰면, 보은산 컹컹 울부짖는 승냥이 울음소리가 두렵지 않고 유배流配보다 더 독한 어둠이 두렵지 않구나. 어쩌다 폭설이 지는 밤이면 등잔불을 어루어 시경강의보詩經講義補를 엮는다. 학연아 나이가 들수록 그리움이며 한이라는 것도 속절이 없어 첫해에는 산이라도 날려 보낼 것 같은 그리움이, 강물이라도 싹둑싹둑 베어버릴 것 같은 한이 폭설에 갇혀 서울로 가는 길이란 길은 모두 하얗게 지워지는 밤, 사의재四宜齋에 앉아 시詩 몇 줄을 읽으면 아아 세상의 법도 왕가의 법도 흘러가는 법, 힘줄 고운 한들이 삭아서 흘러가고 그리움도 남해 바다로 흘러가 섬을 만드누나.//
* 1985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당선작(일부 수정)

그대 내 손금이 될 때까지 / 정일근
한 사람을 사랑하는 일이/ 꽃이 피었다 지는 슬픔보다도/ 나무들이 바람에 우는 아픔보다도/ 슬프고 아픈 일이지만/ 사랑하며 기다리는 것이/ 기다리며 눈물 훔치는 것이/ 내 사랑의 전부라 할지라도/ 그대를 사랑하는 일이/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인지라/ 흐르는 눈물 손가락에 찍어/ 빈 손바닥 빼곡하게/ 뜨거운 그대 이름 적어 보느니/ 내 손금에 그대 이름 새겨질 때까지/ 그대 내 손금이 될 때까지//

사는 맛 / 정일근
당신은 복어를 먹는다고 말하지만/ 그건 복어가 아니다, 독이 빠진/ 복어는 무장 해제된 생선일 뿐이다/ 일본에서는 독이 든 복어를 파는/ 요릿집이 있다고 한다, 조금씩/ 조금씩 독의 맛을 들이다 고수가 되면/ 치사량의 독을 맛으로 먹는다고 한다/ 그 고수가 먹는 것이 진짜 복어다/ 맛이란 전부를 먹는 일이다/ 사는 맛도 독 든 복어를 먹는 일이다/ 기다림, 슬픔, 절망, 고통, 고독의 맛/ 그 하나라도 독처럼 먹어보지 않았다면/ 당신의 사는 맛도/ 독이 빠진 복어를 먹고 있을 뿐이다//

깨끗한 슬픔 / 정일근
작은 마당 하나 가질 수 있다면/ 키 작은 목련 한 그루 심고 싶네// 그리운 사월 목련이/ 등불 켜는 밤이 오면/ 그 등불 아래서/ 그 시인의 시 읽고 싶네// 꽃 피고 지는 슬픔에도/ 눈물 흘리고 싶네/ 이 세상 가장 깨끗한 슬픔에/ 등불 켜고 싶은 봄 밤// 내 혼에 등불/ 밝히고 싶은 봄 밤//

강촌에 살자 / 정일근
내 나머지 삶에 강이 흘러갔으면/ 새벽이면 흐르는 강물에 세수하고/ 그 강물 길어 그대 위해 아침을 준비하리/ 삶이 강이라면/ 나는 그 곁 키 큰 미루나무되리/ 미루나무 아니면 이파리 흔들고 가는 파람/ 바람 아니면 떠 있는 뭉게구름되리/ 강물 같은 사람아/ 우리 이대로 멈추어 서서 여기 살자/ 강촌에 살자//

花浦에서 꽃을 찾다 / 정일근
花浦에서 나는 꽃을 생각하고/ 花浦에서 스승은 詩를 읽고 계신다/ 갈대 서걱되는 灣을 갈바람과 함께 돌아 나가면/ 반달처럼 누운 바다, 저기 花浦/ 이 바다의 숭어처럼/ 다도해의 섬들은 떼지어 몰려오고/ 누구의 손이신가,/ 두 손바닥에 찰랑찰랑 바다를 담고 있지만/ 오후 干潮에 바닷물이 모두 사라져버리면/ 늙은 어머니 삭은 젖가슴 같은 뻘밭이 펼쳐지고/ 깊게 패어진 아픈 손금으로 뻘강이 흘러간다/ 花浦라, 어디엔가 분명 꽃은 숨어 있으리/ 나는 바다에 피는 꽃을 찾기 바쁘고/ 스승은 무심히 해지는 서쪽을 바라보신다/ 마지막엔 해도 서쪽으로 돌아가고/ 무지개 같은 하늘 포물선을 따라/ 極光의 저녁놀이 탈 때, 그 때/ 나는 스승의 맑은 눈동자에 피는 꽃을 본다/ 花浦의 장엄한 붉은 꽃 앞에서/나는 아직 詩를 찾으려고 하고/ 스승은 벌써 詩를 읽고 계신다/ 나는 머리로 詩를 만들려고 하고/ 스승은 마음으로 詩를 노래하신다/ 花浦에서 돌아오는 길/ 나는 詩가 무엇인지 다시 아득해지고/ 스승은 花浦에서 꺾어온 꽃들을/ 이 주머니 저 주머니에서 가득 꺼내어/ 마술사처럼 활짝 피워 주신다//

가을 억새 / 정일근
때로는 이별하면서 살고 싶은 것이다/ 가스등이 켜진 추억의 플랫폼에서/ 마지막 상행선 열차로 그대를 떠나보내며/ 눈물에 젖은 손수건을 흔들거나/ 어둠이 묻어나는 유리창에 이마를 대고/ 터벅터벅 긴 골목길 돌아가는/ 그대의 뒷모습을 다시 보고 싶은 것이다// 사랑 없는 시대의 이별이란/ 코끝이 찡해오는 작별의 악수도 없이/ 작별의 축축한 별사도 없이/ 주머니에 손을 넣고 총총총/ 제 갈 길로 바쁘게 돌아서는 사람들/ 사랑 없는 수많은 만남과 이별 속에서/ 이제 누가 이별을 위해 눈물 흘려주겠는가// 하산길 돌아보면 별이 뜨는 가을 능선에/ 잘 가라 잘 가라 손 흔들고 섰는 억새/ 때로는 억새처럼 손 흔들며 살고 싶은 것이다/ 가을 저녁 그대가 흔드는 작별의 흰 손수건/ 내 생에 가장 깨끗한 눈물 적시고 싶은 것이다.//

목련 / 정일근
나비 날개 같은 부드러운 오수에 빠진 봄날 오후/ 창문 아래 사월의 공중전화 부스 안에서/ 누군가 사랑의 전화 버턴을 꼭꼭 누루고 있다./ 뜨거운 목소리 잊혀진 첫사랑의 귓불을 간지럽히고/ 화사한 성문이 잠든 몸을 깨워 열꽃의 뜸을 놓는다./ 누구일까, 저렇게 더운 사랑을 온몸으로 고백하는 사람은/ 내려다 보니 없다 아무도 없는 봄날 오후를 배경으로/ 담장안의 목련만이 저홀로 터지고 있다//

사과야 미안하다 / 정일근
사과 과수원을 하는 착한 친구가 있다. 사과꽃 속에서 사과가 나오고 사과/ 속에서 더운 밥이 나온다며, 나무야 고맙다 사과나무야 고맙다, 사과나무/ 그루 그루마다 꼬박꼬박 절하며 과수원을 돌던 그 친구를 본 적이 있다. 사/ 과꽃이 새치름하게 눈뜨던 저녁이었다. 그날 나는 천 년에 한 번씩만 사람/ 에게 핀다는 하늘의 사과꽃 향기를 맡았다.// 눈 내리는 밤에 친구는 사과를 깎는다. 툭, 칼등으로 쳐서 사과를 혼절시킨/ 뒤 그 뒤에 친구는 사과를 깎는다. 붉은 사과에 차가운 칼날이 닿기 전에 영/ 혼을 울리는 저 따뜻한 생명의 만트라. 사과야 미안하다 사과야 미안하다./ 친구가 제 살과 같은 사과를 조심조심 깎는 정갈한 밤, 하늘에 사과꽃 같은/ 눈꽃이 피고 온 세상에 사과 향기 가득하다.//

나무, 즐거운 전화 / 정일근
나무들이 사랑을 속삭이는 모습을 보신 적이 있습니까?/ 바람부는 날 숲으로 가 보셔요. 바람을 투명한 전홧줄 삼아/ 뚜와루 뚜와루 즐거운 나무들의 手話 혹은 樹話, 그리워 살/ 금살금 한 걸음씩 가까이 다가서지 않아도, 안타까워 안타까/ 워 살 비비며 불태우지 않아도 기쁨 넘쳐나는 나무들의 깨/ 끗한 사랑법. 저 단정한 거리를 두고도 꽃 피우고 열매 맺는/ 나무들의 사랑을 아시는지요? 사랑이여, 나도 이제 그대 앞/ 에 한 그루 잎 많은 나무로 마주 서고 싶습니다. 그대와 나/ 사이에 바람이 전홧줄을 놓아줄 때 잎새 하나하나 사랑의/ 푸른 수화기를 들고 즐거운 전화를 걸고 싶습니다. 뚜와루/ 뚜와루......//

오른손잡이의 슬픔 / 정일근
오른손 아프고부터 왼손 있다는 사실 알았다/ 나는 오른손 왼손 평등하게 가지고 태어났으나/ 태어나면서 나는 오른손에 힘주며 세상을 잡았다/ 나는 오른손으로 숟가락을 잡았고/ 오른손으로 연필 쥐고 공책에 글 썼다/ 오른손으로 악수하고 주먹 날리고/ 오른손 새끼손가락 내밀어 사랑을 약속했다/ 우주의 무게 중심이 오른쪽이라 믿었으니, 전지자도/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도록 하라 가르쳤으니/ 왼손은 오른손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있었으나/ 왼손은 오른손에서 가장 멀리 잊혀져 있었다/ 오른손 아프고부터 왼손으로 세상을 잡아 본다/ 왼손으로는 지푸라기 하나 쉽게 잡히지 않는다/ 자꾸만 놓치고 마는 왼손의 미숙 앞에/ 오른손의 편애로 살아온 온몸이 끙끙거린다/ 오른손잡이도 왼손잡이도 절반을 잃고 사는 것이다/ 오른손잡이도 왼손잡이도 슬픈 사람인 것이다/ 손은 둘이 하나다 마주쳐야 소리가 나듯이/ 두 손을 모아야 기도가 되듯이//

아름다운 식사 / 정일근
밥집에 가면 국과 밥 따로 먹는 시인 알고 있습니다. 정성스럽게 한 그릇의 국 다 비운 뒤 비로소 밥 먹는 시인의 식사법에서, 아름답습니다! 국은 국으로 밥은 밥으로 대접 받습니다. 세상의 식사법은 국에 밥 말거나, 급하게 밥만 먹는 요란스러운 숟가락질뿐입니다. 국은 국으로 밥은 밥으로 인정하지 않고 쉽게 국밥을 만들어버리는 혼돈의 식탁은, 섞어 하나로 만드는 폭력일지도 모릅니다. 내가 아닌 우리라고 쉽게 익명이 되어버리는 이 시대의 밥상에서 나도 국밥이 아닌 국과 밥 먹고 싶습니다. 경건히 국 다 먹은 뒤 더욱 경건히 밥 먹고 싶습니다. 기분 좋지 않습니까? 국 다 먹을 때까지 밥 한 그릇 따뜻하게 기다리고 있다는 일이.//

마음의 양변기 / 정일근
마음에 양변기 하나 두고 싶다/ 마음에 누가 가래침 내뱉으면 물 내리고/ 마음에 누가 오줌 누면 물 내리고/ 마음에 누가 똥 누면 물 내리고/ 언제나 맑은 샘물 가득 채워두고 싶다/ 내 마음 똥통 오줌통이어서/ 마음에 깊은 욕창 아물지 못하고/ 피고름 고이고 구더기 들끓는 날/ 마음에 양변기 놓아 물줄 당겨/ 쏴아아 쏴쏴 다 씻어 내려버리고 싶다/ 오욕에 오염된 오장육부 다 내려버리고/ 내가 나를 이기지 못하는 마음 다 내려버리고/ 양변기 하나 놓아두고 살고 싶다//

사월에 걸려 온 전화 / 정일근
사춘기 시절 등교길에서 만나 서로 얼굴 붉히던 고 계집애/ 예년에 비해 일찍 벚꽃이 피었다고 전화를 했습니다// 일찍 핀 벚꽃처럼 저도 일찍 혼자가 되어/ 우리가 좋아했던 나이쯤 되는 아들아이와 살고 있는,/ 아내 앞에서도 내 팔짱을 끼며, 우리는 친구지/ 사랑은 없고 우정만 남은 친구지, 깔깔 웃던 여자 친구가/ 꽃이 좋으니 한 번 다녀가라고 전화를 했습니다// 한때의 화끈거리던 낯붉힘도 말갛게 지워지고/ 첫사랑의 두근거리던 시간도 사라지고/ 그녀나 나나 같은 세상을 살고 있다 생각했는데/ 우리 생에 사월 꽃잔치 몇 번이나 남았을까 헤아려 보다/ 자꾸만 눈물이 났습니다// 그 눈물 감추려고 괜히 바쁘다며/ 꽃은 질 때가 아름다우니 그때 가겠다, 말했지만/ 친구는 너 울지, 너 울지 하면서 놀리다가 저도 울고 말았습니다.//

시월의 기도문 / 정일근
시월에는 무신이게 하소서/ 천고마비보다 시고시인비이게 하소서/ 서정성으로 둔갑하는 누이의 가을 사랑 속에서도/ 번번이 결별의 비수는 빛나고/ 안경을 벗은 안맹의 여린 내 시선으로도/ 반도를 움켜쥐는 바람의 손길이며/ 한반도의 툭툭 불거진 슬픔의 힘살들이 환히 보입니다/ 하여 시월 속으로 떠나간 사람들의 길을 따라/ 이제는 당당하게 걸어가게 하소서/ 시월에는 유신이게 하지 마소서/ 가을이 주는 넉넉한 풍요로움으로도/ 우리나라 사람들은 즐거이 일하고 놀이합니다/ 하누님 당신은 늘 그대로 하늘에서 쉬시고/ 시월에는 무신이게 하소서/ 그리하여 시월의 공산 같은 달밤이 오면/ 아이들, 낙엽, 대통령, 바보, 눈물, 풀꽃 모두 모여/ 고운 시를 읽게 하소서/ 높은 더욱 낭낭히 높은 목소리로 시를 읽게 하소서//

11월 / 정일근
혼자 내원에 들었다.// 정시 정각에 도착한 열차처럼/ 나는 가장 좋은 시간에 닿았다// 잘 익은 나무들과 함께 걸어서 당도한 11월// 나무의 1과 1 사이로 황금빛 수평선 펼쳐지고/ 그 사이로 겨울 철새는 풍경이 되기 위해/ 먼, 차가운 먼 북쪽에서 세차게 날개 치며 돌아오는 중이다// 물들기 위해 봄부터 함께 걷기 시작한 나뭇잎/ 한 장 한 장, 햇살 되받아내며 눈부시고// 바람은 차고 맑은 몸으로 찾아와/ 마지막 꽃씨와 풀씨를 날린다// 물이 낮은 곳으로 흘러 원융무애의 바다에 당도하듯/ 내원의 나무가 걸어서 당도한 바다, 저 깊은 바다// 먼저 물든 낙엽부터 먼저, 풍덩풍덩/ 미련 없이 돌아가는데// 묵언하는 나무가 날기 위해 천천히 등을 굽힌다//

흑백다방 / 정일근
오래된 시집을 읽다, 누군가 그어준 붉은 밑줄을 만나/ 그대도 함께 가슴 뜨거워진다면/ 흑백다방, 스무 살 내 상처의 비망록에 밑줄 그어진/ 그곳도 그러하리// 베토벤 교향곡 5번 C단조를 들을 때마다/ 4악장이 끝나기도 전에/ 쿵쿵쿵 쿵, 운명이 문을 두드리며 찾아와/ 수갑을 차고 유폐될 것 같았던/ 불온한 스무 살을 나는 살고 있었으니// 그리하여 알렉산드리아 항구로 가는 밀항선을 타거나/ 희망봉을 돌아가는 배의 삼등 갑판원을 꿈꾸었던 날들이 내게 있었으니// 진해의 모든 길들이 모여들고/ 모여들어서 사방팔방으로 흩어지는 중원로터리에서/ 갈 길을 잃은 뒤축 구겨진 신발을 등대처럼 받아주던,/ 오늘의 발목을 잡는 어제와/ 내일을 알 수 없는 오늘이 뇌출혈을 터트려/ 내가 숨쉬기 위해 숨어들던 그곳,// 나는 그곳에서 비로소 시인을 꿈꾸었으니/ 내 습작의 교과서였던 흑백다방이여// memento mori*,/ 세상의 화려한 빛들도 영원하지 않고/ 살아있는 것은 모두 사라지느니/ 영혼의 그릇에 너는 무슨 색깔과 향기를 담으려 하느냐,/ 나를 위무하며 가르쳤으니// 그 자리 그 색깔 그 향기로/ 사진첩의 속의 흑백사진처럼 오래도록 남아있는/ since 1955 흑백다방,/ 진해시 대천동 2번지//
* memento mori: 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는 라틴어.

나에게 사랑이란 / 정일근
마음속에 누군가를 담고 살아가는 것이/ 사랑인 줄 알았습니다.// 사랑하기에/ 젊은날엔 그대로 하여 마음 아픈것도/ 사랑의 아픔으로만 알았습니다// 이제 그대를 내마음 속에서 떠나보냅니다./ 멀리 흘러가는 강물에, 아득히 부는 바람에/ 잘가라 사랑아,/ 내마음 속의 그대를 놓아보냅니다.// 불혹,/ 무음에 빈자리 하나 만들어 놓고서야/ 나는 사랑이 무엇인지 아는 나이가 되었나 봅니다.// 사랑이란/ 누군가를 가두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비워놓고 기다리는 일이어서// 그 빈자리로 찾아올/ 누군가를 기다리는 일이어서/ 사람을 기다리는 일이 사랑이라는 것을/ 이제서야 나도 알게 되었나 봅니다//

사랑할 때 사랑하라 / 정일근
사랑할 때 사랑하라/ 아홉 손가락이 잘려 나가도/ 팔 하나를 내어 주어도/ 은 손가락, 남은 손이 있다면/ 사랑하라, 사랑이/ 두 눈알을 다 가져가 버려도/ 사랑이 몸뚱이만 남겨 놓아도/ 사랑이 남아 있다면 사랑하라/ 지구별에 다시 빙하기가 오고/ 지구가 두꺼운 얼음에 덮여/ 검독수리가 죽고/ 향유고래가 죽고/ 흰민들레가 죽고/ 오직 외발 하나 딛고 설 땅이 있다면/ 그 땅에 한 발 딛고 서서/ 나머지 한 발은 들고라도/ 서 있을 수 있다면/ 사랑하라, 사랑은/ 용서보다 거룩한 용서/ 기도보다 절실한 기도/ 아무것도 가질 수 없고/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아도/ 사랑이 있다면 사랑하라/ 사랑할 때 사랑하라//

황옥의 사랑가 / 정일근
운명의 맥을 짚어 누런 바다를 건너기로 했습니다/ 바다 건너 동쪽나라에 하늘에서 알이 되어 내려왔다는/ 수로首露, 그대가 산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더 먼 나라 나사렛에서 태어난 야소耶蘇라는 남자가/ 죽은 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났다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태어나고 죽는 일이 하늘에 있고/ 죽어서 다시 사는 일이 하늘에 있다면/ 제가 그대에게로 가는 것도 하늘이 정한 일이라 생각했습니다/ 우리 사랑이 하늘의 신탁神託이라면/ 그대는 그 나라에서 저를 기다리고 있겠지요/ 어머니가 주신 붉은 속곳을 준비하며 저는 자꾸만 붉어집니다/ 그래서 바다를 건너는 두려움은 잊기로 했습니다/ 이만오천리二萬五千里 뱃길 내내 초야初夜의 뜨거움을 꿈꿀 것입니다/ 첫날밤 그대가 열여섯 내 나이를 묻는다면/ 붉은 저 속곳보다, 바다를 건너며 붉어진 내 몸보다/ 더 붉은 처녀의 피로 답할 것입니다/ 내 배 안에서 하늘의 흰 피와 땅의 붉은 피가 섞여/ 새로운 나라 새로운 옥조玉朝의 피를 만들고/ 그 피 세세연년世世年年 붉게 이어지길 바라겠습니다/ 건강한 남자로 곧추서서 저를 기다려주시겠습니까/ 지금 아유타국에서 허許씨 성을 가진 황옥黃玉이/ 물고기 두 마리 문양을 증표로 수로首露, 그대에게 갑니다//

돌쩌귀 사랑 / 정일근
울고 불고 치사한 이승의 사랑일랑 그만 끝내자./ 다시 태어나 우리 한 몸의 돌쩌귀로 환생하자./ 그대는/ 문설주의 암짝되고 나는 문짝의 수작되어/ 그 문 열리고 닫힐때마다 우리 뜨겁게 쇠살부비자./ 어디 쇠가 녹으랴만 그 쇠 다 녹을 때까지/ 우리 돌쩌귀같은 사랑 한번 해 보자.//
* 돌쩌귀: 문짝을 문설주에 달아 여닫는 데 쓰는 두 개의 쇠붙이. 암짝은 문쇼ᅟᅥᆯ주에, 수짝은 문짝에 박아 맞추어 꽂는다.

감지(紺紙)의 사랑 / 정일근
비단 오백 년 종이 천 년을 증명하듯/ 우리 한지에 쪽물을 들인 감지는/ 천 년을 견딘다는데// 그 종이 위에 금니은니로/ 우리 사랑의 詩를 적어 남긴다면/ 눈 맑은 사람아/ 그대 천 년 뒤에도 이 사랑 기억할 것인가// 감지에 남긴 내 마음이 열어주는 길을 따라/ 경주 남산 돌 속에 잠든 나를 깨우러 올 것인가// 풍화하는 산정 억새들이/ 여윈잠을 자는 가을날/ 통도사 서운암 性坡스님의 감지 한 장 얻어/ 그리운 이름 석 자 금오산 아래 묻으면/ 남산 돌부처 몰래 그대를 사랑한 죄가/ 내 죽어 받을 사랑의 형벌이 두렵지 않네// 종이가 천 년을 간다는데/ 사람의 사랑이 그 세월 견디지 못하랴/ 돌 속에 잠겨 내 그대 한 천 년 기다리지 못하랴//

사랑, 붉은 / 정일근
흔현리 들길 걸어가다/ 가을소풍 마치고 하늘로 돌아간/ 고추잠자리 한 마리 보았다/ 또 한 마리의 고추잠자리/ 오래 그 주검 곁을 지키며/ 날고 있는 것도 보았다/ 저 미물들도 저렇게 붉게/ 사랑했나 보다/ 제 몸과 색깔 다 벗고/ 모두 돌아가는 이 늦가을까지.//

연가 / 정일근
허락하신다면 사랑이여/ 그대 곁에 첨성대(瞻星臺)로 서고 싶네./ 입 없고 귀 없는 화강암 첨성대로 서서/ 아스라한 하늘 먼/ 별들의 일까지 목측으로 환히 살폈던/ 신라 사람의 형형한 눈빛 하나만 살아/ 하루 스물네 시간을, 일 년 삼백 예순 닷새를/ 그대만 바라보고 싶네./ 사랑이란 그리운 사람의 눈 속으로 뜨는 별/ 이 세상 모든 사랑은 밤 하늘의 별이 되어/ 저 마다의 눈물로 반짝이고,/ 선덕여왕을 사랑한 지귀의 순금 팔찌와/ 아사달을 그리워한 아사녀의 잃어버린 그림자가/ 서라벌의 밤 하늘에 아름다운 별로 떠오르네./ 사랑아, 경주 남산 돌 속에 숨은 사랑아,/ 우리 사랑의 작은 별도 하늘 한 귀퉁이 정으로 새겨/ 나는 그 별을 지키는 첨성대가 되고 싶네./ 밤이 오면 한 단 한 단 몸을 쌓아/ 하늘로 올라가 그대 고운 눈 곁에 누운/ 초승달로 떠 있다가/ 새벽이 오면 한 단 한 단 몸을 풀고 땅으로 내려 와/ 그대 아픈 맨발을 씻어주는 맑은 이슬이 되는.//

그대 내 손금이 될 때까지 / 정일근
한 사람을 사랑하는 일이/ 꽃이 피었다 지는 슬픔보다도/ 나무들이 바람에 우는 아픔보다도/ 슬프고 아픈 일이지만/ 사랑하며 기다리는 것이/ 기다리며 눈물 훔치는 것이/ 내 사랑의 전부라 할지라도/ 그대를 사랑하는 일이/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인지라/ 흐르는 눈물 손가락에 찍어/ 빈 손바닥 빼곡하게/ 뜨거운 그대 이름 적어 보느니/ 내 손금에 그대 이름 새겨질 때까지/ 그대 내 손금이 될 때까지//

세월의 저쪽 / 정일근
잘 가라, 인사하지 않아도/ 시간은 떠나가 무덤으로 간다/ 사람들은 떠나가는 시간과 함께 흘러가/ 둥그런 시간의 무덤 속에 길게 눕는다/ 살은 썩고 뼈는 풍화되는 세월/ 무심한 촉루 위로 잡풀 무성히 돋는 세월만/ 아주 저 속에 누워 있구나/ 이제 그 사람의 얼굴 희미하고/ 그날의 애절한 슬픔 무덤덤한 무덤으로 남았다/ 저 무덤 속 세월에 한 줌 뼈인들 남았으리/ 호호했던 사랑의 마음인들 붉은 흔적 있으랴/ 짧은 흰 십자가 그림자 길어지는/ 오후의 공동묘지 쓸쓸히 지나며/ 움켜잡아도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오는 잡풀 같은/ 세월의 저쪽을 붙잡는다/ 슬프다, 탄식하지 않아도/ 사람도 시간도 시나브로 빠져나가/ 둥그런 무덤으로 남은 세월의 저쪽/ 미움도 그리움도 없는 저쪽//

​강 / 정일근
아마 꿈이었을 거야, 내가 동쪽으로 흐르는 그 강 다녀온 기억은,/ 새벽이면 하늘이 문 열어 푸른 물길 열고, 저녁이면 땅이 몸 얼어 황금 물길 거두는 강,/ 추운 날 강이 얼면 하늘도 함께 어는 강. 새들이 강물 속에서 놀고 물고기가 하늘에서 헤엄치는 강./ 새와 짐승들이 세수하고 돌아간 뒤에도 착한 얼굴이며 맑은 눈빛 그냥 그대로 남는 강./ 팔만 사천 살 수명이 다한 장수천인이 찾아와 제 몸속 피 다 버리고 흐르는 강물 담아 어린아이가 되어 돌아가는 강./ 사진으로 지도로도 남길 수 없는 강. 오직 진실로 사랑하는 사람의 눈 속이나 손금에만 담아올 수 있는 강./ 내 다시 그 강 찾아간다 해도 강은 동쪽을 떠나고 없을 거야. 그 곳 사람들, 차음부터 그 곳에는 강이 없었다고 말할 거야.//

욕記 / 정일근
전라도 종마 같은 이대흠 시인이/ 내 홈페이지 방명록에 '씨벌'이라고 적었다// 씨벌은 욕이다, 며/ 홈페이지 독자들은 씨벌씨벌 다시 욕 올린다// 이대흠의 씨벌은 욕이 아니다/ 그의 시며 사람의 향기다, 나에게 주는/ 서해 갯벌 같이 질퍽한 사랑이다// 입 속 가득 구린내 나는 욕 감추고/ 음전한 척, 척 하는 세상을 향해/ 나도 씨벌 씨벌 씨벌 욕 먹이고 싶다// 욕이 욕밖에 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욕도 시가 될 수 있다 가르치며/ 이 씨벌! 뒤통수치며 욕 퍼붓고 싶다// 시인이 시인에게 하는 욕은/ 욕이 아니라 사랑이니// 대흠이 이 씨벌! 내 입안 가득/ 청량한 용뇌향 고인다//

새벽 / 정일근
사랑아 너를 내 팔에 누이고도/ 욕심 없이 잠을 내고 난 관음(觀音)의 새벽/ 몸도 마음도 이슬처럼 맑고 가벼워서/ 통도사 극락암 삼소굴 앞마당에 핀 금낭화/ 작은 방울 같은 꽃 끝에라도 매달릴 수 있겠다/ 뒤란 대나무숲에서 잠을 깬 무소유의 바람/ 새벽을 밟고 오는 맨발마다/ 화엄 같은 파란 무늬가 빛나고/ 어린 모감주 잎들 일제히 깨달음의 눈을 뜬다/ 스님은 어느 새 여름 선방에 드시고/ 찾아오시는 손님을 위해 남겨놓은 차 한 잔/ 사랑은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는 일이라며/ 따뜻한 말씀으로 풀리고 있다.​//

갇힌 소가 우는데 / 정일근
은현리에 살면서 들었다. 황금벌판에서 일하는 소는 움머-하며 해설피 울지만 감옥 같은 창고에 갇혀 사육되는 소는 엉-엉- 휴대폰 진동소리처럼 기계음으로 우는 것을. 처음에는 기계의 진동음으로 알았다가 무슨 소리가 뼈마디에 스며들도록 아픈가 싶어 찾아갔다 신문지 크기만한 창문 하나 가지고 컴컴한 어둠 속에 징역사는 소를 만났다. 그 순한 눈망울 가득 타오르는 사람의 원죄를 보고 말았다. 그 소리 가끔 전화기로도 듣는다. 도시 사는 친구가 술에 취해 전화를 하는 밤, 보고 싶다 보고 싶다며 대책 없이 우는 밤, 그 울음 뒤로 도시가 엉-엉- 휴대폰 진동음으로 갇힌 소처럼 따라 우는 소리를.//

성요셉여자고등학교 청소부 / 정일근
나에게 전업시인과 바꾸고 싶은/ 직업이 있는지 묻는다면/ 강진군 강진읍 평동리 100번지/ 성(聖)요셉 여자고등학교/ 등 굽은 청소부가 되고 싶다/ 영랑의 서정시를 닮은/ 요셉이란 이름의 아름다운 정원을 가진/ 그 시골 여자고등학교에서/ 시를 쓰는 대신 빗자루를 들고 싶다/ 청소부 발령을 통보받는다면/ 나는 하루도 결근하지 않고/ 교정의 구석구석을 쓸 것이다/ 봄이면 잔디운동장에 돋는/ 토끼풀이며 들풀을 뽑고/ 가을이면 교문 앞에 수북이 쌓인/ 늙은 플라타너스 잎을 쓸 것이다/ 하지만 교장수녀님은 곧 알 것이다/ 네 잎 크로버를 찾느라/ 시킨 일을 잊어버리는/ 들풀에 망울이라도 맺히면/ 손을 놓고 꽃이 피길 기다리는/ 낙엽 밟는 소리에 혼자 취해/ 온종일 플라타너스 잎만 밟는/ 내가 무능한 청소부라는 것을/ 교장수녀님은 알고 낙담할 것이다/ 벌 받는 학생처럼 매일같이/ 행정실장 수녀님에게 혼쭐이 나도/ 나는 청소부의 정년은 채울 것이다/ 하루하루 쑥쑥 자라는 여학생들의/ 작아진 책걸상을 단정하게 고쳐주거나/ 교정 여기저기 숨어있는 시집과 공책/ 몽당연필을 주워 제 주인 찾아주며/ 성(聖)요셉 여자고등학교와 함께/ 평화롭게 살다가고 싶은 것이다/ 선생님의 화장실 손 청소하고/ 여학생의 화장실 물청소한 뒤/ 퇴근 후에는 성요셉 동산에 들러/ 깜깜해질 때까지 무릎 꿇고/ 내 안으로 찾아온 신에 대해 묵상할 것이다/ 그렇게 늙어 밝은 눈이라도 생긴다면/ 여학생이 책상서랍 속에 넣어두고/ 잊어버린 마가렛 꽃 같은 꿈을/ 순결한 마리아 같은 여학생이/ 책갈피 어딘가에서 잃어버린/ 사랑의 설렘을 모두 찾아서/ 하느님의 선물처럼 전해주고 싶다/ 여기 시(詩)보다 아름다운 교정에서/ 지금 꾸는 꿈이나 사랑이/ 손수건 크기만큼 작다할지라도/ 사는 동안 영원히 아름다울 것이라고/ 그 아름다움이 너를 덮고/ 너의 인생을 다 덮을 수 있을 것이라고/ 축복처럼 속삭여주고 싶다/ 정식 고용직이 아니라도 좋으리/ 일용직 청소부라도 나는 행복하리/ 시인이 되어 내가 쓴 착한 서정시만 모아/ 빗자루와 걸레를 만들어/ 성(聖)요셉 여자고등학교 정원을 쓸고/ 마룻바닥을 윤이 나도록 닦을 것이다/ 더러 여학생들이 청소부라 무시해도/ 스승의 날에 카네이션을 달지 못해도/ 졸업앨범에 얼굴이 박히지 않아도/ 교직원주소록에 내 이름이 빠져도/ 자전거 타고 맨 먼저 출근하고/ 자전거 타고 맨 나중에 퇴근하는/ 나는 전직 시인이 아니라/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현직/ 청소부가 되고 싶은 것이다//

봄, 엄나무 가시 사이 부풀어오르는 / 정일근
화려하게 꽃 피우는 것만이/ 봄을 기다리는 것은 아니다/ 온 몸에 가시 달고 서 있는 엄나무/ 은현리 엄나무도 봄을 기다린다/ 잘린 가지 끝이나 가시와 가시 사이/ 거칠고 좁은 황무지 같은 살결에/ 화상 입은 듯 스스로 붉은 상처 내며/ 엄나무는 진실로 봄을 기다렸다/ 예쁜 봄꽃들 꽃 피우고 새잎 내밀 때/ 엄나무 제 아픈 상처 찢고/ 착하고 푸른 새순 밀어 올릴 것이다/ 향기로운 꽃은 독이 될 수 있지만/ 가시 가진 것들이 피우는 어린순은/ 생명을 살리는 약이 된다 했느니/ 엄나무 가시 사이 부풀어오르는 봄처럼/ 가장 엄격한 자세로 겨울을 견딘 것들에게/ 가장 뜨거운 봄은 찾아온다//

무제치늪의 봄 / 정일근
마음을 얻어야 손이 순응하는 법이다/ 기다릴 줄 아는 마음을 위해 봄은 오고/ 바라볼 줄 아는 손을 위해 꽃은 핀다/ 물이 만든 물의 나라 무제치늪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도 물이니/ 물은 다투지 않고 평등하게 스며들고/ 겸허하여 낮은 곳으로 흘러간다/ 꽃을 기다려 삼월 봄이 오고/ 봄을 기다려 사월 꽃이 피는/ 그 착한 물들이 빚어내는 빛나는 봄/ 오랜 마음의 친구가 내미는 손처럼/ 그 따뜻한 손 꽉 잡아보고 싶은/ 무제치늪의 봄//

가을 부근 / 정일근
여름내 열어놓은 뒤란 창문을 닫으려니/ 열린 창틀에 거미 한 마리 집을 지어 살고 있었습니다/ 거미에게는 옥수수가 익어가고 호박잎이 무성한/ 뒤뜰 곁이 명당이었나 봅니다/ 아직 한낮의 햇살에 더위가 묻어나는 요즘/ 다른 곳으로 이사하는 일이나, 새 집을 마련하는 일도/ 사람이나 거미나 힘들 때라는 생각이 들어/ 거미를 쫒아내고 창문을 닫으려다 그냥 돌아서고 맙니다/ 가을 바람이 불어오면 여름을 보낸 사람의 마음이 깊어지듯/ 미물에게도 가을은 예감으로 찾아와/ 저도 맞는 거처를 찾아 돌아갈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가을엽서 2 / 정일근
그대의 일자무소식과/ 막막한 내 그리움 사이/ 가을만 저 홀로 차다// 그대에게 가까이 가기에는/ 늘 손 시린 새벽,/ 유리창 가득 호호 입김 불며/ 그리운 그대 이름 적는다// 그립다, 라고만 쓰기엔/ 가을꽃밭 붉은 꽃대궁처럼/ 너무 더운 그대// 빈 손톱 밑으로 스며드는/ 그리운 그대//

가을의 일 / 정일근
풀잎 등에 맺히는 이슬 한 방울이 무거워진다/ 그 무게에 풀들이 땅으로 휘어지며 겸허해지고/ 땅은 씨앗들을 받아 품으며 그윽하게 깊어진다/ 뜨거웠던 황도의 길도 서서히 식어가고/ 기구가 만든 그림자 속으로 달이 들어와 지워지듯/ 가을의 길을 걸어가면 세상살이 욕심도 무색이 된다/ 어두워지기 전에 아궁이를 달구어 놓아야겠고/ 가을별들이 제자리를 찾아와 착하게 앉았는지/ 헤아려 보는 것도 나의 일, 밤이 오면/ 나는 시를 읽으며 조금씩 쓸쓸해질 것이다/ 시읽는 소리가 우주의 음률을 만드는 시간/ 가벼워지기 위해 나도 이슬처럼 무거워질 것이니//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숙을 알고 있다 / 정일근
해 지고 추워지기 전에 그 여인숙을 찾아가야 합니다/ 어두워지면 문을 꼭 닫고, 파란 슈미즈를 입은 여인숙 주인/ 밤새 손님을 뜨겁게 안아주지요, 아침 햇살이 찾아오면/ 주인이 손수 대문 열어 손님을 정중히 떠나 보내고/ 손님은 제 몸에 스민 꽃내음 감추지 못해 붕붕거립니다/ 얼마냐고 묻지를 마세요/ 숙박비도 하룻밤 꽃값도 무료입니다// 11월 찬 서리 내린 다음날 그 다음날에도/ 오래 오래 피어있는 은현리 용담꽃/ 길 잃은 벌들이 찾아와 하룻밤 자고 떠나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숙//

날아오르는 산 / 정일근
영축산*은 영락없는 독수리 형상이다./ 날개 크게 펼쳐 하늘 허공을 돌며/ 먹이를 낚아채기 직전, 저 거침없는 몰입의 긴장을/ 나는 느낀다, 무진장무진장 눈이라도 퍼붓는 날이면/ 흰 날개 파르르 떨리는 것이 보이고/ 산의 들숨날숨 따라가다 나도 함께 숨을 멈추고 만다./ 명창의 한 호흡과 고수의 북 치는 소리 사이/ 그 사이의 짧은 침묵 같은, 잠시라도 방심한다면/ 세상 꽉 붙들고 있는 모든 쇠줄들/ 한순간에 끊어져 세차게 퉁겨 나가버릴 것 같은,/ 팽팽한 율에 그만 숨이 자지러지는 것이다./ 겨울산을 면벽 삼아 수좌들 동안거에 들고/ 생각 놓으면 섬광처럼 날아와 눈알 뽑아버릴/ 독수리 한 마리 제 앞에 날려 놓고/ 그도 물잔 속의 물처럼 수평으로 앉았을 것이다./ 조금이라도 흔들리면 잔 속의 물 다 쏟고 마는/ 그 자리에 내 시를 들이밀고, 이놈 독수리야!/ 용맹스럽게 두 눈 부릅뜨고 싶을 때가 있다./ 나도 그들처럼 죽기를 살기처럼 생각한다면/ 마주하는 산이 언젠가는 문짝처럼 가까워지고/ 영축산은 또 문짝의 문풍지처럼 얇아지려니/ 그날이 오면 타는 손가락으로 산을 뻥 찔러보고 싶다./ 날아라 독수리야 날아라 독수리야/ 산에 구멍 하나 내고 입바람을 훅 불어넣고 싶다./ 산 뒤에 앉아 계신 이 누구인지 몰라도/ 냉큼 고수의 북채 뺏어들고/ 딱! 소리가 나게 산의 정수리 때려/ 맹금이 날개로 제 몸을 때려서 하늘로 날아가는 소리/ 마침내 우주로 날아오르는 산을 보고 싶은 것이다.//
* 靈鷲山: 불지종가 양산 통도사를 품고 있는 산

별사(別辭) -경주 남산 37 / 정일근
우리 이승의 사랑 끝나고 그대는 죽어 복사꽃 나무/ 가 되리라 나는 죽어 한 마리 은어가 되리라// 사랑이여 천 년이 지난 봄날 먼, 먼 어느 봄날 그대/ 온몸에 복사꽃등불 밝힐 때// 나는 몸속 수박향 숨기고 소월천 거슬러 오십천 따/ 라 올라가다 강물에 어루숭 어루숭 잠긴 그대의 꽃그/ 늘 그냥 지나치지는 못하리라// 나를 휘감는 연분홍 비단 같은 슬픔에 까닭도 모른/ 채 펑펑 울며 거기 멈추어 서 있을 것이니/ 사랑이여 그대 또한 그러하리라// 꽃그늘에 울고 있는 한 마리 어린 은어를 보며 꼭 한 번/ 어디선가 눈 맞춘 것 같은 작은 물고기의 눈물을 보며// 무엇인가 아뜩하여 경계 없는 슬픔에 그대가 피운 가/ 장 아름다운 꽃 분홍 꽃잎 몇 장 손수건으로 하늑하/ 늑 날려줄 것이니// 사랑이여 사랑하였으니 진실로 그러하리라//

물항의 길 / 정일근
쓸쓸해지기 위해 찾아가는 길이 있다/ 물항이 그런 곳이다, 물항의 길이란/ 낮이면 종종걸음으로 달아나 버리고/ 밤이면 느릿느릿 비린 내음으로 돌아온다/ 그리하여 낮에 내가 잡은 것들은 헛것이고/ 밤에 내가 껴안은 것들은 모두 깨어진다/ 어디에도 있고 어디에도 없는/ 물항의 길 위에서 누구나 자유로우나/ 자유로운 만큼 쓸쓸하다, 부정하지 마라/ 미로처럼 얽혀있는 물항의 골목길을 풀어가다/ 연금술사의 접시 안에 타고 있는 물내음 맡았다면,/ 또 검은 소를 끌고 가는 늙은 순례자가/ 하얀 맨발로 밟는 물소리 들었다면, 그 때/ 저녁 거울에 비친 물항의 길을 보았을 것이다/ 돌아오기 위해 떠나는 길처럼/ 떠나기 위해 돌아오는 그 길을 보았을 것이다/ 나는 내가 돌아가는 곳을 알고 있다/ 은어가 회귀하는 마지막 강처럼/ 돌아가는 그 마지막 길을 알고 있다/ 가벼워져 찾아온 사람들이/ 무거워져 물항을 떠나가고 있다/ 물항의 길이 둥근 길이라는 것을 알지 못한다면/ 사람들은 언제나 떠난 자리로 되돌아오고, 둥근/ 물항의 길 위에서 오래 헛돌고 있을 뿐이다//

감은사지 10 / 정일근
경주박물관 옹관 속에 웅크린 천 년 잠들이/ 붉은 시간을 굴리며 찾아온다/ 둥근 시간의 집을 굴리며 감은사로 온다/ 감은사에는 시작과 끝이 맞닿아 있고/ 삶과 죽음이 맞닿아 하나가 된다/ 굴러가는 시간의 저편으로 절은 세워졌다 사라지고/ 사라졌다 다시 세워진다/ 감은사에서 오늘을 말하지 마라/ 흙은 불에 구워져 옹관을 만들고/ 다시 부서져 흙으로 돌아간다/ 죽음을 담았던 그 흙 위로/ 또다시 풀은 자라고 풀꽃은 핀다/ 감은사에서는 사라지는 것이 탑은 아니다/ 탑은 그냥 서 있고 시간은 사라진다/ 시간이 집을 만들고 사랑을 만들고/ 시간이 집을 허물고 사랑을 깨트려 버리고/ 작은 금 사이로 사라진다/ 시간에 갇혀 흘러가는 사람들을 두고/ 감은사는 천 년째 그 자리에 서 있다//

감은사지 11 / 정일근
사라진 감은사 서 있는 탑과 탑 사이/ 아득한 허공 위에 놓인 문 하나 있으니/ 지나간 시간과 돌아올 시간 사이에 놓인 푸른 문을 열고/ 살며시 들어갈 수 있다면 사랑아/ 내 몸 가득 천 년의 단청이 비늘처럼 새겨지고/ 청동 용뉴를 빠져나온 법열의 종소리가/ 그대 비단 치마에 고운 주름으로 접히리라/ 바람이 왕위를 벗어버린 내 금관을 흔들어/ 금빛 소리 사이 비취빛 곡옥들이 밀어를 속삭일 때/ 그대 황금귀고리도 수줍은 듯 귀 붉히리라/ 어두워진들 무슨 두려움이 있겠는가 사랑아/ 동해로 나간 용들이 대종천을 타고 돌아와/ 석등마다 둥근 칠월 보름달을 밝히고/ 아무 근심없이 그대 무릎을 베고 눕는 밤이 오려니/ 이슬 속에 숨은 종소리가 깨어 서라벌의 새벽을 열 때까지/ 우리 만나 뼛속까지 불이 되는 한 몸이 될 수 있으려니/ 눈감은 사이 천 년이 흘러가고/ 눈뜨는 사이 다시 천 년이 흘러갈지라도 나는 즐거우리/ 두드리노니 감은사 탑과 탑 사이의 문이여/ 어떤 밀교의 신비스러운 주문으로/ 닫힌 시간 저편의 문을 열 수 있는가//


감은사지 12 / 정일근
내 몸 어느 금 사이에 숨어 나를 보느냐 뱀이여/ 푸른 혀를 내밀어 어제와 내일을 나누고/ 시간과 시간 사이 미끄럽게 빠져 달아나는 유월의 뱀이여/ 네가 생의 허물 벗듯 나도 무거운 탑의 허물 벗고/ 그리운 서라벌의 저녁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칠월 보름날 저녁 둥근 달빛 불러 달아나리라/ 내 떠난 자리 내가 나를 벗어 내가 없고/ 사랑이 사랑을 벗어 사랑 없는 감은사 빈터에서/ 뱀이여 너는 어떤 곡조의 푸른 휘파람으로/ 떠나간 신라여인들을 부를 것인가/ 또 어떤 시간을 안고 숨막히는 사랑의 또아리를 틀 것인가//

감은사지 13 / 정일근
사라지는 것들은 상처를 남기지 않지만/ 절은 사라지고 절터만 남은 이 저녁 감은사처럼/ 사라질 수 없는 것들은 상처로 남아 슬픔을 만드네/ 무너지는 세월의 무거운 몸을 안고/ 아픈 허리를 곧추세우고 섰는 동서 쌍탑과/ 땅 속에 두 발을 묻고 잠들어 버린 깨어진 모퉁잇돌/ 알 수 없는 바다 깊숙이 달아나버린 목어의 숨소리와/ 유사의 행간 사이사이 뱀처럼 숨어 바스락거리는 신화 곁에서/ 나는 보네, 사라진 절터가 남긴 천 년 세월의 상처를/ 신라사람들이 남긴 쓸쓸한 상처의 저 아름다운 흉터를!/ 진주조개의 상처가 영롱한 진주를 빚듯/ 시간의 상처는 눈물같은 슬픔으로 독한 술을 빚어/ 세상 모든 그리움들을 불러 저녁놀로 불타고/ 슬픔이 내 마음이라면, 저녁 감은사여/ 마음의 우주에 칼금 그어진 깊은 상처같은 별을 보네/ 서쪽 밤하늘 붙박이별로 반짝이는 그대를 보네//

감은사지 별사 / 정일근
입춘날 아침 감은사에 갔다가/ 해바라기를 하고 있는 걸인 부부를 보았습니다/ 서탑 기단부 하대석 위에 나란히 앉은 부부는/ 넓은 상대석 면석으로 동해바다 겨울바람을 막고/ 귀한 순금빛 햇살을 온몸 가득 쬐고 있었습니다/ 추운 겨울을 견디기에 너무 얇은 옷과/ 풀어헤친 머리며 오랫동안 씻지 못한 얼굴이었지만/ 그들에게 쏟아지는 아침 햇살만으로도/ 두 사람은 이 세상 어느 것도 부러울 것이 없는 모습이었습니다/ 두툼한 겨울 외투를 걸친 사람들은 추위에 웅크리며/ 걸인 부부 앞을 무심히 지나쳐 갔지만/ 이름만으로도 빛나는 무소유의 감은사 절터처럼/ 가지지 않고서도 넉넉한 모습이어서/ 내 눈동자 속 눈부처로 붙박혀 버렸습니다/ 동탑과 서탑이 잠시 사람으로 변해 우리를 찾아왔을 것이라고/ 선덕여왕과 지귀가 환생해 사랑나들이 왔을 것이라고/ 돌아오는 길 나와 같이 간 동행에게 들려주었지만/ 동행은 그 걸인 부부를 보지 못했다고 말했습니다/ 감은사 빈터에는 동서 쌍탑만 서 있었다고 말했습니다//

 



정일근 시인
1958년 경상남도 진해에서 태어났다. 도천초교, 진해남중, 마산상고, 경남대 국어교육학과 졸업했으며, 1984년 『실천문학』에 <야학일기> 등 7편의 시를 발표하고 1985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유배지에서 보내는 정약용의 편지> 시가 당선되어 등단했다. 울산 및 경상남도의 지역 작가로 알려져 있으며 ‘시힘’의 동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경남대학교 교수, 한국시인협회 이사, 문화일보와 경향신문 사회부 기자를 역임했다. 진해 남중학교 국어 교사로 재직할 때 쓴 <바다가 보이는 교실 10-유리창 청소>는 2001년부터 7차 교육과정 중학교 1학년 2학기 국어 교과서에 실렸다. 시집으로 『바다가 보이는 교실』 『유배지에서 보내는 정약용의 편지』 『그리운 곳으로 돌아보라』 『처용의 도시』 『경주 남산』 『누구도 마침표를 찍지 못한다』 『마당으로 출근하는 시인』 『오른손잡이의 슬픔』 『착하게 낡은 것의 영혼』 『기다린다는 것에 대하여』 『방!』 『소금 성자』 『저녁의고래』 등이 있다. 한국시조작품상, 시와시학 젊은시인상, 소월시문학상, 영랑시문학상, 포항국제동해문학상, 지훈문학상, 월하진해문학상, 토지문학제 평사리 문학대상 특별상, 김달진 문학상, 육사시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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