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서남북을 헤아리는 방향감각이 그믐밤처럼 어두우니, 길눈에 관해서는 당연히 천치天痴일 수밖에 없습니다. 단독 주택에서 아파트 단지로 이사했을 때, 그 집이 그 집 같아서, 남의 집 현관문 열쇠 구멍에 우리 집 쇳대를 넣으려고 시도하다 깜짝 놀라서 달아난 전과가 있을 정도입니다. 나의 딱한 처지를 잘 아는 친구들은 듣기 좋은 말로 위로합니다. “조물주는 공평무사한 존재여서 한 가지 일에 관하여 극도로 무능한 사람에게는 다른 일에 대한 능력을 후하게 배정함으로써 균형을 얻도록 한다”는 것이 그 위로하는 말의 요지입니다. 그저 듣기 좋으라고 지껄이는 헛소리라기보다는 분명히 일리가 있는 말로서 다가옵니다. 나에게도 남보다 뛰어난 능력이 적어도 한 가지는 있을 것이라는 믿음 비슷한 것이 생겼습니다. 내가 가진 남..
글을 쓴다는 것 / 김태길 사람은 가끔 자기 스스로를 차분히 안으로 정리할 필요를 느낀다. 나는 어디까지 와 있으며, 어느 곳에 어떠한 자세로 서 있는가? 나는 유언 무언중에 나 자신 또는 남에게 약속한 바를 어느 정도까지 충실하게 실천해 왔는가? 나는 지금 무엇을 생각하고 있으며, 앞으로 어떤 길을 걸을 것인가? 이러한 물음에 대답함으로써 스스로를 안으로 정돈할 필요를 느끼는 것이다. 안으로 자기를 정리하는 방법 가운데에서 가장 좋은 것은 반성의 자세로 글을 쓰는 일일 것이다. 마음의 바닥을 흐르는 갖가지 상념을 어떤 형식으로 거짓 없이 종이 위에 옮겨 놓은 글은, 자기 자신을 비추어 주는 자화상이다. 이 자화상은 우리가 자기의 현재를 살피고 앞으로의 자세를 가다듬는 거울이기도 하다. 글을 ..
작금의 심정 / 김태길 대한민국 학술원이라는 고령집단에 깊이 관여한 까닭으로, 팔순이 넘는 나이임에도 근래 문상問喪의 기회를 자주 가졌다. 문상을 거듭하는 가운데 삶의 덧없음을 새삼 느껴온 작금이다. 삶에서 죽음으로 가는 길목은 생각보다 가까운 곳에 있다. 어제까지 멀쩡하던 사람이 오늘 홀연히 떠나는 것을 여러 차례 보았다. 삶과 죽음의 사이가 멀고먼 거리라는 착각 속에 살아온 세월이 가소롭다. 삶과 죽음이 바로 이웃이라는 사실을 깜박 잊었던 탓으로, 앞을 다투며 짧은 시간을 길게 보낸 나날이 어리석었던 것이다. 스피노자의 말이 생각난다. 존재하는 모든 개체個體들은 하나뿐인 대자연을 구성하는 여러 부분들이며, 이 점에서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라는 스피노자의 말이 다시금 진리로서 다가온다. 스피노자가 말했듯이..
꽃 떨어져도 봄은 그대로 / 김태길1 좋은 글은 읽는 이에게 감동을 준다. 글재주와 짜임새에 있어서 나무랄 곳이 없더라도, 감동을 주지 못한다면 좋은 글이 아니다. 글이 감동을 주는 요인에는 여러 가지 경우가 있다. 표현의 절묘함이 감동을 주기도 하고, 작품 속을 흐르는 정서가 감동을 일으키기도 하며, 세상을 보는 작가의 안목이 감동을 부르기도 한다. 한당(閑堂)의 수필 는 특별히 문장이 아름다운 것도 아니고 그 가운데 깊은 정서가 흐르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글이 감명 깊게 읽히는 것은, 그 가운데 심오한 삶의 지혜가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한당은 이 작품에서 청(淸)대 말기의 중국학자 유월의 이야기를 소개하고 있다. 유월이 과거에 응시했을 때 ‘꽃은 떨어져도 봄은 그대로 있다(花落春仍在..
글이 도무지 써지지 않는다. 글쓰기와 멀어지지 않으려면 매일 무엇이든 써야 한다는 주위의 조언이 마음을 조급하게 만든다. 기껏 머리에서 떠올린 단어들은 제자리를 찾지 못해 맞춰지지 않는 퍼즐 같다. 글머리부터 티격태격하다 힘들게 조합한 문장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 수가 없다. 쓰고 지우길 반복한 날이 얼추 한 달은 지났다. 생각해 보니 아끼던 안경이 사라진 시기와 딱 들어맞는다. 한 달 전쯤이다. 십오 년 가까이 써온 자줏빛 뿔테 돋보기안경이 감쪽같이 자취를 감추었다. 아침나절 신문을 볼 때 사용한 것까지는 기억나지만 어디다 벗어두었는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넓지 않은 집안을 몇 날 동안 뒤져도 행방이 묘연했다. 여분의 돋보기는 두어 개 더 있지만 집에서 글을 읽고 쓸 때 늘 애용해 온 것이다. 긴 ..
집 뒤 공원 길섶에 두 마리 까치가 나풀댄다. 아직 찬바람에 버석대는 검불 여기저기를 쪼아댄다. 아침나절 창밖에서 소리치던 녀석이 이놈인가 싶어 살폈다. 살을 에는 추위에 한동안 자취를 감추더니 봄을 물고 와 부려 놓았다. 며칠 새에 산수유, 개나리가 엷은 꽃잎을 내밀었 고, 벚꽃 움이 곧 터질 기세다. 문득 까치는 한겨울을 어디서 보내다 온 걸까 궁금해진다. 날이 추워 지면 새들이 사라지는 걸 당연시해 온 탓에 의문을 품지 않았던 일이다. 철새처럼 남쪽 따뜻한 곳으로 피접 다닌다는 말도 들어본 적 없으니 더 그렇다. 삭풍 몰아치는 산기슭의 까치집을 쳐다보면서는 빈집일 거라는 생각을 늘 한다. 얼기설기한 갖춤새로는 엄동 한천을 이겨내지 못하리라 여겼기 때문이다. 봄날 출현하는 녀석은 어딘가 먼 데서 숨어..
나는 바람입니다. 소리로 존재하는 나는 바다를 끌어안고 파도를 일으키며, 숲 우거진 계곡에서 바위를 만나 계곡물과 어울려 조잘대고, 때로는 대나무의 결기와 인고의 세월을 댓바람 소리로 전하기도 합니다. 교회 첨탑의 종소리를 불 꺼진 움막까지 실어다 주고 새들의 울음소리를 숲 속 가득 실어 나르며 밤새워 뒤척이는 개울물 소리에 기대어 함께 울 때도 있지요. 당신은 문득 누군가 당신 곁에서 울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든 적 없었나요? 내 손길이 닿는 빈 곳의 가락은 울음이 되거든요. 봄바람에 꽃잎에 비처럼 떨어질 때, 물기 하나 없는 낙엽이 발밑에서 부스스 부서져갈 때, 막연한 어느 겨울밤, 가로등 아래 흰 눈만 흩어져 내릴 때, 그럴 땐 내가 당신을 찾아간 것이라는 걸 기억해주기 바랍니다. 나는 바람입니다. ..
바람이 분다. 나뭇잎이 팔랑거린다. 바람은 어디서부터 불어와서 어디쯤서 사라지는가. 인생의 여름에서 한참 멀어진 지금, 아직도 잠재우지 못한 내 안의 바람이 마중을 나와 함께 일렁인다. 아이들 집에 머물 때 아침마다 산책로를 찾는 것은 꼭 운동을 위함이기보다는 일찍 잠에서 깨어 남아도는 식전시간을 주체할 수 없어서다. 오랜 습관으로 눈만 뜨면 직행을 하던 주방은 이곳에서만은 나의 영역이 아닐뿐더러 더운 여름날 아침부터 도를 닦는 사람처럼 책을 마주하고 앉았기도 좀 뭣하다. 생존의 전장으로 나가는 젊은이들의 부산한 하루의 시작을 방해하지 않으려고 나는 도둑고양이처럼 발소리를 죽여 가며 현관을 빠져나온다. 한강을 지척에 두고 서해바다가 멀지 않은 이곳은 바람이 많다. 바람 없는 날이 거의 없다. 겨울이면 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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