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야말로 ‘코로나 블루’를 한방에 날려주는 진정 반가운 봄소식이다. 미증유의 이 끔찍스런 상실의 시대에 그나마 위안물이 되어주었다. 1. 영화를 보기 전 영화를 보기 전, ‘미나리’라는 영화 제목을 듣는 순간 내 머릿속엔 미나리꽝 근처에서 놀았던 유년의 추억들이 활동사진처럼 펼쳐졌다. 우리 마을 한가운데에 지붕이 있는 커다란 우물이 있었다. 20여 가구 남짓한 동네에 유일한 우물터였다. 양쪽에 우람한 버드나무가 우물을 향해 맞절하듯 기울어져 있어 제법 운치있는 풍광이었다고 기억된다. 축축 늘어진 버들가지는 빨래하는 여인들에겐 그늘이 되어 주지만 꼬마들의 손아귀에 잡히는 가지들은 어김없이 찢기고 꺾이는 수난을 당했다. 어머니가 빨래하러 갈 때나 물 길러 갈 때면 나는 걸레 바구니라도 들고 쫄랑쫄랑 따라..
글을 쓰면 세상일에 대들고 싶은 의식이 꿈틀거린다. 내 얼굴에 물음을 던지는 일이다. 한편의 글 상이 떠오르면 눈이 아프고 머리가 어질하도록 달려든다. 하지만 붙잡은 글은 장타령 노랫가락을 풀고 난 각설이의 내민 손이 허하듯 그렇다. 홀로 흔드는 글 품바다. 글 쓰는 연유를 헤집으려니 무춤해진다. 밭둑길에 자욱했던 아지랑이를 잡는 것 같다. 어쨌든 뭔가 쓰고 싶었다. 이 쓰고 싶었다는 것은 유년부터 내게 어룽대었던 아지랑이 그림자 같은 거였다. 그것은 내 고향의 산천이 내게 심은 심상이요, 우렁각시 이야기를 실타래처럼 풀어내시던 할머니의 품이었다. 내 고향은 경주에서 오십여 리 떨어진 산골 심곡深谷이다. 사랑메기라는 산 고개에서 내리뻗은 산자락이 소쿠리처럼 감싼 십여 호 좀 넘는 작은 마을이다. 앞엔 심..
엄마 손을 잡고 캄캄한 밤길을 걸었다. 대여섯 살 먹은 아이가 겁을 먹을 만도 한데 엄마가 있어서 괜찮았다. 어른들 말을 들으니 무서운 것은 귀신이 아니라 인민군이라고 했다. 인민군이 무엇인지 모르지만 인민군에 발각되지 않게 조심조심 빙판길을 걸어야 한다고 엄마는 작은 소리로 말씀하셨다. 그런데 가죽 구두 굽에서 들리는 “똑똑 딱딱.” 소리가 골짜기에 더욱 크게 울렸다. 아버지가 사주신 구두였다. 한 짝이 언제 없어졌는지 쭈그려 신은 한쪽 발에서 소리를 냈다. 사람들은 구두 소리에 화를 내며 잰걸음으로 앞질러갔다. 엄마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욕을 먹으며 길을 걸었다. 밤하늘에 별들은 잠도 없는지 초롱초롱 빛을 품어내고 있었다. 엄마 등에서 동생도 잠이 들었는지 숨소리마저 내지 않았다. 엄마는 앞서가는 사..
오늘은 하늘도 맑고 투명하다. 오랜만에 가까운 친구들과 봄나들이에 나섰다. 들녘은 온통 노란 유채꽃으로 물들었고 연초록의 싱그러운 보리 물결이 봄 정취를 만끽하기에는 충분하였다. 머릿속을 메우던 잡념도 슬며시 물러간다. 서귀포 중문의 ‘지삿개’에 도착하여 산책로에 접어들었다. 해송 사이로 멀리 수평선이 보였고, 두 눈에 담을 수 없을 만큼 넓은 바닷가가 끝없이 펼쳐졌다. 해안선 끝자락에는 중문 해수욕장과 산방산도 눈에 들어와 멋스러운 풍치를 더해 주었다. 몇 발짝 더 다가서서 절벽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해안선 아래로 병풍을 둘러놓은 듯 펼쳐진 절벽과 어우러져 바다 풍경의 독특함을 보는 순간 와! 하는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끝없이 펼쳐진 바다와 해변의 현무암이 오묘한 조화를 이루며 마음을 사로잡는다. 자..

“마셔 보세요!” 김 원장이 내놓은 것은 투명한 유리잔이었다. 묵직했다. 그러나 무얼 마시라는 걸까. 유리컵 안엔 아무것도 담겨있지 않았다. “마셔보세요!” 다시 독촉을 해왔다. “오전에 제가 한 번 마셨으니 가득 차 있지 않을 지도 몰라요.” 컵을 입으로 가져가 ‘훅’ 하고 들이마셔 봤다. 향긋한 냄새가 나는 것 같기도 하고 그렇지 않은 것도 같았다. “햇빛이에요” 그녀의 설명이었다. 내가 지금 마신 건 창가에 쏟아지는 햇빛을 받아둔 것이란다. 좀 맹랑하단 생각이 들면서도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재미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햇빛을 내 속으로 들여보내준다? 그러면 내 속에선 어떻게 반응할까. 갑자기 들어온, 아니 한 번도 보지도 느껴보지도 못했던 한 밝음이 어둠 속의 그들에게 순간적으로 다가갔을 때 어..

바람이 분다. 어둠을 더듬어 온 바람은 동해의 눈꺼풀을 살며시 올린다. 곤히 잠든 아이를 깨우는 엄마의 손길처럼 살갑게 바다의 몸을 쓰다듬는다. 바다는 칭얼대는 아이처럼 몸을 뒤채면서도 조금씩 깨어나고 있다. 동심의 푸른 바다, 동해를 깨우는 바람에서도 푸른 색감이 묻어나는 듯하다. 남편과 함께 블루로드를 걷는 중이다. 어떤 손이 있어 밋밋하던 길에 푸른색을 입혀 놓은 것일까. ‘푸른’이라는 말이 주는 청량한 어감이 길에 대한 기대치를 한껏 높여준다. 게다가 길 위에서, 하루의 처음을 여는 태양의 장관을 만날 수 있다니. 발걸음이 빨라진다. 길(吉)한 터의 조건 중 하나가 좌청룡우백호라 하던가. 무성한 솔숲과 동해를 양쪽으로 거느린 오솔길이 해안을 따라 끝없이 이어진다. 여명이 깔린 길은 몽환적이기까지 ..
예쁘다 너는. 섹시하다 너는. 한동안 나는 이 거리를 지날 때마다 너를 눈여겨보아 왔다. 그러나 이토록 화사한 너를 만나러 오는 일은 그리 쉽지 않았다. 나의 마음속에는 오랫동안 혹독한 겨울이 머물러 있었다. 봄이 오고 꽃이 피어나도 그 냉기는 좀처럼 가시지 않았다. 마침내 꽃잎이 떨어지기 시작한 오늘, 나는 깊은 호흡으로 애써 그 냉기를 몰아낸다. 그리고 유리문을 열고 너에게로 다가선다. 너는 옛날의 나를 기억케 한다. 너의 몸은 아침에 갓 깨어난 섬세한 꽃잎 같은 피부에 싸여 있다. 송아지 가죽이다. 손끝으로 느껴지는 촉감은 진저리가 쳐질 만큼 부드럽다. 입안에 침이 고여 혀를 깨물 뻔한다. 너에게서는 비릿하면서도 초콜릿 향 같은 소녀의 살내음이 난다. 그러나 겨울을 견디고 피어난 창밖에 벚꽃처럼 매..
어지러웠다. 오랜만에 화창한 햇볕을 대하니 너무 눈부시고 현기증이 났다. 그대로 땅바닥에 쭈그려 앉아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잠시 그러고 있다가 일어나면 그만이고 별로 문재 될 것도 없었다. 그런데 나의 그런 모습이 남의 눈에는 크게 걱정스러웠던 모양이다. “왜 그러세요, 도와드릴까요?” 눈을 들어보니 20대로 보이는 아가씨가 나의 팔을 잡고 흔들면서 아주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괜찮다고, 걱정 말라고 몇 번이나 말해서야 그 아가씨는 제 갈 길을 갔다. 회색 바지에 베이지색 코트를 걸치고 머릿결이 뒷목을 덮은 키가 훤칠한 아가씨였다. 나는 한참동안이나 멀어져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아가씨가 내 곁에 머문 시간은 극히 짧은 순간이었지만 내게는 진한 여운을 남겼다. 요즘은 길을 가다가 약자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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