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여 지리산에 오려거든 / 이원규 행여 지리산에 오려거든/ 천왕봉 일출을 보러 오시라/ 삼 대째 내리 적선한 사람만 볼 수 있으니/ 아무나 오지 마시고/ 노고단 구름바다에 빠지려면/ 원추리 꽃무리에 흑심을 품지 않는/ 이슬의 눈으로 오시라// 행여 반야봉 저녁노을 품으려면/ 여인의 둔부를 스치는 풀잎으로 오고/ 피아골 단풍을 만나려면/ 먼저 온 몸이 달아오른 절정으로 오시라// 굳이 지리산에 오려거든/ 불일폭포의 물 방망이를 맞으러/ 벌 받는 아이처럼 등짝 시퍼렇게 오고/ 벽소령의 눈 시린 달빛을 받으려면/ 뼈마저 부스러지는 회한으로 오시라// 그래도 지리산에 오려거든/ 세석평전의 철쭉 꽃 길을 따라/ 온몸 불사르는 혁명의 이름으로 오고/ 최후의 처녀림 칠선계곡에는/ 아무 죄도 없는 나무꾼으로만 오시라/..
실로 먼길을 돌아 지리산에 왔다. 삼신산(三神山)의 하나인 지리산은 민족의 영산이자 모성의 산이다. 그만큼 크고 높고 깊고 넓다. 지리산을 잘 안다는 말은 몇 생을 걸지 않고서는 거짓말일 수밖에 없다. 그러니 지리산을 잘 모른다는 말이 언제나 정답인 것이다. 세상의 모든 일과 자연이 그러하겠지만 알 듯 잘 모르겠고, 가까이할수록 멀어지고, 멀어질수록 어느새 가까워지는 경이로운 산이 바로 지리산이다. 그러니 지리산을 조금이라도 알기 위해서는 한몸이 되는 수밖에 없다. 내 고향 경북 문경에서 대구, 서울을 지나 지리산까지 오는 데 35년이 걸렸으며, 이제 지리산과 섬진강의 품에 안긴 지 겨우 6년이 지났다. 자본주의와 도시적 욕망의 삶이 환멸과 권태였다면, 아주 작은 산촌이나 강촌의 지순한 삶은 종교보다 높..
섬진강 물안개가 촉촉이 귓불에 내리는 초여름 아침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낮은 목소리, 사랑의 귓속말이 세상을 바꿉니다. 크고 빠르고 높은 목소리는 일시적인 긴장과 공포를 유발할 뿐 마음 깊숙한 곳까지 도달하지 못합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낮고 느린 목소리로 속삭이면, 뜨거운 입술이 닿기도 전에 귓불의 솜털들이 바르르 한쪽으로 쏠리다가 일어서고, 그러는 사이 사랑의 최면술은 시작되는 것이지요. 배추벌레처럼 자근자근 사랑하는 이의 귓바퀴를 깨물면 밤마다 달팽이관 깊숙이 이명처럼 휘파람새가 웁니다. 어느새 목덜미엔 마취제가 퍼지듯 마구 물어도 하나도 아프지 않으니 참으로 신기한 일이 아닌지요. 낮은 목소리가 세상을 바꾸고, 그 모든 사랑의 이력서는 귓속말의 추억이었습니다 그러나 추억이라는 것이 늘 아름다운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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