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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느낌

이원규 시인

부흐고비 2021. 5. 23. 00:51

                                       
                                         행여 지리산에 오려거든 / 이원규


행여 지리산에 오려거든/ 천왕봉 일출을 보러 오시라/ 삼 대째 내리 적선한 사람만 볼 수 있으니/
아무나 오지 마시고/ 노고단 구름바다에 빠지려면/ 원추리 꽃무리에 흑심을 품지 않는/ 이슬의 눈으로 오시라// 행여 반야봉 저녁노을 품으려면/ 여인의 둔부를 스치는 풀잎으로 오고/ 피아골 단풍을 만나려면/ 먼저 온 몸이 달아오른 절정으로 오시라// 굳이 지리산에 오려거든/ 불일폭포의 물 방망이를 맞으러/ 벌 받는 아이처럼 등짝 시퍼렇게 오고/ 벽소령의 눈 시린 달빛을 받으려면/ 뼈마저 부스러지는 회한으로 오시라// 그래도 지리산에 오려거든/ 세석평전의 철쭉 꽃 길을 따라/ 온몸 불사르는 혁명의 이름으로 오고/ 최후의 처녀림 칠선계곡에는/ 아무 죄도 없는 나무꾼으로만 오시라// 진실로 진실로 지리산에 오려거든/ 섬진강 푸른 산 그림자 속으로/ 백사장의 모래알처럼 겸허하게 오고/ 연하봉 벼랑과 고사목을 보려면/ 툭하면 자살을 꿈꾸는 이만 반성하러 오시라// 그러나 굳이 지리산에 오고 싶다면/ 언제 어느 곳이든 아무렇게나 오시라/ 그대는 나날이 변덕스럽지만/ 지리산은 변하면서도 언제나 첫 마음이니/ 행여 견딜 만하다면 제발 오지 마시라.//

(행여 지리산에 오시려거든) 자서(自序)
어느새 지리산 입산 17년이 지났다./ 그 이전과 이후의 삶은 비교 불가능할 정도로 달라졌다./ 내 고향 문경의 삶과 서울 등의 저자거리,/ 그리고 지리산의 생활이 정확하게/ 삼등분 되는 시절과 딱 마주쳤다./ 참으로 오묘한 경계다.// 세상에 처음 시를 발표한 지 어느새 30년,/ 그동안 다섯 권의 시집을 펴냈다./ 적지도 많지도 않을 정도의 시력,/ 돌이켜 보면 참으로 부끄럽다./ 남은 생애의 첫 출발점으로 삼아/ 자선 육필시집을 낸다./ 육필보다 더 낮은 족필(足筆)의 시를 꿈꾸며.// 2015년 새봄 지리산 하 섬진강 변/ 피아산방에서/ 이원규//

 

족필(足筆) / 이원규
노숙자 아니고선 함부로/ 저 풀꽃을 넘볼 수 없으리// 바람 불면/ 투명한 바람의 이불을 덮고/ 꽃이 피면 파르르/ 꽃잎 위에 무정처의 숙박계를 쓰는// 세상 도처의 저 꽃들은/ 슬픈 나의 여인숙// 걸어서/ 만 리 길을 가본 자만이/ 겨우 알 수 있으리/ 발바닥이 곧 날개이자/ 한자루 필생의 붓이었다는 것을//

달빛을 깨물다 / 이원규
살다 보면 지근지근 달빛을 깨물고 싶은 날들이 있다// 밤마다 어머니는 이빨 빠진 합죽이었다/ 양산골 도탄제 너머 지금은 문경석탄박물관/ 연개소문 촬영지가 된 은성광업소/ 육식 공룡의 화석 같은 폐석 더미에서/ 버린 탄을 훔치던 수절 삼오십 년의 어머니/ 마대 자루 한가득 괴탄을 짊어지고/ 날마다 도둑년이 되어 십 리 도탄재를 넘으며/ 얼마나 이를 악물었는지/ 청상의 어금니가 폐광 동바리처럼 무너졌다// 하루 한 자루에 삼천 원/ 막내아들의 일 년 치 등록금이 되려면/ 대봉산 위로 떠오르는 저놈의 보름달을/ 남몰래 열두 번은 꼭꼭 씹어 삼켜야만 했다// 봉창 아래 머리맡의 흰 사발/ 늦은 밤의 어머니가 틀니를 빼놓고/ 해소 천식의 곤한 잠에 빠지면/ 맑은 물속의 환한 틀니가 희푸른 달빛을 깨물고/ 어머니는 밤새 그 달빛을 되새김질하는/ 오물오물 이빨 빠진 합죽이가 되었다// 어느새 나 또한 죽은 아버지 나이를 넘기며/ 씹을 만큼 다 씹은 뒤에/ 아니, 차마 마저 씹지 못하고/ 할 만큼 다 말한 뒤에 아니, 차마 다 못하고/ 그예 들어설 나의 틀니에 대해 생각하다/ 문득 어머니의 틀니의 행방이 궁금해졌다/ 장례식날 대체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털신이며 속옷이며 함께 불에 타다 말았을까/ 지금도 무덤 속 앙 다문 입속에 있을까// 누구는 죽은 이의 옷을 입고 사흘을 울었다는데/ 동짓달 열여드렛날 밤의 지리산/ 고향의 무덤을 향해 한 사발 녹차를 올리는/ 열한 번째 제삿날 밤이 되어서야 보았다/ 기우는 달의 한쪽을 꽉 깨물고 있는, 어머니의 틀니//

속도 / 이원규
토끼와 거북이의 경주는/ 인간들의 동화책에서만 나온다/ 만약 그들이 바다에서 경주를 한다면?/ 미안하지만 이마저 인간의 생각일 뿐/ 그들은 서로 마주친 적도 없다.// 비닐하우스 출신의 딸기를 먹으며/ 생각한다 왜 백 미터 늦게 달리기는 없을까/ 만약 느티나무가 출전한다면/ 출발선에 슬슬 뿌리를 내리고 서 있다가/ 한 오백년 뒤 저의 푸른 그림자로/ 아예 골인 지점을 지워버릴 것이다.// 마침내 비닐 하우스 속에/ 온 지구를 구겨넣고 계시는,/ 스스로 속성 재배되는지도 모르시는/ 인간은 그리하여 살아도 백년을 넘지 못한다.//

부엉이 / 이원규
밤새 너무 많이 울어서/ 두 눈이 먼 사람이 있다.//

동행 / 이원규
밤마다/ 이 산 저 산/ 울음의 그네를 타는/ 소쩍새 한 마리/ 섬진강변 외딴집/ 백 살 먹은 먹감나무를 찾아왔다//

몹시 / 이원규
당신이 몹시 아프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아프다,는 말보다/ 몹시,라는 말이 더 아팠습니다// 그러니까 당신은 몹시의 발원지/ 몹에서 입을 꽉 다물고/ 시에서 겨우 입술을 뗍니다/ 그날부터 나의 시는 모두 몹시가 되었습니다// 걸어서 지구 열 바퀴를 돌면/ 달까지, 당신의 뒷면까지 가닿을 수 있을까요// 얼굴이 몹시 어둡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월하미인 / 이원규
그믐마다/ 밤마실 나가더니/ 저년,/ 애 밴 년// 무서리 이부자리에/ 초경의 단풍잎만 지더니// 차마 지아비도 밝힐 수 없는/ 저년,/ 저 만삭의 보름달// 당산나무 아래/ 우우우 피가 도는/ 돌벅수 하나//

옛 애인의 집 / 이원규
라일락 푸른 잎을 씹으며/ 귀향하듯/ 옛 애인의 집을 찾아가네// 계단은 열한 계단/ 그 아래 쪼그려 앉은 할머니/ 여전히 졸면서/ 구천을 건너는 생불(生佛)이네// 라일락 푸른 잎/ 그 사랑의 쓴맛을 되새기며// 대문은 파란 대문/ 엽서가 도착하기도 전에/ 도둑고양이처럼 지나가네// 세상의 모든 집/ 옛 애인의 집//

 

뒷집 소녀 때문에 / 이원규
기필코 좋은 시를 써야겠다/ 섬진강 변 녹차밭 대밭 옆으로 이사 온 뒤/ 집들이 꽃놀이 밤새 너구리처럼 술만 퍼마시다/ 뒷집 소녀 때문에 시를 써야겠다// 평균 연령 71세의 강마을에/ 쫑알쫑알 아이 목소리가 들려/ 필름 끊긴 창문을 열고 헛기침을 하니/ 강아지 얼씨구와 놀던 아홉 살 소녀/ 먹포도 두 눈을 반짝이며 인사를 한다// 아찌, 정말 시인이세요?/ 두 눈이 빨개, 밤새 시 쓰다 나왔어요?/ 슬그머니 눈곱을 닦으며/ 마침내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일생 단 한 편의 좋은 시를 써야겠다/ 오로지 뒷집 귀농자의 딸 가연이 때문에//

겁나게와 잉 사이 / 이원규
전라도 구례 땅에는/ 비나 눈이 와도 꼭 겁나게와 잉 사이로 온다// 가령 섬진강변의 마고실이나/ 용두리의 뒷집 할머니는/ 날씨가 조금만 추워도, 겁나게 추와불고마잉!/ 어쩌다 리어카를 살짝만 밀어줘도, 겁나게 욕봤소잉!/ 강아지가 짖어도, 고놈의 새끼 겁나게 싸납소잉!// 조깐 씨알이 백힐 이야글 허씨요/ 지난 봄 잠시 다툰 일을 얘기하면서도/ 성님, 그라고봉께 겁나게 세월이 흘렀구마잉!// 궂은 일 좋은 일도 겁나게와 잉 사이/ 여름 모기 잡는 잠자리 떼가 낮게 날아도/ 겁나게와 잉 사이로 날고/ 텔레비전 인간극장을 보다가도 금세/ 새끼들이 짜아내서 우짜까이잉! 눈물 훔치는/ 너무나 인간적인 과장의 어법// 내 인생의 마지막 문장/ 허공에라도 비문을 쓴다면 꼭 이렇게 쓰고 싶다/ 그라제, 겁나게 좋았지라잉!//

북극성 / 이원규


숲속에 홀로 누운 밤이면
나의 온몸은 나침반
그대 향해 파르르 떠는 바늘

밤에 외눈의 그대 깜빡일 때마다
나의 몸은 팽그르르 돌아
정신이 없다

극과 극의 사랑이여
단 하룻밤만이라도
두꺼비집을 내리고 싶다


빈손 / 이원규
겨울 산정에 올라 별 사진을 찍었다// 일생 가난한 시인의 빈손/ 밤새 별빛 어루만지던 차디찬 손// 몸살의 그대 뜨거운 이마를 가만히 짚어줄 뿐//

소쩍새의 길 / 이원규
섬진강 변 용두리 뒷집 할머니/ 밤마다 백 살 먹은 먹감나무 찾아오는/ 소쩍새를 두고 한 말씀 하시는데// 에라이, 저놈의 새 새끼/ 왜 저러코롬 울고 자빠지는지 아요?/ 밤 열 시에 내 염장 질러로 온당께/ 반평생 내 혼자 사는지 다 암시롱/ 지 혼자 짝을 찾겄다고 고약하니 울고잉/ 테레비 끄고 잠들라 함시롱 쳐들어와/ 한 식경 또 지랄 염병 겁나게 울어쌓다가/ 강 건너 훨훨 문척 안지마을로 간당께// 내 다 알제라, 환하게 앍말고잉/ 저놈의 소쩍이가 워디 워디로 밤마실 댕기는지/ 으미 흐미, 오줌보 터져불겄네잉//

독거 / 이원규
남들이 출근할 때/ 섬진강 천둥오리떼와 더불어 물수제비를 날린다/ 남들이 머리 싸매고 일할 때/ 낮잠을 자다 지겨우면 선유동계곡에 들어가 탁족을 한다/ 미안하지만 남들이 바삐 출장갈 때/ 오토바이를 타고 전국 일주를 하고/ 정말이지 미안하지만 남들이 야근할 때/ 평상 모기장 속에서 촛불을 켜놓고 작설차를 마시고/ 남들이 일중독에 빠져 있을 때/ 나는 일없어 심심한 시를 쓴다/ 가끔 굶거나 조금 외로워하는 것일 뿐/ 사실은 하나도 미안하지 않지만/ 내게 일이 있다면 그것은 노는 것이다/ 일하는 것이 곧 죄일 때 그저 노는 것이 얼마나 정당한가/ 스스로 위로하며 치하하며/ 섬진강 산 그림자위로/ 다시 물수제비를 날린다/ 이미 젖은 돌은 더 이상 젖지 않는다//

지푸라기로 다가와 어느덧 섬이 된 그대에게 / 이원규
연푸른 잎사귀가 나부끼니/ 바람도 살살 부는 줄 알겠습니다./ 꽃잎 하나 띄워놓고 보니/ 강물도 어디론가 흐르는 줄 알겠습니다/ 바람이 불지 않아도/ 유난히 몸살 앓던 나뭇잎 하나/ 머리카락에 가리어/ 그 절절한 얼굴이 잘 안보이더니/ 행여 그대 돌아서 가는 길은 아닌지/ 더 이상/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지푸라기로 다가와/ 어느덧 커다란 섬이 된 그대여!//

별다방 / 이원규
저 멀리 빛난다고 다 별빛은 아니었네/ 점촌역전 골목의 지하 다방/ 그녀의 청보라 스웨터에 별들이 반짝거렸지/ 한번 불붙으면 펄펄 뛰는 팔각 성냥갑/ 달달하게 녹기 전에는 날 세운 각설탕// 오빠야, 내도 차 한 잔 마실게/ 옆자리 앉자마자 허벅지 쓰다듬으며/ 근데 얼굴이 캄캄한 오빠는 뭐 하는 사람?/ 나야 뭐, 지하 막장에서 벼, 별을 캐지/ 아, 죽어야만 2천만 원짜리 그 막장 꺼먹돼지!/ 그래 그래 별마담, 커피 두 잔 부탁해// 철없는 시인이 되었다가 폐광하고/ 경제학 원론을 불태우던 그 시절/ 지하 1층 별다방에서 별똥별을 보았지/ 밤마다 9톤의 별들에게 다이너마이트 터뜨리며/ 지하 700미터 막장에서 운석을 캐냈지/ 오후 네 시에 팔팔 항목으로 들어가/ 자정 무렵 시커먼 포대자루로 기어 나오면/ 코피처럼 폐석처럼 쏟아지던 별빛들// 세상도 나도 너무 밝아져 다 식어버렸네/ 지천명 넘어서야 밤의 지리산 형제봉/ 해발 1100미터 산마루에 홀로 누워/ 아득하고 아련한 별빛들을 소환하네/ 아주 가까이 빛나던 것들은 모두 별빛이었지//

별똥별과 소원 / 이원규
지리산에는 첫눈이 오시느라 보이지 않지만/ 저 눈밭 속으로 별똥별도 함께 내릴 것이다.// 그 중에 하나 쯤은/ 필선계곡에 깃든 산토끼의 머리맡에도 떨어질 것이다./ 저를 향해 달려오는 별똥별을 보며/ 산토끼도 저도 한가지 소원을 빌 것이다./ "이대로 영원히 산토끼일 수 있기를!"// 이보다 더한 별똥별의 축복이 어디 있으랴,/ 주문처럼 일평생 외워야 할 유일한 소원./ 무련, 그대도 나도 밤하늘을 보며 빌어 보는가./ "영원히 이대로 나는 나이기를!"//

겨울 외등 / 이원규
어디서부터 얘기를 시작해야 할까/ 저 아득한 별에서/ 이 시대의 가장 구체적인 외등까지/ 구호도 없이 눈발은 날리는데/ 또 어디쯤에서 눈물겨운 얘기를 끝내야 할까// 도시 뒷골목길을 지나/ 늦게 귀가하는 갓서른의 겨울/ 밑동부터 마르는 수상한 시절의 코스모스와/ 소주 몇 잔에도 쉬이 비틀거리는 세상/ 세상은 온통 얼어서 빛나는 것들뿐이었다/ 아프게도 반짝이며 일어서는 서릿발과/ 억장의 가슴으로 무너져 내리는 서릿발 사이사이로/ 얼굴 없는 아니, 창백한 풀꽃들은 처참했다// 안개와 어둠으로/ 세상이 더 많이 서러워질수록/ 밤새 관념투성이 정신들/ 깊이깊이 발목이 빠져 쓰러지는데/ 다시 한번 두 눈 부릅뜨고 바라보라// 요소요소 척후병처럼 말없이 다가와/ 우리 절망의 심장을 속속들이 엿보고 있는/ 저 겨울 외등을/ 끝내 빛을 거부하지 못하고/ 잠 깨어 바라보는 누구에게나/ 어둠이 남겨놓은 저 겨울 외등의 성역을// 언제나 절망의 다른 이름은/ 섣부른 희망이었다/ 너무 멀어 오히려 절망이 되는 별빛도 아닌/ 지상의 가장 구체적인 불빛을/ 뜨거운 이마 타는 눈빛으로 바라보라/ 한 시대의 쓸쓸한 밤을 지켜줄 것은/ 오직 저 겨울 외등뿐일지니/ 풀꽃 하나가 세상의 한 모서리를 감당하듯/ 저마다의 성역을 향하여/ 산 자는 산 값으로 치열하라!/ 살아남은 자는 살아남은 값으로 치열하라!//

몽유운무화 / 이원규
몸이 무너져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 너무 쉬운 여자는 지루하고/ 너무 뻔뻔한 남자는 지겨워서/ 저잣거리는 침침하고/ 산중 헤매는 것도 심심해서// 7년 동안 모터사이클 타고 별종 위기 야생화를 찾아다녔다// 바위 뒤에 숨은 아이/ 산그늘 깊이 무너진 남자/ 아예 얼굴을 지워버린 여자// 안개 치마를 입고 구름 이불 덮어쓴/ 몽유운무화夢遊雲霧畵/ 저 홀로 훌쩍이는 꽃을 찾아/ 지구에서 달까지 38만 4300킬로미터// 오지의 야생화들이 병든 나의 폐를 살렸다//

                         능소화 / 이원규

꽃이라면 이쯤은 돼야지//
화무 십일홍/ 비웃으며/ 두루 안녕하신 세상이여/
내내 핏발이 선/ 나의 눈총을 받으시라//


오래 바라보다/ 손으로 만지다가/ 꽃가루를 묻히는 순간/ 두 눈이 멀어버리는/ 사랑이라면 이쯤은 돼야지//
기다리지 않아도/ 기어코 올 것은 오는구나//

주황색 비상등을 켜고/ 송이송이 사이렌을 울리며/
하늘마저 능멸하는//

슬픔이라면/ 저 능소화만큼은 돼야지//


찔레꽃 / 이원규
아버지가 돌아왔다// 제삿밥 물린 지도 오래/ 청춘의 떫은 찔레 순을 씹으며/ 뼈마디마다 시린 가시를 내밀며/ 산사나이 지리산에서 내려왔다/ 흑백 영정사진도 없이/ 코끝 아찔한 향을 올리며/ 까무러치듯 스스로 헌화하며/ 아직 젊은 아버지가 돌아왔다// 어혈의 눈동자 빨간 영실들이야/ 텃새들에게 나눠주며/ 얘야, 막내야/ 끝내 용서받지 못할/ 차마 용서할 수 없는 내가 왔다/ 죽어서야 마흔 번/ 해마다 봄이면 찔레꽃을 피웠으니/ 얘야, 불온한 막내야/ 혁명은 분노의 가시가 아니라/ 용서의 하얀 꽃이더라// 하마 네 나이 불혹을 넘겼으니/ 아들아, 너는 이제 나의 형이다/ 이승에서 못다 한 인연/ 늙은 안해는 끝내 고개를 돌리며/ 네 걱정만 하더라// 아서라 에비, 애비!/ 나보다 어린 아버지가 돌아왔다//

물고기는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 이원규
쌍계사 법고 소리/ 공중 헤엄치는/ 목어의 울음소리 들으며/ 아직 젊은 시인은/ 낡은 투망을 손질했다// 산살구꽃들/ 일제히 몸을 날리는/ 사월이라 초파일 전야// 쌍계사 다리 밑에서/ 옴, 오옴, 오오옴/ 범종 소리에 맞춰/ 서른세 번의 투망질을 했다// ​꺽지 은어 빠가사리 버들치/ 목어처럼 내장을 빼내어도/ 물고기들은 내내/ 묵언수행 중이었다// 흰 눈썹 무성한 스님과/ 회를 뜨고 매운탕을 끓이며/ 맑은 만큼 독한 소주로/ 소독을 한 물고기,/ 물고기 눈빛을 빛내며 실없이 웃었다// 눈물도 없이/ 내장도 없이/ 우는 법을 터득한 것일까// 물고기는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벙어리 달빛 / 이원규

   은어떼 솟구치는 강물 위로
   달빛 투망을 던지는 이여
   섬진강변 사도리의 벙어리여
   그대는 어이해
   막걸리에 막김치를 먹고도

   내장이 그리 맑은가
   투망질을 가르쳐준 이여
   말없이 달무릴 펼치는 이여
   은어 눈치 쏘가리
   잡은 물고기 다 놓아주며
   밤마다 누구를 호명하는가
   달빛이 벙어리라면
   눈부신 햇살은 귀머거리 아닌가
   그대 마흔 살의 통뼈가 더없이 투명하다


청학동에선 길을 잃어도 청학동이다 / 이원규
울지 마라/ 길 위에서 길을 잃어도 그 또한 길이다// 아주 먼 옛날 우리가 오기 전에도/ 지리산은 그대로 여기 이 자리에 있었으며/ 아주 먼 훗날 우리가 떠난 뒤에도/ 섬진강은 마냥 이대로 유장하게 흐를 것이니/ 너무 촐싹거리며 쟁쟁 바둥거리지 말자/ 아주 오래 전에 두 마리 학이 날아와 둥지를 틀었으니// 쌍계청학 실상백학이라/ 지리산의 남북으로 청학동과 백학동이 있었다는데/ 천년 전의 고운 최치원 선생은/ 두류산하 청학동에 와서 청학동을 찾지 못하고/ 아니 찾으려고만 했지 끝끝내 만들지 못하고/ 남명 조식 선생의 대성통곡은/ 천왕봉 천석들이 종을 울리고/ 매천 황현 선생은 절명시 사수를 남기며 자결을 하고/ 비운의 산사나이 이현상 선생은 빗점골에서 총을 맞고/ 우천 허만수 선생은 스스로/ 지리산의 풀과 나무와 이끼가 되었다/ 청운 백운의 꿈은 마고할미 천왕할매와 더불어/ 지리산의 전설이 되고 신화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바야흐로 때가 무르익어/ 다시 백학 청학의 무리들이 날아들고/ 고운 선생이 돌아와 형제봉에서/ 악양동천을 내려다보며/ 이중환의 택리지를 읽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남명과 매천 선생이 7,250만 개의/ 싸리 회초리를 가다듬으며/ 네 이놈들아, 어서 종아리를 걷어라 호통을 치고/ 화산 이현상 선생이 돌아와 골골이 단풍을 물들이고/ 우천 허만수 선생이 노고단 천왕봉/ 케이블카 철탑자리에/ 심장과 허파와 생간을 내다 걸었으니// 아주 오래 전부터 지리산중에 청학동이 있었고/ 3천 명의 신선들이 매일 먹어도/ 쌀이 나오는 동굴이 있었다는데/ 그 동굴이 거대한 항아리 모양의 악양동천이면 어떻고/ 화개동천이면 어떻고 구례평야면 또 어떤가/ 신선의 신(神)은 하늘과 땅의 이치를/ 보고 아는 사람이요/ 신선의 선(仙)은 산에 가까이 사는 사람이니/ 말 그대로 신선은 하늘과 땅의/ 이치를 아는 산사람이 아닌가// 바야흐로 때가 무르익어 지리산에서/ 벼농사를 짓고 대봉 곶감을 깎는 사람이 곧 신선이요/ 녹차를 덖고 밥을 하고 아이를 낳는 선녀/ 집을 짓고 도자기를 굽고 찻상을 만드는 선남/ 천연염색을 하고 손두부를 만들고/ 면사무소 농협 가게로 출근하는 선남선녀/ 사진 찍고 그림 그리고/ 시 쓰고 기타 치는 신선들이 있으니/ 청학동을 찾아 헤매고 헤매다/ 수처작주(隨處作主)라 앉은 자리가 바로 꽃자리니/ 마침내 날마다 스스로 청학동을 만드는 사람들/ 그리하여 지리산하 청학비지/ 바로 지금 여기 이곳에서/ 두 눈에 핏발이 선 채로/ 아직 신선이 되지 못하는 사람들만 불쌍한 것이다/ 하지만 그마저 신선, 아주 잠깐 불쌍한 신선이 아닌가//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는 곳이 청학동이요/ 이보다 더 나쁠 수 없는 곳도 청학동이니/ 대체 어디냐고, 청학동이 어디냐고 묻지 마라/ 아주 먼 옛날 우리가 오기 전에도/ 지리산은 그대로 여기 이 자리에 있었듯이/ 끝내 찾지 못한 청학동은 있어왔고/ 아주 먼 훗날 우리가 떠난 뒤에도/ 섬진강은 마냥 이대로 유장하게 흘러가듯이/ 바로 지금 여기 오늘의 잔치 한 마당이/ 청학동의 현현이니/ 청학동은 정말로 있었다고 대대로 전해지리니// 대체 어디냐고, 청학동이 어디냐고/ 너무 촐싹거리며 쟁쟁 바둥거리지 말자/ 청학동에선 길을 잃어도 청학동이다//

돌 / 이원규
당산나무 아래/ 돌탑 속의 못난 돌 하나/ 저도 언젠가는/ 새처럼 날아오른 적이 있으리// 누구인가/ 장난 삼아 던진 돌팔매가 아니라/ 스스로 날아오른 적이 있으리// 화석을 보면 안다/ 물고기처럼 헤엄치던 시절과/ 고사리 이파리처럼/ 아주 낮은 목소리에도/ 흔들리던 시절이 있었다는 것을// 내 몸 속의 담석 하나/ 사리도 아닌 것이/ 아주 천천히 날개를 펴고 있다//

벽소령 안개 사우나 / 이원규
그대와 더불어/ 음력 칠월 열엿새의 벽소령에서/ 달빛 세례를 받고 싶었지만// 이미 달은 지고/ 나 홀로 새벽 네 시의 산길/ 훌훌 옷을 벗어 신갈나무 아래 감추고/ 알몸으로 산길을 걸었다/ 춤을 추었다// 누구인가/ 하산의 인기척이라도 나면/ 산신령처럼/ 검은 바위 나무 뒤에 몸을 감추면서/ 슬쩍 엿보기도 하면서// 산안개 촉촉이 내려/ 머릿결이며 속눈썹이며/ 온몸의 솜털이 다 하얘지도록/ 산신령 처럼 외로운 산신령처럼//

산중문답 / 이원규
으름덩굴 짙푸른 그늘 아래/ 한 평짜리 대나무 평상/ 에프킬라를 버리고/ 구례 장터에서 사온 모기장을 쳤다// 닭장에서 암탉이 울고/ 얼마나 울었는지/ 토끼장의 토끼는 두 눈이 빨갛다// 모기장 속에 드러누워/ 낮잠을 자려다 모기장 밖의 모기와/ 두 눈이 딱 마주쳤다// 배고프냐, 약 오르지?/ 치사한 놈, 네 피는 너무 탁해!/ 어쭈구리, 알만 배면 다냐?/ 넌 가려울 뿐이지만 난 생존의 문제야.// 햐아, 이놈 봐라, 빨대도 입이냐?/ 벼엉신, 모기장 속에 갇힌 건/ 바로 너, 그게 네 인생이야!// 도둑고양이 한 마리/ 씨익 웃으며 돌담을 넘고 있다//

현주소 / 이원규
1/ 주소 좀 불러주세요/ 예에, 구례군 문수골의 외딴집인데요/ 너무 추상적이지 않나요?// 매화나무 환한 그늘 아래/ 나의 눈썹을 스치는 바람의 현주소/ 행여 낡은 집이 무너지고/ 세상이 바뀌어도 끝끝내 변치 않을// 북위 35도 12분 38초/ 동경 127도 31분 39초// 상투적인 편지는 유실될지 모르니/ 꼭 한번 놀러 오세요 매화꽃/ 다 지기 전에 또 이사하기 전에// 2/ 뭐라구요, 너무 구체적이어서/ 오히려 잘 못 찾겠다구요?// 그 참, 벌 나비/ 북극성은 잘만 찾아오시는데// 차라리 그대 마음의 현주소를/ 스리슬쩍 알려주신다면/ 아니 간 듯 내 먼저 낮달처럼 찾아뵙지요//

환절기 / 이원규
밤새 뒷산 벼랑이 기침을 한다// 밤낮 기온차 겨우 13도 넘을 뿐인데/ 늙은 바위가 구르고/ 문득 저승이 가까워졌다// 이윽고 호랑지빠귀가 울고/ 명치끝에 촛불이 일렁거리니/ 그래, 네가 온 것이다/ 맨발의 바람으로/ 푸른 돌이끼에 미끄러지듯/ 오래전에 떠난 네가 물이 되고/ 풀잎이 되고 산노루로 울더니/ 이미 오래전에 죽은 아버지/ 손톱 발톱을 깎아드리고// 생의 뼈마디가 바뀌는 환절기/ 그래, 네가 온 곳이다/ 흙이 되고 돌이 되고/ 다시 삼층석탑으로 서더니/ 밤이슬의 흰 눈썹/ 천 년의 먼 길을 돌아 돌아/ 이미 오래전에 죽은 어머니/ 치렁치렁 검은 머리 곱게 빗어드리고// 그날의 입김 그날의 그림자로/ 다시 네가 온 것이다//

내 그림자에게 길을 묻다 / 이원규
황지연에서 을숙도까지/ 걷고 걸어 스물닷새/ 민족의 젖줄을 따라가다 보았다// 시커먼 폐수의/ 얼굴 뭉개진 사내들이 지나간 자리마다// 우는 돌이 있고/ 우는 여자가 있고/ 우는 아이가 있다는 것을/ 홀로 걷고 또 걷다가/ 내 그림자에게 길을 물으니// 새는 날며/ 저의 보드라운 깃털로/ 공중의 길을 지우고/ 물고기는 헤엄치며/ 저의 지느러미로 물속의 길을 지우고//

별빛 내시경 / 이원규
눈을 감아야 보이는 것들/ 도시를 꺼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다/ 반딧불이 은하수 가물가물 첫 사랑의 눈빛/ 두 눈이 멀기 전에 캄캄한 곳으로 가자/ 예감의 더듬이 다 바스라지기 전에/ 오지마을로 별빛 사냥을 가자/ 네온사인 가로등 텔레비전 핸드폰/ 별 볼 일 없는 세계 최악의 빛 공해 나라/ 밝아도 너무 밝아 생각은 먹통이고/ 사랑과 혁명도 시청률이 다 정해져 있더라/ 한반도 밤의 위성사진이 캄캄한 곳/ 진안 봉화 영양 인제 개마고원 백두산/ 북간도의 명동촌 윤동주 생가에 가보자/ 고흐의 별이 빛나는 아를 카페거리/ 생레미 생폴 정신병원도 너무 밝아졌더라/ 나는 왜 무엇으로 언제 어떻게 어디로 가는지/ 동해선 종단열차를 타고 고성 원산 청진/ 북두칠성 삼태성에게 물어나 보자/ 울다가 휙 노려보던 당신의 눈초리/ 별빛을 사냥하다 슬그머니 별들의 포로가 되자/ 바이칼 호수에서 맨 처음 목욕재계하듯이/ 산꼭대기에서 훌훌 옷을 벗고/ 기막힌 정수리에서 용천혈까지 별빛 샤워를 하자/ 하룻밤 굶으며 위내시경 검사를 받고/ 오금 저리도록 별의 별의 별의 별 침을 맞아보자//

내 그림자에게 길을 묻다 / 이원규
황지연에서 을숙도까지/ 걷고 걸어 스물닷새/ 민족의 젖줄을 따라가다 보았다// 시커먼 폐수의/ 얼굴 뭉개진 사내들이 지나간 자리마다/ 우는 돌이 있고/ 우는 여자가 있고/ 우는 아이가 있다는 것을// 홀로 걷고 또 걷다가/ 내 그림자에게 길을 물으니// 새는 날며/ 저의 보드라운 깃털로/ 공중의 길을 지우고/ 물고기는 헤엄치며/ 저의 지느러미로 물속의 길을 지우고//

모국어 산부인과 / 이원규
그녀는 나의 아이를 가졌다./ 지웠다// 사랑한 것이 죄라면/ 태어난 적도 없이 죽은 아이들/ 성별도 모르고/ 얼굴 또한 모르므로/ 모국어 산부인과는 신생아들의 공동묘지// 전신마취가 채 풀리지 않은/ 하혈의 그 캄캄한 골짜기에서/ 이미 죽은 시인들이 운다// 그녀의 입슬에선 포르말린 냄새가 지독했다//

저 닭을 잡아먹자 / 이원규
외로워서 안 되겠다/ 저 닭이라도 잡아먹자/ 산중의 외딴집 찔레 덤불 억새밭에/ 정란아 유정란 잘도 낳더니/ 족제비 사냥개들에게/ 하나 둘 목울대를 내어주고/ 앞마당의 검은 이단자 오골계와/ 꼬끼이 ㅋㄹㄹ/ 끝끝내 득음 못 한 장닭마저/ 내장이 드러나고 말았으니/ 정란아 무정란 외로워서 안 되겠다/ 하릴없이 박제된 날개 퍼덕이는/ 청상의 저 닭이 외로워서 안 되겠다/ 잡아먹자 저 눔의 씨암탉/ 고갈된 눈물샘 자꾸 쪼아대는/ 깃털로 위장한 저 비애를 잡아먹자//

운우지정 / 이원규
서로 부둥켜안고/ 칠팔백 년은 족히 살아왔건만/ 천연기념물 88호/ 송광사 천자함의 쌍향수/ 가까이 실눈 뜨고 살펴보면/ 온몸을 꽈배기처럼 88 꼬면서도/ 알몸의 살갗 하나 닿지 않았다// 하늬바람만 불어도/ 서로의 뼈마디 비걱거릴 법도 한데/ 조계산의 늙은 곱향나무 두 그루/ 그 참, 절묘하다/ 굳이 맨살을 맞비비지 않고도/ 두 몸 아슬아슬한 경계에/ 저리 희푸른 아침 구름이 오르고/ 저물녁 향내의 안개비가 내리다니!/ 무산의 달뜬 애인이여, 우리 아직 멀었다//

강물도 목이 마르다 / 이원규
강물도 흐르다 목이 마를 때가 있다/ 차가운 바위 위에서 잠을 자다/ 입이 돌아간 사람들/ 몸의 칠 할이 물이라지만 내내 목이 말라/ 습이 빠져나간 벼랑의 돌들이 자구 뛰어내린다// 늦가을 푸른 잎이 시들고/ 목구멍이 칼칼한 해소 천식의 산이 울면/ 뒷집 할머니의 무릎 관절도 삐거덕 군불 지피는 흙집도 따라서 운다/ 그러나 나는 아직 내 몸을 모르니/ 꽃의 그림자에서 어찌 향기가 나랴/ 강물도 흐르다 목이 마를 때가 있다// 슬하의 자식들 다 내보낸 나무들/ 석 달 열흘 단식을 시작하면/ 툇마루 찻상도 알아서 갈라지고/ 밭은기침 소리를 따라/ 밤새 혼이 빠져나가는 어머니의 겨울/ 강물도 흐르다 목이 마를 때가 있다// 습한 곳에는 잡귀들만 꼬이는 법/ 갈증도 없이 어찌 흐를 수 있으랴/ 열고 또 열면서 흐르는 겨울강/ 얼음도 목이 말라/ 입천장에 혀가 쩍쩍 달라붙고/ 목구멍 속에 다시 칼칼한 바람이 분다// 지지직 묵은 뼈에 금이 가듯/ 언 이마에 마른번개가 치듯/ 쩌렁쩌렁 통곡하는 겨울강/ 물의 그림자 단 한 번도 젖은 적이 없으니/ 흐르는 강물도 자꾸 목이 마르다//

탁좆 / 이원규
오해하지 마시라/ 탁좆은 탁족(濯足)의 오자가 아니다/ 한여름 계곡물에 발만 담그면 탁족이지만/ 새벽마다 불끈 일출 조짐을 보이는 불의 알까지/ 푸덩덩 찬물에 말면 탁좆이다// 오늘도 피아골로 숨어들어/ 거풍에 탁좆을 하다/마당바위 찜질방에 드러누어/ 햇볕 사우나로 젖은 몸 말리는데/ 어허라 열두어 걸음 위의 계곡/ 긴 머리 산중 처녀도 훌러덩/ 탁좆, 아니 탁십(濯十)을 하는 게 아닌가// 몽정기의 소년처럼/ 후다닥 옷가지를 걸치고/ 연이어 너덧 개비 담배를 피울 때까지/ 스물댓 살의 산중 처녀 여여하니/ 꼭 무슨 죄인처럼/ 쪼그려 앉아 기다리고 기다릴 뿐// 이윽고 젖은 머리카락/ 산바람 스치는 처자에게/ 이보씨요, 아가씨! 등산로에서/ 훤히 보이는데서 꼭 그래야 스겄소?/ 농을 던지자마자/ 차암, 보는 지가 꼴리지 내가 꼴리나!// 장풍 일격을 날리며 청솔모처럼/ 통통 바위를 타고 내려가는 게 아닌가/ 멍하니 불의 알이 오그라지도록/ 아직 젊은 흑발 대선사를 보긴 보았던 것이다//

 

                    뼈에 새긴 그 이름 / 이원규

그대를 보낸 뒤/ 내내 노심초사하였다//
행여/ 이승의 마지막일지도 몰라/ 그저 바람이 머리칼을 스치기만 해도/ 갈비뼈가 어긋나고// 마른 갈잎이 흔들리면/ 그 잎으로 그대의 이름을 썼다// 청둥오리 떼를 불러다/ 섬진강 산 그림자에 어리는/ 그 이름을 지우고/ 벽소령 달빛으로/
다시 전서체의 그 이름을 썼다// 별자리들마저/ 그대의 이름으로/ 슬그머니 자리를 바꿔 앉는 밤//
화엄경을 보아도/ 잘 모르는 활자들 속에/ 슬쩍/ 그 이름을 끼워서 읽고/ 폭설의 실상사 앞 들녘을 걸으면// 발자국,/ 발자국들이 모여/ 복숭아뼈에 새긴 그 이름을/ 그리고 있었다// 길이라면 어차피/ 아니 갈 수 없는 길이었다//


한 여자가 지나갔다 / 이원규
한 여자가 지나갔다/ 그녀는 자주 흐리고 바람이 불었다/ 뼈마디 속으로/ 알코올 같은 비가 내리거나/ 깔깔거리며 섬진강 물안개 속으로 몸을 숨겼다/ 그녀의 상처는 너무나 깊어/ 온몸의 세포들이 자가 복제를 하였다/ 내 뫔은 겨우 한 평도 못되는/ 철새 도래지/ 한 여자가 사뿐 발뒤꿈치를 들고 지나갔다/ 떠난 게 아니라 단지 떠오른 것이다/ 상처가 깊을수록 뫔이 더 가벼워지다니!/ 후우, 불기도 전에 날아오르는/ 그 여자의 깃털 하나/ 마침내 철새 도래지는 녹슨 폐선이 되고/ 108마력의 슬픔은 추억이 되었다/ 내 생의 마지막 철새가 오는 듯 지나갔다//

​자음의 풍경 / 이원규
ㅅㅅㅅ 산바람 불어오면/ 속눈섭도 ㅅㄹㄹ 한쪽으로 쏠린다// ㅁㄹㅁㄹ 물안개 위로/ ㅈㅊㅊ 물수제비를 날리면/ 섬진강이 ㅉ ㅉ ㅉ 혀를 차고/ ㅍㅎㅆㅍㅎ 물속의 가물치가 웃는다// 밤새 달려온 전라선 기차가/ ㅊㅋㄷㅊㅋㄷ 여수로 향하면/ 뒷집 할머니 ㄱㄹㄹ 가래가 끓고/ ㅇㅁㅇㅁㅁ 화엄사 범종 산을 오른다// ㅎㄷㄷ 물까치들이 날고/ ㄲㄹㄹㄲㄹ 배가 고프지만/ 자음만으로도 충만한 묵언의 이 아침// 왠지 가슴이 찡한 ㄴ/ 문득 복받치는 ㅂ/ 그리고 차마 못다 부른 모음들/ 아직 남은 내 생의 서러운 곳간!//

저승새 / 이원규
벽오동/ 검푸른 문수골의 밤/ 누가 자꾸 돌을 던지나// 날아도 꼭 변화무쌍한/ 유인구처럼 날아와/ 아주 가까이 호랑지빠귀가 운다// 봉창문 아래서 밤마다/ 이미 죽은 첫사랑을 부르듯/ 휘이이 퓌이이/ 겨드랑이 속을 파고든다// 속지 마라/ 홀리지 마라/ 저 울음소리는/ 이승의 소리가 아니다// 온몸의 솜털이 자꾸 한 쪽으로 쏠린다//

유마경 –물의 가족 / 이원규
감나무에 비 오시니/ 물비늘 반짝 헤엄치는 이파리들// 감잎은 섬진강 참붕어요/ 방앗잎은 꺽지/ 어름나무 잎은 첫날밤의 각시붕어// 이따금/ 벌 나비 새들이 안부를 물으면/ 물고기도 꽃이다/ 혼인색의 선남선녀들/ 오색 비눗방울을 날리는데// 뒷집 할머니/ 어린 새끼들을 데불고/ 등 굽은 헤엄을 치는 동안/ 할아버지는 죽어 바위가 되고/ 밤마다 할머니는/ 그 바위 밑에 알을 낳는다// 처마 끝에는/ 낚시 바늘을 입에 문 풍경 소리/ 돌담을 넘다가 멈칫,/ 비가 그친 것이다// 불면의 감나무 가지마다/ 물비늘 반짝이는 물고기 떼들/ 연목구어의 아침이 오면/ 저마다 하나씩의 낚시 바늘을 물고/ 백내장의 두 눈을 들여다본다// 단 한 사람이라도/ 경악하며/ 몸부림치는 순간/ 일제히 팽팽해지는 낚싯줄// 네가 아프니 나도 아프다//

 

우리들의 행복한 밥상 -실상사작은학교 개교 10주년 축제에 부쳐 / 이원규
그 아이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서툰 톱질 망치질로 자기 책상 걸상부터 만들고/ 약사전 옆 컨테이너 교실에 벽화를 그리던 아이들/ 쑥을 먹으면 온몸에 쑥 냄새 폴폴 나고/ 산딸기며 오디를 따먹고 보랏빛 혀를 내밀던/ 고라니 같은 그 아이들은 모두 어디에 있을까// 너희들이 이곳에 오기 전에는/ 실상사마저 묵언 기도중인 폐사지에 가까웠다./ 논이며 과수원이며 산비탈 밭에는/ 허리 굽은 노인들의 관절만 삐거덕 거리고/ 저녁이면 온가족이 둥근 밥상에 둘러 앉아/ 야야, 체할라 꼭꼭 십어 먹거라이!/ 잔소리 말씀도 콜록콜록 기침소리에 묻혀버린/ 울울 절망뿐인 산촌이었다. 창창 슬픔뿐인 농촌이었다./ 아주 오랜 옛날처럼 다시 지리산의 봄이 와도/ 농촌은 농촌대로 아이들의 울음소리가 끊긴 유령의 마을이요./ 도시는 도시대로 탯줄이 잘린 실향민들의 집단 수용소였다.// 그러나 너희들이 온 뒤부터 달라졌다./ 지리산에 생기가 돌았다./ 대체 뭔 일이여! 해탈교 석장승이 두 눈을 부릅뜨고/ 실상사 천년의 삼층석탑이 자세를 바로 잡았다./ 바로 지금 여기 이곳에서/ 지리산의 아들딸로 입양된 너희들과 더불어/ 착한 농부의 이름으로, 귀농자 귀촌인의 이름으로/ 가난 소박하지만 행복한 밥상을 차린지 10년/ 마침내 차일치고 멍석 깔고 한바탕 잔칫상을 차렸으니/ 그 옛날처럼 밥상머리에 둘러앉아 즐겁게 밥을 먹자/ 박씨 아저씨의 유기농 쌀밥에/ 구수한 된장으로 상추쌈을 싸먹고/ 지리산 녹차 민들레차 감잎차 뽕잎차를 마시자/ 지리산의 딸 아들아, 어느새 청년이 된 도반들아/ 보광전 앞에서 도법스님이 주례를 서고/ 약사전 철불의 손을 잡고 백년서약을 할 날도 멀지 않았구나./ 마침내 우리들의 행복한 밥상 위에/ 저 푸른 지리산이 오르기 시작했으니/ 날마다 하루 세 끼 온몸을 열어 지리산을 받아들이자/ 더불어 온 마음을 열어/ 섬진강을 마시고 온몸 섬진강의 맑은 물결이 되자/ 지리산을 먹고 온몸 지리산의 푸른 눈빛이 되자./ 그리하여 세상 그 어디를 가더라도/ 모두가 지리산이요 섬진강이 아니더냐/ 지리산의 딸아들아 아들딸들아/ 아침 저녁 애타게 너희들을 부르는 실상사 종소리가 들리느냐.// 너희들이 이곳에 온 뒤부터/ 지리산에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해탈교 석장승들이 껄껄 웃고/ 천년의 삼층석탑이 마주보며 덩실덩실 춤을 추기 시작했다.//

평사리 연가 -제1회 섬진강 달빛차회에 부쳐 / 이원규
날마다 밤마다 섬진강의 동쪽 하동에서/ 해가 뜨고 달이 떠오릅니다/ 아침 햇살은 그대의 얼굴을 어루만지고/ 희푸른 달빛은 내내 그대의 영혼을 비춥니다// 맨 처음 그대를 만나던 날/ 평사리 청보리밭은 하루 종일 술렁이고/ 생각만 해도 입속에 침이 고이는/ 그대가 나의 신맛이었을 때/ 온 동네 청매 홍매 백매는 피고지고/ 눈빛 마주치는 가지마다 시큼한 매실이 익어갔지요// 그러나 어인 일인지/ 흐린 날의 초저녁부터 휘이 퓌이-/ 마치 혼이 빠져나가듯 검은 숲에서 호랑지빠귀가 울고/ 귀를 막아도, 아무리 귀를 틀어막아도/ 그대가 나의 쓴맛이었을 때/ 형제봉 철쭉꽃밭은 붉은 상사병으로 더욱 번지고/ 신열의 이부자리엔 쓰디쓴 씀바귀만 자랐지요// 아아, 그러다 그러다가/ 마침내 빨간 물앵두가 익어가던 날/ 그대가 나의 단맛, 나의 달콤한 맛이었을 때/ 내 온몸의 구멍이란 구멍은 모두 열려/ 신록의 산바람 강바람이 불고/ 구재봉 활공장에선 패러글이드가 새떼처럼 날아올랐지요// 그러나 다시 그대가 나의 매운맛이었을 때/ 자꾸 입술이 부르트고 혓바늘이 돋아/ 무딤이 들녘에선 까마귀 떼가 울고/ 그대가 나의 짠맛, 짜디짠 맛이었을 때/ 눈물의 수위는 자꾸 높아져/ 하동포구에서부터 바닷물이 역류했지요// 그랬지요 이를 어쩌나 어쩌나/ 밤새 달빛 이슬 내리는 평사리 백사장을 걸으며/ 발자국으로 그대의 이름을 쓰고 또 쓰다 보니/ 이제야 알겠습니다/ 그대가 나의 단 한 가지 맛이었을 때/ 그것은 진정 사랑이 아니었으며/ 그대가 나의 단 한 가지 맛이기를 강요했을 때/ 열정과 고통과 절망마저 한갓 미몽이었다는 것을// 이제서야 알겠습니다/ 그대는 이미 나의 다섯 가지 맛/ 신맛, 쓴맛, 단맛, 매운맛, 짠맛 모두였다는 것을!/ 그대는 나의 산(酸), 고(苦), 감(甘), 신(辛), 함(鹹)이요/ 그대는 나의 목화토금수(木火土金水)였다는 것을!/ 그대는 마침내 나의 지수화풍(地水火風)이요/ 우리 모두의 지리산 수제 작설차요, 하동 야생녹차였다는 것을!// 밤마다 섬진강의 동쪽 하동군/ 악양고을의 칠성봉에서 달이 떠올라/ 섬진강을 비추고, 그대의 영혼을 비춥니다// 오늘 지금 바로 여기 평사리 백사장에서/ 목욕재계하듯이 달빛 사우나를 하며/ 그대를 마십니다/ 그대 영혼의 맑고 푸른 피를 마십니다/ 오월 신록의 청람(靑嵐), 푸른 기운를 마십니다/ 그대를 마시며 기꺼이 사랑의 노예가 됩니다/ 그대를 마시며 기꺼이 절절한 그리움의 하인이 됩니다//

 

우리가 떠난 뒤에도 지리산은 여여할 것이다 -제1호 지리산국립공원 50주년에 부쳐 / 이원규
우리가 오기 전에도 섬진강은 흘러왔고/ 우리가 떠난 뒤에도 섬진강은 유장하게 흐를 것이다/ 우리가 오기 전에도 지리산은 여기 이곳에 있어 왔고/ 우리가 떠난 뒤에도 지리산은 바로 여기 이곳에서 여여할 것이다/ 21세기가 막 시작되던 17년 전에/ 맨 처음 지리산 한 바퀴 850리를 걸었다, 17일 걸렸다/ 교만과 정복욕의 등산이 아니라/ 지리산과 한 몸이 되는 입산의 자세로 걸었다/ 함부로 노고단 반야봉 천왕봉을 오르지 않겠다고 맹세하며 걸었다/ 그리고 3년 뒤에는 지리산 마을 마을을 돌며/45일 동안 1,500리 생명평화 순례의 길을 걸었다/ 천년 하고도 훨씬 더 이전에 지리산 운상원에 울리던/ 옥보고의 거문고 소리를 들으며/ 고운 최치원 선생이 두 귀를 씻고 입산하던 길을 따라 걸었다/ 1540년 서산대사가 원통암으로 출가하던 길/ 남명 조식 선생과 매천 황현 선생의 대를 이어/ 화산 이현상 선생의 한 맺힌 현대사의 길을 따라 걸었다// 걷고 또 걷다가 걷는 것으로도 모자라/ 남악단인 지리산 노고단에서 중악단인 계룡산 신원사까지/ 그리고 계룡산에서 서울 지나 임진각까지 오체투지를 했다/ 북녘땅 상악단 묘향산까지의 길은 아직 남겨두었지만/ 한 마리 자벌레처럼 기고 또 기어서갔다// 걷다가 무릎 꿇고 엎드려 기어가면서/ 41년 전인 1976년 6월에 홀연히 사라져/ 지리산의 풀과 나무와 이끼가 된 지리산 산신령/ 우천 허만수 선생을 만나고 지리산 어르신들을 만났다/ 불일평전의 변규화 선생과/ 노고단과 피아골 산장의 지리산 호랑이 함태식 선생/ 지리산 최초의 등산모임인 구례의 연하반과 우종수 선생을/ 절대로 잊을 수 없었다/ 마침내 1967년 12월 29일/ 전쟁통의 아수라장인 지리산을 국립공원 1호 지정에 앞장선/ 김헌규 박사와 구례 군민들의 간절한 마음을 되새겼다// 어느새 지리산의 어르신들은 모두 떠나고/ 50대 중년의 지리산국립공원 지킴이들만 남았다/ 국립공원은 이제 그냥 공원이 아니라/ 지구에서 한반도에서 반드시 지켜야 할 보루 같은 것/ 우리들의 심장이자 허파/ 끝까지 지켜야 하는 절대보존지역이 되었다/ 이제부터 국립공원관리공단은 관리공단이 아니라/ 지킴이공단, 절대보존공단이어야 한다/ 통행세에 눈이 멀어 국민지탄을 받는/ 천은사 화엄사의 부처님은 지리산에 계신가 아니 계신가/ 국립공원은 어느 누구의 것이 아니라/ 지구인과 국민 모두의 국립공원이요/ 지리산은 옛 어르신들과 당대와 미래세대 모두의/ 지리산이다// 우리가 오기 전에도 지리산은 여기 이곳에 있어 왔고/ 우리가 떠난 뒤에도 지리산은 이 모습 이대로/ 바로 여기 이곳에서 미래세대와 더불어 여여할 것이다//

 

(동물 천도재 고유문) 먼길 떠나는 길동무들의 극락왕생을 축원합니다 / 이원규
만화방창 환한 봄날입니다./ 산벚꽃이며 산복사꽃이 너무나 환해서 오히려 더 슬픈 봄날입니다./ 꽃그늘에 앉아 두 눈을 감으면/ 세상도처에서 울부짖는 소리들이 먹구름처럼 밀려오고/ 울컥울컥 목구멍 속에서 서러운 버섯들이 자랍니다./ 그 눈빛, 그 목소리, 그 자태, 그 약속만 남기고/ 그립고 그리운 몸은 그예 먼길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하루 종일 쓰다듬고 품고 비비던 길동무도 없이/ 지금의 내 몸이 나의 몸인지요./ 기쁠 때나 슬플 때나 화가 날 때마저 가까이 교감하던 길동무도 없이/ 지금의 내 마음이 나의 마음인지요./ 세상만물이 다 그러하듯이 언제나 한 몸 한마음이었습니다./ 한 식구였고, 친구였고, 애인이었고, 길동무였습니다./ 네가 아프니 내가 아프고, 내가 슬프니 네가 슬퍼하던/ 나는 너였고, 너는 바로 나였습니다.// 그토록 사랑하던 길동무를 멀리 보내고/ 퉁퉁 부은 눈으로 세상을 둘러보노라면/ 하나의 죽음은 단 하나의 죽음만이 아니었습니다./ 이웃마을 농장에 단 한 명의 친구가 조류인플루엔자에 감염됐다고,/ 아픈 친구와 단지 조금 더 가까운 곳에 살았다는 이유만으로/ 그 모두가 살처분 되는 나라,/ 살처분이 아니라 버젓이 집단학살이 자행되는 광기의 나라,/ 집단우울증과 전 국민적 발광이 전혀 이상하지 않고/ 산과 강과 바다가 죽어가고,/ 철조망 허리띠를 칭칭 감은 채 이 땅 한반도의 모두가 아픈 데도/ 그 아무도 통증을 느끼지 못하는 나라./ 우리는 지금 21세기의 이런 아수라지옥에 살고 있습니다.// 지난밤에도 산중 포장도로를 건너다가 로드킬 당한 고라니의 비명소리,/ 우리는 그 소리에 두 귀를 틀어막았습니다./ 전국 온갖 사육장의 철창 안에서 옴짝달싹못하며/ 태어나자마자 죽음의 순번만을 기다리는/ 살아 생명체가 아닌 이미 죽은 건강식품들의 절규,/ 왜 죽어야 하는지도 모른 채 생매장 당한 수백만 목숨의/ 그 간절한 눈빛들을 외면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1년이 지나도록 두 눈을 감지 못하는 맹골수도의 아이들,/ 그 아이들이 바다 속 컴컴한 배안에서 울부짖을 때/ 바로 그곳에는 구조대도 희망도 없었습니다.// 단 한번이라도 고라니의 비명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서/ 그 누구를 사랑한다 말 할 수 있으며,/ 발아래 아주 가까이 풀 한 포기 땅강아지 한 마리 살펴보지 않으면서/ 그 누구를 그리워할 수 있으며,/ 살아생전 날마다 지옥의 사육장을 외면하는 동시에/ 이와 똑같이 아파트 층간소음만으로도 살인충동을 억누르지 못하면서/ 그 누가 행복한 밥상과 건강에 대해 얘기할 수 있겠는지요.// 만화방창 환한 봄날입니다./ 하지만 환해서 더 서러운 꽃그늘에 앉아 두 눈을 감으면/ 세상도처에서 울부짖는 소리들이 안개처럼 밀려오고/ 울컥울컥 목구멍 속에서 슬픈 버섯들이 자랍니다./ 안타깝게도 먼 길 떠나고 말았지만/ 언제나 한 식구였고, 친구였고, 애인이었습니다./ 동물들은 단지 하나의 건강식품이 아니라 우리들의 길동무입니다./ 동물들은 단지 장난감이 아니라 생명교감의 영원한 반려자들입니다./ 그 눈빛, 그 목소리, 그 자태, 그 약속만 남기고/ 그예 먼길을 떠난 길동무들의 극락왕생을 축원합니다./ 이제는 그대가 환해질 일만 남았습니다./ 원한 다 풀고 환하게 다시 태어날 일만 남았습니다./ 온 세상의 내 몸은 이미 너의 몸이고/ 너의 마음은 이미 내 마음이니/ 뒤늦은 발로참회와 생명연대의 자각으로/ 극락왕생을 축원하고 또 축원합니다.//

자궁 속에 잠들다 / 이원규
저 청청한 가을 하늘에/ 느닷없이 눈물의 강이 범람하면/ 무련, 너의 자궁 속에 하룻밤 묵고 싶다/ 숙박계도 쓰지 않고/ 단풍 드는 눈물의 양수 물침대 삼아/ 가을 한철 너의 몸속에 깃들고 싶다// 사성암 좌선대 위에서 눈을 감으면/ 무련, 없는 너의 자궁 속에서/ 동자승이 졸고 있다가 하품을 하며/ 천상천하 유아독존!/ 싯다르타가 타불타불 걸어 나오시며/ 화두를 던진다/ (변하지 않는 것은 모두 거짓이요/ 보지로 나오지 않은 것 또한 거짓이니/ 어머니 옆구리를 뚫고 나온 나도/ 제왕절개 수술이 없던 시절의 거짓말!)// 룸비니 동산은 멀고/ 섬진강 아래 지리산이 흐른다/ (석가여, 태어나면서/ 어머니 마야를 죽인 싯다르타여/ 그리하여 아들을 낳고서도/ 내 갈 길을 막는 장애물이여!/ 이름도 라훌라라 지었던가)// 저 청청한 가을 하늘에서/ 느닷없이 눈물의 양수가 터진다/ 어머니의 문을 열고 나온 자/ 한 번 더 생사의 큰 문 열어야 하므로/ 무련, 너의 없는 자궁 속에 하룻밤 청한다//

단풍의 이유 / 이원규
이 가을에 한 번이라도/ 타오르지 못하는 것은 불행하다/ 내내 가슴이 시퍼런 이는 불쌍하다// 단풍잎들 일제히/ 입을 앙다문 채/ 사색이 되지만// 불행하거나 불쌍하지 않다// 단 한 번이라도 타오를 줄 알기 때문이다// 너는 붉나무로/ 나는 단풍으로/ 온 몸이 달아오를 줄 알기 때문이다// 사랑도 그와 같아서/ 무작정 불을 지르고 볼 일이다//

동강할미꽃 / 이원규
섬진강 매화가 피고 질 때면 나는야 봄바람 난 유목민의 아들/ 말안장 위에 야영 장비를 단단히 묶고/ 북상하는 꽃들을 따라 먼길 나선다/ 막 겨울잠에서 깨어난 오토바이 시동을 걸고/ 채찍으로 허벅지를 때리며/ 강원도를 향하여 108마력의 슬픔으로 내달린다// 지리산 마고할미의 품을 벗어나/ 내 고향 문경의 할미산성까지 육백 리 길/ 사과밭 옆의 어머님께 큰절 두 번 올리고/ 다시 정선과 영월의 석회암 절벽/ 뼝대 위의 동강할미꽃까지 오백 리 길/ 채 녹지 않은 눈길을 엉금엉금/ 첫돌배기 아이처럼 두 무릎이 까지도록 달려간다/ 아슬아슬한 뼝대 위로 손발톱이 빠지도록 기어오른다// 바로 그곳에 돌아가신 어머님 계신다/ 길도 없는 벼랑 끝에 외할머님 계신다 아직 어린 소녀처럼 솜털 보송보송한 얼굴들/ 일평생 기역자로 굽은 허리 모처럼 꼿꼿하게 세우고/ 청보라 홍보라 연분홍 하얀 수건을 덮어쓰고/ 아리랑 아라리요 동강을 내려다본다/ 나는야 돌아온 탕자가 되어 허위허위 뼝대를 기어오르면/ 아서라 얘야, 다칠라, 여긴 길이 없다, 아무 길도/ 네 마음 다 알겠으니 이제 그만 돌아가거라!/ 천 리 먼 길 달려와도 끝끝내 가닿을 수 없다// 외할머니 시름시름 먼 길 가시며/ 고구마 밭 참깨 밭 귓속골 가는 길을 지우더니/ 수절 삼십 년의 어머니는 탱자나무 울타리 사이로 이어진/ 상의 마지막 길마저 지워버렸다/ 강아지풀 며느리밥풀꽃 하나 못 자라는/ 고속도로 인터넷은 뻥뻥 뚫리는데/ 수천 년 이어온 길들은 저절로 무덤이 되었다/ 우리들의 어머니 할머니는 지구의 마지막 인류/ 논두렁 밭두렁 고갯길 다 지워버리고는/ 낭떠러지 뼝대 위에 올라가/ 아리랑 아라리요 동강을 내려다본다/ 죽어 다시 피어도 길 없는 곳을 자처하는 토종꽃/ 일평생 주기만 하고 아무 것도 바라지 않는 동강할미꽃/ 아서라, 얘야, 그만 돌아가거라/ 그예 동강의 동강할미꽃들이 지고 나면/ 나는야 여전히 철이 없는 유목민의 아들/ 불효막심한 고아가 되어 오토바이 시동을 건다/ 바람의 채찍으로 등짝을 후려치며/ 지리산을 향하여 108마력의 슬픔으로 내달린다//

입산자의 노래 -빈집을 찾는 후배에게 / 이원규
함부로 도를 묻지 마라/ 온몸이 상처인 민족의 영산 지리산에서/ 기에 빠지지도 말며/ 무릉도원 청학동을 찾아 헤매지도 마라/ 백태의 눈으로 천부경 삼일신고를 새기지 말고/ 명심하라 명산에 도인 없다 애시당초/ 진인은 사라지고 삼신산에는 사기꾼들만/ 살모사 살모사처럼 똬리를 트는 법/ 밤새 동의보감 본초강목 한글본을 읽으며/ 함부로 약초를 구하거나 처방을 내리지 마라/ 진정 네 업이 아니면 사기다/ 이제마의 사상의학 몇 줄에 기대어/ 툭하면 체질을 분별하거나 함부로/ 뜸과 부항을 뜨고 침을 놓지 마라/ 조금 아는 것이 사기다 정감록을/ 노래하지 말고 살아보지도 않고 풍수를 논하거나/ 도참비기를 꿈꾸지 마라 잘 모르면 사기다/ 기분에 따라 비운의 빨치산을 노래하고/ 머리로만 생태주의를 꿈꾸지 마라/ 살다보면 너무 많이 알아도 사기다/ 잘 못 고르면 지리산 녹차도 독이듯이/ 사기 천지 지리산에서 사기꾼을 면하려면/ 먼저 귀를 막아라 입을 꿰매어라/ 날마다 일찍 일어나 거울 속/ 자꾸 꺼칠해지는 너의 얼굴을 보아라/ 한동안 몸이 상하지 않으면 그것도 사기다/ 또 하루 살아남은 자신을 바라보며/ 마치 초상을 치르듯 천도재를 지내듯/ 날마다 거울 속으로 절을 하며 또 하루를 시작하라/ 최소한의 텃밭에 푸성귀나 가꾸며/ 내리 삼 년 아무 것도 하지 마라/ 절대로 굶어죽지 않으니/ 그저 산짐승처럼 지리산에 몸을 맞추어라/ 빈집을 구하는 아우야/ 전설 속의 청학동은 많이 상한 네 몸 속에 있다//

시를 태워 시가 빛날 때 / 이원규
젖은 장작은 말수가 적어/ 이 세상의 신문은 불쏘시개로 태어났다/ 외설적인 정치면과 다이어트 중인 문화면/ 노안의 글씨는 작아도 거짓말처럼 화력이 좋지만/ 엄동설한에 솔가리며 신문지마저 떨어지니/ 소지를 올리듯 문예지를 태운다// 표지는 뻣뻣하고 목차는 미끄러워/ 문화예술의 연기인지 그을음인지/ 과묵한 장작은 쉬쉬 거품을 내뿜지 않는다/ 재생 속지의 보드라운 수필을 훑어보다/ 엄살 심한 문장을 찢어 아궁이에 넣으니/ 글자들끼리 서로 간질이며 타오르고/ 때로 쉬운 것이 더 어려운 비평의 요지는/ 같은 대학 다녔어요 술친구예요/ 후배인지 제자인지 나랑 사귈까요/ 활발한 문맥의 얼굴을 비비며 불타오른다/ 숲만 무성한 소설은 울울 오래 타고/ 불통의 시를 한글로 번역하며/ 궁시렁 궁시렁 아궁이에 집어넣으니/ 숨 가쁜 산문시는 더 빠르게/ 여백이 있는 시는 그래도 좀 천천히/ 촌철의 시는 문득 푸른 불꽃을 일으키는데/ 어쩐지 낯익은 나의 시 세 편은/ 혈흔 지문 발자국도 없는 완전범죄// 미적 거리가 가깝거나 너무 멀거나/ 영하 십도의 겨울밤 계간 문예지의 다비식은/ 자꾸 눈이 맵고 얼얼해지는 것이어서/ 시를 태워 시가 빛날 때/ 구들방 아랫목이 먼저 후끈 달아올랐다/ 안방 솜이불을 걷어젖히자/ 나이테 무늬 장판 위에 상형문자 같은/ 검붉은 불도장이 찍혀 있고/ 연기를 빼려고 유리창을 열다 보니/ 안과 밖의 경계 그 차고 맑은 얼굴에/ 원고지 천삼백 장 분량의 성에꽃이 피었다//

물에 찔리다 / 이원규
아무래도 너무 멀리 온 게 분명해/ 지천명의 강변에 서서/ 저 바람의 손바닥에 두 뺨을 내주고/ 목울대 꺼이꺼이 무릎을 꿇는다/ 이 환한 능소화에 눈멀지 못하고/ 저 아련한 꽃향기에 숨 한 번 멎지 못하고/ 이 여린 풀잎에 피 한 방울 내주지 못하고/ 저 서러운 휘파람새 소리에 고막 한 번 안 나가고/ 이 슬픈 여자에게 깊이 중독되지 못하고/ 그래, 물속에 뼈가 있었어/ 눈물의 염전에는 안구건조증의 소금 뼈만 자라고/ 내 심장의 증기기관차에는 고드름 칼/ 혈관도 얼어 얽히고설킨 녹슨 철사줄/ 부드러운 혀마저 급속 냉동된 흉기였지/ 이도 저도 아닌 후안무치의 사내가/ 지천명의 벼랑 끝에 서서/ 희푸른 달빛의 가발을 덮어쓰고/ 눈구멍 안쪽에 있다는 얇고 작은 눈물뼈/ 누골에 대해 생각한다//

먹구름 우산을 쓰고 달리다 / 이원규
누군들 일단 피하고 싶지 않으랴/ 퉁퉁 불은 우동발 같은 소낙비/ 물까치들도 산중 외딴집 처마 밑으로 날아드는데/ 모터사이클 시동을 걸다가 서쪽 하늘을 본다/ 시속 43km로 몰려오는 먹구름/ 비옷을 입을까 저 구름을 우회할까/ 정면으로 깊숙이 통정하고 말 것인가/ 오후 3시의 시낭송 약속쯤이야/ 비구름의 명에 따라 스스로 취소하고/ 기수를 돌려 동쪽으로 달린다/ 바람보다 빨리 구름보다 빨리 속까지 다 젖기 전에/ 빗줄기의 결을 따라 시속 130km로 달린다/ 비바람이 물오른 수양버들 가지처럼/ 이마를 때린다 척척 목을 감는다/ 이 뭐꼬, 기가 막힌 문장이지만 질문이 필요 없다/ 왜 달마가 동쪽으로 갔는지/ 아직 그 누구도 알지 못하는 것을 보면/ 그 또한 단지 소낙비를 피했을지도 모르는 일/ 마침내 나는 앞바람 앞구름을 따라잡았으니/ 서서히 비가 그치고 동쪽 하늘이 환하다/ 그런데, 여기는 도대체 어디쯤인가/ 몽유병 환자처럼 하동을 지난 것만은 분명한데/ 구름의 길만 보고 달리다가 허걱/ 모터사이클을 세우고 뒤돌아본다 다시/ 소낙비가 먹구름의 퉁퉁 불은 젖을 빨며 달려온다/ 담배 한 개비 치지직 꺼질 때까지 기다리다/ 천천히 속도를 늦춰 먹구름 우산을 덮어쓴다/ 젖은 입술이 촉촉하다 모처럼 젖이 돈다//

별빛 한 짐 / 이원규
두 눈이 나빠져도 별은 보인다/ 빗점골에 쏟아지는 별빛이 아까워/ 늦가을 다람쥐처럼 한 자루 가득 채웠다// 이역천리 서울 가는 길/ 깡마른 몸 지게에 별빛 한 짐 지고 갔더니/ 와 이리 캄캄하노?/ 철 지난 노래처럼 슬슬 눈길을 피해다/ 인사동 뒷골목엔 내다 버릴 곳이 없었다/ 그래, 서울이 좀 더 밝아졌을 뿐이야/ 노인의 두 눈을 질끈 감고/ 풀이 푹 죽은 별빛 한 자루 둘러맸다// 지하철 3호선 심야 고속버스 갈아타고/ 까무룩 섬진강 집으로 돌아오니/ 아내가 다람쥐꼬리를 감추며 말했다/ 에휴, 쌀자루에 쌀은 안 담아 오고/ 전기밭솥 코드를 뽑아버렸다// 며칠 굶는다고 아무데나 거미줄 치랴/ 자정 넘어 섬진강 백사장에 나가/ 풀이 푹 죽은 별빛 자루를 열자 마자/ 호르를 반딧불들이 날아 올랐다/ 쥐 나도록 쪼그려 앉았다 일어서는데/ 어찔 비칠 현기증이 일었다/ 생각보다 아주 가까이 별들이 빛났다//

밥상머리 시학 / 이원규
물 마실 때는 물만 생각하고/ 밥 먹을 때는 오로지 밥만 생각하자/ 약속시간 배신감 대출이자 성적을 내려놓고/ 꼭꼭 씹으며 어느 동네 뉘 집 쌀인지/ 쌀자루에 새겨진 본적지를 살펴보자/ 어금니로 잘박잘박 씹다 보면 단물이 고이면서/ 고향의 모내기철 무논이 떠오를 것이다/ 소낙비 내리고 개구리가 울고/ 새벽 물꼬 보러 나가는 외할아버지 장화 소리/ 밥상 위에 논밭이 올라와 다시 낙동강이 흐른다/ 그러니까 멸치조림 먹을 때 멸치 눈을 피하지 말자/ 너도 참 먼 길 돌아서 왔구나/ 친구들과 남해 바다 헤엄치며 놀다가/ 바늘코 촘촘 그물인지 지족마을 죽방렴인지/ 잡히자마자 화탕지옥 가마솥에 들어가고/ 다시 뙤약볕에 일가족 풍장이라/ 이 동네 저 골목 마트며 슈퍼를 떠돌다가/ 프라이팬 위에서 청양고추 올리고당 액젓에 버무려지며/ 죽어서도 몇 생을 돌고 돌아왔으니/ 멸치야, 너나 내나 팔자 한번 고약하구나/ 미안하다 멸치야, 비로소 너는 나고 나는 너/ 너를 먹고 뼛속까지 단단해지면/ 깊푸른 바다의 기억으로 다시 헤엄칠 수 있으리니/ 배추를 먹으며 고랭지 비탈 배추가 되고/ 딴마음 누르며 물 한 모금 마실 때/ 지리산 생수인지 삼다수인지 발원지를 떠올리면/ 밥상머리에 동해 푸른 파도가 출렁이고/ 금수강산 한반도와 초록 별이 생생할 것이니/ 밥 먹을 때 밥만 생각하며 밥을 먹으면/ 밥상 위에 시공초월이 따로 없고 수사학이 무색하다/ 식사 시간 더 오래 걸리지도 않으니/ 구두 신을 때 구두 뒤축의 행로를 생각하고/ 운전할 때 엔진과 타이어의 노고를 치하하자/ 시라는 짐승은 밥상 너머 이국에 살지 않으니/ 잠자리에 다른 여자 떠올리지 말고/ 오랜만이야 친구, 술 마시다 자꾸 핸드폰을 보지 말자/ 밥상머리가 어긋나면 자꾸 생의 창자가 꼬인다//

침빗 / 이원규
엉긴 머리 뒤통수에 보름달이 떴다/ 얼레빛으로 가릴 수 없는 원형탈모증의 달// 황토재 소나무 그 언약의 생가지를 꺾어놓고/ 밤길 도와 산 사나이 기다리던 어머니/ 긴 머리 풀어 참빛으로 동백기름 곱게 빗다가/ 멍하니 첫날밤의 옥비녀만 매만졌다// 니 아부지는 볼쎄 죽었다, 니도 알제?/ 장발 머리 그대로 군대 끌려가더니/ 바리캉 들이미는 병장을 후려지는 바람에/ 영창 대신 사흘 만에 귀향한 막내아들/ 움푹 팬 앞머리 쓰다듬으며/ 니 아부지는 지서에 불 지르고 월악산 갔데이// 심장병으로 입원한 문경병원/ 기나긴 생의 머리카락 다 잘린 뒤에도/ 막내야, 내 참빛 어디 갔노?/ 세상 곳곳에 도사린 이를 잡아내듯/ 거친 숨결 고르던 대나무 참빗// 삼우제 지내며 마지막 큰절 올리고/ 1924년 1월 15일 생일마저 1926년 4월 18일로/ 일생 잘못 살아온 어머니/ 그 주민등록증을 품고 지라산까지 왔다// 한식날 무덤가에서 아버지보다 더 허연 머리/ 참빗으로 세상 맞바람의 결을 빚는다//

섬진강 첫 매화 / 이원규
백운산 햇살이 저의 흰 붓을 들어/ 에헤라 노아라/ 소화정의 백 년 매화나무를 지목하자// 저요, 저요/ 허리춤의 잔가지 하나가 번쩍 손을 들었다/ 해마다 맨 처음/ 보살도 아니 부처도 아닌 것이/ 시무외인(施無畏印)의 오른 손을 들었다// 아직은 소한 대한의 뺏골 시린데/ 어쩌자고 대체 어쩌라고/ 검지 손톱의 꽃망울 처녀 하나/ 빨간 내복 윗도리를 벗기 시작했다// 데미샘에서 망덕포구 오백삽십 리/ 언 몸 풀던 섬진강이 침을 꼴깍 삼켰다//

이팝나무 졸업식 / 이원규
하도 배가 고파서/ 하동군 적량면 우계저수지 아래/ 이팝나무학교에 들어갔다/ 삼년 전 입학식에는 아무도 오지 않았다/ 이따금 서당골의 물까치떼가 날아들고/ 봄밤이면 서어나무 소쩍새가 찾아와/ 한참을 울다가 저수지 물배만 채웠다// 차라리 함박눈이 오길 기다렸다/ 남도의 겨울 청보리는 더디 자라고/ 모내기를 하려면 아직 멀었다// 적량면 우계저수지 아래 이팝나무 어르신/ 삼백 년째 고봉밥/ 보릿고개 환한 밥상을 차렸지만/ 여전히 몸도 마음도 허기진 나 홀로 제자였다// 이른 새벽안개 속의 졸업식/ 우등생은 아니지만/ 이팝나무학교 개근상을 받았으니/ 여왕으로 군림하던 그녀는 구치소로 가고/ 착한 머슴 하나 그 자리에 모시던 날이었다// 한 나무의 제자가 되었다가/ 아직 어린 이팝나무가 되어 하산하는 일/ 한 여인에게 입학하고/ 한 사람을 졸업하는 일 또한 서로 다르지 않았다//

소주 생불 / ​이원규
입산 3년 만에 주먹밥도 떨어지고/ 피아골 아지트에서 막 동면 끝낸/ 반달가슴곰의 부스스한 얼굴로 하산하는 길/ 서굴암 석실 속의 약수터에서 물 한 모금 마시는데/ 주먹크기의 모조 금동불상 아래/ 시주금 1만8천3백원이 놓여 있었다/ 그 누구의 간절한 기도인지/ 애써 외면하며 돌아서 나오는데/ 금동부처가 자꾸 불콰한 소주병으로 보이는 것이었다/ 돈 안 벌고 못 벌고 안 쓰고/ 산짐승처럼 살다 보니 단돈 10원도 없었다/ 한참 내려오다 돌아가 날름 3천 원을 훔쳤다// 섬진강변 외곡검문소 앞 슈퍼에서 소주 두 병을 샀다/ 도둑놈의 걸음걸이가 경쾌했다/ 피아산방에 돌아와 이승의 마지막 술이려니 하고/ 일단 소주 한 병을 목구멍 폭포로 털어 넣으니/ 초승달이 뜨고 자꾸 저승새가 울었다/ 서굴암 석실 속의 모조 금동불상이 생불처럼 보였다/ 아직도 일곱 잔 반이 남았으니/ 하루에 한 잔씩, 티스푼으로 떠 마시는 술마저 아까웠다// 지리산하 외딴집에서 마지막 소주 한 잔을 마시는 데/ 58분47초가 걸렸다 15년 전의 일이었다/ 목마른 병아리처럼 쇠 젓가락으로 찍어 마시니/ 어느새 입 속은 소주바다, 혓바닥은 해일/ 단 한 잔만으로도 알딸딸하니 극락의 잠이 들었다//

김길순(일생 단 한 편의 시1) / 이원규
소돌마을 오 씨 할머니/ 열여섯 살 꽃가마 타고 북한강을 건너/ 첩첩산중 오씨 집안에 시집오니/ 시부모는 맹인 부부, 허우대 멀쩡한 신랑은/ 밤마다 가평 청평 천하의 마작꾼이었다// 세상천지 캄캄한 시어머니 손을 잡고/ 북한강 변에 나와 매운탕 끓이며/ 일평생 까막눈으로 자식들을 키웠다// 칠 남매 자슥들 대학까징 공부시켰지만/ 글쎄, 지들은 글자 하나 안 갈쳐주더라!// 85년 만에 소돌마을회관 책상에 엎드려/ 연필에 침 발라가며 한글을 배우는데/ 난생처음 자기 이름 석자 써놓고/ 아이고 어매, 아이고 어매요 엉엉 울었다// 일생 단 한 편의 시/ 내 어머니의 이름은 김기순/ 오 씨 할머니의 본명은 김길순이었다//

발톱마다 꽃 등불((일생 단 한 편의 시 2) / 이원규
저승에선 산 사람의 발톱만 보인다는데// 하늘재 아래 여든아홉 살의 속골댁/ 다저녁때 헤진 버선을 벗다 말고/ 하이고, 남사시러버라!/ 몽당 빗자루 두 발을 감춘다// 할매요 이 뭐꽃, 바람났능교?/ 손톱도 아이고 열 발톱에 봉숭아 꽃물 들였능교?/ 산 아래 삼팔장에 콩 팔러 간 할배야/ 하마 오십 년도 넘없는데 또 누굴 기다리능교?// 아이다, 아야, 그게 아이다/ 대분 밖이 구천인데 내사 뭘 더 바라겠노/ 한평생 고무신 털신 행여나 오밤중에 버선발로 지새다/ 이래 못난 발톱에 삼세판 봉숭아 꽃물 들이뿌니// 홀로 저승길, 저 캄캄한 길도 인자 꽃 등불 환하다카이!//

​연필 지팡이(일생 단 한 편의 시 3) / 이원규
남해군 삼동면 지족리/ 일생 마늘밭 시금치밭 매던 할머니/ 행여나 길 잃을까 고쟁이 속에 부적처럼/ 딸내미 주소 전화번호를 품고 살았다// 뭐라쿠내, 내는 안 갈끼다!/ 삼동본건소에서 난생처음 한글 배우더니/ 꼬부랑 할머니 백일장에 나오섰다// 선생님이 단디 갤처주니/ 종이 쪼가리에 글씨를 다 써보고/ 지팡이 대신 고물 유모차 밀고 당기다/ 턱하니 연필 지팡이를 짚고 보이/ 허이구매, 놀래 자빠지겄다!/ 병원 간판 부산가는 버스도 이래 다 보이고/ 온 시상이 확 달라졌다 아이가?// 제목 '연필 지팡이'를 보는 순간/ 내 인생의 붓이며 볼팬 만년필은 숨이 턱 막히고/ 삼만 리 걸으며 애써 다듬은/ 마지막 족필足筆마저 오금이 저렸다//

저승엔 주소가 없다(일생 단 한 편의 시 5) / 이원규
탯줄을 끊고 열아홉 번 이사를 했다/ 지리산에서만 여덟 번 빈집을 떠돌다/ 백운산 토끼재길 외딴집에 들었으니/ 이승의 본적이야 분명한데/ 현주소는 갈수록 무성한 가시덤불// 저승에 가서도 자주 이싯잠을 싸야 할지/ 포항 죽도 시장의 어묵 할매가 말했다// 저녁 묵었는기요?/ 내사 마 속 시끄러버 못 산다/ 서방 곡소리 난 지 오십 년/ 가로늦게 글자를 다 배웠다카이/ 생과부 명줄 맨키로 할 말이 쎄리삣다/ 인자 서방 원망도 다 까꾸라졌으니/ 우아노, 우짜믄 좋겠노?/ 억수로 보고 잡다고, 우짜든지 쫌만 더 기다려달라꼬/ 부지깨이로 편지를 쓰면 또 뭐 하겠노?// 저승의 새파란 서방님은 주소가 없다카이!//

송아지(일생 단 한 편의 시 6) / 이원규
지리산 산내초등학교 일 학년/ 한글 배운지 겨우 여섯 달 된 촌놈이/ 백일장에서 시 제목 송아지를 썼다// 송아지의 눈은 크고 맑고 슬프다/ 그런데 소고기 국물은 맛있다/ 난 어떡하지?// 단 세 줄짜리 생태시를 읽는 순간/ 이 뭐꼬?/ 한국 현대시는 잡설인가 요설인가// 나의 시력 35년은 시력을 잃고/ 노안의 노트북 한글 자판은 오리무중이었다//

순례자의 양말(일생 단 한 편의 시 7) / 이원규
강물 따라 삼천리 길 걸을 때/ 묵언 직전에 수경 스님이 말했다// 이왕지사 물 살리자고 나선 길/ 세수 빨래도 하지 말자/ 대운하 반대니 운동이니 다 내려놓고/ 강물처럼 흐르면서 온몸 더러워지자// 땀에 젖은 양말 햇볕에 말리며/ 한 열흘 정도 신었더니/ 던지면 장화처럼 벌떡 일어섰다/ 코골이 발꼬랑내 강변 천막의 밤// 양말들이 아장아장 걸어 다녔다//

내 인생의 그림책(일생 단 한 편의 시 14) / 이원규
이 땅의 모든 어머니는 원래 화가였다/ 고추 배추씨를 뿌리고 호미질하면/ 온 동네 밭들은 저마다 한 폭의 그림/ 날마다 다른 빛깔의 명작이었다// 농투산이 지아비와 더불어/ 봄날 무논에 어린 모를 심으면/ 서 마지기 하늘빛 도화지엔 아직/ 어린 자식들의 연푸른 목숨들이 자랐다/ 일평생 흙가슴에 괭이질 써레질/ 맨손 맨발로 그린 그림은 식솔들의 고봉밥// 부여군 송정 그림책마을 어르신들/ 칠팔십 넘어서야 낫이며 빗자루 잠시 내려놓고/ 한 자루 필생의 붓을 들었다/ 마침내 내 인생의 그림책 스물세 권/ 저마다 한 권씩 맨 처음의 작가가 되었다// 이 땅의 농사꾼은 원래 대자연의 설치미술가였다//

말하는 개 / 이원규
때로 서열은 평화의 맨얼굴/ 우리 집에도 서열 1위 집사람 아래/ 고양이 별이와 아리수와 호랭이/ 강아지 얼씨구와 좋다 몽 그 아래 7위까지/ 일단 서열이 정해지니 전쟁 끝이다// 구례 읍내 왕돈가스 집에서/ 서열 1위 혼자 솥뚜껑만한 돈가스를 먹다가/ 이모, 남은 것좀 싸주세요/ 아, 개 주게? 손 빠른 이모님이/ 옆 테이블 돈가스까지 비닐봉지에 깍 쓸어 담자/ 아, 그 개 말고 우리 집에 말하는 개!// 그날 이후부터 짖는 개와 말하는 개가/ 돈까스를 다정하게 나눠 먹으며/ 사진을 찍다가 이따금 오물오물 시를 쓴다/ 앞마당 매화도 제 순서대로 피는 봄날이었다//

토란 / 이원규
밤이슬 다 모으고도 모자라/ 비를 기다리는 토란을 아십니까// 내가 아직 어렸을 때/ 최고의 우산은 토란잎이었지요/ 잎 하나의 우산을 쓰고/ 삼십오 년 세상의 빗속을 뛰어다닐 때/ 속까지 젖는 것은 언제나 나였습니다// 지리산이 젖고/ 섬진강이 젖은 오늘/ 이제서야 나는 한 잎의 토란입니다// 시시로/ 물의 순은빛 눈동자를 머금지만/ 그마저 소소한 바람에게 내어주고/ 저 홀로 푸른 토란입니다// 수천수만의 빗방울이 집적거려도/ 토란은 그저 젖지 않는 토란일 뿐/ 내 곁을 스쳐간 사람들/ 그들도 하나씩/ 물의 눈동자로 구르지만/ 몸 한번 뒤척여/ 슬그머니 놓아주고 싶습니다//

첫눈 / 이원규
그대 어깨 위로 내리는/ 정갈한 슬픔이고 싶었습니다// 송이송이 눈꽃사연/ 밤새 온몸 적시면/ 그날 밤엔 내가 먼저/ 산짐승처럼 목 놓아 울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산다는 게/ 언제나 내 맘 같을 수만은 없는 것을/ 결국 나보다 먼저/ 울음을 터뜨린 그대의 삶/ 정말이지 걷잡을 수 없었습니다// 어찌 생각해 보면/ 우린 서로의 상처를 핥아주며/ 울기 위해 만난지도 모르는 것을/ 누가 먼저 울고 나중에 울든/ 그게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부지 하세월/ 그대 생각하는 밤마다/ 두고두고 첫눈이 내립니다//

생각 한 끼 / 이원규
하지 무렵이면 섬진강 노을 바라보다/ 내 생일이 지난 것도 몰랐네/ 피안의 어머님께 미역국 한 사발 못 올리고/ 알알이 물앵두를 따먹으며 손꼽아보니/ 이보시게, 어느새 19,719일을 살았네 그려// 생일상은 고사하고/ 삼시세끼 제대로 챙겨 먹지도 못했으니/ 먹는다기보다는 그냥 한 끼 때우는 일/ 찬물에 밥 말아 풋고추와 된장으로/ 이따금 라면 국수로 때웠지만/ 그래도 줄잡아 하루 두 끼/ 무려 39,438그릇의 공기밥을 먹었네// 시를 쓰는 일이나 그대 생각하는 일/ 날마다 밥을 먹어도 허기지듯이/ 감감무소식의 밥숟가락, 쌀 한 톨의 기억들/ 그 많은 밥은 다 어디로 가고/ 김제 만경 평야에 홀로 깡마른 몸만 남았을까/ 열망의 시혼은 자꾸 시들해지고/ 온전히 그대에게 집중하지 못하고/ 일생토록 허겁지겁 생각 한 끼 때우기만 했네// 꼬르륵 무논에 물 들어 가는데/ 이보시게, 내 영혼의 염전은 언제 다 마를까나//

물안개 / 이원규
이명인가/ 밤새 섬진강 쏘가리가 운다// 징한 것들/ 격정의 날들이 가고/ 물이 차다/ 뼈마디가 시리다// 바람이 태어나고 죽은 곳/ 그곳에 가보고 싶었지만/ 이 맛도 솔찮다// 나이 마흔을 넘어서야 찾아온/ 체외수정의 새벽 물안개// 무량무량/ 알 밴 여인들이/ 뒷물을 하고 있다//

도둑고양이 / 이원규
아슬랑아슬랑 개밥을 노리는 고양이/ 졸다 깬 개가 짖는다 짖다가/ 느닷없이 굶주린 도둑괭이에게 뺨을 맞는다// 나는 돌멩이를 들다 말고/ 난감하다 누구 편을 들어야 할지/ 아로록다로록 점박이 고양이/ 그때 작은형은 도둑놈이었다// 내가 중 3일 때 또 하나의 학교/ 형은 충주경찰서 유치장에 있었다/ 사부랑삽작 쪽지를 건네며/ 내게 쌀 한 말의 거짓말을 시켰다/ 쌀집에서 훔친 게 아니라/ 가출할 때 집에서 가져온 것이라고// 하지만 어머니의 쌀통은 텅텅/ 죽은 아버지처럼 비어 있었으므로/ 형은 분명 도둑고양이였지만/ 난감했다 누구 편을 들어야 할지/ 그때 형사가 나의 뺨을 때렸다// 그리고 개가 짖었다/ 형은 구치소로 가고 나는/ 밥만 축내는 개집으로 돌아왔다/ 형과 교도소와 형사와/ 도둑고양이와 나와 집과 세상 사이/ 문신처럼 커다란 발자국들이 찍혔다/ 아로록다로록 점박이 도둑고양이// 도둑의 발자국에 마른 쑥을 지피면/ 마침내 그의 발이 썩는다더니/ 세상사 더부살이 아슬랑아슬랑/ 나의 두 발이 썩고 있다//

또 하나의 바다 / 이원규
이따금 세상살이 지겨우면/ 물안경을 쓰고 바라보라/ 살아 있는 모든 것은 물의 골격일 뿐// 토끼 한 마리 풀을 뜯으면/ 토끼 모양의 물방울 속으로/ 풀잎 모양의 물방울들이 빨려 들어간다/ 인기척에 놀란 물방울이 출렁, 잽싸게 구른다// 물이 물의 손을 잡고/ 물이 물의 혀를 빨아들이고/ 물이 물의 성기에 사정을 한다// 하늘이 둥그니 물의 머리 둥글고/ 땅이 평평하니 물의 발바닥이 평평하다/ 겨울나무는 치솟은 고드름/ 여름산은 물의 왕릉// 물방울 하나 울며 서녘 하늘을 날아간다//

그대 불면의 눈꺼풀이여 / 이원규
아직은 저혈압의 풀잎들/ 고로쇠나무도 자주 관절이 쑤신다// 별자리들도 밤새 뒤척이며 마른기침을 하고/ 길바닥에 얼굴 처박은 호박돌도/ 소쩍소쩍 소쩍새처럼 캄캄하게 딸국질을 한다// 오백삼십 리 유장한 섬진강도 흐르다/ 굽이굽이 몸서리를 치고/ 살아 천년 죽어 천년의 지리산 주목/ 밤의 고사목도 으라차차 달빛 기지개를 켜고 있다// 그대 불면의 눈꺼풀이여/ 서러워 서럽다고 파르르 떨지 말아라/ 외로워 외롭다고 너무 오래 짓무르지는 말아라/ 섬이 섬인 것은 끝끝내 섬이기 때문// 여수 백야리 등대도 잠들지 못해 등대가 되었다//

왼쪽 얼굴을 보여줘 / 이원규
언제나 너의 왼쪽에 앉고 싶었어/ 오른팔로 너의 어깨 감싸며/ 슬픈 표정을 숨기려 했지만/ 네가 먼저 왼쪽에 앉아 먼 산만 바라보았지/ 나는 맨날 들키고/ 너는 맨날 숨기고/ 어쩌다 마주봐도 좌우 눈빛이 엇갈렸어// 권태기였을까/ 너의 왼쪽 얼굴에 통증이 왔지/ 목근육 흉쇄유돌근이 조금씩 짧아져/ 아래턱의 각도가 오른쪽으로 돌아갔기 때문이야/ 좌광우도라는 말 들어봤어?/ 너무 한쪽만 바라보다/ 봄 도다리는 쑥국 속으로 들어가고/ 삼월 광어는 개도 먹지 않게 된 거야// 갈 때는 가더라도/ 열두 개의 얼굴 중에서/ 낯익은 열한 개의 오른쪽 가면 말고/ 검은 머리카락으로 가려온/ 단 하나의 표정을 보여줘/ 가서는 영영 안 오더라도/ 밤하늘의 시베리아행 철새처럼/ 잠시 고개 돌려 왼쪽 얼굴을 보여줘//

신화는 계속된다 / 이원규
한밤중에 홀로 노고단에 오릅니다./ 노고단은 아무래도 탯줄로 이어지는 신화의 초입이지요./ 아직 어린 구상나무로 서서 이미 져버린 원추리꽃을 생각하는데/ 한 여인이 희푸른 달빛을 타고 내려 왔습니다./ 마고 선녀인지 그대인지 사뿐히 내려 앉아/ 다시 전설은 시작됩니다.// 봄밤엔 홀로 처녀치마 꽃이 피고/ 칠월칠석엔 까마귀 떼들이/ 어깨 걸고 오작교로 올랐겠지요./ 천 년 전에 그대의 어머니의 어머니가 달빛을 타고 내려오시고/ 아직 어린 구상나무의 아버지의 아버지가/ 천둥번개의 말을 타고 달려오실 때/ 비로소 노고단은 노고단이었고/ 임걸령은 임걸령, 반야봉은 반야봉이었겠지요.// 신화는 지금도 계속됩니다./ 신화는 비극적일수록 더 아름다운 법/ 온다던 그대 끝내 오지 않더라도 어쩔 수 없습니다./ 이미 천 년 전에 그대의 어머니의 어머니는 망부석이 되고/ 나의 아버지의 아버지는 천년의 주목이 되었으니/ 기다림의 자세는 이것만으로도 충분하겠지요./ 하지만 노고단 아래 아직 어린 구상나무 한 그루/ 구름바다에 잠겨 눈썹이 하얘지도록 탑돌이를 합니다.//

옆을 보라 / 이원규
앞만 보지 말고 옆을 보시라./ 버스를 타더라도 맨 앞자리에 앉아서/ 앞만 보며 추월과 속도의 불안에 떨지 말고/ 창밖 풍경을 바라보시라.// 기차가 아름다운 것은/ 앞을 볼 수 없기 때문이지요./ 창밖은 어디나 고향 같고/ 어둠이 내리면/ 지워지는 풍경 위로 선명하게 떠오르는 얼굴들.// 언제나 가파른 죽음은 바로 앞에 있고/ 평화로운 삶은 바로 옆에 있지요./ 고통스러울지라도/ 우리를 밟고 가는 이들에게 돌을 던지지는 말아야지요./ 누군가 등 뒤에서 똑같이 뒤통수를 후려칠지도 모르니/ 앞서는 이에게 미혹되지도 말고/ 뒤에 오는 이를 무시하지도 말아야겠지요.// 일로매진(一路邁進)의 길에는 자주 코피가 쏟아지고/ 휘휘 둘러보며 가는 길엔 들꽃들이 피어납니다.// 평화의 걸음걸이는 느리더라도 함께 가는 것.// 오로지 앞만 보다가 화를 내고 싸움을 하고/ 오로지 앞만 보다가 마침내 전쟁이 터집니다./ 더불어 손잡고 발밑의 개미 한 마리./ 풀꽃 한 송이 살펴보며 가는 생명평화의 길.// 한 사람의 천 걸음보다/ 더불어 손을 잡고 가는 모두의 한 걸음이 더 소중하니/ 앞만 보지 말고 바로 옆을 보시기 바랍니다.//

꽃의 속도 / 이원규
덧나는 상처도 없이/ 어찌 봄이랴// 섬진마을의 매화가/ 지기도 전에/ 젊은 황어떼가 지리산에 오르고/ 잠시 산수유꽃이/ 잉잉거리는가 싶더니/ 화개동천의 십 리 벚꽃도/ 파장// 아무래도/ 봄은 속도전이다// 피고 지는 꽃이 그러하고/ 아이쿠,/ 무릎 한 번 치더니/ 앉은 채/ 입적하신 노스님이 그러하니/ 나는 그저 어지러워/ 눈 코 입 귀를 틀어막을 뿐// 만만디/ 척추 속에 차오를/ 늦은 고로쇠 수액을 기다릴 뿐//

바람 불어 너도나도바람꽃 / 이원규
밤의 휘파람을 부니 밤바람이 분다/ 간절히 바라니 봄바람이 불어온다/ 파풍(破風)의 대숲에 깃들어 성난 깃털을 쓰다듬더니/ 수다쟁이 봄바람이 창문을 두드린다/ 오래 잊었던 눈짓 손짓들의 살가운 부채질/ 그날 밤 돌담 살구나무 아래 꼴깍 침 넘어가던 소리/ 하릴없이 손가락 관절을 꺾던 소리/ 캄캄해도 부끄러워 눈썹까지 이불을 끌어올리던/ 신열의 달뜬 너도바람꽃/ 삼십 년 전의 봄바람이 불어온다/ 입술 닿은 자리마다 후끈 열꽃이 피어난다// 지천명을 넘어서야 속살 깊이 되새기는/ 변산바람 풍도바람 너도바람 나도바람/ 만주바람 꿩의바람 홀아비바람 조선남바람/ 회리바람 태백바람 세바람 들바람/ 하많은 내 생의 바람꽃들에게/ 그래, 나쁜 놈이야, 나는, 두 무릎을 꿇는다// 간절히 바라니 다시 봄바람이 분다/ 시베리아 바이칼 호수의 자작나무/ 그 숲속에서 불던 흙피리 소리 이제야 당도한다/ 저 바람이 데려오다 흘린 낙엽 하나/ 오늘밤은 또 어디에서 잠드는지/ 흰 목덜미를 돌아온 옛 바람들에게/ 이미 푹 젖은 낙엽의 혀로 안부를 묻는다/ 네가 바라니 나도 바라는 너도나도바람꽃/ 죽을 때까지 제발, 죽지 마/ 애타게 밤의 휘파람을 부니 봄바람이 불어온다//

오디 / 이원규
섬진강 변 861번 지방도/ 모터사이클 내달리며 오뉴월 강바람을 마시는데/ 이 뭐꼬?/ 물까치 떼가 새똥 세례를 퍼부었다// 헬멧 유리창의 새똥을 왼손으로 문지르자/ 온 세상이 보랏빛으로 변했다// 아하, 내 고향 뽕나무에도 오디가 익어가겠구나!// 엄마는 콩나물 팔러 점촌 장에 가고/ 나는야 고갯마루에 밀린 공납금 봉투로 주저앉아/ 가은중학교를 내려다보았다/ 동무들이 공부 다 마치고 돌아올 때까지/ 오디를 따 먹으며/ 청보라 입술을 깨물며// 살다보니 척 보면 알 만한 것들/ 외사촌 누이 영애도 청보라 스웨터를 입고 죽었다//

각시붓꽃 / 이원규
울먹울먹/ 산중 오지마을의 논골 습지에 먹을 갈아놓고/ 남몰래 보랏빛 붓으로 한 획을 긋는데/ 각시여, 나의 각시여 일 년이 걸린다// 해마다 제자리에서 자음 모음 열흘을 망설이다/ 마침내 꽃잎 하나 지우며 겨우 한 획의 편지를 쓰다 말고/ 내년 이맘때에야 다시 붓을 들리라// 아무래도 나는 너무 자주 흘림체로 휘갈겼다/ 이 산 저 산 앉은뱅이 각시붓꽃들을 이어보면 무슨 글자가 될까/ 삼만 리를 걸어도 해독할 수 없다// 그대 또한 깊은 봄밤의 두더지처럼/ 이불 속에서 돌아누우며 끄응 쉼표를 찍고/ 나 또한 지리산하 섬진강변에서 별똥별처럼/ 털썩 무릎을 꿇으며 한 획을 긋는다// 각시여, 나의 각시여 대체 이 무슨 상형문자인가/ 고향 밖으로 떠돌며 이승 내내 울먹울먹 먹을 갈아도/ 끝끝내 못다 쓸 나의 족필(足筆) 한 자루//

복수초 -때로는 돌아갈 수 없는 길도 있다 / 이원규
너를 만나러 가는 길,/ 해는 이울고 길은 멀어 목이 탄다./ 눈보라가 다시 몰려오고 길이 희미해진다./ 마음은 내처 달리는데 발걸음은/ 팍팍하기만 하다./ 한 구비만 돌아서면 너에게 닿을 것 같은데/ 길을 가로 막는 입산금지의 붉은 팻말/ 생의 길,/ 붉은 팻말의 길에 몇 번이나 넘나들었을까/ 주춤대는 마음은 뒤를 돌아보지만/ 돌아가기엔 너무 멀리 왔다./ 아니,/ 때로는 돌아갈 수 없는 길도 있다.//

동백꽃을 줍다 / 이원규
이미 져버린 꽃은/ 더 이상 꽃이 아닌 줄 알았다// 새야,/ 시든 꽃잎을 물고 우는 동박새야/ 네게도 몸서리쳐지는 추억이 있느냐// 보길도 부용마을에 와서/ 한겨울에 지는 동백꽃을 줍다가/ 나를 버린 얼굴/ 내가 버린 얼굴들을 보았다// 숙아 철아 자야 국아 희야/ 철 지난 노래를 부르다 보면/ 하나 둘/ 꽃 속에 호얏불이 켜지는데/ 대체 누가 울어/ 꽃은 지고 또 지는 것이냐// 이 세상의 누군가를 만날 때/ 꽃은 피어 새들을 부르고/ 이 세상의 누군가에게 잊혀질 때/ 낙화의 겨울밤은 길고도 추웠다// 잠시 지리산을 버리고/ 보길도의 동백꽃을 주우며,/ 예송리 바닷가의 젖은 갯돌로 구르며/ 나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지 않는 꽃은/ 더 이상 꽃이 아니라는 것을// 경아 혁아 화야 산아/ 시든 꽃잎을 물고 우는 동박새야/ 한번 헤어지면 그것으로/ 모든 것이 끝장인 줄 알았다//

꽃피는 그대에게 / 이원규
꽃피는 그대/ 먼 길 오시는데/ 이것 참/ 예의가 아니다// 보살행의/ 황어 떼가 오르고/ 매화 꽃망울 막 벙그시는데// 백태 낀 눈으로/ 반기려니/ 이것 참, 예의가 아니다// 목욕재계하고/ 맞아야 할 분들이/ 어디 꽃피는 그대뿐이랴// 달래 돈나물 돋으시는데/ 소화불량의 아랫배 움켜쥐고/ 이것 참, 이것 참//

겨울밤에 쓴 편지 / 이원규
눈 쌓여 길이 사라지면/ 너 향한 새로운 발자국 하나/ 뚜렷이 새기는 줄 너 그렇게 알거라/ 기나긴 광산촌의 겨울밤/ 뼈만 허옇게 남아 그리움이 되는/ 겨울 강변 갈꽃들의 몸짓으로도/ 문득 자지러지는 별들의 비명으로도/ 끝내 이르지 못할/ 기막힌 겨울 편지를 쓰노니/ 너는 아느냐/ 마지막 반을 버리기 위해/ 오늘도 일찍 솟아오른 저 반달의 사연을/ 네 편지를 읽는 겨울밤/ 여기 산간지방엔 둥둥 소북을 울리며/ 송이송이 함박눈이 내리고/ 푸른잠 푸른꿈을 꾸는 청보리들의 아우성과/ 탱자나무 가시에 걸린 비비새의 깃털 하나도/ 결코 가벼이 여길 수 없는 겨울밤/ 백화산을 넘어온 낯선 바람이/ 밤늦도록 불빛 새나가는 내 유일한 출구/ 다락방 유리창을 기웃거리는데/ 너는 아느냐/ 마저 남은 반을 찾기 위해/ 새벽에도 지지 않는 저 반달의 뜻을/ 창문이 흔들리며 네 잠을 깨우든지/ 바람이 문득 네 젖가슴을 스치면/ 그것은 겨울하늘 겨울밤도 울릴 수 있는/ 내 한숨인 줄 알거라/ 이윽고 멀리 새벽닭이 울거내 뜰에도 새벽이 가까운 줄 알고/ 달빛에 눈빛 더욱 빛나는 밤이면/ 나도 네 생각에 잠 못 드는 줄/ 너 그렇게 알거라//

지리산 멧돼지 / 이원규
남원시 운봉읍 지리산 기슭에/ 정종개씨 산다 멧돼지에게 들이받혀/ 갈비뼈 세 대가 나갔지만/ 멧돼지들의 보모인 그에게서 배웠다// 순종은 위험하다는 사실을/ 순도 백퍼센트의 다이아가 깨지기 쉽듯이/ 새끼마저 물어 죽인다는 사실을/ 집돼지 어미를 둔 순도 칠십오의 그들은/ 새끼 잘 키우고 육질도 연하므로/ 하산한 모든 멧돼지는 혼혈이라는 사실을// 함박눈 내리는 지리산의 밤/ 멧돼지 쓸개주를 마시다 한 수 배웠다/ 순결한 꽃은 어째서 일찍 시드는지/ 알코올 백의 술은 어째서 있을 수 없는지/ 오르가슴 백의 섹스는 어째서 복상사일 뿐인지// 혼혈의 멧돼지처럼/ 길들여지는 것은 아닌가 반문해 보지만/ 순도 백의 혁명은 죽음뿐이라는 것을/ 순결한 야인을 꿈꾸지만/ 그는 이미 이승 사람이 아니란 것을//

등 뒤에 지도가 새겨진 사내 / 이원규
그 사내의 등 뒤에는 전국지도 문신이 새겨져 있다// 861번 지방도를 달리다 당산나무 그늘 아래/ 등 뒤의 지도를 벗어 펼치면/ 강원도 평창의 물매화/ 화악산의 금강초롱꽃이 피어난다/ 바로 그 너머 첫사랑의 남편의 어린 아내가 살고/ 이화령 아래 고모산성 사과밭 옆에서/ 어머니의 무덤이 지도 위로 솟아오른다// 해남 땅끝도 멀지 않다/ 전국지도 위의 한 뼘이 3백 리/ 족히 한 시간이면 달려갈 수 있으니/ 등 뒤에 다시 지도를 접어 넣고/ 모터사이클 시동을 건다/ 지리산에서 서울까지 세 뼘 반/ 강원도 고성까지는 다섯 뼘/ 백두산이 열 뼘, 바이칼 호수까지는 스무 뼘/ 잠 안자고 내달리면 겨우 하룻길이 아닌가// 그 사내의 등 뒤에는 붉은 신호등이 없지만/ 한반도 북쪽은 여전히 접힌 채로 깨끗하다// 언제나 지도에 안 나오는 집이 제일 멀다//

풍등(風燈)을 띄우며 / 이원규
서해 맹골수도의 밤은 그 얼마나 캄캄하냐/ 바다 속 깊은 그곳은 또 얼마나 춥고 캄캄하냐/ 아이들아, 수중고혼이 된 아이들아/ 뒤늦게나마 바닷가에 나와 참회의 풍등을 띄운다/ 행여라도 이 불빛들이 보이거든 날아올라라/ 하나 둘 불빛 동아줄을 잡고 사뿐히 날아올라라/ 돌아보지도 말고 훠이훠이 구천을 건너가라// 그리고 용서하지 마라, 아이들아/ 서해의 용이 되어서라도 절대로 용서하지 마라/ 너희들은 교육이 아니라 사육을 받았다/ 너희들은 학교가 아니라 밀식사육장에서/ 왜? 라는 혀가 거세되고/ 아니오! 라는 성대 제거수술을 받으며/ 가만있으라, 가만히 있으라!/ 대한민국 어른들의 그 말만 믿다가/ 해경과 헬기와 에어포켓과 정부만 믿다가/ 원망 한 번 못 해보고 살해되었다/ 마침내 살처분되고 말았다// 아이들아, 수중고혼이 된 아이들아/ 절대로 용서하지 마라/ 거짓 눈물, 기념사진을 찍으며/ 온갖 빠져나갈 궁리만 하는 정부를,/ 사이비 종교를, 천민자본주의를 더 이상 믿지 마라/ 펜은 칼보다 강하다는 말도 믿지 말고/ 어른들을, 시인들을, 종교인들을/ 그리고 뒤늦게 발로 참회하는 나를,/ 여기 이 자리에 모인 사람들마저 믿지 마라// 칼을 물고 엎어져야 할 이 땅의 어른들을 더 이상 용납하지 마라/ 그래야만 너희들이 돌아올 수 있다/ 인당수에 몸을 던진 심청이, 수많은 심청이로 돌아와야만/ 겨우 겨우 한반도가 실눈이라도 뜰 수 있을 것이다// 아이들아, 서해 맹골수도의 밤은 그 얼마나 캄캄하냐/ 수중고혼이 된 아이들아, 육십일이 지나도록/ 바다 속 깊은 그곳은 또 얼마나 춥고 캄캄하냐/ 음력 오월 열이렛날의 남해 바닷가에 나와 참회의 풍등을 띄우니/ 하나 둘 불빛 소망의 동아줄을 잡고 사뿐히 날아올라라/ 돌아보지도 말고 훠이훠이 삼도천을 건너가라//

저승새 / 이원규
벽오동 푸른 문수골의 밤/ 누가 자꾸 돌을 던지나// 날아도 꼭 변화무쌍한/ 유인구처럼 날아와/ 아주 가까이 호랑지빠귀가 운다// 봉창 아래/ 죽은 첫사랑을 부르듯/ 휘이이 퓌이이/ 겨드랑이 속을 파고드는데// 속지 마라 홀리지 마라/ 저 소리는 이승의 소리가 아니다// 온몸의 솜털이 자꾸 한쪽으로 쏠린다// 잊어선 안 될 세월호 의인들에 금낭화 바쳐//

단지 그 물맛이 아니었으므로 / 이원규
전라선 밤기차를 타기 직전이었다/ 단지 물맛이 그 물맛이 아니었으므로/ 서울역파출소 앞 지하도에서 세상의 가장 얇은 이불/ 1998년 5월 8일자 신문지 한 장을 덮어쓰고 누웠다가/ 일어나 생수병에 담긴 맑고 찬 소주를 마셨다/ 사표를 던지고는 빙하기의 바퀴벌레 더듬이를 세운 채/ 문 빌딩 8층 내 의자에서 아주 잘 내려다보이는/ 서울역의 노숙자로 스며든 지 열흘째 밤이었다/ 이만하면 됐다, 시인 박봉우 식의 서울 하야식!/ 환멸의 도시를 떠나는 게 아니라 나도 나를 못 믿겠으니/ 제발이지 불귀불귀불귀 주문을 외며/ 하나 남은 더듬이마저 담뱃불로 지져버리고는/ 구례구행 막차에 올랐다 바로 어젯밤 같은 16년 전의 일/ 나이 들수록 단지 물빛은 그 눈빛이 아니었으므로/ 겨우 맑은 물 한 모금 마시러 지리산까지 왔다/ 어릴 적 날마다 밤마실 나가던 청상과부 어머니/ 고향 하내리의 참샘에서 맨 먼저 길어와/ 장독대 위에 올리던 하얀 사발 속의 정화수/ 바이칼 호수의 만년설이 녹은 물/ 그 차고 맑은 물 한 모금의 눈빛은 아니더라도/ 고운 선생의 세이암 아래 두 귀를 씻고/ 달빛 어른거리는 당몰샘의 천년고리 감로수/ 생니 시리도록 마시고픈 해발 1320미터의 임걸령 옹달샘/ 빗점골 폭포수와 칠불사 찻물 한 바가지/ 첫 햇살 받으며 똑똑 떨어지는 서출동류 석간수/ 그 물 한 방울의 목소리를 들으러 섬진강까지 왔다/ 큰 산 푸른 숲의 배꼽에 얼굴을 묻고/ 입술 부르튼 고라니가 마시고/ 혓바닥이 마른 산새들이 먼저 와서 마시는/ 맑은 물 한 모금이 되려고 16년 전 전라선 밤기차에 올랐다//

단풍나무 인터넷 / 이원규
절정이야/ 혁명도 없이 희망도 없이/ 내 몸은 지금 절정이야/ 피아골 단풍잎들이 스팸메일을 보내 왔다// 자판을 칠 때마다/ 잎잎 푸르던 날들이 저물고/ 엔터키를 두드릴 때마다/ 섣부른 낙엽들이 몸을 날린다// 밤새 단풍나무 벗 삼아/ 고스톱을 치다가/ 야, 낙장불입이야 낙장불입!/ 그래, 그렇지/ 인생이야말로 낙장불입이야// 아침저녁으로 접속하는 단풍나무 인터넷// 옷 벗기 내기를 한 것도 아닌데/ 어느새 무서리 내리고 나목이 되었다/ 그래, 일단 푸욱 겨울잠을 자자//

접사 / 이원규
네 손을 잡는 순간 우리는 이미 한 그루 연리목이야// 야하다는 말 알지?/ 봄날 맨 처음의 꽃 큰개불알풀/ 연보랏빛을 오래 들여다보는 엎드려 자세가 너무 야해// 바지 아랫도리가 터져 불알이 빠지도록/ 100㎜ 접사렌즈로 보는 세상은 오직 너뿐이야// 숲치마를 들추고 변산바람꽃의 성기를 남몰래 들여다보듯이/ 야해야만/ 떨리는 나뭇가지가 다른 가지에게/ 충혈된 눈동자가 눈동자에게/ 불안한 영혼이 영혼에게/ 비로소 접 붙는 거야/ 우리는 지구의 둥근 우리에 갇힌 한집살이 씨짐승// 흰 뼛가루 합장될 때까지/ 봄밤의 섬진강도 너무 야해서 흐르고/ 말씀의 찰거머리도 너무 야해서 자꾸 네 혀를 빠는 거야//

해발 삼백 미터 / 이원규
해발 삼백 미터 이상에선/ 강간 사건이 일어나지 않는다/ 선과 악의 경계/ 새들도 함부로 울지 않고/ 악인마저 착한 산노루가 된다/ 모든 범죄는 그 아래서 일어난다/ 왜 그런지 묻지 마라/ 서울역 지하도를 지나면서도/ 해발 일천 고지를 넘나드는 사람이 있다//

단 하나의 천수천안 / 이원규
저 산은 그 어떤 꽃들도 마다하지 않는다/ 독초도 고슴도치도/ 멧돼지도 말벌도 살모사도/ 저 강물은 절대로 분별하지 않는다/ 천 개의 손, 천 개의 눈을 가졌기 때문// 깊은 계곡 물소리 들으며/ 얼레지가 쫑긋 연분홍 귀를 내밀고 있다/ 그 순간 저 가녀린 꽃처녀는/ 마치 치마를 뒤집어쓰듯 온몸 통째로 귀가 된다/ 봄비가 오시면 온몸이 입이자 혀가 되고/ 깊푸른 물속의 하늘을 볼 때는 눈동자/ 누군가 살며시 입산하면 꽃송이 통째로 코를 벌름거린다// 나 또한 그런 적이 있었다/ 밤길을 도와 우물가 앵두나무로 다가오면/ 그녀의 발자국 소리에 온몸 통째의 귀가 되고/ 밤바람 불면 단 하나의 솜털로 파르르/ 첫 키스 때는 겨우 혀만 살아 있었다/ 시시로 그녀네 울타리의 나팔꽃처럼 킁킁 기웃거리는 코가 되고/ 잠시라도 안 보이는 날이면/ 당산나무 밤 그늘을 떠도는 반딧불이 눈동자// 온몸 단 하나의 손/ 온몸 단 하나의 귀일 때/ 비로소 천 개의 코가 되고 눈이 되고 혀가 된다는 것을/ 아예 몰랐다는 듯이 까맣게 잊고 살았다//

단식 / 이원규
지리산 화개 작설 수제라/ 홀로 산녹차를 마시며/ 주소 불명의 편지를 쓴다// 오늘 저녁은 이것뿐/ 무련, 그대를 생각하면/ 도무지 밥을 먹을 수 없다// 오미의 지리산 녹차여/ 어느새 나의 단맛 쓴맛 신맛/ 짠맛 떫은맛이 된 그대여// 어스름 산그늘에 몸을 가리고/ 그대 영혼의 맑은 피를 마신다//

지리산 옛길 -화개동천 신흥~의신 십리 길 / 이원규
살다 지쳐 자주 팍팍한 날이면/ 세상사 낡은 외투 훌훌 벗어던지고/ 화개동천 지리산 옛길로 가자/ 세이암 맑은 물에 두 귀를 씻고/ 연초록 산바람에 백태 낀 눈동자를 헹구자/ 저마다 외로운 구름처럼/ 한 마리 보리은어의 첫 마음으로 거슬러 오르자// 아직 어린 새색시 첩첩 울며 시집오고/ 의신마을 코흘리개들 가갸거겨 배고픈 쇠점재/ 저 홀로 버림받은 사람도/ 아랫도리 후덜덜 화개장터 소금장수도/ 어금니 꽉 깨물고 넘던 사지넘이고개/ 날마다 서산대사는 입산출가의 자세로 오가고/ 비운의 혁명가 화산 선생은 빗점골로 들어가/ 마침내 죽어서야 돌아왔다// 살다 지쳐 자주 침침한 날이면/ 저잣거리 빛바랜 안경을 벗어던지자/ 감감바위 아래 그 무거운 봇짐일랑 내려놓고/ 금낭화 피면 그 옆에 쪼그려 앉아 그냥 금낭화가 되자/ 산나물 조금 안다고 뜯지도 캐지도 말고/ 박새 초오 지리강활 동의나물/ 여차하면 독이 되는 오욕의 풀일랑 키우지 말고/ 그저 가만가만 보리은어의 눈빛으로/ 착한 다람쥐꼬리처럼 따숩게 두 손을 잡자// 그래도 못다 한 속울음이 남았다면/ 벽소령 희푸른 달빛을 보며/ 대성폭포처럼 그예 대성통곡을 하자/ 그리고 돌이끼처럼 다시는 울지 말자/ 그 누구라도 외로운 산신령, 서러운 신선/ 온종일 의신동천 물소리로 내장을 헹구러 가자/ 모세혈관마다 연초록 바람이 이는 지리산 옛길로 가자// 서산대사옛길 옆에서 밤을 물고 있는 다람쥐//

섬진강 편지 64 -섬진강을 떠나며 / 이원규
낯선 발걸음 거두어 주던 사람들/ 마주칠 때면 눈빛 반짝여 주던 강물/ 흐르는 땀방울 적셔 주던 바람/ 철철이 피어 마음 뉘여 주던 꽃무리/ 낯선 도시 떠돌다 낀 때 씻어내 준/ 순천, 하동, 구례, 광양 사람들/ 데미샘에서 갈사포구까지 오백 리 물길/ 지리산, 백운산, 조계산 사철바람/ 산수국, 꽃무릇, 금낭화, 물봉선 꽃무리와/ 더불어 석삼년, 천백 날 있어/ 나 이제 어느 거리 떠돌더라도/ 마음에 난 물길 여울목/ 징검다리 건너 앞산에 올라/ 흰물봉선 만날 수 있겠네./ 저물면서도/ 저물면서도/ 아,/ 환히 빛나는/ 그 강 노을빛으로 살아갈 수 있겠네.//

네 어무이, 어데 갔노? / 이원규
구레나룻 아저씨을 처음 보았다/ 구랑리의 솔숲의 청설모는 알아도 다섯 살의/ 나는 아버지가 아버지인 줄 몰랐다// 해 질 무렵 비칠비칠 산 그림자로 내려와/ 네 어무이 이디 갔노?, 장에 갔는데요/ 엉거주춤 털보 아저씨가 나를 껴안았다/ 진갈색 장난감 말 한 마리 쥐어주고/ 구랑리의 캄캄한 솔숲으로 꼬리를 말아 넣었다// 강변 자갈 마당엔 쉬쉬 장작불이 타오르고/ 마을 사람들은 부고장도 없이 화장을 했다// 그날 이후 털보도 구레나룻도 모르는 나는/ 네 어무이 어디 갔노? 이 말 한마디/ 고무공 움켜쥐고 쉬쉬 폼푸질이나 하면서/ 뒷다리 용쓰는 장난감 말을 타고 달렸다// 어머니는 저승 삼팔장에 가신 지 스믈두 해/ 아버지 나이보다 열 살 더 먹도록/ 나는 장난감 말 대신 모터사이클 갈아타고/ 지구 스믈일곱 바퀴, 무장무장 백십만 킬로미터를 달렸다// 네 어무이 어디 갔노, 또 어디 가노?/ 말을 타고 말을 찾아 헤매는 기마족이 되었다//

 




이원규 시인
1962년 경북 문경군 마성면에서 태어났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자퇴하고 백화산 만덕사에 들어갔다가 10·27 법난 때 하산 당했다. 독학으로 고등학교 졸업학력 검정고시를 거쳐 계명대학교 경제학과에 입학했다. 1984년에 휴학하고 흥성광업소에서 막장 광부로 일했다. 그 뒤 서울로 와 월간 《노동해방문학》과 민족문학작가회의에서 일했으며 중앙일보와 월간중앙 기자를 하기도 했다.
1984년 《월간문학》에 시 〈유배지의 풀꽃〉을 발표하여 문단에 나왔고, 1989년 《실천문학》에 연작시 〈빨치산 아내의 편지〉 15편을 발표하면서 본격적인 시작 활동에 나섰다. 1998년에 제16회 신동엽창작기금을 받았으며, 2004년에 제2회 평화인권문학상을 받았다.
2000년 지리산 실상사의 수경스님과 황지연에서 을숙도까지 1300리 길을 함께 걸은 첫 도보 순례를 시작으로, 2002년에는 문규현 신부 등과 “무분별한 개발중심주의를 경계하라”는 목소리를 내며 전라북도 새만금에서 서울까지 삼보일배를 지원했다. 2004년에도 제주도를 포함해 대한민국 땅 소읍 여기저기를 두루 밟는 도보 순례를 했으며, 2008년 봄에 종교인·일반 시민·동료 시인 박남준과 함께 ‘한반도 대운하 건설 반대’를 슬로건으로 내걸고 한강과 낙동강, 영산강과 금강 일대를 100일 이상 걸었다. 지리산의 빈집이나 절방을 옮겨 다니며 살고 있다. 자신이 머무는 토방을 ‘너와 나의 경계를 허무는 곳’이라는 뜻의 피아산방(彼我山房)이라 부른다. 구례 피아골, 남원 실상사, 함양 칠선계곡, 구례 마고실마을과 문수골을 돌며 살았으며, 한 번 이사할 때마다 시집이나 산문집을 한 권꼴로 냈다. 스스로를 ‘날라리 시인, 지리산에서 노는 남자’라고 부른다.(출처:위키백과)

 

지리산 은사(隱士) 시인 이원규

직장을 그만두고 처성자옥(妻城子獄)에서 벗어나, 밥벌이에 대한 근심도 던져버리고 산으로 가고 싶다. 청산에 살고 싶다. 이는 누구나 한번쯤 가보고 싶은 길일 것이다. 하지만 자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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