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회 동서문학상 동상 현관 계단 끝에 검정 봉지 하나가 놓여 있다. 봉지에는 이름도 성도 없지만 나는 누가 갖다 놓았는지 알 수 있다. 안에 담긴 것도 반갑지만 봉지 주인의 안녕을 확인했기에 마음이 놓인다. 우리는 이렇게 봉지로 서로의 안부를 전하고 마음을 읽는다. 봉지 안에는 봄빛을 겨우 받은 어린 쑥이 한 줌이다. 옆에는 깨끗이 다듬은 달래 한 움큼이 곁들여져 있다. 그대로 냄비에 들이기 좋을 만큼 단정한 모습이다. 봄이라 향기 머금은 그것들을 애써 장만하신 마음이 그대로 느껴진다. 우리 집에서 보면 어머니가 사시는 마당이 보인다. 지척이라도 문 꼭꼭 닫고 들어앉으면 백리도 넘는 거리다. 어머니가 홀로 계시는 마당을 내다보며 밤새 걱정이고 궁금하다. 이렇게 다녀가신 흔적을 봐야 마음 귀퉁이 짐을 ..
제10회 동서문학상 동상 옹기 일가족이 베란다에 오종종 앉아 해바라기를 하고 있다. 쌀이며 고추장을 담은 크고 작은 배불뚝이들이 반가운 얼굴로 나를 맞는다. 요즘엔 플라스틱, 스테인 그릇들이 대량으로 생산되어 옹기의 기능을 대신하고 있지만 그것들엔 물질문명을 지향하는 획일성만 있어 좀체 정이 가지 않는다. 그에 비해 옹기는 무뚝뚝하지만 언제나 따뜻한 흙의 질감을 느낄 수 있어 볼수록 친근감이 더해지는 것이다. 옹기는 질그릇과 오지그릇을 아울러 말한다. 질그릇은 오지잿물을 덮지 아니하고 진흙만으로 구워 만든 것이고 오지그릇은 붉은 진흙으로 만들어 볕에 말리거나 약간 구운 위에 오짓물을 입힌 것이다. 삼국시대부터 만들어진 옹기는 주 부식을 저장하거나 고추장 된장 등 양념이나 주류를 발효시키는 용구로 사용되었..
제10회 동서문학상 동상 산화된 세월을 건드리면 기억이 환원된다. 습기제거제를 넣으려고 옷장을 뒤적거렸다. 차곡차곡 놓인 옷들의 맨 아래 종이뭉치 하나가 보인다. 제법 도톰하고 길쭉하다. 겉포장을 벗겨 펼치니 수년이 지난 신문의 날짜가 눈에 들어온다. 내용물의 지난 세월을 말해 주고 있었다. 뽀얀 한지로 된 속포장지를 보고서야 외할머니의 유품이라는 것을 알았다. 내 유년의 기억을 고스란히 떠올릴 수 있는 할머니의 은비녀다. 오랜 세월에 은비녀의 색은 변했지만 할머니의 기억은 오히려 또렷하게 다가온다. 푸르스름한 여명의 시각, 할머니는 방바닥에 신문지를 펼쳐놓고 긴 머리를 풀어 동백기름을 발랐다. 가르마를 반듯하게 타서 한 올의 흐트러짐 없이 참빗으로 싹싹 빗어 내리고, 쫑쫑 땋아서 말아 올린 후 쪽을 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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