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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은비녀 / 임경희

부흐고비 2022. 3. 1. 10:31

제10회 동서문학상 동상

산화된 세월을 건드리면 기억이 환원된다. 습기제거제를 넣으려고 옷장을 뒤적거렸다. 차곡차곡 놓인 옷들의 맨 아래 종이뭉치 하나가 보인다. 제법 도톰하고 길쭉하다. 겉포장을 벗겨 펼치니 수년이 지난 신문의 날짜가 눈에 들어온다. 내용물의 지난 세월을 말해 주고 있었다. 뽀얀 한지로 된 속포장지를 보고서야 외할머니의 유품이라는 것을 알았다. 내 유년의 기억을 고스란히 떠올릴 수 있는 할머니의 은비녀다. 오랜 세월에 은비녀의 색은 변했지만 할머니의 기억은 오히려 또렷하게 다가온다.

푸르스름한 여명의 시각, 할머니는 방바닥에 신문지를 펼쳐놓고 긴 머리를 풀어 동백기름을 발랐다. 가르마를 반듯하게 타서 한 올의 흐트러짐 없이 참빗으로 싹싹 빗어 내리고, 쫑쫑 땋아서 말아 올린 후 쪽을 쪘다. 마지막 은비녀를 꽂는 모습은 주어진 오늘 하루를 최선을 다해 살아내겠다는 경건한 의식처럼 보였다. 쪽머리에 하얀 수건을 덮어 쓰고 쇠죽을 쑤기 위해 아궁이 앞에 앉으면서 할머니의 일상은 시작되었다.

할머니는 반짝거리는 금비녀가 아니라 존재감 없는 은비녀였다. 어쩌면 당신 스스로 그 길을 택하셨는지도 모르겠다. 왁자하고 웃음꽃이 피어나는 곳에서는 언제나 한 발짝 물러나서 동그마니 외따로 있었다. 할머니는 부지런히 농사일을 했고 잠시도 외로움이 머물지 못하도록 자신을 다그치고 달래는 삶을 살았다. 노동만으로 점철된 수도승 같은 모습이었다. 할머니의 웃는 모습을 볼 수 있는 사람은 유일하게 나뿐이었다. 모처럼 앞 동네 잔치집이라도 다녀오면 ‘내 강아지’ 부르면서 흰 손수건에 싸온 떡이랑 고기를 빙그레 웃으며 놓아주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그런 할머니와 더불어 나의 유년은 외가에서 시작되었다. 할머니의 쓸쓸한 문간방에서부터 유년의 기억은 싹을 틔운다. 문간방은 외양간을 마주보고 있다. 속눈썹이 길고 우수에 찬 슬픈 송아지의 눈이 지척에 있다. 격자무늬 문살 위에 창호지가 발라져 있고, 반질반질하게 단련된 동그란 문고리 옆에는 빛바랜 코스모스 꽃잎이 펼쳐 있다.

할머니는 저녁마다 아무 소용없는 의식을 거행했다. 등잔불을 켜서 방을 밝히고 나면 반드시 문고리를 안으로 걸고 구멍 속에 숟가락을 꽂았다. 할머니의 방에는 아무도 오지 않았다. 깊어가는 밤, 외양간에서는 송아지의 잠투정하는 얕은 울음소리와 어미 소의 워낭소리만 번갈아 들렸다. 뒷산에서는 길을 잃은 부엉이가 울고 한지 문살 사이로 푸른 달빛이 가득 스며들었다.

나는 북을 가지고 놀았다. 나룻배처럼 생긴 반들반들한 나무통이다. 할머니가 젊었던 시절, 베를 짤 때 씨실 꾸리를 넣고 북바늘로 고정하여 날실 틈으로 오가면서 씨실을 풀어주는 구실을 했던 것이란다. 열여섯의 어린 나이로 시집을 오자마자 베틀에 앉아서 삼베, 명주, 모시를 짜며 노름판과 술에 절어 살던 대책 없는 신랑을 대신해 생계를 도맡아야 했다. 북은 베틀에 앉은 새댁의 임신한 배를 자꾸 쳐대어 아기를 두 번이나 유산하게 만든 한 많은 도구이기도 했다. 그래서 그랬을까. 북을 치면 속 울음소리 같은 것이 먹먹하게 들렸었다.

그 후 할머니는 어렵게 아들을 얻었지만 홍역으로 젖을 떼기도 전에 잃었다. 그렇게 세 명의 자식을 내리 가슴에 묻었다. 그러면서도 살기위해선 베틀에 앉아야 했다. 어스레한 호롱불 아래 밤새 베를 짜면서 인고의 세월과 한을 함께 엮어냈다. 그러다가 내가 어머니라 부르는 딸 하나를 간신히 얻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갈수록 심해지는 외할아버지의 아들타령은 견디어 낼 수 없었다. 결국 할아버지의‘여자’살 돈을 마련하기 위해 할머니는 쉬지 않고 베를 짰다. 사납고 강퍅했던 외할아버지는 당신의 딸과 동갑인 처녀를 사서 작은댁으로 들였다.

할머니의 고단한 삶과 숨죽여 산 세월을 표출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담배였다. 허공에 몽글몽글 퍼지는 하얀 담배 연기를 바라보며 맛있냐고 철없이 물어 보았다. 할머니는 설핏 웃으며 복장이 터질 것 같아 문을 활짝 열고 모든 것을 태워서 연기로 날려 보내는 것이라고 했다. 할머니의 자존심을 흔들고 있었던 것인가. 흐트러짐 없는 쪽진 머리에 가지런히 꽂혀있는 은비녀가 그때 잠시 떨리는 것을 보았다.

할머니 치마꼬리 붙잡고 유년기를 모두 보낸 탓일까. 어느 순간부터 할머니의 인생길을 그대로 따라서 걷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하늘이 내려준 인연인 줄 결혼을 했다. 곧 들어선 아기와 연이은 유산은 내 삶의 회오리바람을 암시했다. 다시 임신이 되었지만 병원에서는 가망이 없다고 했다.

아득했던 그 때, 달려온 사람은 할머니였다. 꼼짝하지 않은 채 누워서만 지내게 했다. 심지어 바닥에 비닐을 깔고 눕힌 상태로 내 머리를 감겼다. 그뿐이랴. 이른 새벽부터 들판에서 익모초 줄기를 따다가 그늘에 말린 후 달였다. 익모초는 혀가 오그라들 만큼 쓴 약초이다. 내 귀에는 자궁에 좋다는 소리만 들릴 뿐 쓴맛의 감각조차 느끼지 못했다. 할머니의 정성과 간절한 기원이 하늘에 닿았는지 기적적으로 태아는 살릴 수 있었다.

기쁨은 잠시 예상 못할 일은 그 후에 일어났다. 나는 하늘처럼 믿었던 남편과 갈라섰다. 배신의 아픔을 삼키며 아이를 키워야하는 운명을 맞이했다. 참혹한 지옥 속에 허우적거릴 때 달려 온 사람도 할머니였다.

“잊어뿌라. 다아 잊어뿌라. 인자 흘려 보내그라.”

불 꺼진 밤, 어둠 속에서 내가 잠이 들었는지 가만가만 얼굴을 들이대고 숨소리를 확인하던 할머니 때문에 잠든 척하느라 숨죽이던 눈물겨운 밤들이었다. 세상과 이어진 끈을 확 놓아버리고 싶은 나날의 연속이었다. 죽음의 유혹은 너무도 강렬했지만, 상심할 할머니 생각을 하면 내게 엮인 질긴 삶의 끈을 놓아버릴 수는 없었다. 그 옛날 할머니가 모든 불행을 겪어 내면서 베틀에 앉았듯이, 넘어졌던 몸을 일으켜 세우고 직장으로 나갔다.

세월이 약이라 했던가. 내가 자리를 잡고 일어설수록 할머니는 점점 작아졌다. 어깨가 눈에 띄게 내려앉았고 허리가 기역자로 구부러졌다. 심각한 난청이었지만 보청기에 적응하지 못해서 적막강산에 홀로 있었다.

눈발이 분분하게 흩날리던 겨울날, 할머니는 불현듯 머리를 자르겠다고 했다. 한 평생 해왔던 할머니의 쪽진 머리가 어정쩡한 상구머리로 변하는 순간, 낯설어서 눈물이 쏟아졌다. 눈물을 훔치는 내 손에 할머니는 은비녀를 가만히 쥐어주었다.

할머니는 바보처럼 착하고 따뜻한 사람이었다. 임종 며칠 전, 병원 침대에 까무룩 자는 듯이 누워있던 할머니는 갑자기 두 팔을 위로 쳐든 채 허우적거렸다. 입가에는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깜짝 놀란 내가 왜 그러냐고 큰소리로 물었다.

“할배 왔니라. 어서 물 길어다 정지에 가 쌀 안쳐야 한데이.”

평생 한량이었고 배신으로 멍들게 했던 할아버지의‘뜨신 밥’을 지으려고 우물가에 서 있었다. 허공을 향해 두 팔로 바쁘게 두레박을 당기는 할머니 모습에 가슴이 후두둑 뜯기고 말았다.

할머니는 내 삶을 지켜준 기둥이었다. 인생길 구비 구비마다 치맛자락을 거머쥐고 달려와 눈물을 훔쳐 주었다. 세상일은 시간이 흐르면 삭아지고 흐려지게 된다고들 말한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파랗게 짙어지는 이끼 같은 슬픔도 존재한다. 나이가 들어가도 할머니의 모습은 눈물 속에 일렁이고, 할머니의 말씀은 귓가에 쟁쟁하다.

내 기억 속에서 가장 명료한 할머니는 은비녀로 하루의 빗장을 열었고 은비녀 같은 꼿꼿한 자존심을 지켰던 모습이다. 반듯한 가르마가 나누어 놓은 머리카락을 한 곳으로 모아 올려 한 올 빠뜨리지 않은 채 자신과 자식들을 지켜왔다. 흘러 가버린 어제에 매달리지 않았던 할머니의 모습, 다가오는 오늘에 최선을 다하던 할머니의 모습이 은비녀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은비녀를 닦았다. 부드러운 면에 소다와 물을 묻혀 문지른다. 금세 깨끗하고 우아한 빛을 발산한다. 은비녀를 장식장 위에 놓는다. 그리운 마음 한 자락도 같이 내려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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