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회 동서문학상 동상 생이란 사랑 외에 다른 소명을 지녔을까. 그건 생물이건 무생물이건 마찬가지여서 마음을 열어 서로를 확인하는 순간부터 크나큰 우주적 흐름 그 근원적 에너지를 공유하게 되는 게 아닐까, 엄마가 나날이 여위는 동안 나는 나이답지 않게 생각이 많아지고 엉성한 애어른이 되어갔다. 가마솥의 가장자리를 꼭 짠 행주로 문질러 닦아놓기도 하고, 쇠죽 끓는 뚜껑을 뒤집어 물을 데우기도 하고, 여섯 살짜리 동생을 말갛게 씻겨 놓기도 하고, 저녁마다 등불 켜듯 떠오르는 별들을 하나하나 이름 불러 잠재우기도 했다. 그 애가 떠난 자리는 거꾸로 매달린 우물처럼 캄캄하고 아슬아슬해서 우리들 누구도 똑바로 들여다본다거나 다가갈 생각은 하지 않았다. 적당히 거리를 두고 돌아앉거나 먼 산을 바라보며 외면하려 했..

제11회 동서문학상 동상 친구가 조각보 하나를 보내왔다. 다과상이나 찻상을 덮을 만한 크기이다. 상보로 쓰기에는 좀 작은 듯하지만 외출을 할 때면 남편의 상을 보아서 이 조각보로 덮어둔다. 남편은 밥과 국에 두어 가지 반찬이면 족한 사람이라 크기가 적당하다. 젊은 시절에는 자질구레한 생활 소품들은 웬만한 것을 여러 개 두고 쓰기를 좋아했다. 바느질을 배워 손수 만들었다. 바느질하기를 좋아하는 탓도 있었지만 그런 것들을 일일이 사서 쓰기에는 생활이 바듯했다. 아이들 턱받이나 토시, 고무줄 바지, 전화기받침, 앞치마, 베갯잇, 커튼들을 만들었다. 이제 아이들은 자라서 집을 떠나고 우리 부부만 있어서 집안을 어지럽힐 일도 별로 없고, 매일 쓸고 닦아야 할 일도 줄었다. 아기자기한 소품들을 즐길 나이도 지나서 ..

제11회 동서문학상 동상 텅 빈 벽면에 흑백 사진 한 점이 걸려있다. 네 개의 팔로 세상의 위협과 폭력을 차단시키겠다는 듯 굳세게 끌어안고 있는 사진 속 두 남녀를 본다. 맞닿은 심장에서 솟구치는 힘찬 박동소리가 들린다. 그 박동소리에 몸을 실어 어딘가로 날아가고 있는 듯 여자의 입가엔 희마한 미소가 서려있다. 이 방의 이름을 지어주고 싶다. 서재라고 그냥 밋밋하게 부르기에는 방의 느낌이 너무 특별하다. 다갈색 벽지가 차분한 벽면을 따라 연한 검정 색깔의 나지막한 책장 두개가 이어져 있다. 그 앞으로 놓여 진 폭이 좁은 긴 책상이 책장과 맞춤인 듯 어우러진다. 책꽂이의 책들은 필를 나눈 혈육들처럼 다정히 포개어져 있다. 스틸 프레임이 심플한 데스크 탑과 하얀 색 복합기. 그것들이 이 방의 전부다. 세평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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