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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이별의 능력 / 권혁주

부흐고비 2022. 3. 3. 08:37

제11회 동서문학상 동상

생이란 사랑 외에 다른 소명을 지녔을까. 그건 생물이건 무생물이건 마찬가지여서 마음을 열어 서로를 확인하는 순간부터 크나큰 우주적 흐름 그 근원적 에너지를 공유하게 되는 게 아닐까, 엄마가 나날이 여위는 동안 나는 나이답지 않게 생각이 많아지고 엉성한 애어른이 되어갔다. 가마솥의 가장자리를 꼭 짠 행주로 문질러 닦아놓기도 하고, 쇠죽 끓는 뚜껑을 뒤집어 물을 데우기도 하고, 여섯 살짜리 동생을 말갛게 씻겨 놓기도 하고, 저녁마다 등불 켜듯 떠오르는 별들을 하나하나 이름 불러 잠재우기도 했다. 그 애가 떠난 자리는 거꾸로 매달린 우물처럼 캄캄하고 아슬아슬해서 우리들 누구도 똑바로 들여다본다거나 다가갈 생각은 하지 않았다. 적당히 거리를 두고 돌아앉거나 먼 산을 바라보며 외면하려 했다. 사람에겐 아픔이나 상처 같은 건 되새기고 싶지 않은 본능 같은 게 있는 모양이었다. 또래 아이들 속에서 이슬빛 눈망울이 깔깔거리며 달려들 때마다 나는 안도의 숨을 내쉬곤 했다.

감나무 그늘에서 잠자다 깨어났을 때 그늘은 저만큼 물러나고 눈부신 햇살속의 나를 낯설게 바라보는 이전의 나를 만났을 때처럼, 한번도 꾼 적 없는 생경한 꿈속을 술래가 되어 열을 세고 스물을 세는 동안, 다시 어딘가로 사라져 버릴까봐 그 작은 어깨가 숨어드는 짚더미며, 벽 모퉁이며, 금간 장독 뒤며, 늦은 햇살이 깔아 논 감나무 그림자 뒤로 눈길을 거두지 않았다. 엄마가 부르는 소리를 따라 하나 둘 집으로 돌아가고 난 뒤에도 여전히 술래였던 나는 무너진 담벼락에 기대 산등성이로 넘어간 별들과 풍뎅이처럼 윙윙거리는 기억들을 하염없이 따라 다녔다. 파리하고 작은 그림자에 기대 집으로 돌아오면 늦은 저녁밥을 불빛 아래 펼쳐 놓은 엄마가 아득한 시간을 끌어다가 탑이라도 한 채 쌓으려는 듯 달력의 숫자들을 거꾸로 세어보고 세어보고 하였는데 잊어버린 뭔가를 애써 상기하려는 것인지 아니면 무슨 비탈길을 하나하나 되짚어 새로운 강이라도 하나 새기려는 모양이었는지.

그 무렵 엄마는 달빛 아래 찔레꽃빛처럼 참으로 아슬아슬했다. 종잇장처럼 얇고 가벼운 시간들을 온몸에 펴 바른 듯 창백하고 우울한 그림자였다. 마음안의 즐거움이나 기꺼움들이 얼마나 사람을 빛나게 하는지. 스스로를 계획하고 충고하며 끊임없이 어디로든 데려가는 일은 아무도 대신 해 줄 수가 없다. 부모자식간이라 해도 그보다 더 가까운 사이라 해도 영혼이 지닌 힘이기도 하고 함정이기도 하다.

특별히 다정하지도 냉정하지도 않은 아버지는 마음의 풍경을 거의 읽을 수 없었다. 책을 읽어주고, 얘기를 들려주고, 풀잎이나 꽃송이 같은 걸로 놀잇감을 만든다거나 맑은 울림을 지닌 풀피리 같은 걸 만들 때 유독 다정해지거나 무심해지지 않은 것처럼 그저 고요하고 잔잔했다. 마당의 감나무 그림자가 온종일 제자리걸음만 하다가 저녁때쯤 산들이 마을로 내려와 지친 그림자를 한 겹 두 겹 쌓아 올리는 시간이 오면 고삐에 매인 염소처럼 아버지는 돌아왔다. 때로는 늙은 암소를 느릿느릿 몰고 푸성귀를 한 짐 출렁거리며 묵은 나그네처럼 마당으로 들어섰다. 그럴때면 우리 마당은 금방 잠에서 깬 우물이듯 덩달아 출렁거렸고, 고삐를 받아 매고 지게의 작대기를 받치는 아버지를 도와 푸성귀 사이에서 익은 산딸기나 산앵두 같은 것을 찾아내기도 하였다. 수풀 속에서 새빨갛게 익어가는 그것들을 따 모으며 마음은 무슨 시간들을 떠올렸을까? 두레박처럼 길어 올린 생각들은 어디에 머물던 것이었을까? 무심한 것들이 얼마나 사람을 아프게 하고 숨막히게 하는지, 가라앉는 것들이 들여다 볼수록 아득하고 아득하듯이. 깊은 산속의 외딴 호수처럼 홀로 깊어가고 홀로 저물어가는 그런 존재의 적막을 품은 아버지, 세상의 모든 아버지란 이름들.하찮은 미물이라도 생명이란 생명들은 다 귀하다 여기는 아버지는 참으로 경건한 사람이었다. 새털만큼의 가벼움도 깃들지 않았지만 특별히 종교적이지도 않았다. 시간이 사람을 속이기도 한다는 걸, 하지만 그런 일은 해 지는 일만큼이나 자연스러워서 억울해 할 수도 없는 일이라 했다. 비 그친 여름날 온 동네 사람들이 물길 어귀마다 통발을 치느라 수선을 피워도 언제나 시큰둥했는데 무슨 마음에선지 양동이 가득 통통하게 살 오른 미꾸라지들을 건져다 놓았던 날이 있었다. 우리는 서로 뒤엉켜 거의 하나가 된 것 같은 찰진 생명의 덩어리를 눈앞에서 만났다는 게 믿기지 않아 물속에 손을 넣어 미끄러운 감촉을 느껴도 보고 몇 마리쯤 건져 올려 안절부절 하는 그놈들을 아득하게 바라보기도 하였다.

어떤 경우에도 자기를 완전히 감춘다는 건 불가능해. 누군가는 반드시 찾아내고 말거야, 잡기도 하고 잡히기도 하는 세상은 술래놀이 같아, 이것들을 우리가 찾아낸 것처럼 또 누군가는 우릴 찾고 있을 거야 끊임없이 열려있는 생명의 신비로운 여정, 유한성을 넘어 어딘가로 가고 싶은 저 미끄럽고 유연한 길들의 잔치 같은 것. 저렇게 서로 엉키어 한 발자국도 나아가지 못하면서도 우주를 다 여행하는 중이라우기는 저 것들처럼.

영영 찾을 수 없는 곳에 숨는다는 건 놀이의 규칙에 어긋나지. 한 번, 두 번, 세 번 적어도 그 이상은 술래를 휘돌게 해선 안 되지. 누구나 술래가 될 수 있으니까, 자기 차례가 오면 실망하지 않을 만큼 그렇게 자기 스스로를 믿어 주는 게 중요해, 술래가 지치거나 화가나 놀이를 팽개치고 엄마 품으로 달려가기 전에 옷자락이나 머리카락쯤 들켜 주는 게 미덕이라구. 내가 가르쳐준 술래잡기의 규칙이었다.

운명은 참 칼날 같았다. 여덟 해, 세상의 검은 구름 한 점 곁눈질 하지 않은 나이 호기심 많은 것이 아무도 몰래 낫을 찾아 풀 베는 시늉을 한 게 화근이었고, 흐린 땅바닥에 떨어진 순결한 핏방울들을 어느 발자국이 흔적 없이 지워버렸는지, 지나는 바람이 감추어 버렸는지. 손가락의 상처를 봉합하고 아물기를 기다리는 동안 하늘의 한 쪽 모퉁이가 빗물처럼 땅속으로 사라지는 중이라는 걸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닷새쯤 지났을까. 열이 오르고 헛소리를 해대어도 손가락의 상처로 숨어든 세균이 뇌 속까지 다다른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않았다. 무슨 열병이거니 한 며칠 지나면 거짓말 같아지려니 다들 그랬다.

병원에서 하룻밤도 못 넘기고 큰아버지 등에 업혀 온 아이는 더 이상 술래는 아니었다. 일러 준 술래의 규칙들을 한순간에 모조리 깨뜨려버린 뒤였으므로. 그날부터 우리는 스스로 술래임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마음을 술래마당처럼 폈다 아버지는 아버지대로 어머니는 어머니대로 나는 또 나대로. 찾아도 찾아도 늘 제자리인 마음속의 그 마당은 해가 지지 않는 불멸의 영토였다. 두레박을 내려도 내려도 수면이 닿지 않는 캄캄한 우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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