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엄마는 지난겨울 눈길에 넘어져서 고관절 수술을 하셨다. 수술을 감당할 수 있을까 걱정하였는데 잘 견디셨다. 담당의사도 놀랄 정도였다. 가족들, 친척들, 동네 분들의 병문안이 이어졌다. 엄마는 자식들에게 누구는 몇 번 오고, 무엇을 사오고, 얼마를 주고 갔다고 사람들의 면면을 이야기하느라 바쁘셨다. 꼭 올 줄 알았던 사람이 안 온다고 서운해 하기도 하고, 그 집 어멈 죽었을 때 부조를 얼마 했는데 그 사람은 그것의 반만 주고 갔다고도 하셨다. 엄마는 죽만 드셔야했다. 움직이지 못하고 누워 있으니까 소화도 안 되고 음식이 넘어가지 않았다. “배곯아서 죽겄다. 곰국에다 밥 좀 말아 묵으먼 원이 없겄다.” 하셨지만 갈수록 미음을 넘기기도 힘들었다. 오빠는 “이렇게 안 드시면 못 일어나요. 그러면 요양병원 가셔야..
신문에서 오늘의 운세를 본다. 띠별로 출생년도에 한마디씩 풀어 놓은 말이 재미있다. 신문을 대충 훑어보고 청소며 빨래를 몰아쳐서 한다. 집 떠나있는 아들들이 오는 날이다. 월화수목은 느긋하게 살다가 주말만 되면 살림하는 주부가 된다. 세탁소에 들렀다. 서너 해 보아왔건만 아주머니는 처음본 듯 늘 데면데면이다. 하긴 살갑게 대하는 거 보다 편할 때도 있다. 아주머니가 옷을 내주면서 웬일로 말을 건넨다. “화장 안 해도 얼굴이 깨끗하셔요.” 집 나서려면 군빗질에 립스틱 정도는 바르는데 민낯으로 보였나. 그래도 아주머니의 뜬금없는 말이 싫지는 않다. “사장님은 더 고우셔요.” 말대접을 한다. 아주머니는 고개를 살짝 흔들면서 “아휴, 저는 젊잖아요.”하는 게 아닌가. 그럼 나는 늙었다고? 기껏 해봐야 대여섯 살..
물황태수라는 말이 있다. 술에 술 탄 듯 물에 물 탄 듯 부처님 근처에 있는 듯하지만 신통치 않은 사람을 말한다. 남편은 아주 오래된 농담처럼 나에게 한 번씩 물황태수라고 한다. 남편은 신경 쓰지 않아도 될 살림 간섭을 가끔씩 하는데 오늘도 청소기 때문에 그 말을 들어야 했다. 청소기 브러시가 지저분해서 새것으로 사다가 바꾸라고 했는데 며칠이 지나도 그대로였다. 듣기 좋은 노래도 한두 번이다. 오늘은 꽃잎 속의 가시처럼 그 말이 콱 가슴 속으로 와서 박혔다. 우황청심환이라도 먹어야 진정이 될 것 같았다. 촛불 밝힌 식탁에서 티타임의 모녀처럼 차라도 마시고 있었다든지 저물녘의 황홀 속에 빠졌다든지 꽃을 찾아서 어떤 나들이라도 갔다 온 뒤라면 웃으면서 넘어갈 수도 있었을 것이다. 서로의 성격을 지 알고 내 ..

많은 분들이 오셨구려. 문학제를 한다기에 와 보았소. 내가 누구냐구요? 수주(樹州) 변영로(卞榮魯)의 마누라 양창희(梁昌姬)요. 내 가만 보니 부천에서 수주문학상도 만들고, 수주 책들을 다시 내기도 합디다. 그런데 모두 다 '수주 수주'지 함께 살면서 고생한 내 이야기는 아무도 안하는 거여. '수주'하면 말술도 마다하지 않았다는 술꾼 아니요? 그 술꾼 마누라로 살았던 내 이야기 좀 하려고 이리 왔소. 수주가 "이년아! 썩 내려와라!" 하면서 저쪽에서 달려올 것 같기도 하네요. 만취해 들어오면서 "이년아!" 하고 부르는 것이 나를 부르는 소리였으니까. 그 소리만 나면 밥상에 앉아있다가도 이웃집으로 도망을 쳤지. 그러면 "거기 대가리 허옇게 희고 코 빨간 년 있거든 당장 내쫓아라. 세상에 둘도 없는 악독한 ..
- Total
- Today
- Yesterd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