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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제목들의 향연 / 최미아

부흐고비 2020. 12. 2. 11:13

물황태수라는 말이 있다. 술에 술 탄 듯 물에 물 탄 듯 부처님 근처에 있는 듯하지만 신통치 않은 사람을 말한다. 남편은 아주 오래된 농담처럼 나에게 한 번씩 물황태수라고 한다. 남편은 신경 쓰지 않아도 될 살림 간섭을 가끔씩 하는데 오늘도 청소기 때문에 그 말을 들어야 했다. 청소기 브러시가 지저분해서 새것으로 사다가 바꾸라고 했는데 며칠이 지나도 그대로였다.

듣기 좋은 노래도 한두 번이다. 오늘은 꽃잎 속의 가시처럼 그 말이 콱 가슴 속으로 와서 박혔다. 우황청심환이라도 먹어야 진정이 될 것 같았다. 촛불 밝힌 식탁에서 티타임의 모녀처럼 차라도 마시고 있었다든지 저물녘의 황홀 속에 빠졌다든지 꽃을 찾아서 어떤 나들이라도 갔다 온 뒤라면 웃으면서 넘어갈 수도 있었을 것이다. 서로의 성격을 지 알고 내 알고 하늘이 알건만 오늘은 어떤 야만이 꿈틀거렸는지 빈정이 확 상했다. 남편이 속으로 나의 웬수덩어리, 이러지나 않나 하는 얼척없는 생각까지 들었다. 집안도 마음도 다 꿉꿉하게 만들어 버린 장맛비 탓인지도 모른다.

혼자 집 옆 공원에 나왔다. 남편은 <추적자>라는 드라마를 보고 있다. 내가 보기에는 어느 시시한 사내 이야기 같던데 요즘 한창 인기란다. 가는 비, 이슬비가 내려서 그런지 사람들이 별로 없다. 비가 오기 시작하니까 목마른 계절이 언제였나 싶게 날마다 비가 온다. 삼 년 가뭄에는 살아도 석 달 장마에는 못 산다더니 그 말이 딱 맞다. 이제 비가 그만왔으면 좋겠다.

어제 청소기 때문에 서비스센터에 가기는 갔다. 530W, 청소기 몸판 위에 J-1 비자 번호처럼 쓰여 있는 숫자를 적어 가지고 집을 나섰다. 마침 비도 그치고 하늘이 빠끔 열려서 차를 타지 않고 걸었다. 공원은 꽃 지고 잎 피고 하더니 녹음이 우거져 싱그러웠다. 떡을 맛있게 한다는 그 여자네 집 앞을 지나가는데 삼삼오오 서 있는 여자들이 있었다. 무슨 일인가 가까이 갔더니 놀랍게도 모두 담배를 피우고 있는 중이었다. 그 근처에서 근무하는 여인들인데 쉬는 시간에 나온 것 같았다. 욕망의 응달 때문에 휘청거리는 오후를 달래고 있는지, 길고 재미없는 영화가 끝나갈 때처럼 지루한 표정들로 담배 연기를 후후 날리고 있었다. 공항에서 만난 사람들처럼 아무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놀라 바라보는 내게 지금이 어느 시대인데 그대 아직도 꿈꾸고 있는가 묻는 듯하였다. 참을 수 없는 비밀을 간직한 듯 눈치 보면서 담배를 피우던 때는 지났나 보다. ‘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 이런 교양강좌는 어디 없나 부질없는 생각이 들었다.

칼 가는 아저씨가 리어카를 끌고 무심히 지나갔다. ‘카~알 갈아 칼.’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말이 규칙적으로 흘러나왔다. 녹음한 테이프를 틀어 놓고 세상에서 제일 무거운 틀니를 해서 입을 열 수 없다는 듯 아저씨는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팔뚝의 문신만이 훈장처럼 도드라져 보였다. 아저씨는 헝겊에다 사주, 궁합, 작명, 택일 등의 글자를 써서 리어카에 주렁주렁 달아놓았다. 굿은 못 하는지 ‘재수굿’, 이런 것은 없었다. 칼갈이와 역학, 카메라와 워커만큼이나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지만 칼만 갈면 거저나 마찬가지로 사주 정도는 봐 줄 것 같아 칼이 없는 것이 섭섭할 정도였다. 대로에서 그런 것 볼 용기도 없었지만 만약에 보았더라면 내가 놓친 화합이나 도둑맞은 가난 같은 것, 마흔아홉 살 마른 꽃 같은 내 인생을 꿈과 같이 풀어 주었을까? 또 오복이 아니라 육복까지 타고났다며 지금은 오만과 몽상에 사로잡혀 너무도 쓸쓸한 당신이지만 그래도 해피엔드로 끝날 거라 말해 주었을까?

길거리에서 해찰을 부리다 서비스센터에 도착했다. 부품을 사러 왔다고 하니까 안내를 해 주었다. 지금은 어디나 ‘친절한 복희 씨’들이 있다. 닮은 방들 속에서 열심히 일을 하고 있는 젊은 기사들에게 상이라도 주고 싶었다. 예서제서 지렁이 울음소리처럼 제품들을 시험하는 소리가 들렸다. 딸 부잣집 맏사위처럼 생긴 기사에게 530W, 적어온 메모지를 자신 있게 보여주었다. 맏사위는 간단명료하게 이건 모델명이 아니라 흡입력을 나타내는 숫자라고 말했다. 갑자기 머릿속이 무중 상태로 되어버렸다. 아직 황혼에 접어든 나이도 아닌데, 이러다 나의 가장 나종지니인 것은 무엇이 될까 두려웠다. 나는 왜 작은 일에만 분개하는가 싶기도 했지만 모델명을 잘 보이는 곳에 적어 놓아야 하는 거 아니냐고 따져 물었다. 서글픈 순방에 아직 끝나지 않은 음모라도 있는 듯 주춤거리다 비슷한 걸로 주면 안 되느냐고 사정해 보았다. 종류가 저렇게 많이 있다고 창고 쪽을 보여주는데 층층이 쌓여 있는 자재들을 보니까 우길수가 없어 조용히 물러났다.

오는 길에 서점에 들렀다. 그곳이야말로 내가 초대 받은 공간처럼 대범한 밥상을 차릴 수 있는 만만한 곳이다. 꼭두각시의 꿈을 꾸든 그 남자네 집을 미망하여 그리워하든 어느 이야기꾼의 수렁에 빠지든 다 허용이 된다. 로열박스에 박완서 선생의 장․단편 전집이 꽂혀있었다. ≪엄마의 말뚝≫, ≪도시의 흉년≫, ≪해산바가지≫, 어쩌면 제목들을 이리 잘 지었을까. 서점을 나와 석양을 등에 지고 그림자를 밟으며 가족 간 저녁의 해후가 기다리고 있는 집으로 왔다. 식사를 차려 “후남아, 밥 먹어라.” 이르고 제목들을 종이 한 장에 쭉 써서 프린트 하였다.

오늘 갱년기의 기나긴 하루를 제목들을 들여다보면서 보냈다. 읽고 또 읽으면 저문 날의 삽화나 조그만 체험기라도 한 편 근사하게 써지지 않을까 싶었다. 이런 내가 어찌 청소기 따위를 생각할 수 있으랴. 또한 나목처럼 뻣뻣한 남편이 어찌 봉황의 나날을 이해할 수 있으랴.

후둑후둑 빗줄기가 굵어진다. 드라마를 보다 소파에서 잠들었을 그의 외롭고 쓸쓸한 밤 속으로 어서 가라는 듯.

* 본문 내용에 박완서 님의 책 제목들을 가져와서 썼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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