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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오늘의 운세 / 최미아

부흐고비 2020. 12. 3. 08:44

신문에서 오늘의 운세를 본다. 띠별로 출생년도에 한마디씩 풀어 놓은 말이 재미있다. 신문을 대충 훑어보고 청소며 빨래를 몰아쳐서 한다. 집 떠나있는 아들들이 오는 날이다. 월화수목은 느긋하게 살다가 주말만 되면 살림하는 주부가 된다.

세탁소에 들렀다. 서너 해 보아왔건만 아주머니는 처음본 듯 늘 데면데면이다. 하긴 살갑게 대하는 거 보다 편할 때도 있다. 아주머니가 옷을 내주면서 웬일로 말을 건넨다. “화장 안 해도 얼굴이 깨끗하셔요.” 집 나서려면 군빗질에 립스틱 정도는 바르는데 민낯으로 보였나. 그래도 아주머니의 뜬금없는 말이 싫지는 않다. “사장님은 더 고우셔요.” 말대접을 한다. 아주머니는 고개를 살짝 흔들면서 “아휴, 저는 젊잖아요.”하는 게 아닌가. 그럼 나는 늙었다고? 기껏 해봐야 대여섯 살 아래 같은데…. 자칭 젊은 사장의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문을 밀고 나왔다. 건너편 상가 ‘세탁수거배달’ 간판이 이제 단골을 바꿀 때라는 듯 크게 보였다. 오늘의 운세가 뭐였더라. ‘과분한 칭찬을 경계하라.’였나.

횡성한우 정육점에 갔다. 소를 잡은 날인가 보다. 아저씨는 갈고리에 매달아 놓은 육괴를 손질하고 있다. 예전에는 소 한 마리가 들어오면 꼬리, 사골, 내장 등이 다 나갔는데 요즘은 살코기만 팔린다고 한다. 나는 고기요리만 반찬인 줄 아는 아들들이 올 때만 정육점에 간다. 하지만 가게가 아파트 1층에 있어 날마다 지나다닐 수밖에 없다. 아저씨는 담배 피우다가도, 전화 하다가도 나만 보면 인사를 한다. 마트에서 고기를 사올 때면 아저씨가 볼까 봐 잰걸음을 친다. 안 보는 척하지만 아저씨는 매의 눈으로 시장바구니를 훑어본다. 오늘은 대패삼겹살을 사려고 들렀다. 아저씨는 텔레비전에 나온 요리를 하느냐고 물었다. 항상 한우 투플러스만 먹는 젊은 사모님들이 이걸 사갔단다. 투플러스는 연중행사로나 사는 내게 들으라는 말 같다. 요리 할 줄 모르는 사모님은 생고기만 구워먹으면 쉽다. 요리 좀 하는 나는 돼지고기만으로도 열댓 가지 요리를 할 수 있다. 아저씨는 큰 인심쓰듯 고기소스를 봉지에 넣는다. 들큰한 시판용 소스는 하수나 쓰지 어찌 고수가 쓴다고. 소스는 물리치고 나는 대패삼겹살만 들고 나왔다. 대형마트 옆에 있어 잘 될까 걱정했던 푸줏간이 유지되는 이유가 젊은 사모님들 투플러스 사랑이었나 보다. 오늘의 운세는 뭐였지.

얼마 전 개업한 옷가게 앞이다. 주인 혼자 있으면 들어가기가 쉽지 않다. 문밖에 있는 미끼 상품만 들춰 보기도 하고, 손님이 있을 때 들어가서 대충 눈요기만 하고 나왔다. 내 취향인 옷이 많았지만 얼핏 본 가격이 만만치 않았다. 오늘은 손님이 욱적북적이고 있어 이때다 하고 들어갔다. 내가 들어간 순간이 손님이 나가려던 때였는지 순식간에 싹 빠져나가고 혼자 남았다. 맨드리가 고운 사장님이 엉거주춤 서 있는 내게 다가왔다. 옷가슴에 있는 브로치를 위쪽으로 옮겨주면서 나를 거울 앞으로 돌려세웠다. 살짝만 바꾸어도 훨씬 ‘영’해 보인단다. 주인여자는 오래 보아 온 사람처럼 곰살가웠다. 손님이 많다고 했더니 오픈 두 달만에 자리를 확실히 잡았다면서 이어지는 말이 청산유수다.

원래 전공은 무용인데 액세서리 강의도 했어. 자기 다니는 거 자주 봤는데 얌전하더라. 들어와서 구경 해. 내가 동생 같으니까 옷 코디 해 줄게. 백화점은 못가더라도 홈쇼핑 옷은 절대 사지 마. 얌전한 얼굴 다 버려. 저쪽 주상복합에 사는 사모님들은 부자인가 봐. 아까 봤지 사모님들. 옷 들어오는 날 연락하면 와서 싹 쓸어 간다니까. 언니는 이거 한 번 입어 봐. 우리 애들 다 어울리지만 애가 딱이야. 오늘 많이 팔아서 그냥 가져온 가격에 줄게. 말도 안 되는 가격이야. 나는 옷 가게만 하면 왜 이리 잘되나 몰라. 하도 심심해서 오픈했더니 또 이 난리네.

주인여자는 얼굴 주름에 비해 목소리가 카랑카랑하다. 내 호칭은 사모님이 아니고 동생과 언니, 자기로 왔다갔다했다. 오늘의 운세는 ‘빠른 선택이 결코 좋은 것은 아니다.’였지만 사장님 눈에 얌전하게 보였다니 어울린다는 카디건을 빠르게 샀다.

주말이 지나자 날씨가 갑자기 더워졌다. 옷가게 앞을 지나는데 눈에 익은 옷이 문밖에 나와 있다. 반 토막이 난 값이다. 벽에 붙은 ‘현금 교환 환불X’ 종이가 나를 비웃는 듯 바라보고 있다. 날씨 탓만은 아닌 열기가 온몸으로 확 퍼졌다. 오늘의 운세를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울고 싶어도 웃어야 할 때가 있다.’

오늘의 운세, 재미로 떠올려보면서 웃음 짓기도 하고 털어내기도 한다. 내가 좋아하는 운세는 ‘무료한 나날이 이어질 듯’이다. 어려운 일이지만 아무 일 없는 무료한 날들의 연속이야말로 크나큰 축복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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