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1년 제12회 경북문화체험 전국수필대전 장려상 태풍이 훑고 간 해안가는 어수선하다. 잔해들이 여기저기 응집되어 있어, 한바탕 소란을 피웠던 거센 비바람의 힘을 엿볼 수 있다. 하지만 해수면은 지난밤에 찾아왔던 폭풍이 무색하리만치 평온하다. 비바람과 씨줄날줄 설피창이로 엮였던 그 많던 빗방울은 다 어디로 숨어버렸을까. 물의 윤회 속에서 어쩌면 지금 내가 바라보는 상생의 손이 담겨 있는 호미곶(虎尾串) 바닷물로 거듭 되풀이되었을 수도 있으리라. 빗물에 사라진 길의 경계를 더듬어 걷다가 등대박물관에 다다른다. 그곳에서 짭조름한 바닷바람에 젖어 있는 등대를 만난다. 호미곶 등대는 우리나라에서 제일 높은 등대로 1908년에 신설 점등되었다. 등탑은 철근을 사용하지 않고 붉은 벽돌만으로 조적된 팔각형으로, 1..

2021년 제12회 경북문화체험 전국수필대전 장려상 두 손으로 무궁화 꽃다발을 받쳐 든 여인을 올려다본다. 단아한 한복 적삼에 걷어 올린 소매와 옷고름에 결기를 품은 듯 먼 하늘을 응시한다. 앞에는 총검을 높이 쳐든 네 사람의 ‘군인상’ 이 우뚝 서 있고 뒤에는 전적비가 하늘 높이 솟아 있다. 여인은 아들의 무사 귀환을 바라고 종전과 평화를 갈구하는 곡진한 어머니의 모습이다. 다부동전적기념관이다. 6·25 전쟁의 치열했던 격전지 다부동 전투를 기념하기 위해 1981년 건립하였다. 서울을 3일 만에 함락한 북한군은 파죽지세로 개전 사십 여일 만에 왜관의 낙동강까지 밀고 내려왔다. 전 국토의 95%를 점령당한 절체절명의 위기였다. 연합군은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이곳 낙동강 전선에 최후의 방어선을 쳤다. 강..

2021년 제12회 경북문화체험 전국수필대전 장려상 이른 새벽, 홀로 주산(主山)을 오른다. 주산은 고령 대가야읍에 있는, 대가야 왕국의 흥망성쇠를 온몸으로 보듬어 안고 온 어머니와 같은 산이다. 왕릉전시관 뒤편의 남쪽으로 난 고분들 사이를 걸으며 대가야 역사의 숨결 속으로 빠져든다. 1천500여 년 동안이나 꼼짝없이 한자리를 지키고 서 있는 수많은 고분의 우뚝우뚝한 봉분 위로 새벽 별빛이 총총하다. 철의 왕국으로 불리며 520년 동안 대가야를 지배했던 왕과 왕족들의 700기가 넘는 무덤이 주산의 능선과 비탈에 따개비처럼 붙어있다. 그 무덤 속에는 순장(殉葬)이라는 비정한 이름으로 생목숨을 빼앗겨야 했던 이름 없는 백성들의 영혼도 숨 쉬고 있다. 당시의 사람들은 사람이 죽어서 저세상에 가더라도 이승에서와..

2021년 제12회 경북문화체험 전국수필대전 장려상 걸음을 디딜 때마다 딸그락거린다. 매끈하게 다듬지도 않고 넓적하게 생긴 돌들을 쌓아 올려 탑을 만들었다. 탑이라기보다 돌무더기에 가깝다. 남쪽 감실 속 불상 앞에 다소곳이 앉아 비손하는 어머니 옆을 하릴없이 왔다 갔다 한다. 꼰들대며 내는 소리는 틈새를 메우고 있던 염원들이 내지르는 외침인 듯하여 조심스럽게 발을 옮긴다. 중앙고속도로 의성 나들목에서 20여 분 거리인 의성군 안평면 석탑리에는 시간의 더께가 켜켜이 쌓인 고려시대 장방형적석탑이 있다. 어린 시절 석탑 뒷산 8, 9대 조부 산소에 묘제를 지낼 때마다 따라다녔다. 나에게는 놀이터였고 어머니는 기도처로 삼았다. 정숙하게 앉아 들릴락 말락 주문을 외는 엄숙함에 주눅이 들었다. 지금의 깔끔한 모습과..

2021년 제12회 경북문화체험 전국수필대전 장려상 물길이 비단결같이 곱다는 청도 금천(錦川)의 장연사지를 걷는다. 온화한 부처의 미소가 그리웠을까. 개망초 무리들의 탑돌이가 한창인 절터에는 살색 감꽃이 하염없이 떨어지고 있었다. 넉넉했던 절터는 감밭으로 내주고 한 뼘 땅에 몸을 부비고 있는 쌍탑의 처지가 딱했다. 금당을 지켜내지 못한 회한 때문일까. 두 탑은 멀리 흘러가는 동창천만 무심히 바라볼 뿐 말이 없다. 태고를 향해 눈물짓는 망부석 같기도 하여 탑돌이 하는 내 마음이 짠해진다. 육화산의 끝자락, 나지막한 구릉에 위치한 장연사지는 모든 게 수수께끼다. 빈대가 많아 불태웠다는 구전 외에는 절의 규모도, 창건과 폐망도, 심지어 절의 이름까지 어느 문헌에도 언급이 없다. 쌀뜨물이 십 리나 흘렀다는 전설..

2021년 제12회 경북문화체험 전국수필대전 장려상 산지사방 가을빛이다. 심란했던 마음이 가라앉는다. 좁고 긴 골짜기를 지나니 누런 들판이 낮은 산을 등에 업고 낮잠을 자는 듯 평온한 동네가 눈에 잡힌다. 간절함을 안고 돌할매를 찾아 나선 길이다. 영천시 북안면 관리에 있는 돌할매 공원. 낯선 시골길에 안내판이 반갑다. 돌할매에게 경건한 마음으로 지극정성 기도를 드리면 한 가지 소원은 꼭 이루어진다고 적혀있다. 수백 년 전부터 주민들이 당산 신으로 모시면서 마을의 대소사나 가정의 길흉화복을 빌고 각자의 소원을 다져보는 신비의 돌 할머니이다. 사람들의 발걸음을 따라가니 길게 줄을 서 있는 모습이 보인다. 모두 경건한 의식을 치르는 듯 진지한 표정이다. 하여 햇살마저 골짜기 사이로 안개처럼 내려앉았고 나무들..

2021년 제12회 경북문화체험 전국수필대전 장려상 구불구불한 도로를 천천히 감아 돈다. 여기까지가 경계라는 듯 포장도로가 끝나고 숲이 나온다. 자동차 바퀴가 숲에다 철길처럼 쌍가르마를 그려놓았다. 가르마를 따라 능선을 오르니 차도 몸도 덜컹덜컹 흔들린다. 나지막한 구릉을 지나 산 중턱에 집 몇 채가 띄엄띄엄 놓였다. 카메라 줌을 당기듯 한 걸음 두 걸음 다가간다. 솔숲이 둘러싼 공간 푸른 잔디밭 한가운데 집이 앉아있다. 죽은 사람을 태워준 집이라는 선입견 때문인지 내 집에 든 것처럼 선뜻 안기지 못하겠다. 조심스러운 걸음으로 다가가 본다. 백 년이 넘은 이 상엿집은 본래 영천시 화북면 자천마을에 있었다. 그런데 장례문화가 바뀌면서 오래도록 방치되다가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 우리의 얼과 혼을 소중히 여긴..

2021년 제12회 경북문화체험 전국수필대전 장려상 배꼽을 들여다본다. 옴폭 패인 그곳엔 나를 세상과 이어주던 탯줄의 흔적이 남아 있다. 내가 아직 뱃속의 양수에 잠겨 있을 적, 어머니는 한 줄의 제대정맥과 두 줄의 제대동맥을 내려 주었다. 나는 그 세 줄을 통해 신선한 산소와 풍부한 영양분을 공급받고 노폐물을 뱉어내면서 열 달 동안 무럭무럭 자라날 수 있었다. 그러니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기 전, 내 태초의 집인 자궁은 어머니의 바다인 셈이었다. 바다를 본다. 이곳은 고래가 가끔 출몰한다는 포항 앞바다. 오래전 탯줄이 끊어진 날 뭍으로 올라올 수 있었던 나와는 달리 탯줄이 끊어진 다음에도 바다를 한 번도 떠난 적 없는 고래의 배꼽을 떠올려 본다. 그런데 아주 오래전, 사람이 살지 않던 시절엔 고래도 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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