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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울 밑 무궁화 / 이홍선

부흐고비 2021. 11. 2. 17:16

2021년 제12회 경북문화체험 전국수필대전 장려상

두 손으로 무궁화 꽃다발을 받쳐 든 여인을 올려다본다. 단아한 한복 적삼에 걷어 올린 소매와 옷고름에 결기를 품은 듯 먼 하늘을 응시한다. 앞에는 총검을 높이 쳐든 네 사람의 ‘군인상’ 이 우뚝 서 있고 뒤에는 전적비가 하늘 높이 솟아 있다. 여인은 아들의 무사 귀환을 바라고 종전과 평화를 갈구하는 곡진한 어머니의 모습이다.

다부동전적기념관이다. 6·25 전쟁의 치열했던 격전지 다부동 전투를 기념하기 위해 1981년 건립하였다. 서울을 3일 만에 함락한 북한군은 파죽지세로 개전 사십 여일 만에 왜관의 낙동강까지 밀고 내려왔다. 전 국토의 95%를 점령당한 절체절명의 위기였다. 연합군은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이곳 낙동강 전선에 최후의 방어선을 쳤다. 강물은 피로 물들었고, 55일간 치열했던 다부동 전투에서 이김으로써 인천상륙작전의 교두보를 마련했다. 중앙고속도로 다부 IC 옆의 격전지를 통과하는 자동차 행렬은 격세지감으로 다가온다.

전차 모형의 기념관에 들어섰다. 긴박했던 전황에 대한 설명 자료와 각종 무기며 장비가 희미한 조명 아래 새삼 가슴 저미게 한다. 바깥 전시장엔 그때의 유월처럼 바람을 안은 나무들이 짙푸른데 항공기, 전차, 직사포, 장갑차, 자주포 등이 그때의 굉음을 내지르듯 육중하다. 구국용사충혼비, 구국경찰충혼비, 백선엽 장군 호국구민비, 조지훈의 추도 시비 위에 오늘따라 찌푸린 하늘이 무겁다.

해마다 유월이 되면 시아버님과 이곳을 찾았지만 올핸 남편과 함께다. 참전용사의 긍지와 자부심을 잃지 않던 구순의 시아버님은 이제 힘없이 보훈병원에 누워계신다. 전쟁 중에 겪은 일을 생생하게 들려주던 그 길고 긴 이야기를 들을 날도 그리 많지 않을 것 같다. 오늘따라 마음이 더욱 숙연해진다.

전쟁이 나자 자원입대한 시할머니의 스물한 살 맏아들은 입대한 지 한 달도 되지 않아 한 줌의 재로 돌아왔다. 피난길에서 전쟁터에 붙들려 간 후 소식 끊어진 열아홉 살의 둘째 아들은 5년이 지나서야 피골이 상접해 돌아왔다.

시아버지는 대구농림학교에서 일주일 동안 총 쏘는 것만 배우고 신령 갑령재에 배치되었다. 달포쯤 지났을 때 인민군의 공격 소식이 전해졌다. 산 위에서 보초를 서며 바라본 왜관 쪽은 비행기가 하늘을 오르내렸고 이내 폭격 소리가 들리며 검은 연기가 솟아오르는 게 보였다고 한다. 다부동 전투의 서막이었다.

인천상륙작전의 성전보가 전해오자 6사단 이천여 장병의 한 사람으로 트럭을 타고 북진했다. 20일 만에 38선을 돌파하여 평양을 탈환하고 파죽지세로 북진하여 10월 초에 압록강 변 초산에 도착했다. 통일을 이루는 줄 알았지만 기쁨도 잠시였다.

3일 만에 대규모 중공군의 기습공격으로 포위되었다. 낮에는 숨고 밤에만 걷는 목숨 건 후퇴였다. 28일 만에 겹겹의 포위망을 벗어나 덕천(평북)으로 옮겨 주둔한 부대를 찾아 복귀했다. 12월 초 다시 평양으로 퇴각하다 오른쪽 팔다리에 총상을 입었다. 어쩔 수 없이 낙오병이 되었으나 구사일생으로 피난민 지게에 실려 대동강을 건넜고 서울 수도육군병원으로 옮겨졌다.

전황은 부상병의 회복도 기다리지 못했다. 아버님은 수술한 다리로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상태로 복귀했다. 제주자동차학교에서 조교로, 부산 부두에서 군수품 하역 트럭 운전도 했다. 영천에서 평양과 압록강으로 다시 고통의 후퇴를 하며 제주까지 전국의 전장을 옮겨 다니며 죽을 고비를 수없이 넘겼다. 운 좋게 살아남았지만 전쟁은 아직도 아버지의 가슴에 인두 자국처럼 파인 깊은 상흔이었고 나라를 지킨 자부심이기도 하다.

시산혈해였던 유학산 산허리에 비안개가 짙게 깔려있다. 시할머니는 내색하지 않았지만 죄인 아닌 죄인이 되어 피멍 든 가슴에 자욱한 안개 같은 아픔을 품고 살았으리라. 평생 맛있는 음식을 배부르도록 먹는 일도, 새 옷을 차려입는 일도 없었다. 큰 소리 내어 웃을 때도 없으셨고 마을에 큰 잔치가 있어도 얼굴만 비치고 이내 돌아왔다.

대문 앞 울 밑에 무궁화나무 한 그루가 있다. 그곳은 시할머니가 붙박이듯 소일하는 곳이었다. 거미줄이 생기면 걷어내고 진딧물이 끼면 약을 뿌리고 시든 꽃잎을 따내며 자식 키우듯 무궁화를 매만졌다. 꽃이 피는 6월을 기다렸고 꽃이 지는 10월이면 다음 해를 기다렸다. 시할머니는 몇 해 전에 그토록 염불처럼 이름 되뇌며 그리워하던 큰아들 곁으로 가셨다. 짧고 짧은 삶을 살고 간 그 아들 부둥켜안고 무슨 이야기부터 나누었을까.

전쟁이 끝나고 70년이 넘었다. 다부동 전투를 이끌었던 백선엽 장군이 가신 지도 일 년 지났다. 피 흘리며 나라를 지켜낸 장수에게 삿대질도 모자라 부관참시라도 할 듯 해대는 한쪽 세상이 섬뜩하다. 아직도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죽자고 흘린 땀으로 선진국에 들어섰지만 유일한 분단국가의 고통과 긴장을 아직 짊어지고 있다. 전쟁의 참상도 교훈도 애써 지우려 하는 세태가 먹먹하다.

하늘 바라보던 여인은 평화의 여신상이었다. 받쳐 든 무궁화 꽃에 안개비가 적신다. 꽃잎 사이로 저고리 걸쳐 입고 울 밑에서 먼산바라기 하던 시할머니도 병상의 시아버지도 보인다. 비구름 자욱한 유학산 골짜기에서 산화한 만여 명 용사들의 함성이 들려온다. 전쟁을 잊지 말라는 소리였다.

수 상 소 감

칠곡은 호국 평화의 고장입니다. 6·25전쟁 당시 최후의 방어선이었던 낙동강 전투가 벌어진 곳으로 전세를 역전시키며 풍전등화에 처한 나라를 지켜낸 승전의 역사를 자랑하고 있습니다. 다부동전적기념관이 있는 다부동에서 가장 치열한 전투가 55일간이나 벌어졌습니다. 고지를 10여 차례나 뺏고 빼앗기며 북한군 2만4천여 명, 국군과 유엔군 1만여 명의 사상자가 산을 붉게 물들였습니다. 백선엽 장군이 이끄는 국군 1사단은 북한군 3개 사단의 공격을 저지해 한국전쟁의 전세를 바꿨습니다. 이는 전사에 길이 남을 일이 됐습니다. 직접 전쟁을 겪지는 않았지만 나는 이 고장에서 나서 자라고 40여 년의 공직생활을 했습니다. 전쟁이 할퀴고 지나간 아픈 상처들이 남아 있는 현장을 수없이 봤고 전쟁이 빚어낸 파괴, 살상, 가족이산 때문에 시련과 고통을 겪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내 시댁도 전쟁의 참상은 비껴가지는 않았습니다. 맏아들을 잃은 시할머니는 참으로 비통한 슬픔을 안고 평생을 사시다 떠나셨지만, 남아있는 가족들의 가슴엔 애달픔이 머무는 듯합니다. 이 세상 어떤 곳이라도 전쟁은 일어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세계 유일의 휴전 상태인 이 땅에서 두 번 다시 전쟁이라는 단어는 없어야 할 것이며, 옛날의 과오를 잊어버리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많이 부족한 저의 글을 눈여겨 봐주신 심사위원님께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2018년 ‘수필과비평’ 등단 △2019년 제10회 경북문화체험 전국수필대전 장려상 △대구수필문예대학 수료 △수필문예회 회원 △수필과비평작가회의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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