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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에게 효도하는 길(諭谷山鄕校勸孝文)


효자가 자기 어버이를 봉양하는 일은 어버이의 뜻을 봉양함에 있었기 때문에 성인(聖人)께서 먹고 입는 일만 봉양함을 무척 경계 삼도록 하셨다. 그러나 세상이 갈수록 타락하고 도덕이 날로 빛을 잃고 있는 탓인지, 먹고 입는 것만을 봉양하는 사람조차 도리어 찾아보기 어렵다.
먹고 입는 일만 봉양할 사람이 있다면 이 사람이야말로 역시 효자의 부류이리라.

 

더구나 일반 백성들의 뜻이란 대인군자(大人君子)와는 달라서 먹고 입는 일 말고는 별다른 뜻을 가지기가 힘들어 곧 먹고 입는 일만 봉양해 드릴 수 있으면 더러는 뜻까지 함께 하여 봉양 받은 것으로 여기지 않을 수 없다. 연약한 백성들이나 서민들이 어찌하여 먹고 입는 것에 대한 봉양만이라도 부지런히 힘쓰지 않을 수 있겠는가.

맹자(孟子)는 "5묘의 주택지의 담장 아래 뽕나무를 심으면 50세의 사람이 비단옷을 입을 수 있으며, 닭·개·돼지 등의 가축을 그 때를 놓치지 않고 기른다면 70세 노인이 고기를 먹을 수 있을 거다"라고 하였다. 이는 곧 옛날의 훌륭한 임금들이 누에치기와 명주짜기를 백성들에게 권하고 가축 기르기를 권했던 까닭은 정말로 그런 일을 해서 그들의 부모를 봉양하게 하려는 것이지 이익을 늘리고 재산을 모으게 하려고 했음은 아니었다.

 

요즘 가축 기르는 정책이 오랫동안 등한하여 없어져 가는 지경이지만, 그러나 더러는 여인들 중에 열심히 누에를 쳐 명주를 짜기도 하고 남자 중에는 가축 기르는 일에 힘쓰는 사람도 있다. 한 필의 비단을 짜내면 금방 시장에 달려가 팔아서 돈을 만들 생각이나 하고 병아리 한 마리라도 키워내면 급히 읍내에 들어가 돈으로 바꿀 생각이나 하고 있어, 저고리 하나라도 만들고 닭고깃국 한 그릇이라도 준비하여 부모님을 기쁘게 해드릴 일은 하지 않고 있으니 역시 서글픈 일이 아닌가.

그 사람들 중에는 집안 형편이 넉넉지 않아 아직 그러할 겨를이 없다고 여길 것인데, 이게 다른 날을 기다릴 수 있는 일이겠는가. 아아, 바람이 불면 나무는 항상 고요할 수 없는데 어버이 나이가 어떻게 오래도록 멈추어 있으랴. 참으로 어버이의 나이 먹어가는 하루라도 애석해하는 효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의당 곰곰이 생각해 볼 일이다.

음식의 미세한 맛인 시고 짜거나 달고 떫은 것에 대해서는 군자들이 결코 신경을 쓰고 있지 않은데, 『예기(禮記)』의 내칙(內則) 등과 같은 여려 편에서는 고기 굽는 일, 고깃국의 맛이나 생강·계피·양념 식초 간장의 품질 등 잗다란 것들을 정밀하고 핵심적으로 논란해 놓아 번거롭고 복잡하며 정중함을 잃는 것을 꺼려하지 않았는데, 이건 왜 그렇게 하였을까. 그건 부모를 봉양하기 위함이어서다.

 

요즘 사람들은 집안의 재산이 조금만 넉넉하여도 부녀자들이 손수 밥을 짓거나 반찬 장만하는 일도 하지 않고, 남자들이야 더욱 고자세로 관남녀 종들이나 매를 때리며 꾸짖고는 끝내 자기들의 잘못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으니, 이 또한 미혹된 짓이 아니겠는가.

요즘 세상의 학자들이란 가까스로 학문한다는 이름만 나도, 갑자기 자랑이나 무겁게 하며, 천(天)이나 지껄이고 이(理)나 떠들어대며 음(陰)이다, 양(陽)이다 하고는 벽 위에 태극팔괘(太極八卦)·하도낙서(河圖洛書) 따위의 그림을 그려놓고 스스로 일컫기를 완색(玩索)한다고 하면서 어리석은 사람들이나 속여먹고 있다.

 

그러나 자기 부모가 한창 춥다고 하소연하며 배고픔을 참다가 병이 들어 깊은 병세가 되어도, 게으름 피우며 보살펴 드리지도 않은 채 편안히 노동도 않으니, 그러한 완색(玩索)은 부지런히 하면 할수록 학문하는 일과는 더욱 멀어져 버리는 것이다.

 

진실로 부모에게 효도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비록 배우지 않은 사람이라도 나는 반드시 배운 사람이라고 말하겠다."

효자의 행동으로서 손가락을 잘라 피를 내거나 어버이의 똥을 맛보아 병세를 살피는 일 같은 것은 정말로 훌륭하고 기특한 품행이 아니랄 수는 없지만, 그러나 순(舜)임금·증자(曾子)·윤자기(尹子奇)·민자건(閔子騫)과 같은 옛날의 효자들은 왜 그러한 일을 하지 않았을까?

 

만약 살아계실 때 섬기고 죽어서 장례 치르고 제사지내는 일들을 예로써 하여 백가지 행실이 모두 갖추어져 있어 하나라도 모자람이 없는 사람이라면, 비록 한가지의 기이한 품행이 없다 하더라도 그런 사람이 바로 효자인 것이다. 또 얼음 속에서 잉어가 뛰어나오고, 눈 속에서 죽순이 솟아나오고, 꿩이 던져지고, 호랑이가 타라고 땅을 긁는 것과 같은 자취는 옛날 사람들의 특이한 신령스러움이 나타났던 일이지 어떻게 그러한 일이 항상 있을 수 있는 일이겠는가.

 

고을이나 마을에서 효행한 사람을 칭송하는 일로, 했다 하면 옛날의 기적과 같은 그런 소리를 답습하고 있는데, 더러는 사실과 틀린 소리였다. 사람의 아들이 되어 설사 그러한 기적이 있었다 하더라도 의당 자신의 비밀로 가려 두고 남이 알도록 하지 말아야 한다.

불효의 단서가 되는 것으로 두 가지가 있는데 아내와 재물이 바로 그거다. "젖먹이 어린이도 자기 어버이 사랑할 줄 모르는 아이가 없다."라는 말은 젖먹이의 어리석음으로도 오히려 부모 사랑할 줄을 안다는 것이다. 내가 볼 때 젖먹이의 어린애 때조차도 자기 어버이를 사랑할 줄 알면서 어른이 되어서는 반대로 더러 그걸 모른다고 한다면 무엇 때문일까. 아내와 재물이 가리어 버리기 때문이다. 아내와 재물이라는 것은 본래 부모에게 효도하기 위한 것이었다.

 

아내란 장차 시켜서 살아계시는 동안에는 맛있는 음식을 마련하게 하고, 돌아가신 뒤에는 제사지내고 자식을 낳아 길러서 조상을 잇게 하려는 거다. 재물이란 장차 부모에게 옷과 음식을 해드리게 하려는 것이요, 부모의 장례나 제사의 비용에 이바지하는 것이다.

 

아내가 없고 재물이 없다면 사람의 자식이 되어 어떻게 효도를 할 수 있겠는가. 다만 아내를 자기 개인의 아내로만 해버리고 재물을 자기 개인의 재물로만 해버려 부모가 자기의 아내를 편하게 해주지 않는 걸 보고서는 원망하고, 부모가 자기의 아내를 수고스럽게 하는 것을 보고는 부모를 비난한다.

 

소곤소곤 안방에서만 가까이 붙어 지내며 자기 부모를 외면해 버리는데, 이게 바로 불효하는 원인이다. 부모가 자기의 재물을 축내는 걸 보면 인색스러워지고 부모가 자기의 재물을 다른 형제들에게 나누어 주는 것을 보고서는 걱정스러워 상자 속에다 비밀히 단단히 은닉시켜 두고는 부모를 외면해 버리니, 이런 게 불효하는 까닭이다.

 

아내란 바로 내 부모의 며느리다. 나만 어떻게 내 것으로 하랴. 재물이란 바로 내 부모가 일으켜 놓으신 거다. 어떻게 내 것으로만 해버릴 것인가. 나란 바로 내 부모의 유형(遺形)이다. 내 몸이 어떻게 나 혼자만의 몸이겠는가. 참으로 이런 점을 알아야 효도할 수 있게 된다.

어떤 친구 한 사람이 어느 날 그대를 위험스러운 횡액으로부터 구해 주었다고 하자 그대는 그 친구에게 은혜 갚으려는 생각을 하지 않을 테냐. 또 어떤 친구 한 사람이 어느 날 그대에게 백냥의 재물을 도와주었다고 하자. 그대는 그 친구에게 은혜 갚으려는 생각을 하지 않을 거냐. 심지어 종이나 노예 등이 더러 너의 병을 간호해 주며 너의 입에 떡을 먹여주었다고 하면, 너는 입이 닳도록 그들의 공을 칭찬하며 못내 아끼는 정을 품을 것이다.

 

아아, 인생이 지극히 위험스러워서 조심조심 보살피기 힘 드는 일은 갓난아기 때보다 더 심함이 없다. 자기 부모로 하여금 일각이라도 사랑스럽게 돌봐주고 보호하는 일을 잊어먹게 한다면 갓난애가 어떻게 안전 무사하겠는가.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날 때는 대체로 맨손으로 태어난다. 옷을 입혀 주고 먹여주며 아울러 전답과 집을 물려준다. 비록 만 냥의 돈을 물려주지 않았다고 부모가 아닐 것인가.

 

지난번에 친구의 하루 동안 은혜에 대해서는 죽을 때까지 잊지 않고, 지난번의 종이나 노예의 하루 동안의 수고에 대해서는 마음에 새기고 잊을 줄 모르며, 지금 부모야말로 호천망극(昊天罔極)의 은혜인데도 망연하게 잊어먹고는 마치 당연히 해주어야했던 일인 것처럼 생각해버리고는, 숫제 그 만분의 하나라도 보담해 드리려고 하지 않으니 이게 도대체 무슨 이치인가. 사람의 자식이 되어 어찌 이 문제에 대하여 심사숙고해 보지 않을 건가.

남자들이 장인·장모에게 겉으로는 건성건성하는 것 같지만 속으로는 은근한 정을 두고 있다. 부인들은 시부모에게 겉으로는 존경하는 것처럼 하지만 속으로는 비난할 점만 가지고 있으니, 이거야말로 참으로 미혹된 일이다. 『예기(禮記)』에 "며느리가 시부모 섬기는 일을 친정 부모 섬기듯 한다."라고 하였으니, 정말로 시부모에게 불효하는 사람은 그 부모에게 하는 일도 알아볼 만하다.

 

시부모는 자기 며느리를 자기 자식같이 보기 때문에 바라는 바가 매우 깊다. 그러나 며느리는 시부모 보기를 친부모와는 다르게 하기 때문에 그 바램에 부응하지를 못하니, 이렇게 정이 붙지를 않아 가도(家道)가 어그러져 버린다.

 

참으로 아내로 하여금 자기 남편이 뜻이 한결같이 효도하려는 마음만 있고 딴 마음 먹는 게 없음을 알게 해준다면 남편의 환심을 사려고 해서라도 효성으로 시부모 섬기는 일을 아니할 수 없을 것이니, 그렇게 오래 하다 보면 물이 들고 감화되어 흔연히 저절로 효부가 되리라. 이것으로 본다면, 며느리의 불효는 그 남편이 불효한다는 명확한 증거다. 무슨 말이 더 있겠는가.

순임금은 어떻게 효도했을까. 계모를 아주 잘 섬겼었다. 윤자기(尹子奇)는 어떻게 효도했을까. 계모를 아주 잘 섬겼었다. 왕상(王祥)은 어떻게 효도했을까. 계모를 아주 잘 섬겼었다. 계모의 마음에 맞도록 하지 못하는 사람이 항상 계모를 귀찮게 여기니, 장차 그렇게만 한다면 어떨 것인가. 계모의 마음을 기쁘게 해주는 데는 방법이 있으니, 계모의 아들과 지극한 우애를 하기만 한다면 계모를 기쁘게 해줄 수 있다.

 

순임금이나 윤자기는 모두 이 방법으로써 효도의 극치를 이룩했었다. 그러한 입장에 있는 사람은 거의 깜짝 놀라듯 깨우치리라. 만약 계모에게 자식이 없는 이는 그 마음이 진실로 갈라지지 않을 것이다.

요즈음 부부간에는 좋아서 화합함이 마치 금슬(琴瑟)을 두드리는 것 같음이 있으나 형제간에는 전혀 화목하지 못한다. 친구들과는 붙쫓아다니면서 죽고 살기를 허락하면서도 형제간에는 지나는 길손처럼 여겨버린다. 그렇게 되면 성인들이 교(敎)를 세워놓은 뜻이 어떻게 되어버리겠는가. 성인들이 다섯 가지 가르침을 세워놓을 때 아내와 친구는 넣지도 않았다. 다섯 가지 가르침이란 아버지·어머니·형님·아우·자식이었다.

형제란 나와 부모를 함께 하고 있으니, 이 또한 나일뿐이다. 형은 나보다 먼저 나온 사람이고 아우는 나보다 뒤에 나온 사람이다. 얼굴 모습이나 나이가 다소 약간 다르지만 참으로 구분하여 두 사람으로 여기고 서로 우애하지 않는다면 이것은 내가 나를 멀리 함이다. 어찌 미혹한 짓이 아니랴.

나무 한 그루가 여기에 있다고 하자. 가지 하나는 번성하게 자라서 꽃이 무성하게 되었지만, 다른 가지 하나는 시든 듯 말라빠져 고목이 되었다면 사람들이 안타깝게 탄식하며 애석하게 여기지 않을 사람이 없을 것이다.

 

지금 형제 여러 사람이 있어 어떤 사람은 부자가 되어 편안히 즐기고 어떤 사람은 가난하여 괴롭게 애쓰는데, 서로 돌보아 주지 않고 각각 자기 아내와 자식들만 돌보고 있는 사람이라면, 사람들이 그들을 보기를 어찌 지각없는 초목을 보는 것 같이만 여길 것이냐. 특별히 대면해서는 감히 한탄하면서 허물을 따지지 않는다 하더라도 부끄럽고 두렵지 않으랴.


출처 : 정약용 저, 박석무·정해렴 편역, 다산문학선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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