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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득 코너

심청의 유서 / 마희숙

부흐고비 2008. 3. 1. 10:33

 

심청의 유서


아버님께.
당신은 어머니의 얼굴도 모르는 저에게 어머니이자 아버지이신 단 한분의 어버이십니다. 저의 무모해 보일 수도 있는 행동이 당신이 눈뜰 수 있는 실낱같은 희망에 작은 불씨나마 된다면 소녀 아무 여한도 없습니다. 당신은 선비로서의 삶도 포기하고 저를 위해 거렁뱅이짓도 마다하지 않으셨고, 갓을 던져버리고 체면 따위는 개의치 않으시고 비굴해 지는 것도 서슴지 않으셨습니다.
그렇게 자란 제가 삯바느질로 당신을 모실 수 있게 되기까지 말입니다.
어느 날 일어났는데 온 몸이 불덩이고, 식은땀이 흘렀죠. 지독한 몸살이었었나 봅니다. 차마 당신이 마음 아파하실까 저어하여 신음 소리 손으로 막고, 이불 속에 얼굴을 묻고 눈물만 흘렸습니다. 그런 저를 만져보시고는 더듬거리는 몸짓으로 힘겹게 물을 떠다 주셨죠. 그게 당신이 아픈 저에게 해주실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죠. 그리곤 화를 내셨죠. 처음으로. 왜 몸 하나 간수 못하느냐고.
보았습니다. 제가 잠든 줄 알고 홀로 깨어 아궁이 앞에서 눈물 흘리시던 당신을...
알고 있습니다. 당신이 눈물 반, 물 반으로 떠다주신 물은 어떤 명의의 약보다 저에겐 큰 치료제인 것을.
부모가 먼저 죽으면 땅에 묻고, 자식이 먼저 죽으면 부모의 가슴에 묻는다 하더이다.
소녀 생각하고 또 생각하였습니다.
만약 부처님께서 공양미 삼백석이 부족하여 눈 띄워주실 수 없다 하시면 하늘에 가서 빌고 또 빌겠습니다. 무릎 꿇어 두 손 모아.
부족한 부분은 천년만년동안이라도 정성을 다하여 빌겠으니 우리 아비 눈뜨게 해달라고 말입니다. 그런 소녀의 마음을 헤아리시어 건강한 몸으로 기다려 주십시오. 그것이 저의 가는 발걸음을, 떠난 저를 가볍게 해 주는 일이라는 믿음으로 말입니다.
저를 기다리시다 물에 빠지는 일은 다행히 지나가는 행인의 도움으로 무사하셨지만 이와 같은, 아니 이보다 더한 일이 일어난다면 소녀는 돌아가신 어머니를 어찌 뵈올 수 있겠습니까! 당신은 저를 부끄럽지 않게 키우셨습니다. 그런 당신께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니 이 아니 기쁜 일입니까?
웃으소서. 당신이 웃으실 때 옆에 와 있겠습니다. 그러니 환하게 웃으시어요.
당신이 슬퍼 눈물 흘리실수록 저와의 거리가 멀어진다는 거 잊지 말으셔요.
부디 소풍 즐거이 노니시다가 천천히 오시어요.
잠시 제가 떠나는 거라 여기시고, 배웅해 주시어요.
언젠가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소녀가 행복하면 당신도 행복하다구요. 지금 당신도 저만큼 기쁘시지요? 소녀도 당신이 행복해야, 행복합니다.
마지막으로, 한번만 당신의 마음에 못을 박는 불효를 용서하여 주시어요. 다음 생애에 다시 부모와 자식으로 만나 못을 녹이는 성심으로 옆에서 모실 것을 약조하겠나이다.
사랑합니다. 아버지.


주) 심청이가 인당수에 몸을 바치기 전에 눈 먼 아비를 위하여 남긴 필사본이 개인소장가에 의해 공개되어 화제가 되었던 내용 (마희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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